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릴과의 외출을 끝마치고 돌아온 다음날.
예기치 못한 손님이 찾아왔다.
"엘드미아 님. 자신을 왕국군 은수리 여단 소속 책임자라 밝힌 여성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만, 혹시 약속을 잡으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제 슬슬 게으름을 벗어던지고 레비엥 탈환 작전을 대비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장비와 소모품을 재점검하는 걸로 하루를 보내려고 했었는데 뜬금없이 손님이라니.
심지어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부대 이름인 데다가 책임자라면 지휘관일텐데, 내가 아는 이들 중 여자 지휘관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쌩뚱맞은 이야기였다.
"...생전 처음 듣는 부대이름인데 왜 귀에 익을까?"
"은수리 여단은 마족 전선에서 활동 중인 부대입니다. 그리고 어제 수도로 귀환한 병사들이 소속된 곳이기도 하죠."
"아! 왕국 제 3군단 소속 은수리 독립전투여단?"
"맞습니다."
티에의 설명을 듣고 나니 기억이 난다. 분명 오가토르프 가문에 있을 때 자주 들려오던 부대였지. 군대엔 개뿔도 관심 없는 나조차 들어 봤을 정도로 유명한 부대다.
거의 전쟁 초창기부터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상대적으로 사상자도 적은 곳이라며, 지인이 보충병의 신분으로 전선에 가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라리 그곳에 들어가길 빌던 사용인이 있었지.
그 외에도 나름 오고 가며 들려오던 이야기의 주인공들 중 일부가 어제 만났던 그치들이라니, 세상 참 좁군.
"혼자 왔어?"
"예. 완전 무장이긴 했으나 따로 붙은 호위는 없었습니다."
완전 무장이 걸리긴 하지만, 어제를 떠올려보면 그냥 전장의 습관이겠지. 정신머리가 멀쩡히 박혀 있으면 따지러 온 게 아니라 사과하러 왔을 거다.
어차피 자주 마주하게 될 사람이니 좋은 인상이나 심어 줄 겸 만나 보기로 했다.
"잠깐 얼굴만 비추고 갈 거 같지는 않으니 일단 안으로 모신 다음 차 좀 준비해주겠어? 금방 내려갈게."
"차는 뭘로 준비할까요?"
"아무... 아니다, 커피로 해 줘."
전장에서 오래 머문 사람이니 차보다는 커피가 낫겠지.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티에를 보니 그녀도 비슷한 판단을 내린 듯했다.
간단하게 정리를 마치고 그녀의 뒤를 계단을 내려가자, 티에에게서 이제 막 커피를 받아 든 방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볍게 예를 취했다.
"은수리 독립전투여단 소속 란제라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불구하고 환대해주셨으나 군법 상 자세한 관등성명을 밝히지 못 하는 점, 사과드립니다."
첫인상은 '작다'였다.
나랑 비교하면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이 키가 작지만, 자신을 란제라고 밝힌 여성의 키는 잘해봤자 에스뮈에보다 10cm안팎으로 큰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에 띄는 외모인데 심지어 머리카락마저 보기 드문 숏컷이라 살짝 놀라고 말았다.
저런 걸 픽시컷이라고 부르던가? 여기사나 여자 군인들을 못 보고 산 건 아닌데 저렇게까지 짧게 친 사람은 처음 봤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오러가 느껴진다는 거였다. 에카프 경 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포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느껴지는 오러를 지녔으니 강자인 게 분명했다.
"알고 오셨겠지만, 엘드미아 에가라고 합니다."
"전장에 그대의 명성이 퍼지지 않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많은 공훈을 세우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먼저 인사를 드리게 되어 송구스럽습니다."
분명 어제 있었던 소란으로 인해 방문하신 것일진대, 내가 공공장소에서 휘하의 병사와 기사들에게 금품을 갈취했음에도 저렇게 저 자세로 나오다니.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어떤 목적으로 왔는지 너무 일목요연했기에 난 여유롭게 웃어 보일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군인의 의무를 다하고자 발생한 작은 소란에 불과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미 합의금도 받았으니 이렇게 사과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 중간 관리직의 고뇌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느낌상 내 말을 곡해해서 듣거나, 이대로 끝날 리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결국 우물쭈물 자리에 앉으면서도 부단히 부하들을 위해 이런저런 핑계를 입에 담는 그녀의 말을 적당히 받아주며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내가 정말 어제의 문제로 아무런 태클도 걸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해한 란제는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관대한 처우 감사드립니다. 비록 똥강... 크흠, 부족함이 많은 부하들이지만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인지라, 혹여 다른 문제로 불거질까 걱정했었습니다."
지금 똥강아지라고 말하려고 했던 건가? 왜소한 외모와 달리 군인은 군인인가 보다. 보아하니 평소엔 온갖 육두문자를 던져댈 것 같군.
어쨌든 무사히 분위기를 이완시킨 듯했기에, 나는 은근슬쩍 어제 궁금했던 내용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았다.
