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임식은 간단한 파티조차 하지 않은 채 정말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
본디 일반적으로는 훈장을 수여받은 사람을 띄워주거나 해당 인물과의 연줄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파티가 이어지기 마련이었지만, 이번엔 정말 왕실과 황실에서 일방 통보하는 것에 가까운 자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졸지에 예정에도 없던 듀얼 방랑 기사가 되어 버렸으나 나에게 있어 문제 될 건 없었다.
'네가 정말 기사가 되고 싶을 때 우리의 등용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 정도의 의미를 지닌 거였으니까. 일각에서는 왜 이티스엘 사람에게 제국이 침을 바르냐며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다고는 하나 에스뮈에를 구했다는 타이틀이 워낙 빡세서 감히 따지고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꼬우면 제국의 관직에 앉혀 버리거나 작위를 줘버린다는 식의 요상한 협박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업적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나중에 듣기로는 오히려 왕실의 체면을 생각해 방랑 기사로 타협을 봐준 게 분명하다는 식의 우호적인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랜 시간 동안 숙고한 끝에 이번 왕실의 행사에 일정을 맞춘 게 그 증거라나?
그마저도 에스뮈에의 계획에 포함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차피 제국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왕실의 입장에서는 반제국적인 분위기가 흐르며 괜히 제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고 하니 윈윈인 결과였다.
하지만 마냥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영지를 되찾을 준비에 들어간다고?"
"정확히는 막바지에 이르렀지. 2월에 공세에 들어갈 거야."
최근 제대로 얼굴 볼 기회가 없었다 보니 이번 기회에 자리를 마련해 이야기를 나누던 라그니스가 입에 담은 내용은 심히 놀라웠다.
레비엥 변경백령의 탈환.
마왕군과의 전쟁이 이어진 와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기록된 처참한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계획이 구상 중이었다는 건 그리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었으나 라그니스가 후방 지휘부도 아니고 직접 전장에 참여한다는 건 전혀 달랐다.
"라드넬반데스 경에게 훈련을 받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잖아?"
"근접 전투는 그럴지 몰라도 마법은 꾸준히 받아왔거든? 스승님도 어느 정도는 인정하셨어. 그래서 한 가지 조건만 통과하면 내 결정에 동의하겠다고 하셨지."
"...세상에."
그 영감님이 노망이 들거나 라그니스를 죽일 생각인 게 아닌 이상 그녀의 실력이 비명횡사와는 거리가 먼 수준까지 올랐다고 여기는 게 맞긴 한데...
"못 믿겠지?"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지."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수시로 주워들었다고 해도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나조차 지금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만 7년이 넘어간다.
그에 비해 수도로 입성한 뒤 라그니스가 아무리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고 한들, 그녀가 제대로 전투와 관련된 것들을 습득하기 시작한 건 햇수로 2년을 채 못 채운다. 온갖 정치적인 문제와 귀족의 업무들 속에서 틈틈이 시간을 쪼개 배운 마법과 창술이 마왕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먹힐 거라고 진심으로 믿어 주기엔 내가 지금까지 보고 겪은 게 너무 많았다.
"물론 최전선에 직접 나설 수준이 된다는 건 아니야. 전장에서 기습을 받을 경우 지근거리에 있는 아군이 도와줄 때까지 버틸 정도의 잔재주는 된다는 거지."
"그 정도도 충분히 납득이 안 가는데."
"알아. 사실 그거 때문에 이번에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부탁?"
"응. 스승님이 내건 조건과 관련해서."
뭐지? 그 출정에 내가 그녀를 곁에셔 지켜 준다는 조건이라도 내민 건가? 아무리 그래도 나를 이기라는 악랄한 조건을 내걸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떠오르는 의문 속에서 탁자에 놓인 다과를 주워 먹으며 눈빛으로 물어보자 라그니스가 결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랑 대련해 줘."
...어쩌면 라드넬반데스는 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악랄한 마법사일지도 모르겠다.
◈
다행히 내 순간적인 우려와 달리 라드넬반데스 경의 인성은 매우 평범했고, 라그니스에게서 그의 주장을 전해 들은 나는 흔쾌히 그녀의 부탁을 수락했다.
그렇게 나흘이 지나고 난 뒤, 나는 대련을 위한 준비가 다 끝났다는 라그니스의 편지를 받고 레비엥 저택에 방문하자마자 그 즉시 마차에 올라 라드넬반데스 경의 도서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응해줘서 고맙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그니스의 일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그렇게 도착한 라드넬반데스의 도서관은...
"근데 여기가 정말 도서관이 맞긴 합니까? 병기고 같은데."
그냥 주인처럼 생긴 곳이었다.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라드넬반데스 같은 거구의 근육질 전사와 완벽하게 매칭되는 무기고 같은 느낌.
