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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397화 (397/412)

상당히 높은 곳에서부터 시작하는 스카이 다이빙이었지만 스스로도 놀랄 만큼 침착했다. 이 짓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나름 익숙해지는 기분이다.

잠깐의 틈을 타 저 무식한 마족의 팔에 박혀 있던 대바늘을 빼서 쥔 덕에 완전히 착지할 때까지 조금 피곤할지언정 떨어져 죽을 일은 없으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마족은 같이 자유 낙하를 만끽하는 와중에 온갖 쌍욕을 내뱉으며 연신 팔다리를 휘저었지만, 저주를 거는 재주는 없는 듯하니 일단 내버려두고 고민에 들어갔다.

그 와중에 이미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마족들의 비룡이 좆같았지만, 이미 기회를 놓쳤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인지라 깔끔하게 잊기로 했다. 에스뮈에의 말마따나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에 얽매이는 건 시간 낭비였으니까.

허나 단순하면서도 애매한 고민의 결론은 생각보다 쉽게 나지 않았다.

"이걸 써먹어야 하나, 죽여야 하나?"

아직은 굉장히 멀게만 느껴지는 대지를 두고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기자 마족은 욕조차 멈추고는 세상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반응 역시 내 고민 해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부하들을 살리고자 하는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거나 여자라서 봐준다 같은 시답잖은 이유로 시작한 고민은 아니다. 정확히는 이놈들이 날 노리고 날아들어온 순간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온 좆같음이 문제였다.

난 아직도 내 마을의 원수가 누구인지 모르는데, 이 새끼들은 하다 하다 이젠 내 위치까지 파악해서 하이재킹을 시도하네? 물론 결과적으로 하이재킹을 당한 건 놈들이 되었지만, 내 정보가 일방통행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한 마디 정도 하고 싶어졌는데... 마침 눈앞에 나름 대장이라는 것이 하나 떨어지고 있으니, 어차피 어그러진 계획 차라리 얘를 써먹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간 것이다.

"뭐, 이건 내가 강요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지."

어차피 상대방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한 짓이었기에, 슬슬 감속이 필요했기에 바늘에 마력을 주입하며 겸사겸사 여전사의 팔에 박힌 바늘에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나야 바늘을 쥐고 있으니 적당한 저항만 느꼈을 뿐이지만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한 여전사의 팔은 주인을 배려하지 않고 멋대로 들어 올려지며 그녀의 추락에 제동을 걸었다.

"아악!"

딱히 배려하지는 않았기에 갑자기 위로 치솟은 바늘이 살갗을 죄다 찢어 버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전사는 짧은 비명과 함께 이 악물고 팔뚝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 그 대참사를 막아 냈다.

과연 억지로 빼내려고 했을 때도 근육으로 쥐어 잡고 놓지 않던 사람답다고 할까, 터프하다.

"이, 이게 무슨...?"

하지만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과 달리 이 상황을 이해하긴 힘든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시작부터 본론을 언급하려던 계획을 보류하고 살짝 우회하기로 했다.

"적의를 불태우며 떨어져 죽을래, 아니면 나랑 거래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할래?"

"뭐?"

"잘못 들은 거 아니니까 대답이나 해."

내가 전달할 말은 원래 단 하나였다. 우리 마을에서 저지른 학살의 대가를 징수하러 곧 갈 테니, 닥치고 기다리라는 것.

하지만 얘는 다른 마족들처럼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했던 상대가 살려줄 테니 그 사건과 관련된 전언을 전달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라면 의문부터 가질 것이다. 대체 그게 뭐길래? 마왕군이 서부에 발을 디딘 적도 없는데 이런 이야기가 왜 나오지? 하면서.

그리고 신중해지겠지. 비밀 활동을 하는 놈들이면 의심이 많아 더 그럴 것이다. 재수 없으면 기껏 살려 보내줬더니 입 싹 닦고 아무 말 안 할지도 모른다. 그럼 안 그래도 홧병나게 생긴 내 속이 제대로 뒤집힐 것이다.

어차피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는 하나, 그런 좆 같은 결과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밑작업은 하고 들어가야 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너 그 꼴로는 나 못 이겨. 멀쩡해도 못 이기지. 알잖아?"

