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연히 이티스엘의 주요 항구도시였지만, 지금의 만델리 항에는 게이트가 없다.
정확히는 있었는데 없어졌다. 마족들의 침공으로 도시가 반파될 때 이용당할 우려가 있어 자체적으로 게이트를 파괴해 버렸다고 한다. 본디 게이트를 통한 병력 증강을 노리는 게 일반적인 양상인 걸 감안하면 당시의 습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덕분에 수도에서부터 비룡을 타고 날아가려고 했는데... 더럽게 추워서 게이트와 비룡 정거장이 둘 다 있는 도시를 알아 본 뒤 그냥 거기에서부터 이동했다. 돈은 좀 나가게 됐지만 이 정도 사치는 부려도 괜찮은 상황이었으니 괜히 피곤한 상태로 도착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이동하여 석양이 지기 시작한 하늘에서 내려다 본 만델리 항은 아직 습격의 여파를 다 벗어던지지 못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땅에서 봤으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눈에 들어온 도시의 방벽은 군데군데 박살이 나 있고, 부둣가에는 무너진 건물이 한두 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안에서 개미떼처럼 바글거리고 있는 사람들 덕에 절찬리 재건 중이라는 느낌은 팍팍 들었다.
비룡 정거장에 도착하자마자 내 인생 두 번째 비룡 조종사와 간단하게 작별한 뒤 찾아간 모험가 길드는 거의 멀쩡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도 컸다. 수도의 길드보다 배는 거대한 건물은 이곳에서 모험가들의 입지가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왜 굳이 고래의 뼈 같은걸로 지붕을 장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 항구도시의 정체성을 살리는 마스코트같은 건가 보다 하고 적당히 납득하며 안으로 들어서자, 수도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후끈한 열기와 술 냄새가 확 하고 얼굴을 때렸다.
모험가가 많아서 그런 건지 그게 아니면 이번 마족 탐색이 뭔가 영향을 끼친 건지는 몰라도 아직 저녁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내부에는 이미 얼큰히 취한 모험가들이 한가득이다. 못해먹겠다, 할 만하다 등등의 잡소리가 섞여 정신이 하나도 없는 길드 내부는 밖에서 볼 수 있었던 전쟁의 참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전형적인 모험가의 모습이라고 하기도 애매했다. 마치 길드에 소속된 모험가들 전체가 하나의 일거리를 끝내고 앉아 회포를 푸는 꼴이었으니.
물론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자명했다. 나는 마족 탐색에서 돌아온 게 분명한 모험가들의 술자리를 피해 두르고 있던 털망토를 벗어 팔에 걸친 뒤 접수대로 걸어갔다.
"마족 수색에 참여한 공로자들에게 길드에서 제공하는 건 음식과 술뿐입니다!! 박살 난 물건은 죄다 개인 청구할 거니까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세요!!"
음식과 술을 서빙하는 길드원들이 중간중간 소리 지르는 걸 들어 보니 이 모든 게 공짜라서 생긴 문제인가 보다. 하긴, 마족이 나타났다는 소문만으로도 자신이 머물던 도시를 떠나 내륙으로 도망치려고 하는 모험가들도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 정도는 해 줘야 불만을 잠재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아... 어서 오세요. 마족 탐색에 합류하려고 오신 건가요?"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납득가는 상황을 뒤로한 채 다가가자 방금 전까지 어딘가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깨먹으면 죽는다는 식의 고함을 치던 여자 접수원이 지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름 표정 관리를 하며 미소를 짓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아하니 직업 정신은 상당히 투철한 사람이었다.
"탐색에 참여한 지인들을 찾고 싶어서 왔습니다. 혹시 방법이 있을까요?"
탐색에 합류하는 게 아니면 태도가 바뀌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접수원은 오히려 내 말을 듣고 표정이 펴졌다.
"평소라면 의뢰 목록을 찾아서 알려드렸을 텐데, 이번 탐색은 군대와 협업 중이라 인원 관리를 위해 임시 파티를 맺고 움직이다 보니 별도의 절차가 생겼습니다. 저기 게시판 보이시죠?"
그녀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길드 벽 한 켠에 사람 눈높이 정도로 다닥다닥 들어선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의뢰 게시판이 참 많기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용도였다.
"형식상 파티장을 맡은 모험가분의 이름으로 명패를 만들어서 아직 임무 수행 중인지, 귀환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만든 현황판이에요. 지인분이 파티장이라면 일단 저걸로 확인할 수 있으니 한 번 보고 오시겠어요? 만약 저기에 없다면 다시 도와 드릴게요."
워낙 대규모로 진행되고 있는 의뢰인 탓에 업무량을 줄이기 위한 절차를 만든 것일까.
아무래도 그녀의 표정이 펴진 이유는 저 많은 게시판을 다 살피고 다시 오게 될 나를 빌미로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인 듯하다. 설마 이곳에서 군대에서나 봤던 위치 현황판을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시판으로 향했다.
수도와 다르게 내가 움직이는 것만으로 시선이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 거긴 저질러 놓은 게 하도 많아서인지 길드 문턱에만 들어서도 날 알아보는 녀석들이 알람마냥 반응하며 눈치를 보기 시작하더라고.