"물론 처음엔 조금 당혹스럽긴 했습니다. 다짜고짜 마족이라 의심받았으니 말이죠.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그 자리에 계시던 모든 분들이 같은 의견이신 것 같던데...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 그게... 미신같다고 여기실 수도 있습니다만..."
나름 잘 풀리고 있었던 분위기 속에서 뜨악한 반응을 보이길래 대체 왜 그러나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됐다.
무슨 마도구가 있는 건 아니고 단순히 전장에서 장기 복무한 이들 대다수가 얻는 감각이라고 한다. 오러나 살기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전부 다 느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레비엥 탈환 작전을 위해 동원된 이들은 나름 정예인지라 대부분 다 감각을 깨우친 상태라는 것이 란제의 설명이었다.
"완벽하게 들어맞는 건 아니지만, 전장에서는 그래도 별문제 없었기에 쉬쉬하며 지나가는 수준이었습니다. 근데 그게 수도에 와서 문제가 될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겠지. 실제로 마력 있는 놈이 인간 레이더에 걸릴 거라고 어떻게 예측하겠어. 아마 이 일로 얼차려라도 받았다면 더럽게 억울할 거다.
"과연, 전장에서는 직감도 중요한 법이죠."
"그, 그렇긴 하죠. 사실 이 감각 때문에 첩자나 몰래 뒷공작을 시도한 마족들을 적잖이 잡아내기도 했습니다. 녀석들도 실패보다 성공이 더 많다 보니... 좀, 자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거 자만 아닌데...
"말씀을 듣고 나니 새삼 궁금해지는군요. 전선에서 귀환했다는 엔벨데와 그 휘하의 기사들과 싸울 때도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보지 못했는데, 그런 능력을 얻는 데에 뭔가 조건이 있는 건가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 조건이 있다면 전장의 모든 군인들이 이 감각을 얻기 위해 조건을 맞추려고 아득바득 굴렀을 테니까요. 그들은... 그저 전장에서 너무 오래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감을 잃은 게 아닐까요."
그리 길지 않은 대화 안에서 참으로 많은 걸 알게 되는군.
'이' 감각이라고 말하는 걸 보면 이 여자도 어제 마주한 이들처럼 마력 탐지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고...전장에서 오래 벗어나면 감을 잃는다라.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일에서 오래 손을 놓고 있으면 감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전장에서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는 가볍게 넘겨 들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이번 레비엥 탈환 작전에 란제 님을 비롯한 다른 병사분들이 참전하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여러모로 든든하군요. 작전에 임하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한다 하심은...?"
"당연히 레비엥 탈환 작전을 말하는 거죠. 레비엥 변경백께서 원정에 동참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그러기로 했죠."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아하니 처음 듣는 이야기인가 보다. 뭐, 사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 같이 전장에 서게 될 동료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사탕발림을 던지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시도는 나름 성공적이었다.
◈
"시간을 할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정식으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마음의 짐을 한가득 내려놓게 된 란제의 인사에, 문 앞까지 마중을 나온 엘드미아는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하며 화답했다.
"원정날이 되겠군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하게 끝났다.
닫히는 문 너머로 사라지는 엘드미아를 바라보며 란제는 진심으로 그리 여겼다.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게 자신들이 아닌 상태로 이번 사건이 터졌다면 절대 이렇게까지 깔끔한 형태로 마무리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어제 하루 사이에 갈굼이란 갈굼은 다 당하고 강제로 엘드미아 에가라는 인물에 대해 주입식 교육을 받아버린 그녀가 내린 판단은 그랬다.
무려 암살 시도가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도 한복판에 위치한 귀족 저택을 흙발로 걷어차고 들어가 도륙을 낸 인물이다. 그럼에도 훈계방면과 다를 바 없는 가벼운 격리 끝에 멀쩡히 나온 걸 보면 정치적인 수완도 만만찮을 게 분명했다.
마음만 먹으면 의미를 곡해하고 꼬투리 잡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관대하게 넘어가 주는 것은, 그만큼 레비엥 탈환 작전에 진심이라는 뜻이겠지. 같이 싸울 병력과 척을 질 이유도, 사기를 깎아 먹을 이유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남자였다.
강하고, 머리도 쓸 줄 알고, 입지도 있다. 표면상으로는 방랑 기사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번 원정에 있어 큰 전력이 될 터였다.
"...쓰읍, 진짜네."
문제는 정말 묘하게 마족 느낌이 난다는 것 정도.
마음속 한 켠으로는 부하들이 단체로 헛다리를 짚은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엘드미아는 오묘한 마족스러움이 있었다. 수준급의 마족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족스러움이.
하지만 이미 모든 판단을 마친 란제는 그딴 건 좆도 신경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씨발, 수준급 마족만큼은 강하다는 거잖아.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돌아가서 부하 놈들 술이나 한잔씩 사줘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란제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흘러 기어이 원정날이 다가왔다.