움찔거리며 반응이 왔지만 여전사는 부정하지 않았다. 순간적으로 부딪치는 건 얼추 비슷했지만, 그것도 몸이 멀쩡할 때의 이야기다. 이미 팔 하나가 작살이 났는데 저것도 못 이기면 여기서 떨어져 죽어야 하는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원래는 죽여 버릴 생각이었는데 네 태도의 변화가 명줄을 조금 늘린 상태거든? 방금 말했듯이 네가 당장 나에게 위협이 되는 수준도 아니고, 위협이 될 여지도 없으니 싸움을 포기한다면 일단 살려는 준다. 어쩔 거냐? 참고로 '그 말을 믿으라고?' 같은 진부한 말을 내뱉으면 거절로 받아들이고 바로 마력 뺄 거니까 대답 잘해라."

반사적으로 벌어졌던 입을 다무는 꼴을 보아하니 진짜로 말하려고 했나 보군. 순간 그냥 떨궈버릴까 싶었는데, 이어진 그녀의 반응이 조금 남달랐기에 유보하기로 했다.

"...정보를 얻어낼 요량이면 그냥 죽여라."

'큭, 죽여라.' 보다는 합리적인 대답이었다. 나름 특수 부대이니 머리 쓸 줄 아는 사람을 넣는 게 당연하려나?

"그건 걱정 마라. 어차피 너에겐 내가 원하는 정보가 없다."

"어째서? 넌 이티스엘 인이잖아?"

"그게 뭐?"

"내가 이 전쟁에 도움이 될 정보를 쥐고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그런데 궁금한 게 없다고?"

태평하게 저런 걸 물어볼 정신머리가 있나 싶었지만... 아까도 작지 않다는 것에 태클을 거는 묘한 정신 머리의 소유자였기에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해주겠다는 건 아니다만.

"너한테 그런 거까지 설명해 줄 이유는 없다. 질문에나 대답해라. 싸울 거냐?"

내 손패가 이미 알려진 건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사람 죽이고 살리는 기준이 알려지는 건 별개의 이야기였다. 이에 확실히 선을 긋자 여전사가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사실, 여기서 죽음을 선택하는 게 앞으로 이어질 그녀의 삶을 통틀어 가장 영예롭게 죽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결사 항전의 분위기로 홀로 남았던 녀석이 임무를 성공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무사히 돌아오는 걸 '아,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여 주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 심지어 특수 작전을 수행하는 군인인데. 기밀 한두 가지 정도 누설했을 수 있다고 가정한 뒤 부하들의 증언과 비교해가며 면밀히 따지고 보는 게 그나마 가장 상식적인 대응이겠지.

진실의 수정구라던가 거짓말 탐지 성법같은 게 존재하는 세상이니 혐의는 빠르게 풀릴 수 있어도, 교묘하게 다른 형태로 마왕군을 배신한 게 아닐지 의심받거나 부하 팔아먹고 살아 돌아온 패배자라는 식의 수식어에서 자유롭긴 힘들다.

그것만으로도 쟤들처럼 소속감이 강한 녀석들에겐 종종 죽음보다 가혹한 일일 텐데... 내 말을 윗대가리들에게 보고하면 무슨 꼴이 날지 나도 알 수 없다. 이유야 어쨌든, 우리 마을을 초토화 시킨 건 마왕군 내에서조차 기밀인 거 같으니까. 마을 하나도 몰살 시킨 놈이 입막음을 위해 부하 하나 못 죽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녀석의 고민도 길어지길래, 들고 있던 검을 까딱거려 주의를 끈 뒤 고개를 살짝 움직여 아래를 가리켰다. 그것만으로도 내 의도를 전달하기엔 충분했다.

아직 지상에 닿으려면 한참 남았다. 우리의 발 아래로는 진즉에 삼림지역을 벗어나고 맞이한 새하얀 광야 위로 추락사한 이들의 흔적이 드문드문 새빨갛게 남아 있다.

나에게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참 멀리까지 피가 퍼지는구나 정도의 감상을 안겨 주는 광경이었지만 그녀에겐 달리 느껴지겠지. 아무리 육체를 강화할 수 있다고 한들 여기서 떨어지면 오러 마스터가 와도 사망이지 않을까?

"...거래를 받아들이겠다. 싸우지도 못하고 추락해 죽는 건 개죽음에 불과하니."