이번에 얻은 갑옷 때문에 어느 정도 시선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다들 적당히 흘겨본 뒤 고개를 돌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적의는 없다. 덕분에 나는 마음 편히 게시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서 가엔달 파티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몇 안 되는 독립 수색대 취급을 받으며 따로 움직이고 있는 이들 쪽에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유능한 사람은 어딜 가도 티가 난다니까."
아직 귀환하지 않은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니 적당히 앉아서 요기나 때우다보면 만날 수 있으리라.
나는 아직 내 쪽에 시선을 두고 있는 접수원에게 찾았다는 시늉을 한 뒤 적당한 테이블에 잡았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만큼 자리도 많았고, 워낙 실내가 후끈하다 보니 일부러 따뜻한 자리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빠르게 자리 잡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이곳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배곯을 걱정이 없는 건 좋지만 영 지치는군. 자네 쪽은 성과가 있었나?"
"그럴 리가. 애먼 오크들하고만 부딪쳤수."
"오크면 그래도 부수입은 나왔겠군. 우린 그냥 허탕이었어."
"낄낄낄. 허탕은 무슨, 누가 들으면 길드에서 돈 안주는 줄 알겠네 그려."
오늘 하루 있었던 이야기를 가볍게 주고받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이들부터.
"젠장 있지도 않은 마족 때문에 이게 뭔 고생인지 원."
"마족이 없다고?"
"걔들도 대가리가 있는데 아직도 여기 있겠냐? 날라도 진즉에 날랐겠지. 하루 종일 허탕이나 치고 돌아오는 게 벌써 몇 주 째인데 아직도 마족이 있을 거라고 믿냐."
"아니, 그건 그냥 니 생각..."
타당한 듯 허술한 뇌피셜로 동료와 언쟁을 펼치는 놈들까지. 각자 하는 말은 달랐지만 배 부르게 먹여주고 돈까지 주고 있음에도 성과없는 노동에 지친다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있는 건 비슷하다.
"듣자 하니 누굴 찾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누가? 마족이?"
"그래. 도적이나 화전민 같은 놈들하고 부딪친 녀석들이 가끔 이야기하더라고. 누굴 찾고 있는 거 같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나?"
"지랄, 그럼 마족 새끼들이랑 그것들이 마주쳤다는 소리인데 걔들이 등신도 아니고 왜 살려 두냐?"
"낸들 알겠냐?"
옆을 지나가며 떠드는 모험가들은 그 소문이라는 걸 귓등으로도 안 듣는 것 같았지만, 이미 두어 차례 부딪쳐 봤을 뿐만 아니라 세네란의 보고까지 받은 내 입장에서는 꽤 타당한 이야기였다.
마왕군은 생각보다 규율도 잘 잡혀 있고, 의무감도 투철했다. 무엇보다 놈들은 같이 행동하는 인간들을 버림패로 쓰지도 않는 등 역할 구분마저 뚜렷했으니 도적들은 몰라도 화전민같은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손속을 뒀을 가능성이 있다.
그때의 마왕군들이 특수한 목적을 지니고 침투한 부대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녀석들도 그런 부류일 테니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로 인해 자신들의 꼬리가 잡히더라도 도주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자신감이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지만... 들리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적어도 놈들은 그만한 실력이 된다고 자부하고 있는 게 맞는 모양이다.
주문했던 스튜를 받아 홀짝이면서 그렇게 하릴없이 주변의 이야기를 주워듣고 고민하고를 몇 차례 반복했을까.
"뭘 그렇게 고민해?"
갑자기 귓가에 엄청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씨, 깜짝이야!"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 했지만 스튜를 쏟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참으며 가까스로 상체만 틀었다. 내 뒤엔 어느새 다가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세네란이 피로로 인해 짙게 깔린 다크서클 위로 생기 없는 눈웃음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에서는 날 발견한 가엔달 파티가 정겹게 손을 흔들고 있었지만 당장은 너무 놀라서 잠깐 시선을 주고 받는 게 고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입구를 등지고 앉는 게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뒤에 선 사람의 인기척만 느껴져도 알아차린다는데 엘드미아야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인기척이 있어야 알아차리죠. 다 죽어 가는 송장 꼴로 다가오니 알 수가 있나?"
농담이 아니다. 대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게 아니라 혹시라도 나에게 다가오는 발걸음을 대비하기 위해 청각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세네란이 바로 뒤통수까지 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 인간이 그새 은신술 같은 거라도 배운 건가? 혹시나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신발이 아니라 뭔 정체불명의 털 뭉치를 발에 끼우고 있었다.
옘병, 뭔 도둑도 아니고. 저게 발소리를 다 잡아먹었군.
"세상에, 그런 거 신고 걸을 수나 있습니까?"
"동상 걸려서 고통받는 것보다는 좀 걷기 불편한 게 낫지."
오히려 어중간하게 땀만 많이 나서 식을 때 고통스러울 것 같았지만 본인이 만족한다니 뭐라 하기도 애매했다. 그녀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의자를 꺼내 앉는 사이 현황판을 바꾸고 다가온 가엔달 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일세 엘드미아. 근데 자네 혹시 비룡 타고 왔나?"
뭔가 간만에 만난 것치고 뒤에 이어진 질문이 좀 이상한 인사였다.
어떻게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