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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엘드미아 에가를 건드리지 마라-403화 (403/412)

"여유롭구만."

노빠꾸 상여자라 해도 과언이 아닌 행동력을 선보이며 스승님을 이끌고 오그웬으로 향한 세네란 덕분에 졸지에 하루 일과 중 가장 큰 일정이 비어 버린 나는 간만에 늦은 아침을 맞이하며 침대 위를 굴렀다. 어김없이 달라붙는 라이카를 쓰다듬으며 만끽하는 여유였지만, 워낙 싸돌아다니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딱히 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하루 종일 빈둥 거릴 생각도 없었기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외출 준비에 들어갔다. 세네란이 떠난 뒤 벌써 나흘 동안 여유를 만끽했으니 오늘은 좀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그림자 발과 만날 수는 없었지만, 이야기를 전달 받은 그가 물약을 구해 우편으로 보내줬다는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자폭 성녀의 구슬 포션이 있다고는 해도 그건 상처의 경중을 따져가며 소량만 사용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기에 나에게는 매우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 외에도 이번 레비엥 탈환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전선에 있던 부대 일부가 수도로 귀환한다고 했던 게 오늘이기도 했던 터라 겸사겸사 셰릴과 함께 그들의 귀환을 구경하기로 약속했기에, 나는 조금 서둘러 준비를 마친 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티에의 커피 한 잔을 받아 마시며 집을 나섰다.

"엘디...? 도끼는 왜 들고 나가?"

"아, 발쿤 씨한테 좀 보여드려서 조언 좀 받으려고."

여유롭게 티에랑 차를 즐기던 아실리에는 내 대답에 불신에 찬 눈초리를 쏟아 내는 것으로 반응했지만, 그래도 방어구를 착용한 게 아니라 출근 복장인 것을 보며 납득했다. 새삼 고삐 풀린 망아지와 비슷한 입지가 되어 버린 것 같았지만 밖에 나가기만 하면 사건 사고였으니 그녀의 불신을 곱게 받아들이며 드워프 지구로 향했다.

말을 타고 나올까도 싶었지만, 나중에 셰릴과 다닐 때 귀찮아질 게 뻔했기에 그냥 조금 빨리 걸어서 도착한 드워프 지구는 겨울이 무색할 정도로 사방팔방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모험가들이 쉬기 때문에 드워프 지구도 비수기에 들어설 것 같지만 오히려 수선같은 주문이 한 번에 들어와서 훨씬 바쁘다. 평소에 꼬박꼬박 수선을 맡기면 좀 좋으련만, 절대다수의 모험가라는 것들은 수시로 점검하고 보수하는 것보다 아득바득 쓴 끝에 한 방에 몰아서 수리하는 게 더 싸게 먹힌다고 믿는 요상한 믿음을 지니고 있어서 이런 광경은 내가 수도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건 발쿤 씨의 공방도 다르지 않았다. 이제는 안면을 터서 익숙하게 인사를 건네며 안으로 들어서자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훨씬 많은 물량이 쌓여 있는 걸 보고 내가 다 질릴 정도였다.

정작 당사자인 발쿤 씨는 업무량보다 그의 기준에서 너무나도 조야한 수준의 물건들을 수리해야 한다는 게 더 고통스럽다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수도에 모험가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는데요."

"오크들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많이 몰렸지. 덕분에 아주 매일매일 바빠 죽겠어."

오크 게이트가 문제였군. 이에 적당히 납득하고 포션과 대금을 주고받는 동안 내 등에 걸린 도끼에 시선이 닿은 발쿤 씨가 흥미롭다는 듯 질문했다.

"그건 또 재밌는 무기로군. 이번 영웅담을 써내려가면서 구한 건가?"

재밌는 무기라니, 드워프라서 도끼만 봐도 즐거운 것일까.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도끼를 들고 방문한 건 오늘이 처음인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며 보여 주었다.

"영웅담이라니 과분한 표현입니다. 오크놈들이 대족장이라 부르던 카쿨라라는 놈이 쓰던 걸 뺏었죠. 원래는 켈바스트의 기사가 쓰던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허어, 그 기사라는 친구가 술 좀 마셨나보군. 하지만 실력은 별로였던 모양이야. 오크에게 뺏기다니."

"예?"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반문하자 발쿤 씨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도끼를 달라고 손짓했다. 이에 별 생각없이 건네주니 익숙하게 도끼 자루의 끝부분에 달린 부속품을 분리하여 내게 안쪽을 보여 주었다.

마치 거기에 뭐가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보여 준 곳에는 뭔가 알 수 없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드워프 어語일세. 마굴라즈 뷔랭이라 읽지. 인챈트에 좀 더 치중된 작품들을 만들던 장인인데 좀 옛날에 흙으로 돌아갔지. 무기의 날에 새겨진 특유의 무늬로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증명해서 아는 사람은 다 알아. 어디 보자... 견고함과 예리함, 이건...소유권과 관련된 술식이군. 기본기에 충실하던 사람다워."

그래서 그렇게 튼튼하고 손맛이 좋았던 건가?

소유권과 술식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몰라도, 당장 쓰는데 이상이 없고 발쿤 씨도 별 거 없다는 듯 반응하는 걸로 봐서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리라.

"무슨 인챈트를 새겼는지도 적혀 있습니까?"

