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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94화 (394/412)

음식을 주문한 뒤 상황을 설명해 준 가엔달 씨 덕분에 나는 한껏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낮게 나는 비룡만 보면 내가 뛰어내릴 거 같다니, 모함도 이런 모함이 있나?"

"모함? 어떻게 그게 모함일 수 있어?"

내 말에 오히려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하는 세네란과 주변의 반응을 보며 난 당당하게 말했다.

"전 높은 곳에서도 뛰어내립니다."

"세상에, 꼬투리 잡는 부분이 거기야?"

"이거 중대사안입니다만."

고개를 내저으면서 먼저 온 술을 들이키는 세네란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나도 웃었다.

오랜만에 만났어도 사실을 기반으로 던진 농담의 효과는 확실했기에 우리는 한결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근황을 나누며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들과의 대화는 분명 즐거웠지만 여기에 온 목적은 친목도모가 아니었기에, 주변의 소란이 더욱 가중되고 식사도 어느 정도 마무리될 무렵에 나는 천천히 본론을 꺼내 들었다.

"잠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분위기인지 감이 오더군요. 여러분은 오늘 성과가 좀 있었나요?"

"전혀. 이젠 마도구도 쓸모가 없는 수준이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기울인 세네란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쪽으로 밀고는 말을 이었다.

"마력의 농도가 짙은 곳을 찾아내는 마도구를 조금 개량한 거였는데, 한동안은 꼬리가 잡히더니 이젠 흔적도 잘 보이지 않아. 마력을 감추는데 익숙해지고 있다는 뜻이겠지."

"아직 인근에 마족들이 있는 건 확실한 건가요?"

"그건 확실해. 오히려 너무 확실해서 문제지. 왜 굳이 남아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거든. 너를 찾는 이유도."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 같은 테이블에 앉은 나조차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기에 딱히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이러고 있으니 가엔달 파티와 처음 만나 길드에서 식사했을 때가 생각나는군. 엄청 오래된 거 같은데 막상 돌이켜보니 불과 몇 개월 전이다.

"그건 뭐, 제가 알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그보다는 굳이 여러 위험 요소를 감내하면서까지 '이곳'에서 저를 찾는 이유를 찾는 게 낫겠네요. 그게 주된 목표인지, 부가적인 목표인지도 모르겠고."

당장 떠오르는 건 역시 게이트다.

이미 제국의 수도조차 건드린 놈들인데 여기서 게이트 두어 개 더 세우는 게 불가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또 이상한 던전 하나 파고들어서 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굳이 항구 인근에서 싸돌아다니는 것도 이미 한번 털면서 빠져나갈 구멍을 몰래 만들어 놓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행동력도, 능력도 출중한 놈들이라는 소리다. 마족의 특징을 대입했을 때 그런 놈은 으레 지위가 높은 법이고, 뒷공작을 하면서 지위도 높은 놈이라면 우리 마을 습격을 지시한 놈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일부러 발품 팔아서 잡기 위해 노력할 이유는 충분하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빈 그릇들이 치워지고 그 자리를 구운 새우가 가득 담긴 쟁반이 채웠다. 도중에 예카트리나가 뭔가 주문하는 거 같더니 저거였나보다. 딱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는데 눈에 먹을 게 들어오니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두의 손이 포크를 집어 살만 남아 있는 새우로 향했다.

마법사들은 빼고. 그녀들은 아직도 먹을 게 뱃속에 들어가는 전사들을 보고 질색팔색하며 땅콩을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개인적으로는... 예의 그 의뢰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의 연장이 아닐까 싶긴 하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가엔달이 물꼬를 트자 다른 이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지금까지 점잖게 턱수염만 쓰다듬던 긴도 한 마디 덧붙였다.

"어쩌면 엘드미아가 파괴했던 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이건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당시에 마족의 영토 내에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난 정황을 포착했다고 하더군."

세네란은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굳이 물어보거나 끼어들지 않았다.  우리가 그녀를 제외하고 이렇게 두리뭉실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는지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이미 그 정체불명의 폭탄의 여파에 휩쓸린 전적이 있는 만큼 딱히 놀라지 않았지만 렐리에와 예카트리나 그리고 가엔달은 긴의 이야기를 듣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가 튕겨 나갔던 장면을 회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개인적으로는 그런 물건을 양산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거라 생각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보니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로 인해 우리 사이에는 잠시 정적이 흘렀으나, 이내 가엔달 씨가 짐짓 쾌활한 어조로 화제를 전환했다.

"당장 알 수 없는걸 고민하는 것보다는 오늘 푹 쉬고 내일을 맞이하는 게 훨씬 이로운 법이지. 그보다 자네가 굳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고 싶은데? 혹시 의뢰를 받기로 한 건가?"

어째서인지 그리 말하는 가엔달 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거기에서 동떨어진 태도로 도끼눈을 뜨며 나를 바라보는 건 세네란이었다.

"일정이 있어서 그럴 수 없으니 눈 착하게 뜨시죠 세네란."

계약이 있다고 한들 내 행동에 제약을 강요받을 생각은 없다. 마찬가지로 도끼눈을 뜨며 말하자 세네란의 눈이 즉시 착해졌다.

