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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91화 (391/412)

에스뮈에와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그녀의 마지막 말이 농담이라는 확답을 받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과는 시원치 않았다.

"무사히 돌아오는 그날이 되면 알 수 있지 않겠느냐? 궁금하면 무사히 살아오면 되는 것이니라."

"아니, 궁금하기보다 무서운 거에 가까운데..."

실없는 소리나 한다며 한 대 맞아버린 나는 에스뮈에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 마차로 향했다. 그녀가 없다고 해서 마차나 수행원이 바뀌지는 않았다. 처음엔 에스뮈에의 동태를 숨기기 위한 눈속임을 위한 건가 싶었는데, 여전히 정중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보아하니 비단 그런 이유 뿐만은 아닌 듯싶다.

"어디로 모실까요?"

"아카데미로 부탁드립니다."

아직 오랜만에 만난 여운이 남아 싱숭생숭했지만 나 대신 의뢰를 떠난 세네란을 봐서라도 오늘치 공부를 빼먹을 수는 없었다.

바쁘면 시간이 빨리 가는 법이라 하고, 나 역시 그 격언에 항상 공감해온 사람이었지만 어째 수도로 돌아온 뒤로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자폭성녀에게 시달리고 에스뮈에에게 농락당한 뒤로 아카데미와 집만 오고 가길 반복하며 살았거늘 그것만으로도 일주일이 흘러갔다. 일상은 분명 평화로웠으나 예상보다 가엔달 파티의 귀환이 늦어지고 있는 것이 유일한 흠이었다.

그렇다고 감감무소식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길드에 보고서를 보낼 때 편지도 함께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편지에 적힌 내용은 그리 유쾌하지 못한 것이었다.

[국가 비상 사태로 임시 소집 상태. 마족의 흔적 확인.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헤집고 있음.]

사실 수취인이 나로 되어 있어서 명목상 편지라고 불렀을 뿐 거의 메모와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나야 오히려 그 편이 좋았지만 마지막 내용은 조금 걸렸다.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건, '혹시 난가?' 라는 도끼병 환자 같은 생각. 문제는 그게 망상이 아니라 진짜 합리적인 의심이 들 만큼 큼직하게 질러 놓은 일이 두 개나 있었다는 점이지.

폐던전 게이트를 넘어가서 디럭스 봄버를 시전해 버린 것과 제국 아카데미 게이트를 넘어가서 마족놈들을 쪼개버린 거. 아무리 그래도 겨우 그런 일로 병력을 소모해가며 적국에 침투할까 싶었지만, 혹시 몰라 길드에 부탁해 편지를 보내두긴 했다. 놈들이 찾는 게 사람이면 즉시 연락 달라고 말이다.

그 이후로도 계속 시간은 흐르고, 세네란이 준비한 교육 자료는 점차 줄어갔지만 가엔달 파티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중간중간 셰릴과 놀아 주고, 가끔 라그니스를 만나러 가고, 대부분의 시간을 스승님과의 공부에 할애하는 사이 날이 더욱 추워지고 이제 두꺼운 코트와 목도리가 없으면 나가고 싶지 않은 지경에 이를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그럴수록 세네란의 편지는 처음과 달리 점점 장문이 되어갔다.

하지만 길어지기만 했을 뿐 그리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대부분은 신세 한탄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손발이 묶여 버린 것을 후회하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래도 1월까지는 꼼짝없이 묶여서 조언과 조사를 이어나가게 될 것 같다는 내용만큼은 쓸모 있는 정보에 속했다.

덕분에 나도 그들을 향한 걱정을 떨쳐 낸 뒤 공부에만 집중했다. 덕분에 수년간 발전이 없던 마법 실력이 아주 조금은 향상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 기어이 한 해가 다 지나가고 1월이 다가왔다.

수도에서 마련한 내 집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1월 1일이라는 기념비적인 날.

우리 집을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제국의 사절단 일행이었다.

"제국의 영웅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전히 부담스러운 극존대를 하며 나타난 그들이 건네준 것은 에스뮈에가 보여줬던 갑옷이었다. 갑옷 거치대 째로 우리 집 거실에 물건을 내려놓은 그들은 갑옷과 함께 착용할 망토가 담긴 목함을 건네주며 짧게 설명했다.

"곧 이티스엘 왕실에서 언질이 있을 것이나, 행사는 1월 11일로 잡혔습니다."

그땐 왕실에서 사람을 보낼 것이라고 말하는 사절의 얼굴에 강한 아쉬움이 맴돌고 있는 걸 애써 무시하며 목함을 받아 든 나는 사절들을 배웅한 뒤 돌아와 내 갑옷을 보고 감탄하는 아실리에에게로 다가 갔다. 무표정 메이드라는 묘한 캐릭터 성을 유지하고 지내던 티에조차 흥미롭게 살펴보는 광경을 잠깐 뒤에 서서 구경하고 있었더니 이내 아실리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땐 그냥 좀 좋은 갑옷이라는 느낌이었는데, 마감처리한걸 보니 감탄이 나올 정도야. 이것도 나름 신경을 써 준 거겠지?"

"에... 1 황녀님이 하신 일이니 그렇지 않을까?"

습관적으로 편하게 에스뮈에를 부르려다가 티에가 있다는 걸을 깨닫고 황급히 말을 바꿨다. 다행히 티에는 내가 어색하게 말을 바꾼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갑옷에 더 집중하고 있는 듯했고, 난 간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쟤가 못 믿을 애 같지는 않은데 아직은 조심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뭐, 방랑 기사가 누가 봐도 화려하고 비싼 갑옷을 입고 다니는 건 그리 보기 좋은 모양새가 아니기도 하고."

