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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401화 (401/412)

주문 영창이란 무엇인가.

이론적으로는 단순하다. 언어로써 자신이 발현하려는 마법의 설계도를 제작하여 마법 시전을 좀 더 수월하게 만들고, 발현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굳이 주문을 입 밖으로 내는 것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다. 사과를 두고 빨갛고, 구형이고, 씹으면 새콤달콤한 과일이라며 주구장창 설명하는 것보다 직접 보여주고 이게 사과라고 말하는 편이 더 이해하기 쉽고 빠른 것과 같은 이치다.

그걸 자기 자신에게 이행하는 것이니, 굳이 따지면 주문 영창이란 결국 궁극의 혼잣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다 보니 어휘력이 후달려 영창이 불분명하면 주문 이외의 요소인 자신의 마나나 연산 능력을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지식과 어휘력이 풍부하여 주문을 효율적으로 영창 할 수 있을 경우 적은 노력과 비용으로도 마법을 정교하게 사용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니, 자연스럽게 마법사들은 온갖 종류의 책을 끼고 살며 지식을 추구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단순히 말을 내뱉는 것만으로는 마법이 발현되지 않는다. 그랬다면 세상이 지금의 곱절은 개판이었겠지. 이론을 기반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별도의 과정까지도 익혀야 비로소 마법을 쓸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에 마법사가 직업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무영창은 어떠한가?

주문 시전을 위한 일련의 과정을 더 '쉽게' 만드는 게 영창이니까, 그 과정에 아무런 어려움도 느끼지 못한다면 무영창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세간에서 무영창이 재능의 영역으로 취급받음과 동시에 비효율로 여겨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

영창과 무영창에는 암기와 필기의 차이를 우습게 뛰어넘을 만큼 거대한 벽이 있으니, 전생에서 읽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주문 하나 외우지 않고 마법을 쏴재끼거나 한 마디의 주문으로 대마법을 쏟아 내는 건 여기서도 판타지의 영역이다. 역사에 존재했던 마법 천재들조차 그런 건 하지 못했다. 비슷한 영역까지 닿은 경우는 있어도 말이다.

근데 아무래도 지금 내 눈앞의 라그니스가 그런 소수의 천재들과 비슷한 선상에 있는 것 같다.

"어이가 없네."

영창이 빠르면 마력도 빠르게 모이고, 느리면 마력도 느리게 모인다. 그렇기에 마법사들은 신속 정확한 영창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녀의 무영창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마력시를 사용한 내 눈에는 순식간에 모여든 마력 때문에 라그니스가 한순간 슈퍼스타를 주워 먹은 콧수염 배관공처럼 번쩍이는 걸로 보였다.

"그건 반칙 아니야?"

겨우 눈 깜짝할 사이에 깃발에 치솟은 불길은 창 뿐만 아니라 그녀의 전신을 은은하게 휘감으며 딱 봐도 버프가 걸렸다는 것을 암시하는 형상을 취하고 있었다. 모든 마법 시전이 저 모양이면 주문 시전을 끊을 수도 없다. 마법이 기창에서부터 시작된 걸로 미루어 볼 때, 마도구의 힘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색다른 상황을 조우하는 내 삶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터트리며 가볍게 던진 농담에 라그니스는 불신이 가득 담긴 눈초리와 함께 대답했다.

"너한테 들을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는 곧장 바닥을 박차며 달려들었다. 자세를 낮추고 방패를 앞세워 상체를 보호한 채 불타는 깃발을 펄럭이며 돌진하는 모습은 그간의 훈련을 허투루 받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견고했으며, 마치 추진기에서 터져나오는 불꽃처럼 사방으로 흩날리는 마력의 잔재 속에서 번뜩이는 창날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다.

"과연."

마법전사나 마법기사도 아니고 굳이 전투 마법사로 분류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저절로 튀어나올 뻔한 감탄사를 참아내며 거침없이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찌르기를 도끼 날로 밀어내자, 충돌과 동시에 작은 폭발이 일어났다.

