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련을 끝마친 이상 굳이 도서관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에 우리는 다시 마차에 올라 레비엥 저택으로 향했다. 그사이 라그니스가 대련장을 청소하거나, 라드넬반데스 경과 방금 대련을 복기하며 이런저런 조언을 받는 사소한 과정이 있었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 레비엥 변경백령을 되찾는 것은 이미 라그니스가 수도로 귀환하기 훨씬 이전부터 준비 중인 계획이었다고 한다.
해당 지역이 가져다주는 지리적 이점에 대해서도 조금 이야기가 나왔지만, 내가 전술 전략까지는 공부하지 못했기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수년간 고착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점령 당했던 왕국의 영토를 되찾는다는 상징성만큼은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왕국은 혼란스러웠고, 분위기를 엎을만한 확실한 승전보를 원했다. 거기서 레비엥 탈환이 반격을 알리는 효시로 화려하게 시작될 예정이었다.
사실 만전을 기할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1년 사이 온갖 사건사고가 터져 버린 탓에 왕실도 조급해졌다는 모양이다.
만델리 항이 박살 나고 엔벨데가 반역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성광십자회의 수뇌부가 악마에게 넘어갔을 뿐만 아니라 수도로 숨어들어와 대악마를 소환했으며, 기어이 마족들의 게이트 수작질 때문에 서부의 오크가 수도 인근에 쏟아지고나니 백성들의 불안이 넘치기 시작했다나?
정작 내 주변에는 딱히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던지라 체감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개인적으로는 만델리 항이 작살난 거 빼면 다 직접 겪은 일이었다는 게 더 골 때렸다.
그나마 성광십자회 지부를 지크프리트에게 짬 때려서 다행이지. 그랜드 슬램도 아니고 말이야.
어찌 보면 라그니스를 이용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구도라고 할 수 있겠으나, 왕국에게 필요한 건 버림패가 아니라 영웅이었으니 지원이란 지원은 다 받는 라그니스가 오히려 왕국을 이용하는 것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라그니스 본인이 참여를 원했으니 내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그래서 말인데, 혹시 원정에 나랑 함께 참여해주지 않을래...?"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라그니스가 조심스럽게 꺼낸 주제는 굉장히 새삼스러운 내용이었다. 왜 저렇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래."
어차피 따로 말이 없었으면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을 사안이다.
라그니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이번 원정이 전장 체험용으로 아주 제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아군은 많은데 적은 그보다 적을 가능성이 높은 전장일뿐더러, 반드시 이겨야 하기에 어지간한 부대보다 지원도 좋을 것이다.
나라가 다 기울어져서 총력전을 시도하는 거면 모를까 이런 기회를 굳이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 그렇지. 아무... 엥? 그래라고?"
정작 말을 꺼낸 당사자는 내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행동했지만 말이다.
"반응이 왜 그래? 거절할 줄 알았어?"
"어, 어어. 그, 이제 방랑 기사도 됐으니 네 목적을 위해 움직일 줄 알았지."
"당장 정보도 없는데 뭐 얼마나 잘 움직일 수 있겠어. 오히려 이렇게 후방 지원이 확실한 상황에서 미리 전장을 경험해 보는 게 장기적으로도 이득이지."
나름 타당하게 설명했음에도 굉장히 의외라는 듯 반응하는 라그니스가 미심쩍어 슬쩍 떠보니, 그런 고민하지 않고 냅다 전장으로 달려가 휘젓고 다니며 마왕군을 심문할 줄 알았다고 한다.
이쯤 되면 대체 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되먹은 것인지 궁금해질 지경이었지만...
벌인 일이 하도 많아 괜히 무덤을 팔 것 같아 입 다물고 넘어가기로 했다.
◈
방랑 기사가 되었다고 해서 당장 내 삶이 극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아무리 쟁쟁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들 결국 귀족들의 영역이었고, 나는 그들과는 먼 곳에 살고 있으니 사실 소문이 돌아도 연관이 없는 편에 속했다.
물론 변화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모험가 길드에 공식으로 내가 받은 훈장과 서임에 대한 이야기가 전달되면서 짭드미아들이 약 맞은 바퀴벌레들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거라고 할 수 있겠다.
놈들이 아예 자취를 감추는 데에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종종 (구)짭드미아들이 개를 끌고 나타나긴 했다는데, 내 흉내를 내려고 구한 개에 정이 들어버려서 같이 다니는 놈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솔직히 웃고 말았다.
다음으로 큰 변화는 역시 아카데미였다.
안 그래도 오크 게이트 사건에 휘말렸다가 돌아왔을 땐 내가 피곤할 거라는 명목으로 눈치만 보던 학생들이 이제는 아예 눈에 불을 켜고 나와의 접촉을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대충 가르침을 바라는 학생과 연줄을 잡으려는 학생과 연애를 노리는 학생이 7:2:1 비율인 듯했는데, 스승님과 세네란이 있을 땐 당연히 접근도 못 했지만 그 외의 상황에는 얄짤없어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셰릴이 있을 땐 그래도 좀 나았다. 그녀의 단무지 눈썹이 분기탱천할 때마다 접근을 시도하려던 학생들은 대부분 그대로 유턴했다.