"놀라우리만치 덤덤하군."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최종 점검을 마치면서 열심히 스스로를 돌아보았지만 역시 아무런 느낌도 없다. 긴장도, 고양감도 말이다.
하긴, 지금까지 질러놓은 사건들이 몇 개인데 여기서 긴장하면 그건 또 그것대로 웃기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아실리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걱정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진짜 이상한 행동하지 말고. 곱게 다녀와야 한다? 알았지?"
근데 어째 걱정의 방향성이 조금 미묘했다.
"아니 누나? 이상한 행동이라니? 남들이 들으면 오해..."
"뜬금없이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거나, 지휘관부터 친다고 몰래 성벽을 넘거나, 기습이 최고라고 혼자 야습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
"......"
"안 된다?"
차마 알겠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어떻게든 집요하게 대답을 얻어내려는 그녀를 뒤로한 채 집을 나서느라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뻔 했지만, 다행히 티에가 능숙하게 막아줘서 늦지 않게 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결국 포기하고 보내준 것에 가깝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 가 볼까 라이카."
[좋아!]
나는 신나서 뛰어 나가는 라이카를 보며 옷을 추스린 뒤 녀석과 함께 남쪽 관문으로 향했다.
지금쯤 한창 왕성 근처에서 출정식이 진행 중일 테지만 나하고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행사에 불과했다. 나는 어디까지나 공식 원정군이 아니라 지나가던 방랑 기사로서 레비엥 변경백에게 개인적인 도움을 주고자 합류하는 것으로 말을 맞춘 상태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실질적으로 모든 여행 비용을 내가 충당해야 하다 보니 말 사료 챙기기도 귀찮아 두 다리로 걷는 중이지만, 서부에서 엘프들과 걸어다니던 시간이 좀 길었던 게 도움이 된 건지 딱히 불편하진 않았다.
[근데 주인 돈 많잖아. 왜 그렇게 아껴?]
여행 전에 든든하게 마력을 먹여놓은 탓에 그럴싸한 어휘력을 발휘하게 된 라이카의 의문은 타당했다. 이번 서훈식 때 받은 포상금 같은 것도 있고, 서부에서 뜯은 돈도 있는데 큼직하게 돈이 나갈 법한 것들은 죄다 공짜로 받은 터라 집에는 꽤 많은 돈이 쌓여 있는 상태다.
발쿤 씨에게 부탁해 파란 포션 세 개를 샀음에도 기별조차 가지 않을 정도이니 나랑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보면 대체 뭐 하는 놈인가 싶을 정도의 재력이긴 하지.
"보통 움직이면서 돈 나올 구석이 있거나 빨리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면 쓰는데, 그런 게 아니면 아끼게 되더라고."
하지만 내가 돈이 많은 거랑 아낌없이 소비하는 건 별개다. 무슨 고정 수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은 어쩌다가 손에 들어온 큰돈이었으니까. 그런 건 아차하는 순간 금전 감각 상실하고 돈에 허덕이기 딱 좋으니 최대한 아껴쓰는 게 낫다. 괜히 로또 맞은 인간들의 결말이 자주 작살나겠어?
한참을 걸어 도착한 남문 언저리에서 원정을 떠나는 군대를 기다리는 동안 라이카의 궁금증을 해소시켜 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더니 점차 저 멀리서부터 시끌벅적해지며 인파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화려한 군대의 모습에 신이나 뛰어 다니는 아이들, 아침부터 거하게 취해서 마족들에게 본떼를 보여주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어른들, 또다시 전장으로 향하는 그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배웅하는 누군가. 그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업적을 세우고 왕국에 영광을 안겨줄 세기의 영웅들인 것처럼 포장하며 희망을 외치는 바람잡이 혹은 음유시인들.
그 모든 이들의 배웅 속에서 군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화려하고, 성대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이 역시 덤덤했다.
자그마치 7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어진 전쟁 속에서 제대로 시도조차 못했던 반격의 쐐기를 박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다. 라그니스는 이번 원정에 가문의 부활이 걸려 있고, 왕실 역시 민심을 장악하기 위한 큼직한 승전보가 필요한 상황.
희망밖에 느껴지지 않는 인파들과 달리 저들에겐 부담밖에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그럼 우리도 다시 움직여 볼까?"
[같이 가는 거 아니야?]
"맞긴 한데, 수도 내에서는 아니야. 좀 더 멀어진 다음 군대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전에 합류할 거거든."
다행히 군대의 행군은 느릿느릿하기 그지없어서 예정된 위치에서 합류한다는 계획에 차질은 없어 보였고, 실제로 수도에서 적당히 멀어지마자마 멀리서부터 나를 발견하고 접근한 레니사 경을 따라 자연스럽게 라그니스가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자기 혼자 출정식에서 도망친 영웅이 오셨... 뭐야, 말은 어쩌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대신 갑옷을 걸치고 군마를 타는 것을 선택한 라그니스는 자신을 호위하는 기사들과 쉬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처음엔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기습같은 것에 취약해지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말 안장에 걸어둔 기창과 방패 때문에 오히려 그녀를 호위하고 있는 기사들보다 더 기사 같아서 되려 안전해 보일 지경이다.
