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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92화 (392/412)

혹시라도 뭔가 추가적으로 적힌 게 없을까 싶어 이리 보고 저리 보고 편지 봉투까지 뒤집어 까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도 마찬가지였다. 난 주저 없이 편지와 봉투를 난로에 던져넣으며 갑옷을 마저 입었다. 이렇게 성능 테스트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데 말이지. 정말 예술 같은 타이밍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세네란이 있는 곳으로 가봐야 할 거 같아."

갑옷이 상처나거나 박살 날 가능성도 있겠지만, 그런 사태가 일어날 정도의 상황을 지금까지 입고 다니던 가죽 갑옷으로 버티는 건 자살행위였기에 그냥 입었다. 멀쩡히 돌아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반병신 상태로 골골 거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욕을 덜 먹겠지. 그런 내 갑작스러운 반응에 아실리에가 당황하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일단 마족이 움직이는 건 확실한 거 같아. 덕분에 확인할 게 생겼어."

"기다려. 나도 준비할게."

"에이, 괜찮아. 가서 뭐 거창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상황만 보고 싶은 거야. 누나는 집에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나 찾으면 설명이나 좀 해 줘."

세네란이 직접 마족들과 조우한 것인지 수소문을 통해 알아낸 이야기를 적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엔 홧김에 내뱉은 것에 불과했던 키워드는 내 전생과 이어져 있으니,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그 대상이 설령 아실리에라 하더라도 아직은 말하기 애매하다. 적당히 둘러대는 내 말을 듣고 아실리에가 의문의 빛을 띄웠다.

"방금 받은 갑옷까지 걸치면서?"

"그거야 워낙 이곳저곳에 시달렸으니 그런 거지. 항상 만전을 기하라. 누나가 알려 준 건데?"

자연스럽게 웃어 보이며 농담을 던지자 다행히 아실리에는 '그렇기는 하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금방 납득했다.

에스뮈에가 제대로 사이즈를 측정한 덕에 갑옷은 굉장히 편했다. 이에 만족하며 도끼를 비롯한 장비들을 챙기는 걸 가만히 보고 있던 아실리에가 입을 열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던 거니?"

"가엔달 파티랑 친해지게 된 계기인 의뢰가 있었는데, 마족들이 그 사건과 관련된 흔적을 추적하는 거 같아."

"아, 그 비밀 의뢰라고 했던 거?"

"맞아."

거기까지만 말해도 충분했다. 아실리에는 내가 편지를 태운 이유가 과거의 의뢰와 연관되었다고 지레짐작하며 납득해주었다. 그녀를 속이는 기분도 들었지만 이미 첫 만남 때부터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라는 형태로 숨겨 온 사실들이 많다 보니 죄책감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아직 진실을 말할 수 없는 팔자인 건 좀 많이 미안했다.

"설령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싹 다 무시하고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서 괜히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짧은 인생동안 워낙 저질러 놓은 게 많아 딱히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추궁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세네란은 계절에 대한 호불호가 없는 편에 속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추울 땐 난방을 틀고 더울 땐 냉방을 틀며 산 세월이 그러지 못한 세월보다 길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호불호가 있던 시절의 기억을 억지로 꺼내보면, 원래는 여름을 더 싫어했던 거 같다. 그게 이번에 바뀌었다.

'빌어먹을 겨울.'

더위는 그늘 아래에서 쉬면 가시기라도 하지, 겨울은 춥다고 쉬면 더 추워질 뿐이니 단언컨대 최악의 계절이 맞았다. 오늘 하루 만해도 수십 번 반복한 결론을 내리며 코를 훌쩍인 그녀가 마도구를 발동시키자 마나가 공명하며 주변을 휩쓸었다.

본디 과도하게 마력이 응집된 지역을 파악하는데 쓰이는 도구였지만 지금은 훌륭한 마족 탐지기로 쓰이고 있었다. 최근 들어 영 성과가 미미했지만, 그게 도구 탓이 아니라는 건 세네란이 가장 잘 알았다.

"미미한 흔적조차 없는 거보면 이쪽도 아닌가 봐."

세네란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듯 내뱉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벌써 일곱 시간이 넘게 이어진 수색에 모두가 피곤했지만 투덜거리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수염에 붙은 서리를 털어낸 긴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거 오늘도 허탕이로군. 우리가 이 정도라면 다른 친구들은 아주 죽어 나가겠는걸?"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지금 이렇게 웃으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건 순전히 세네란 덕이었다. 그녀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마도구들은 하나같이 유용했고, 덕분에 이번 의뢰를 받고 달려온 수많은 모험가들 중 성과를 거둔 몇 안 되는 파티로 등극했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투덜거릴 정도로 모난 인성을 지닌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진심으로 다른 모험가들을 걱정했다. 정확히는 그들이 정신적으로 한계일 가능성을 걱정했다.

한창 열심히 재건 중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만델리 항구 모험가 길드는 이번 의뢰에 나선 이들에게 매우 후한 대접을 해줬으나, 그 대가로 매일 같이 10시간 넘게 항구 밖을 수색하는 강행군을 요구했다.

그들이 제공하는 식사와 숙소 그리고 보수를 생각하면 납득할 수 없는 업무도 아니었지만, 그렇게 한 달 정도 이어지면 아무래도 지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실적이 있는 가엔달 파티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마족과의 조우를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이 따라붙어서 괜히 감시 받는 기분이라며 불만도 많았다.