파앙! 하는 폭발은 무기나 갑옷에는 그리 치명적이지 않을 수준이었지만 피부를 찢고 들어왔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왜 몸통이 아니라 범위가 작은 목을 노리나 했더니 아무 생각 없이 시도한 공격이 아니었다.

상당히 그럴싸한 손패였다. 마족도 사람이니 이런 공격을 맞고 상처가 터져 나간다면 사기가 저하될 게 분명하다.

"주저하지 않는 건 좋네."

지인이라서 손속을 둔다는 식의 클리셰따위는 방금 달려올 때 다 짓밟아버린 것인지 라그니스는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합격점이었기에, 나는 찌르기에 실패한 뒤 다시 돌아가는 창을 따라 안쪽으로 파고들며 그녀의 대처를 살펴보았다.

"흡!"

눈을 감지도, 놀라지도 않는다. 정말 내가 알고 있는 라그니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이 정확히 내 얼굴에 꽂힌다.

얼굴이라, 가차 없군.

-깡!

그녀의 방패가 내 얼굴을 향해 날아들었지만 이미 시선에서 어딜 노리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에 도끼 자루를 들쳐올려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수 있었다. 덕분에 거리가 멀어지기는커녕 더 가까워져 버렸고, 나는 라그니스가 다른 대처를 하기전에 도끼자루로 그녀를 아래에서부터 위로 있는 힘껏 밀쳤다.

-터엉!

"으엑?!"

검도의 코등이 싸움과 비슷한 동작이었지만 결과는 어른과 어린아이가 부딪친 것만큼 심각했다. 라그니스는 일부러 뒤로 뛰지 않았음에도 거의 내 키만큼 공중으로 날아올랐고, 방금 전까지의 독기는 온데간데없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진심으로 당황했다.

"빈틈."

그런 그녀를 향해 도끼를 휘두른다. 공중에 떠 있는 건 라그니스지 내가 아니었기에 자세를 고쳐잡는 것도, 휘두르는 것도 빨랐다. 얼핏 위험해보여도 흉갑에 닿음과 동시에 멈출 자신감이 있으니 시도한 공격이었다.

장작을 쪼개듯 깔끔하게 일직선을 그으며 떨어지는 내 도끼를 똑바로 바라보던 라그니스의 눈동자가 갑자기 푸른빛으로 빛난 건 도끼날이 그녀의 흉갑에 닿을 무렵이었다.

돌연 라그니스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그리고 느닷없이 뒤에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졌다.

-피이익!

'어떻게?' 라는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기에 일단 휘파람을 불며 바늘을 사출했다.

뒤통수에 눈이 달렸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앞에 달린 두 개가 전부인 나는 방금 라그니스가 보여줬던 돌진을 기준 삼아 방패의 위치를 예측한 뒤 주저 없이 바늘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도끼를 쥐고 있던 손을 주저 없이 놓으며 허리춤에 가져가 검을 뽑아 들고, 온몸을 돌려 중단 자세를 잡은 내 눈에 경악하는 라그니스와 그녀의 방패에 정확히 직격한 바늘이 튕겨 나가는 광경이 들어왔다.

사실 놀라고 싶은 건 내 쪽이었다. 이번엔 심지어 번쩍임조차 없었는데 말이지. 아무런 조짐도 없이 눈앞에서 희뿌연 안개처럼 흩어졌으니 이게 진짜 마법이 맞긴 한 거냐고 물어보고 싶은 수준이다.

뭔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일까? 일단은 잠깐 주춤거린 라그니스의 다음 공격을 막아 내는 게 우선이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짜 말도 안 돼!"

라그니스가 불만스럽다는 듯 외치자 다시 한번 기창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번쩍임.

하지만 이번엔 돌진이 아니라 화염방사기처럼 불길을 휘둘렀다. 그냥 불이 아니라 끈적하게 늘러붙을 것만 같은 위협적인 불길을.