근데 이거 말을 어떻게 해야 하려나? 슬쩍 눈치를 봤지만 기사들은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긴 한데...
다행히 내 시선을 이해한 라그니스가 바로 해답을 내놨다.
"가문 사람들이야. 이미 알만큼 아니까 너무 큰 소리만 내지 않으면 편하게 말해도 돼."
"다행이네. 돈 아낄 겸 그냥 두고 왔어. 어차피 걷는 것도 익숙해서."
내 적당한 대답에 라그니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요즘 셰릴도 그렇고 아실리에도 그렇고 저런 시선을 보내는 일이 잦아진 거 같단 말이지.
"...말 있으면 기병으로 편성될까 싶어서 두고 온 건 아니고?"
"오?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개인적인 친분으로 합류한 방랑 기사까지 기병대에 편성할 일이 생길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내 진심어린 감탄에 라그니스가 눈에서 힘을 풀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군마 한 필 줄까?"
"방랑 기사는 그냥 방랑 기사로 있겠습니다 백작님. 그보다 계획이나 대충 알려 줘."
이번 원정은 엄연히 군사 계획이라서 라그니스에게 미리 들은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아는 정보라고는 레비엥 변경백령이 상대적으로 고지대에 위치한 요새 도시였다는 것과, 마왕군이 점령한 뒤로 한층 더 보강했다는 것 정도. 물론 오러와 마법이 판 치는 세상인지라 그것만으로 난공불락의 거점이 되는 건 아니지만 거기 있는 마왕군이 공격하는 우리보다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사실은 전생과 똑같다.
내가 병사들과 함께 우라 돌격을 할 가능성은 적겠지만 최소한 방해는 되지 않아야 하니 지금이라도 조금은 들어두고자 던진 질문에, 라그니스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왕실에서 모은 정보에 의하면 마왕군이 썼던 방법으로는 탈환하기 힘들 거라고 해. 꾸준히 방해 공작을 시도했지만 이미 보강을 마친 상태라고 하더라고. 구체적인 건 거기에 도착해서 확인하게 되겠지만, 지휘관의 말로는 추가적인 정보가 없을 경우 전통적인 방식으로 싸우게 될 거 같다고 하더라."
참고로 여기서 라그니스가 말하는 '전통적인' 공성전은 전생과는 조금 다르다.
가장 일반적으로는 공성추로 문을 박살 내는 방법을 애용하는데 그걸 끌고 가는 게 일반 병사가 아니라 오러 유저들이거든. 한번 오가토르프 가문에서 기사들이 종자들에게 시범 보여주는 걸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열댓 명이 달라붙어서 달리니 무슨 덤프트럭이 달리는 듯한 위용을 뿜어내더라.
그 외에도 마법으로 성벽 위를 쓸고 시작하려 한다든지, 그걸 막기 위해 서로의 술식에 개입하는 과정만 30분 넘게 반복하는 수싸움이 이어지기도 하는 등, 인력 풀만 확실하다면 공성전도 최소한의 피해로 마무리짓는 게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상대가 마족이니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결국은 가서 고민해야 한다는 거네."
소설같은 거 보면 뭐 성벽의 허점을 파악해서 일망타진하네 뭐네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던데, 역시 현실은 가혹한 법이었다.
"나중에 야영할 때 지휘소에서 약식으로 회의를 진행 하기로 했으니, 그때 뭔가 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지. 어차피 안면도 터야하니 같이 가자."
"그래야겠네. 아, 지휘관 이름은 뭐야?"
"알트 켄체 라는 분이었어. 귀족은 아니라던데 전장에서는 유명한 모양이더라. 스승님도 이름을 들어봤다고 하시고."
"아하, 전쟁 영웅이로군. 그러고 보니 라드넬반데스 경이 안 보이네. 그 지휘관이랑 대화 중이신 건가?"
"맞아. 본격적인 공성전에 들어가면 마법사 하나가 아쉬워지니까. 도움을 요청했거든. 같이 이동하면서 계획 구상 중이지 않을까?"
그랜드 배틀 메이지라 불리는 라드넬반데스 경이 참전해도 확신을 가지고 무지성으로 공성전에 임할 수 없는 건가. 그 어르신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강할 텐데.
"전쟁은 어렵구만."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너 오크들한테 전쟁신이라고 불렸다며."
그건 또 어디서 주워 들은 거야? 저 이야기만큼은 흘려듣기 힘들었는지 묵묵히 딴 곳을 바라보던 호위 기사들의 시선이 살짝 내게로 쏠렸다가 다시 흩어졌다.