대부분은 말이다.
"부디 한 번 더 가르침을!"
"겸사겸사 저도 같이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검술 3등인 칼리츠와 2등인 그리윌스는 셰릴마저 뚫고 달라붙어 자꾸만 가르침을 요구했다.
적극적으로 어필하며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인 칼리츠와 그 옆에서 흑막같은 미소를 지으며 능글맞게 꼽사리를 끼려는 그리윌스의 모습을 몇 번 보고 나서야 나는 칼리츠가 그리윌스에게 종용당해 매번 거절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온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역시 상인 가문 사람이라서 그런가 교묘한 줄타기를 잘하는 녀석이었다. 검술마저 성실하니 크게 될 놈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돈도 안 되는 일에 시간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매번 돌려보내는 나날 속에서 시간은 어느덧 1월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오늘에서야 대악마를 잡기 직전 세네란이 왜 성직자나 마법사 앞에서 절대로 기술을 쓰지 말라고 했었던 것인지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좀 알겠니 엘드미아야? 이 이론을 기반으로 따져 보면 네가 펼친 기술은 마력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야. 신성력이 섞였거나, 신성력인 거지."
아주 아주 장황한 이론 공부 끝에 말이다.
솔직히 반도 제대로 이해 못했지만 내가 처한 상황 자체가 워낙 특수하다 보니 반강제적으로 납득한 것에 가까웠다.
"선생님 진도가 너무 빠릅니다."
"거짓말하지 마. 표정을 보아하니 얼추 감을 잡았구만 무슨. 하루 이틀 수업해?"
빽빽하게 글이 적힌 이동식 칠판을 닦으려다가 이내 귀찮다는 듯 옆으로 치워 버린 세네란은 목을 축이기 위해 다 식은 찻잔을 쭉 들이키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못미덥다는 듯한, 아니면 미심쩍다는 듯한 뉘앙스의 눈초리였다.
"예외는 없어. 확실히 너에겐 신성력이 개입해 있어. 인족이 마력을 쓸 수 있는데 신성력까지 개입한 상태다? 너도 이게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진도가 너무 빨라서 모르겠는데요."
"에이 씨, 내가 이거 다른 곳에 가서 떠들 거였으면 진즉에 떠들었지 미쳤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 그만 둘러대."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둘러대는 것도 한계였기에 난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조금은 만족한 세네란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신이 이런 식으로 축복을 내린 거지...?"
사실 마력과 신성력이라고 해서 즉각 마신이 떠오를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내가 마력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마신교는 마족령 내에서 아주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
용족도 마력을 쓸 수 있고, 악마들도 이 세계에 현신하기 위해 마력을 근간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마력 자체는 세상에 퍼져있는 공기와 같은 거다.
오히려 따지고 보면 마족과 박 터지게 싸우고 있는 인족에게 마신이 축복을 내렸다는 발상은 상식에 어긋난 망상으로 치부해도 이상할 게 없고, 그렇기 때문에 세네란은 내 상황을 단순히 '신의 축복'이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상식 밖의 경우이기에 고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 아무리 그녀라 해도 마신이 인족을 축복했다는 발상은 콜롬버스의 달걀 급인 모양이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해 줄 수도 없었기에 나 역시 침묵한 채 라이카가 쓰다듬을 뿐이었다. 조금 고민하는 척 하면서.
그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한참 전부터 입 다물고 계셨던 스승님이었다.
"...엘드미아의 고향 인근에 마신의 제단이 있었다."
나와 세네란 둘 다 놀랐다. 나는 우리 마을 인근에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에 놀랐고, 세네란은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놀란 듯했다.
"그걸 왜 지금 말해?"
"무엇을? 마족과 싸우고 있는 나라의 인족에게 마신이 축복을 내렸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미안. 듣고 보니 말했으면 노망이 들었다고 여겼겠네."
마법사 특유의 자유분방함인지, 아니면 진짜 스승님과 동년배인 것인지 세네란은 가차 없이 말한다. 정작 스승님도 이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지만 그럴 수록 내 안의 유교 드래곤이 나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든다.
쓰읍, 이제라도 조금 정중하게 대해야 하나? 같은 생각이 들 무렵. 턱을 괸 채 고민에 빠졌던 세네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가자!"
"예? 어딜요?"
"아니, 너 말고. 너는 곧 레비엥 원정에 참여한다며. 위드라, 어딘지 위치 기억하지?"
마신의 제단에 찾아갈 생각이 가득한 그녀를 바라보며 스승님은 조금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엘드미아가 다섯살 무렵일 때 조사를 끝낸 곳인데."
"다섯 살? 대체 몇십... 아, 맞다. 얘 이제 16살이었지. 10년이라... 애매한데."
나잇값 못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는 사람에게 뭔가 늙은이 취급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오묘했지만 워낙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어서 째려보기만 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그녀의 결심을 흔들리게 하는 것 같았지만,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다.
"딱 하나. 어쩌면 확인할 수 있는 게 있어. 가자."
이거 원정에서 돌아오면 출생의 비밀 같은 걸 알게 되는 건가...?
확신에 찬 세네란을 보며 나는 이 상황을 좋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불편하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한참 고민했다.
당연하게도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