방랑 기사들의 목적은 대부분 수행이다.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기사의 의무를 이행한다는 수도승 같은 이들도 없진 않지만 어디까지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가문이라는 뒷배도 없고, 특출난 실력도 없으나 턱걸이로 기사의 자격은 얻게 된 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시도하는 과정인 만큼, 절대다수는 부유함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게 된다.

애당초부터 그런 이들은 서임식 때 입는 갑옷부터가 자가 구매다. 가문에서 갑옷을 사줄 정도면 굳이 방랑 기사가 되지도 않겠지.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궁핍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가뜩이나 왜 자진해서 방랑 기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업적을 남겨 버린 내가 화려하기 그지없는 갑옷을 입고 서임을 받게 되면 부르주아의 프롤레타리아 흉내라며 그 자리에서 돌을 맞아도 곱게 맞아야 한다. 정확하게는 더럽게 죄송합니다라고 대가리까지 박으면서.

"행사는 10일 뒤로 잡혔다고 하더라. 서임식도 같이 치르게 될 거 같아."

"아참! 오늘이 1월이구나! 드디어 성인이 되었네! 축하해 엘디!"

마치 생일이라도 축해주는 것처럼 방방 뛰며 기뻐해주는 아실리에와 달리 티에는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왜 저러나싶어 눈총을 줬더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파악한 그녀가 겨우 표정을 고치며 짧게 대답했다.

"진짜 15살이셨군요."

쓰읍. 그래,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긴 하네. 자꾸만 겉늙었다는 의미로 들리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난 그녀를 용서했다.

키 성장은 멈춘 것인지 별 변화가 없었지만 이미 미래의 키를 다 땡긴 수준이라 아쉬울 게 전혀 없는 이 몸뚱이만 놓고봐도 어지간한 성인 장정조차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다. 그냥 키만 커도 그랬을진대 에스뮈에나 아실리에가 투덜거린 것처럼 근육은 날이 갈수록 탄탄해졌으니, 가끔 거울을 보면 예카트리나의 베이비 페이스를 보고 놀랄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후후후, 시간 정말 빠르게 흘러간다니까. 엘디가 성인이라니."

순간 에스뮈에가 던졌던 마지막 한 마디가 떠올라 살짝 쫄았지만 아실리에의 시선은 더없이 포근했다. 따지고 보면 내 인생의 반절은 아실리에가 키워 낸 것이니 대견하게 보는 것도 당연했다.

"최근 들어 엄청 다사다난 했다는 것만 빼면 참 빨리 지나가긴 했지. 분명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일할 때까지만 해도 시간 훅훅 지나간다는 느낌이었는데 요즘 묘하게 정신 없었어."

고개를 내저으면서 어이없음을 토로 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심이었던 아실리에의 미소가 아주 조금 딱딱해졌다.

"그건 엘디의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

"......"

음. 말을 안 했을 뿐이지 아실리에의 마음고생이 심했구나.

앞으로도 지을 죄가 많을 건 명백했기에, 미안한 마음을 담아 오랜만에 쭈구리 엘드미아가 되기로 마음먹은 나는 입어보라고 성화를 부리는 아실리에의 바람대로 아침 식사를 하기도 전에 갑옷부터 입기 시작했다. 에스뮈에 앞에서 입었을 때보다 훨씬 몸에 딱 맞는 갑옷은 입는 것도 편했다. 보통 기사들의 갑옷은 누군가가 입혀주는 것을 전제로 제작되기 마련인데, 그런 면에서 이 갑옷은 굉장히 모험가스러운 갑옷이라 표현 할 수 있었다.

"갑옷을 입고 벗는 것까지 신경 썼을 줄이야. 섬세하네."

"제 1 황녀가 직접 하사한 갑옷이라고 했던가요? 과연 차기 황제라는 소문에 걸맞게 일 처리가 꼼꼼한 것 같습니다."

"어... 그러네. 역시 제국의 황녀는 다르네."

반응을 보아하니 아실리에도 무의식중에 티에를 신경 쓰지 않았나보다. 그렇게 견갑의 고정까지 마쳤을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드려 잠깐 티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우리는 빠르게 눈빛을 교환하며 속닥거렸다.

"누나도 실수할 뻔 했지?"

"조금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어. 그런데 티에에게 굳이 숨겨야 할까?"

"애초에 자기 목숨값하겠다고 자진한 애니까 나도 의심하지는 않는데, 그거랑 별개로 모르고 있는 편이 안전한 정보라는 것도 있잖아. 일단은 두고 보는 게 나을 거 같아."

"으음, 일리 있어."

작당모의하듯 짧게 의견 교환을 마친 우리가 다시 거리를 벌리기 무섭게 돌아온 티에의 손에는 편지가 한 장 들려 있었다.

"엘드미아 님. 길드에서 온 편지입니다.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으나 꽤 서두르는 눈치였으니 지금 읽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길드? 세네란인가?"

지금까지는 일부러 내가 찾으러 갔었는데 이렇게나 이른 아침부터 직접 가져다주다니. 티에의 말대로 급한 용무일지도 몰랐기에 일단 갑옷 입는 것을 멈추고 그녀에게 편지를 받아 뜯어보았다.

"...씨발."

그리고 항상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간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던 게 거짓말처럼 이번에 적혀 있는 내용은 지극히 단순했다.

[마족. 사람을 찾고 있음. 작은 엘드미아가 뭐야? 동생?]

아무래도 나는 마족들에게 찍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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