"헤헤, 그 일정이라는 건 역시 공부겠지?"

"정확히는 이레 뒤에 있을 행사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미뤄두고 있었던 포상을 한꺼번에 받게 되었거든요."

"...포상?"

내 대답에 이번엔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에스뮈에의 편지는 들켰어도 제국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 기회는 한 번도 없었군. 어차피 이번 기회에 정식으로 치하받는 거니 조금 빨리 말해도 상관없겠다는 판단을 내리며 나는 적당히 이야기를 압축해 설명해주었다.

"제국에서 제 1 황녀님을 위기에서 구한 적이 있었거든요. 보상을 정하느라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번에 왕국에서 세운 공적들과 함께 서훈식이 있을 예정입니다. 성년이 되었으니 방랑기사 서임도 함께 받을 거 같네요."

달그락.

살이 통통하게 오른 구운 새우를 술 안주 삼아 포크를 놀리던 일행들의 손이 동시에 멈췄다. 새우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던 렐리에와 세네란은 입으로 가져가려고 했던 땅콩을 떨궜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멈춰버리는 모습이 개그처럼 느껴졌지만, 당사자들은 조금도 웃기지 않다는 듯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기에 웃지 못했다.

"어... 그래, 물론 엘드미아가 왕국에서 좀 큰 사건들을 많이 해결하긴 했지. 그건 알겠는데, 제국의 황녀를 구했다고? 그것도 철혈황녀를?"

입에 넣었던 새우조차 떨어트릴 기세로 당황하는 예카트리나에 이어 긴 씨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외쳤다.

"세상에, 그래서 눈속임으로 그런 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거였군! 확실히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면 연애편지처럼 속이는 것도 굉장히 자연스럽겠지!"

아니, 그건 반 정도 찐이었는데요...

제대로 설명하면 한층 혼란이 가중될 게 뻔했기에 적당히 눈치를 봤지만 뜨거운 반응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 와중에 쉬지 않고 술을 들이키던 렐리에는 한참을 취해서 헛소리를 들은 거 같다며 현실을 도피하다가 뒤늦게 받아들이고 미심쩍은 시선과 함께 내게 질문했다.

"에가 씨, 솔직히 말해봐요. 저기 대초원으로 갔을 때 용도 잡았죠?"

"용이라면 아카데미에서 사룡 잡았잖아요."

"...어라?"

물론 짭룡을 넘어 대악마였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리 알려져 있으니 별수 없다. 순간 인지부조화가 온 렐리에와 그런 렐리에를 보며 웃음이 터진 예카트리나를 두고 잠시 회상에 들어갔던 나는 내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첨언했다.

"게다가 거기가 뭐 화룡의 영역이라고는 하지만 순 오크들밖에 없던데요."

"반응 좀 봐, 있었으면 진짜 싸웠을 거 같다는 게 더 어이없어. 혼자서 대체 뭘 하고 다니면 그렇게 휘말려요?"

기가 차다는 듯 보고 있는 세네란 말고는 다들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결국은 모험가라는 거지, 하지만 나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기에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요. 돌이켜 보면 오크들 때도 그냥 오랜만에 휴식 한다는 느낌으로 의뢰 받고 간 거였는데."

하지만 돌아온 건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인 예카트리나의 호쾌한 어깨빵이었다.

진심 너무 아파서 눈물이 날 뻔했다.

오랜만에 모여 회포를 푼 것치고 가엔달 파티는 숙취의 흔적이라고는 한톨도 남기지 않은 채 멀쩡히 아침을 맞이했다. 워낙 말술인 사람들이라서 맥주 몇 잔 정도는 그냥 물처럼 마시는 거겠지. 고통스러워하는 건 어김없이 마법사들 뿐이었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네란, 마족과 관련된 정보가 추가로 들어오면 바로 좀 알려주세요."

"으윽, 그거야 어렵지 않은데... 비룡에 게이트까지 이용하면서 왔다며? 벌써 가게? 조금 있다가 가지?"

반쯤 죽어 가면서도 저리 말하는 이유는 뻔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내가 공부를 잘하고 있었는지 확인하고 싶은 거겠지. 나도 여러모로 아쉽긴 했지만, 이번엔 변수가 생겨서 늦었다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자리이기에 돈이 아까워도 빠르게 움직이는 게 나았다.

"게이트가 멀쩡히 작동했으면 그랬겠지만 안 됩니다. 괜히 이상한 사건에 휘말렸다가 돌아가는 게 늦으면 답도 없으니까요."

아예 확정으로 마족들의 위치가 파악됐으면 처리하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고 하니 아실리에에게 약속한 것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편이 이득이었다.

"그것도 그렇긴 하네... 그럼 일 다 본 다음에도 이쪽이 계속 이 모양이면 올 거야?"

"돈은 아깝지만 와야죠. 좋은 기회잖습니까."

마족 잡아 족칠 기회.

내 대답을 들은 세네란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다른 사람들은 그저 헛웃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배웅을 받으며 또다시 거금을 들여 비룡에 올랐다.

다음 도시까지는 불과 몇시간 밖에 걸리지 않으니, 이번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 확신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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