"내가 잘나서 그런 소리가 나온 게 아니라 오크들이 무식해서 그런 소리가 나온 거지. 내가 잘하는 건 어디까지나 쌈박질에 불과해."
그마저도 이젠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굳이 그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나마 이번에는 적도 마력을 쓰고 있으니 강약을 구분할 수는 있을 거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무난하게 라그니스와 합류했다고 여기는 엘드미아의 주관과는 달리 부대는 알게 모르게 시끌벅적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행군 도중에 마주친 행인에 불과한 줄 알았던 사람을 느닷없이 변경백의 가신이 달려와 데려갔는데 어찌 조용할 수 있을까. 별다른 소란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그저 숙련된 병사들 나름대로의 통제된 혼란에 불과했다.
"엘드미아 에가? 그게 누군데?"
그나마 그 의아함이 해소될 수 있었던 건 병사들 사이에 섞여 있던 변경백 쪽 사람들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막 전장에서 올라온 이들에겐 생소하기 그지없는 이름이었고, 한참을 걸어서 야영을 하게 된 뒤에야 정체불명의 방문자에 대한 정체가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했다.
"지랄, 소설을 쓰고 자빠졌네."
냉소적인 반응도 함께 퍼진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든 퍼지기는 했다.
"그 업적들이 죄다 진짜라고 쳐도, 뭐? 그 덩치에 올해로 16살이라고? 게다가 제국이랑 왕국의이름으로 방랑기사가 돼? 아주 용사도 이겨 먹는다고 하지 그러냐."
"씨벌, 왜 나한테 지랄이야."
"소문을 주워 와도 좆같은걸 주워 오니 욕이 안 나갈리가 있나."
병사들의 행군은 굉장히 빨랐지만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각자 소대 별로 뭉쳐서 자리를 잡고 모닥불을 피운 뒤 잠깐의 휴식을 만끽하며 식사하던 이들은 되도 않는 이야기를 듣고 와서는 득의양양하던 동료를 갈구며 낄낄 거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려 했다.
하지만 평소 헛소문만 물고 온다해서 팔랑귀를 넘어서 빡대가리 소리를 듣던 병사도 오늘만큼은 자신감에 넘쳤다.
"아니, 진짜라니까? 이거 기사님들이 나누는 이야기 주워 듣고 온 거라고."
"기사님?"
"그래 씨발. 저번에 한밤중에 란제 대대장 지랄했잖아. 기억 안 나?"
은수리 독립전투여단에서 '발톱'대대의 미친 다람쥐가 자다말고 똥을 밟았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수틀리면 여단장 앞에서도 짝다리를 짚는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앞뒤 안 가리는 광기의 다람쥐가 밤이 내린 연병장에서 목청껏 쌍욕을 박으며 제 휘하의 중대장을 비롯한 일부 병사들을 갈구기 시작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몰래 구경하러 간 놈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사실 군대에서 갈굼이란 어딜 가나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와도 같은 것이고 그녀가 쌍욕을 박는 것 역시 그들에겐 소소한 일상에 불과했지만, 그 이유가 건드리면 안 되는 인간을 건드려서라는 건 희대의 대사건이었다.
부대 내에서 가장 그딴 짓거리를 많이 하는 게 누구냐고 투표에 들어가면 미친 다람쥐 란제가 순위권에서 놀 게 분명했기에.
"...그럼 진짜라고?"
그게 왜 진짜일 수 있지? 예기치 못한 정보에 모두 입을 다문 사이 화제의 주인공이 변경백을 따라 지휘소로 향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는 상대평가로 인해 한층 더 반 토막이 난 것처럼 보이는 란제 대대장이 함께하고 있었고, 병사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이 지휘소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다가 다시금 서로를 바라보았다.
"미친. 변경백은 대체 뭘 데려온 거야...?"
욕지기가 나오는 것과 달리 그들의 입가엔 묘한 미소가 번졌다. 소문이 진짜라면 어마무시한 전력이 추가된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웃음 밖에 안 나왔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그 소문이 전부 진짜겠냐. 그런 놈...분이 뭐가 아쉬워서 방랑 기사를 해?"
"새끼 이거 쫄았네."
"그 소문의 반이 아니라 하나만 사실이어도 쪼는 게 정상이지."
간만에 재밌는 이야깃거리가 생긴 것과 더불어 꽤 유용한 전력이 되어 줄 수 있는 인재가 참전한다는 사실에 흥미가 동한 병사들은 그 뒤로 전장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엘드미아에 대한 이야기로 열을 올렸다. 군기가 흐트러진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긴장해서 꼼짝도 못 하는 것보다는 나았기에 대부분은 그런 분위기를 용인해주었다.
실제로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있었다. 변경백의 이름 아래 모인 신출내기 병사들은 태연하기 그지없는 베테랑들의 분위기에 휘둘려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으니까.