"하여간 마법이란..."

시전을 차단할 수 없는 마법은 예상보다 많이 껄끄럽다고 생각하며, 나는 건틀릿의 방호 마법을 발동했다.

제대로 움직이고 호흡을 조절했음에도 순식간에 숨이 차올랐다.

방금 전까지 침착하게 대련에 임했던 게 갑자기 날아온 투사체 한 방에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뒤에도 눈이 달린 거 아냐?

"후우!"

견제따윈 하지 않았다. 찌르기도, 방패를 휘두른 것도, 엘드미아가 자신을 밀치기 위해 도끼 자루를 움직인 그 순간에도 버티기 위해 육체 강화를 다 동원했다.

그럼에도 몸이 날아가고 그대로 도끼에 맞을 뻔했다. 비장의 수가 없었다면 그대로 대련은 끝났겠지. 이길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무력하게 휘둘렸다는 사실에 라그니스는 살짝 눈물이 날 뻔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울지 않고 투지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엘드미아였기 때문이다.

'너를 좇고 있는 나도 봐 줘.'

이 자리는 그녀가 원해서 만들어진 자리였다. 애초에 그녀가 레비엥 변경백령을 되찾기 위해 움직이면 라드넬반데스도 따라 움직여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옆에 있는 이상 제 몸을 지킬 능력이 부족하든 하나도 없든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그니스는 그런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는 엘드미아를 따라갈 수 없기에.

그래서 훈련했고, 자신이 수도에서 노력해 온 결과를 엘드미아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온갖 업무와 정치에 휘둘리면서 배운 마법과 훈련이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할 수 있어. 제대로 단련할 수만 있다면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늘러붙는 불길을 뚫고 엘드미아가 달려든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저걸 뚫고 오는 건가 싶었는데 제국에서 선물 받았던 건틀릿에서 방벽이 발동되고 있는 걸 보니 납득 할 수 있었다.

알게 모르게 온갖 마도구를 긁어 모으는 남자였다. 그 에스뮈에가 선물한 갑옷에 투구가 없는 것을 보면, 서부에서부터 이어진 정신나간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추가된 귀걸이에도 무슨 알 수 없는 기능이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 직접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얼굴을 공격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다. 그저 도끼에서 검으로 무기를 바꾼 엘드미아의 움직임을 따라잡기엔 그녀의 능력이 부족했을 뿐이다.

불을 쏘고, 벽을 세우고, 전격을 때려 박는 것도 다 부질 없었다. 사실 공간 이동을 통한 기습에 실패한 순간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악착같이 물고 늘어져서 패배를 늦추는 거밖에 없었으나 라그니스는 그렇게 싸움이 늘어질수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난 탑 위의 공주님 따위는 되지 않을 거야.'

무력하던 과거와는 달랐다. 스스로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다. 그간 해온 노력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아 성취감마저 느껴졌다.

물론 그런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두 번째로 벽을 세워 엘드미아의 접근을 막자, 그는 아예 흙벽을 어깨로 들이박아 박살 내고는 그대로 창을 쳐 날린 뒤 다리를 걸고 어깨를 눌러 라그니스를 자빠트렸다.

그렇게 열심히 움직였는데도 잔뜩 상기되고 숨이 차오른 그녀와 달리 엘드미아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다. 심지어 건틀릿에 담긴 방호 마법의 성능이 얼마나 좋은지 옷자락 하나 제대로 그슬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라그니스는 자신이 합격점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무영창, 번거롭네."

아주 번거로워.

그리 말하면서 웃어 보이는 엘드미아를 바라보며 라그니스도 만족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도 네 곁에 서서 싸울 수 있어. 조금만 더 훈련하면 말이지."

"...그럴 거 같다. 아주 무서운 아가씨였네."

난장판이 되어버린 대련장을 둘러보며 내뱉은 엘드미아의 대답에 라그니스는 소리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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