물론 그렇다고 책이 아니라 무기만 잔뜩 진열된 정신나간 공간은 아니고 엄연히 책장이 존재했으나, 그에 못지않게 무기도 많고 훈련장 같은 곳도 있었다. 아무나 붙잡고 와서 보여주면 마법사의 마도서관이 아니라 비밀리에 책을 수호하는 사서 기사단 같은 존재들의 은신처라고 여기지 않을까.
나름 진지하게 물어본 거였으나 정작 라드넬반데스는 내 질문에 웃을 뿐이었다.
"껄껄껄. 농담 좀 하는군."
진담인데...
뭐, 개인의 인테리어 취향을 두고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기에 적당히 같이 웃어넘기며 그의 뒤를 따라가자 곳곳에서 각자 할 일을 하던 라드넬반데스의 제자들이 우리에게 시선을 옮겼다.
유사 라드넬반데스, 라드넬반데스 1/2, 라드넬반데스 유충 등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들이 던지는 유달리 호기심 가득한 시선에 슬쩍 라그니스를 바라보자 그녀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흠흠, 내가 여기서 귀여움 좀 받는 막내라서..."
"과연. 막내가 외간 남자를 데려왔으니 이목이 집중되는 건가."
"어... 아니? 그보다는 막내가 수도에서 악명 높은 정신 나간 인간과 지인이라는 거에 놀라고 있는 거에 가깝지."
순간 나도 모르게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도끼눈을 뜨고 라그니스를 바라보았으나 돌아오는 건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시선을 보내는 것이지?' 라는 의미가 가득 담긴 라그니스의 도끼눈이었기에 조용히 눈을 깔아야 했다.
두눈박이 세상에서는 외눈박이가 이상한 것일 뿐이야...
"이해해주게나. 제자들이 아직은 영웅을 과도하게 동경하는 시기라서 말이야.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배틀 메이지는 실상 싸움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는다는 느낌이 강해서 유독 그런 감이 있어."
다시 한 번 웃어 보인 라드넬반데스가 적당히 손짓하자 쏟아지는 시선이 많이 줄어들었다. 비록 그 끝자락에 아쉬움이 잔뜩 남아 있긴 했지만 오늘은 어디까지나 라그니스의 용무로 온 것이기에 어울려 줄 생각은 없었다.
그의 뒤를 따라 내려간 지하에는 꽤 높은 천장과 적당한 넓이의 대련장이 세워져 있었다. 도착함과 동시에 묘한 기시감이 드는 것으로 보아, 세네란의 마도서관에서처럼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대련장에 내려오자마자 라그니스는 익숙한 걸음으로 구석에 가더니 미리 구비된 장비들을 이리저리 차며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능숙하게 방어구를 차고 조임쇠를 점검하는 모습은 어지간한 모험가보다도 숙련되어 보인다.
그 옆에는 지난 오크 토벌때 잠깐 봤던 기창과 방패가 가지런히 서 있다. 혹시나 싶어 마력시를 사용하니 은은하게 마력이 흐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장비들에 무슨 마법이 부여되어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 내 옆에 선 라드넬반데스가 라그니스에게 시선을 둔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저 아이의 원동력은 자네일세. 갑자기 마법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내 육체 단련 수업을 토하면서 따라온 것도 전부 다 자네를 위해서지."
그녀가 마차에서 같이 전장으로 향하겠다고 말했던 것을 잊지 않았기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이제는 내 혈육보다도 귀한 아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안으로만 싸고 돌 생각은 없어. 하지만 너무 오냐오냐 해 줄 수도 없지."
"전쟁이니까요."
"맞아. 그러니 잘 부탁하네."
내 어깨를 두드리는 라드넬반데스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정말 손녀딸을 보는 할아버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눈빛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가 나에게 부탁한 건 그런 태도와 정반대되는 것이라는 걸 안다.
라그니스의 밑바닥까지 끌어내서 직접 역량을 확인해라.
어쩌면 라드넬반데스가 나와의 대련을 조건으로 내건 것은, 그녀나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그녀의 성장을 보여주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아니, 무조건 그게 맞을 것이다. 세간에서 그랜드 배틀 메이지라고 불리는 사람이 제자의 역량을 파악하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
"그렇다는 건 정말로 라그니스가 비명횡사 안 할 정도로 단기간에 폭풍 성장을 했다는 건데..."
나직이 중얼거리며 대련장에 들어서자, 라그니스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내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거기에 드레스를 입고 우아한 동작을 유지하던 라그니스는 없었다.
그저 붉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올려 묶은 주근깨 여전사만이 서 있을 뿐.
"미리 말하는데, 나 오늘 라이카 안 데려왔다."
가볍게 어깨를 풀고 도끼를 쥐며 말을 건넸더니 라그니스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가볍게 되물었다.
"뭐야, 만전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니. 안 봐줄 거라고 말하는 거야. 걔가 영리하긴 해도 나 움직일 땐 방해되거든."
최근엔 손발을 맞춰 싸운 적이 없으니 더 심하겠지.
덤덤한 내 대답에 라그니스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바라던 바야."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아무런 전조도 없이 그녀의 창에 달린 깃발에 불길이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