고지대에 위치한 도시의 육중한 성벽 위에서부터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을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염구와 화살은 묘하게 비현실적이었다.
물론 성벽을 향해 날아가는 투석기의 거대한 바위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신참 병사는 이내 불합리함을 느껴야 했다.
바위와 화염구들은 목표에 닿기도 전에 터지고 박살 났지만 그 잔해를 비집고 튀어나온 화살들은 말 그대로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기에.
"이 새끼들아! 방패 들어!!"
우렁찬 외침에 화들짝 놀란 병사들이 방패를 치켜 들기가 무섭게 화살이 박혔다.
"오 씨발 신이시여, 신이시여..."
"이 새끼야! 그렇게 들면 내 대가리도 못 막겠다! 신 찾을 시간에 바짝 들어!"
미친 다람쥐 란제가 제 몸만 한 쇠몽둥이를 어깨에 걸친 채 산책하듯 병사들 사이를 걸어 다니며 윽박질렀지만 마족과의 전투를 처음 겪는 병사들은 그마저도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후방에서 분명 마법사들이 술식 싸움을 걸고 있다고 들었는데 날아드는 화염구는 그칠 줄 몰랐고, 화염구들이 마법 방벽에 부딪쳐 터져 나갈 때마다 병사들이 사기와 용기도 팍팍 터져 나갔다.
그렇게 너저분해진 이들에게 쐐기를 박는 건 쏟아지는 화살 세례였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막기 위해 두 손으로 방패를 바친 채 버티던 한 병사는 방패를 뚫고 튀어나온 화살촉에 눈이 찔릴 뻔 하자 기겁을 하며 뒤로 자빠졌다.
아니, 자빠질 뻔했다. 즉시 양옆에 있던 고참들이 잡아주지 않았으면 방진에 구멍이 뚤렸을 상황이었다. 위급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 욕먹을 걱정부터 하던 병사를 바라보며 고참들은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얌마, 그렇게 들면 화살에 맞아 죽는 게 아니라 다람쥐 꼬리에 맞아 죽어. 정신 차려."
"방패 넘겨! 이쪽 방패 구멍 났다!"
목소리는 우렁차지만 아무도 당황하지 않는다. 신참은 그 모습에서 저도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이들은 이런 전장에서 수 년간 살아남은 이들이었으니, 말하는 대로 움직이면 충분히 살 수 있을 것만 같...
"숙여!"
란제의 외침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두가 몸을 숙였다. 철저하게 학습된 반응을 따라가지 못한 일부 병사들은 주변의 고참병들이 온갖 방법을 이용해 자빠뜨렸다.
그와 동시에 군대의 머리 저 위에서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주문 간섭을 통해 불발한 마법이 터져 버리며 불티가 휘날렸고, 동시에 적들의 공세도 잠깐 주춤거렸다.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거병으로 바닥을 내려친 란제가 외쳤다.
"똥개새끼들아!! 좆박을 시간이다!!"
저속하기 그지없는 명령에 맞춰 군대가 갈라지며 신전의 기둥으로 써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 공성추를 든 기사들이 튀어나왔다.
"달려라 좆대가리 중대!!"
"개 같은 보직에 개 같은 별명같으니!"
"이게 다 대대장 때문이야!!"
바퀴조차 달리지 않은 공성추를 오롯이 근력으로 짊어진 채 스무 명의 기사들이 전장을 달려 나가는 것만으로도 바닥이 파여나간다. 오러를 최대한 끌어모은 그들의 질주는 기병대의 돌격과도 같은 위용을 자랑했고, 성벽을 지키던 마족들을 다급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빌어먹을! 마도부대! 바닥이다! 바닥을 갈아버려!"
성벽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마족 지휘관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어김없이 주문 간섭이 들어왔다. 이미 몇몇 마법사들은 코피까지 쏟아가며 주문을 외웠지만, 가장 인접하게 적중한 주문마저도 달려오는 공성추를 방해하지 못했다.
콰드득! 거리는 소리 함께 바닥에서 솓아난 종유석같은 바위를 지나치며 한바탕 웃어제끼는 기사들을 보며 이를 간 마족 지휘관은 성벽 아래를 향해 외쳤다.
"쪽문 열어!"
저 무식해 보이는 공성추 전술은 원래 마왕군의 전매특허였기에 마족 지휘관은 주저 없이 가장 확실한 차선책을 선택했고,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마왕군이 점령한 뒤로 개조당한 성문 한 켠의 문이 열리며 거대한 방패를 든 병사들이 뛰쳐나갔다.
그들은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타워 실드 하나만 챙겨든 채 달려나갈 뿐.
기사들과 싸울 것도 없이 가속도가 붙은 저 무식한 돌격만 멈춰 세우면 공성추는 한동안 쓸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시도한 선택이었다.
"들이 받...아?"
하지만 결사의 각오로 뛰쳐나온 마족 병사들을 맞이한 건 어떻게든 공성추를 사수하려는 기사들의 응수가 아닌 도주였다.