"좀... 게으른 천재였거든. 드워프들은 보통 자신이 자신 있게 만든 물건에 뭔 짓을 했는지 다 기억하는 편인데, 이 양반은 그런 게 없었어. 대신 자기가 직접 보수해야 하는 일이 생길 것을 대비해서 이런 곳에 이름과 특징을 새겨뒀지."

다시 부속물을 단단히 끼워 맞춘 발쿤 씨는 이리저리 살펴본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내게 도끼를 돌려주려고 하였다.

"뭐, 워낙 잘난 인간이 만든 거라 오크놈이 썼는데도 문제는 없군."

"그... 술을 잘 마셨나보다고 하신 건...?"

"아. 자기랑 술내기해서 이긴 사람한테만 완성작을 줬거든. 으핫핫!"

참으로 놀라운 양반이로군. 덕분에 재밌는 걸 알게 됐지만, 그보다는 오늘 그에게 도끼를 보여주려고 했던 목적이 따로 있었기에 바로 받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그 도끼에 뭣 좀 추가하고 싶어서 온 거였습니다."

"추가? 그다지 추천하지는 않네만."

그 반응이 딱히 죽은 장인의 작품을 건드린다는 것에 부담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작게 안도했다. 반응이 안 좋았으면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었을 테니.

"다름이 아니라 마장금 좀 남는 거 있습니까?"

이번 전투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도끼에는 귀소본능을 새겨넣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다행히 바늘 제작자인 발쿤씨는 내 의도를 금방 이해했다.

발쿤 씨의 공방에서 용무를 마치고 도착한 약속 장소에는 이미 셰릴이 도착해 있었다.

"늦어."

며칠 전에 봤던 것처럼 왼쪽 어깨로 머리를 모아 땋은 탓에 뒤통수만 보였으면 못 알아볼 뻔했다.

"안 늦었거든."

하지만 얼굴을 보고 나서도 정말 셰릴이 맞나 잠깐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평소엔 아무리 추워도 움직임에 방해된다고 옷을 껴입는 것보다 털망토 하나 두르는 걸 더 선호하던 그녀였는데, 오늘은 간만에 외출이라고 나름 꾸며 입고 나왔기 때문이다.

원래 예쁘장한 애가 꾸며입으니 확실히 눈에는 잘 띄었다. 가만히 있어도 묘하게 화가 난 인상인 애라서 사람들이 알아서 피해간 게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 그랬으면 셰릴 뿐만 아니라 경비대하고도 마주해야 했을 테니까.

"그나저나 네가 이런 걸 같이 보자고 할 줄은 몰랐는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 우리 가문에서 차출된 기사들이 꽤 있으니."

그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기로군. 애초에 약속 시간을 병사들의 귀환 일정보다 일찍 잡은 상태였기에 우리는 괜히 밖에서 찬바람 맞으며 청승을 떨기보다 대로 주변에 있는 적당한 가게에서 몸을 녹이기로 했다.

제국만큼은 아니지만 왕성과 이어진 대로에는 그래도 격식이 있다고 할 만한 찻집이 있는 편이었기에 적당한 가게를 찾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게에 들어서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셰릴의 의자를 빼주는 식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이어가자 외투를 벗으며 자리에 앉은 그녀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능숙하네?"

"그럼, 열심히 일한 게 있는데 당연하지. 괜히 집사장님이 칭찬했겠어?"

노동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일할 때는 나름 즐겁게 일했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데 벌써 까마득한 추억처럼 느껴지는 기억을 되새기며 웃었더니 셰릴이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넌 집사가 아니라 기사가 될 수도 있었어."

"몇 번을 말하냐. 기사 교육은 3할 정도를 제외하면 내 삶에 쓸모가 없다니까."

차라리 어중간한 투구걸이나 생산하는 가문이었으면 몰라도 오가토르프는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기사 명문가다.

검술과 군사학을 익히고, 정치를 익히고, 교양을 익히는 등 정말 밥 먹고 씻고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걸 익혀서 정말 언제 갑자기 지휘관이나 귀족이 되어도 업무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교육을 거리낌 없이 베푸는 기사의 요람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

하지만 그건 최종적으로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교육이다. 홀로 나돌아 다니며 대접받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목표로 삼았던 나와는 거리가 멀다.

맹세컨데 나에겐 그런 교육보다 집사장님 옆에 붙어서 물자 관리하고 돈 계산하며 물가 파악하고 장사하는 사람들과 안면을 트는 게 백 번 이로웠다. 매번 볼 때마다 반복되는 이야기인데도 계속 저러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아쉬운 모양인데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으니 그냥 어린애 투정인 것 같아 웃길 따름이다.

"아니면 너랑 같이 기사가 돼서 왕국에 헌신이라도 해야겠니? 좆같다고 선임 목이나 안 따면 다행이지."

"...으으으음."

요상한 곳에서 설득력을 느낀 것처럼 반응하는 그녀의 모습과 아침에 나에게로 쏟아지던 아실리에의 불신 어린 눈초리가 오버랩되었다.

믿을 땐 또 믿어 주면서 이런 반응을 보이니 조금 섭섭할 지경이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딱히 섭섭할 자격따위 없었기에 종업원이나 부르기로 했다.

퍼레이드 예정 시간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았지만, 그마저도 예정에 불과했기에 케이크를 비롯한 다과도 추가하자 셰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잠깐의 기다림 끝에 나온 다과와 커피는 확실히 제국 아카데미에서 맛 보았던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게 단순히 제국과 왕국의 국력에서 오는 차이인지, 긴 전쟁의 여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날 무렵이 되어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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