어떤 사고를 거쳐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결국 한껏 우울해진 얼굴로 여전사는 대답했다. 그 태도만 놓고 보면 그냥 다 포기한 듯했지만 일단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동료만 보호하지 않았어도 한참을 더 싸워야 했을 전사다. 놈들이 도주하지 않고 계속 접근했었다면 진즉에 타고 있던 비룡을 죽여 추락시키는 걸 선택했을 거다.

다행히 꽤 긴 시간을 들여 하강을 끝내고 정겨운 대지에 두 발을 디딘 뒤에도 그녀가 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체들이 있던 곳을 바라보느라 나에겐 별다른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팔에 박혀 있던 바늘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대로 한참을 서 있지 않았을까.

제 팔을 뚫고 나온 바늘들이 내게 날아오는 것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래 내용은?"

이번에는 바늘을 정리하며 내가 뜸을 들였다. 어이없지 않고, 목숨값으로 그럭저럭 타당하게 느껴지며, 실제로 나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제안. 그러면서도 저 녀석이 적당한 거부감을 느끼며 큰 손해를 봤다고 여기게 할 만한 것을 제시하고자 오랜만에 일천하고도 하나의 엘드미아들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번뜩였다. 이것저것 동시에 건드릴 수 있는 게.

"네 동료들과 비룡의 시체는 전리품이다. 하나도 손대지 말고 그냥 가라."

"뭣...!"

잔뜩 구겨지는 얼굴. 일부러 '전리품'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신경을 건드린 건 나름 성공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듯했으나 내 예상보다 조금 더 과한 반응이 나오는 건 살짝 놀라웠다.

"어차피 들고 갈수도 없으면서 왜 그런 반응을 보이지? 설마 저 쪼가리들 하나하나 다 긁어모아 싸 들고 갈 생각이었나?"

덕분에 내 연기도 나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반쯤은 진심으로 물어보는 게 되어 버렸거든.

"저, 적어도 화장이라도..."

자기희생적이고, 육체파고, 소속감이 있으며 적진에서 비밀 임무를 수행하느라 기밀 유지가 습관화 된 인물의 표본과도 같은 반응은 실로 만족스러웠다.

"개소리. 그게 거래 조건이다. 싫으면 동료들과 같이 눕든가."

눈을 질끈 감고 굉장히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여전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오른팔에 피를 뚝뚝 흘리며 멀어지려는 그녀를 두고 잠깐 뜸을 들이다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아, 포션은 있냐?"

없다는 걸 알고 물어본 거였다. 작은 파우치조차 없는데 어디에 포션을 뒀겠어.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여전사의 눈에 불쾌감이 맴돌았다.

"...지금 놀리는 건가?"

참으로 감정의 변화가 쉽게 드러나는 마족이었다. 그래도 어이없음을 조금도 숨기지 않는 것이 속에서 능구렁이를 키우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그보다는 상품 판매에 가깝지. 생각해 보니 너희에게 명령을 내린 놈이 좀 좆같게 느껴져서."

나는 파우치에 들어 있던 적당한 가격의 포션을 꺼내 그녀가 보기 쉽도록 머리 위로 든 채 말을 이었다.

"팔에 난 상처 정도는 치유할 거다. 적어도 출혈을 막기 위해 마력을 과다 운용하다가 비명횡사할 일은 없겠지. 별거 없어. 그냥 말만 전달하면 돼. 동료들의 시체를 버리고 가는 것보다 쉽고, 어쩌면 네가 임무를 수행했다는 증거도 될 수 있겠지. 판단은 네 몫이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이려고 했으면서, 이제는 치료의 기회까지 준다고?"

목소리에 살짝 분노가 담겼지만 나름 열심히 갈무리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내 입장에서는 그 약간의 분노만으로도 충분히 어이가 없었지만 말이다.

내가 언제 덤비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 지들이 덤벼놓고서는. 목적이 따로 생기지만 않았어도 높은 확률로 죽었는데 왜 고마워할 줄 모르는 걸까.

"그냥 공과 사를 확실히 구분지을 뿐이다. 그리고 너는 화를 낼 게 아니라 에파가 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려야 하는 상황이지.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다시 덤비면 얼마든지 죽여줄 테니까."

"...말만 전하면 된다고?"

"뭐, 전달 못하고 중간에 죽어도 따지러 가진 않을 테니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미친놈"

뒤에 쓸데없는 한마디를 더 붙이긴 했지만, 결국 그녀는 거래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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