"역시 안 통하는군요."
"피해는?"
"전무합니다. 거리도 거리였고, 숙련병들이 훨씬 많아 화살로는 피해가 안 생겼습니다."
그 광경을 지휘부에서 바라보던 중년의 남성이 다른 지휘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이 모든 광경을 함께 보고 있던 엘드미아는 경악하고 있는 라그니스 쪽으로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했다.
"저게 마족들이 시도한 방법이었어?"
"...맞아. 우리는 저런 쪽문이 없어서 그대로 외성이 뚫렸었지."
겨우, 저 쪽문이 없어서.
경악은 어이없음으로, 어이없음은 억울함을 띈 무언가로 변하는 걸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엘드미아는 전장을 바라보았다.
영락없이 이세계 공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은 마왕군으로 인해 전파된 신개념 공성전이었다는 게 적잖은 충격이었지만, 그 외에는 아직 문제가 없어 보였다.
저쪽이 공선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레비앵을 점령했으니, 이제는 이쪽에서 새로운 방법으로 레비앵을 탈환할 차례였다.
"벽 좀 타야겠군."
서부에서 미리 예행 연습을 할 수 있었던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중얼거리는 그의 한마디를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은수리 독립전투여단의 지휘를 맡고 있는 알트 켄체는 말단 병사에서부터 지휘관까지 올라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전쟁 전부터 군인이었고, 나쁘지 않은 속도로 승진하다가 마족 전선에 서면서 고참은 죽고 본인은 살아남아 공훈을 세우는 것을 반복하며 일궈낸 성과였다. 애초에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기에 딱히 명예롭다고 느낀 적은 없었으나, 열심히 살아왔다는 자부심은 있었다.
그런 과거 때문인지 그는 꽤나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편이었다. 병사들 사이에서 미친 다람쥐라고 불리는 란제의 하극상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용인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명령을 무시하면 문제였겠지만... 명령을 성실히 이행하고 제 할 일을 완벽하게 수행해내며 오래 살아남는 능력 있는 지휘관이라는 건 아티팩트만큼 귀중한 자원이었기에 일종의 성과금이라는 느낌으로 무례를 용인하는 그였다. 실제로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오히려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엔 조금 경우가 달랐다.
'혹시... 내가, 늙은 건가?'
이제 마흔을 바라보고 있는 그였지만 늙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실제로 그의 부하들 중에서는 오히려 자신보다 더 나이가 든 이들도 있었으니까.
그저 레비엥 변경백이 데려온 방랑 기사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말도 안 된다는 생각과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동시에 치고 올라온 탓에, 혹시라도 자신이 너무 고착화된 시각으로 전장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싶은 불안감이 엄습했을 뿐이다.
전장에서는 상상력이 부족한 녀석부터 죽는다. 그리고 그게 지휘관일 경우 죽는 건 부하들이다. 만에 하나 지금 자신이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스스로의 지휘 능력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슬쩍 눈을 굴려본 알트는 주변의 반응도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다행스럽게도 방랑 기사가 미친 소리를 한 게 맞는 듯했다. 바로 며칠 전에 왕실의 이름으로 훈장을 수여한 인물이 미쳤다는 사실을 과연 다행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나간 소리입니다. 변경백께서는 정말 이런 의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신 겁니까?"
이번엔 정말 다행이었다. 도무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침음을 흘리는 사이 조금 성질 급한 부하가 먼저 나서줬으니.
하지만 부적절한 발언이었다. 알트는 미간을 찡그리는 레비엥 변경백과 눈이 게슴츠레해지는 방랑 기사 중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기 전에 탁자를 살짝 치며 입을 열었다.
"레이널, 무례하다."
어리다 해도 변경백이고, 이 전쟁의 명분이고, 허울뿐이라고는 하나 대외적으로 총사령관이었으며, 이후에는 왕실에서 원하는 영웅이 되어야 하는 여자였다. 아무리 은수리 독립전투여단이 특수한 위치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하위 귀족인 연대장이 감히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무엇보다 방랑 기사가 옆에 붙어 있다.
작전에 임하기 전에 왕실에서 받은 보고서에 의하면 레비엥 변경백의 명예에 대해서는 꽤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반역자 엔벨데가 암살을 시도하자마자 역으로 습격해 저택을 초토화 시킨 인물. 보고도 믿기 힘든 그의 행적을 기록한 끝에 적힌 경고는 단순했다.
-아군이 아니라 적의가 없는 용이라 여기고 행동할 것. 명분만 주지 않으면 대체로 무해함.
무려 '용'이라는 표현까지 쓰인 경고는 그러려니 해도, 명분을 안 주면 대체로 무해하다는 건 무슨 의미인 걸까. 몇 번을 되새겨보았지만 정치 놀음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던 탓에 쉬이 감이 잡히지 않는 경고를 떠올리며 알트는 손을 거뒀다.