정작 모험가들과 같이 붙어다니게 된 병사들은 눈 쌓인 평원이나 숲속에서도 흔적을 찾아내고 어떻게든 아득바득 추적하는 모험가들을 보며 신기해할 뿐이었지만 당사자들이 그 사실을 알 방법은 없었기에, 긴이 말한 것처럼 많은 모험가들이 정신적으로 죽어 나가고 있는 상황이긴 했다.

"별수 없죠. 실제로 마족의 흔적을 찾아버렸으니, '죽어 나가는 기분'을 느끼는 게 '죽어 나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마왕군인지 그냥 마족인지 알 수 없는 이들은 자신들의 흔적을 없애는 데 점점 능숙해졌고, 처음엔 어느 정도 흔적과 탐색 마법으로 꼬리를 잡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이젠 세네란의 마도구를 이용해 편법을 쓰지 않는 이상 감조차 잡기 힘들 지경에 이르렀다.

그 희미한 흔적을 추적하던 도중 숲속에 숨어 살던 화전민들과 우연히 마주치지 않았다면 이번에 엘드미아에게 보낸 편지에는 평소와 같은 신세 한탄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거기서 뜬금없이 엘드미아의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정확히 따지면, 엘드미아의 이름은 아니었다. 화전민이 어거지로 떠올려 입에 담은 건 '작은 에두미아인지 뭔지.' 였으니까.

물론 세상 어딘가에 작은 에두미아라는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실존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화전민의 대답을 들은 다섯 명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봄으로써 말없이 의견을 통일했다.

'이들은 대충 이유를 짐작하고 있는 눈치였는데...'

엘드미아를 생각해서 가엔달 파티에게 금전을 제공하고 들은 내용을 함구하게끔 만들 생각까지 했었는데, 되려 그 부탁을 듣게 된 건 세네란이었다.

이유는 훨씬 상식적이었다. 아무래도 이전에 수도 모험가 길드에서 받은 비밀 의뢰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는 가엔달의 말에 세네란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시늉을 한 뒤 수락했다.

비밀 의뢰라면 뭔가 마법적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쓸데없이 캐물어봤자 어차피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거라 판단한 그녀는 괜히 엘드미아의 뒤를 캐는 짓을 하기보다 즉각 정보만 전달하기로 했다.

그것도 벌써 이틀 전의 일이었다. 평소라면 형식적인 답장이라도 돌아왔을 텐데 소식이 없는걸 보면 직접 오는 중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이쯤하고 돌아가도록 하죠. 내일부터는 더 멀리까지 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새로운 방침에 대한 의견을 놓고 회의한다고 했던 게 오늘이었나?"

이대로 계속 만델리 항 주변을 순회하며 수색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지역과의 협업을 통해 활동 범위를 넓힐 것인가.

사실 한 달 넘게 이 짓을 반복하고 있으면 이미 마족이 없는 게 당연하니 후자를 선택하는 게 정상 아니냐는 볼멘 목소리도 많았다

하지만 이티스엘 최대 규모의 항구도시였던 만큼 만델리 항은 꽤 넓은 관할 지역을 지니고 있었고, 모험가들에게는 미안하게도 그동안 그들이 헤집고 다닌 건 그 넓은 지역 중 도시 인근으로 분류되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기에 지휘봉을 잡은 입장에서는 결코 간단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번에 회의를 거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족들이 갈수록 교묘히 흔적을 지우고 있다는 모험가들의 일관된 증언. 거기엔 세네란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다. 수도에 사는 이들은 세네란이 품은 황금에 눈이 멀어 왜 그녀가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시작했는지 대부분 잊었지만 만델리 항의 주역들은 달랐다.

세네란은 넘치는 황금으로 마족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와 도구들을 사들이는, 소위 말하는 큰손이자 권위자였기에. 그런 그녀가 추적이 갈수록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건 결코 넘겨들을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이젠 진짜 그냥 돌아가고 싶다..."

"그러게요. 여러모로 피곤한 의뢰이긴 하네요. 돈은 많이 들어와서 좋지만."

그런 고평가를 받거나 말거나 세네란은 울상이었다. 엘드미아가 성실하게 공부했다면 지금쯤 미리 준비해 놓았던 교보재가 바닥 날 시점이었다. 이는 곧 다음 실험으로 넘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이야기였으니, 그녀로서는 지난 세월 동안 백날 연구해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던 마족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엘드미아에게 더 치중하고 싶은 게 당연했다.

'이 지긋지긋한 추위도 지쳤고 말이지.'

결국 만장 일치로 귀환하게 된 일행은 반쯤 부서진 만델리 항의 성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아, 비룡이다."

아직 기운이 넘치는 편에 속한 예카트리나의 중얼거림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확실히 겨울이 오고 난 뒤로는 쉬이 볼 수 없었던 비룡 한 마리가 만델리 항을 향해 날아가는 중이었다. 날씨가 추워서인지 뭔지는 몰라도 꽤 낮게 날고 있는 비룡을 힘없이 바라보던 렐리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젠 저렇게 낮게 나는 비룡만 보면 갑자기 에가 씨가 뛰어내릴 거 같아요."

오크 토벌 작전에 참가하진 않았지만 예카트리나에게 이미 경과를 다 들은 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만큼은 세네란도 실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크들의 게이트를 닫기 위해 저번에도 비룡에서 뛰어내렸다고 했던가?

하여간 어디서 그런 인간이 튀어나온 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라고 생각하며 세네란은 다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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