"예를 갖추지 않으면 내보낼 테니 발언에 주의하도록."
"...실례했습니다."
말과 달리 레이널이 어금니를 즈려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당장은 이걸로 충분한 듯했다. 다시 돌아본 변경백과 방랑 기사의 표정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두 분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실 표현만 온화할 뿐이지 저희의 의견도 레이널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연대장들 사이의 유일한 대대장인 란제만이 '전 아닌데요?' 라는 표정을 지으며 반박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알트의 대답에 잠시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바라보던 레비엥 변경백이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유가 뭐죠?"
"검증되지 않은 전술로 병사들을 위기에 빠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신한 전술이 역전의 발판이 될 수 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것'과 '아무도 시도할 가치를 못 느낀 것'은 별개다. 근데 이건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했지만 듣자마자 시도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계획이었다.
성벽을 타고 달려 올라간다니. 그것도 혼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란제조차 그런 만용을 부리지는 않았다.
'...아닌가? 부렸던가?'
워낙 많은 전투를 겪어 살짝 불확실한 기억을 곱씹고 있었더니 이번엔 방랑 기사가 입을 열었다.
"검증 됐다면?"
모두의 시선이 쏟아졌으나 그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었다.
란제의 보고대로 묘하게 마족의 느낌이 나는 남자는 존재만으로도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연대장들은 자신들의 오러를 내비치는데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다.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바로 검을 뽑겠다는 무력 시위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고, 어지간한 기사조차 마주하고 있다보면 시비 거는 거냐고 따지거나 기가 죽는 수준이었으나 남자는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 하는 것처럼 심드렁할 뿐이다. 오히려 아까부터 눈초리가 영 좋지 않은 레이널과 눈을 마주치더니 뭘 꼬라보냐는 식으로 미간을 찡그리기까지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오러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넷이나 두고 쉽게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대체 남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이길래 이러는 건지 감을 잡지 못한 알트는 일단 그의 말을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실제로 이 방법을 이용해 성벽을 무력화 시켰단 말이오?"
"서부 왕국 지대의 칼다르 왕국에서 멕켈린 백작령을 상대하면서 쓴 방법입니다."
방랑 기사의 대답에 레비엥 변경백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뭔가 표현이 좀 이상하지 않았나? 백작'령'을 상대해?
또 한 번 사고가 멈출 뻔 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알트는 침착하게 되물었다.
"전쟁에 참여했었소?"
"결투였습니다."
"...그, 멕켈린 백작이라는 자와?"
"목적은 그였으나, 여러 이유로 인해 백작령 전체를 상대로 결투를 신청했습니다. 당연히 성벽 밖에서부터 치고 들어가야 했고, 말씀드린 방법은 그때 직접 써 본 방법입니다."
지금 장난하는 건가?
"지금 장난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우릴 놀리는 건가?"
순간 속마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왔나 싶었던 알트는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진 레이널이 움직이는 걸 보고 나서야 방금 발언이 그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으나, 이번엔 그의 무례를 지적하기엔 들은 이야기가 너무나도 충격적이라 정신이 혼미했다.
다른 연대장들조차 방랑 기사의 발언을 레이널처럼 모욕이라 여기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모두(란제는 이번에도 여기서 제외되었다.)의 표정이 덩달아 안 좋아졌지만 방랑 기사는 여전히 당당했다.
"전장에서 농이나 던질 정도로 한가하지 않습니다. 뭐가 문제입니까? 여러분들에게 하라는 것도 아니고, 병사들에게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이행하고 여러분들은 그 뒤 예정된 전술을 이행하면 끝나는 문제 아닙니까?"
"하, 하! 전장을 우습게 보는 건가? 멍청이 하나가 날뛰어 깎아버린 사기로 전세가 뒤집힐 수도 있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비약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슬픈, 전선에서는 의외로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물론 진짜 멍청이가 날뛰어서 생긴 문제보단 의지하고 믿고 있던 강자가 허무하게 죽어버려 사기가 바닥을 찍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실제로 레이널은 그와 비슷한 사건으로 휘하의 대대 하나가 궤멸할 뻔 한 적도 있었기에 누구보다 예민한 편이었다. 그로 인해 진형에 구멍이 나 전세가 뒤집힐 뻔한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침묵으로 레이널에 동조했고 지휘소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하지만 방랑 기사는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웃기까지 했다.
"글쎄요. 전장을 우습게 보는 건 모르겠는데 사기를 깎아 먹는 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여러분만큼이나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댁이라면 듣도보도 못한 미친놈 하나가 느닷없이 도시를 상대로 결투를 걸고 성벽을 타고 넘어 기사의 목을 따고 손 닿는 족족 병사들을 토막 냈는데 사기가 멀쩡했을 것 같습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유추할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말하는 듯한 비아냥거림. 이에 레이널의 이마에 핏줄이 서며 삿대질을 위해 손이 올라갔다.
"그딴 거짓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