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방이 감시자 >
헉헉-
나는 가쁜 숨을 한껏 몰아쉬며 열심히 달렸다.
호텔 주위에 설치된 산책로를 따라, 숨이 막힐 때까지 계속해서 질주하고 또 질주했다.
‘1,000야드만 더!’
다들 가슴이 답답할 때가 있을 거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력으로 달린다.
그러면 가슴 한편에 앓고 있던 무언가가 탁 풀리는 기분이 들곤 했으니까.
‘아······ 날아갈 것만 같아.’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달리는 것은 정말이지 좋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느낌.
컥-
하지만 모든 것에는 다 정도가 있는 법.
페이스를 많이 오버하자 몸에 이상 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군악대가 연주하는 것처럼 심장이 쾅쾅 미칠 듯이 뛰고, 숨이 콱 막혀 갔다.
“하······.”
더는 무리라 여겼기에, 나는 달리던 것을 잠시 멈추고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전력으로 질주한 탓에 힘이 쭉 빠졌다.
나는 즉시 양손과 양다리를 모두 벌리며 대(大)자 형태로 바닥에 누웠다.
‘힘들어 죽겠네.’
무념무상으로 달리며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었는데, 움직임을 멈추니 잊고 있던 현실이 다시 다가온다.
뭔지 모를 답답함이 내 가슴 한편을 조인다.
‘나에게 이런 일이 왜 벌어진 걸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하필 나에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사십여 년의 세월.
남들보다 평범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일주일 전, 나에게 엄청난 일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꿈인가 했지.’
생각해 봐라.
내 몸이 아닌 남의 몸에 빙의한다고.
동시에 과거로 시간여행까지 한다고.
당신의 기분은 어떻겠는가?
둘 중 하나만 경험해도 신문에 대서특필될 일이었건만.
지금 나는 이 모두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으······ 다리에 쥐가 왔나? 오늘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지금 나는 꿈을 꾸고 있지 않았다.
분명, 현실이다.
이렇게.
페이스를 오버할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수반되고 있지 않나?
꿈이면 이렇게 생생할 리가 없을 터.
잔디에 누워 있다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동경의 전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원래 내 몸은 어떻게 되었을까?’
마지막 기억을 회상했다.
삑삑-
그래.
맞아······.
재난 문자 알람으로 시끄러웠었지.
‘그 후 사방이 흔들렸다.’
땅바닥이 엿가락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지진이 도쿄를 덮쳤어······.’
입법 로비를 위해 사업차 일본으로 출장을 갔는데, 하필이면 그때 자연재해가 열도 전역을 강타했다.
난카이 대지진(南海 大地震)이 도쿄 중심부를 가르며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한 것이다.
‘잠잠했던 후지산 역시 활동을 시작했지.’
이젠 꼼짝없이 죽겠다고 체념했다.
무너진 호텔 잔해에 깔려 신음했지만, 아무도 구하러 와 주지 않았으니까.
‘두려움에 떨다가 잠시 눈을 붙였는데······.’
하늘이 날 도왔는지, 원래 묵던 그랜드 호텔에서 다시 깨어났다.
하지만 이내 난 절망에 빠졌다.
깨어났던 곳은 내가 있던 원래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뭐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보다······.’
산책로를 따라 달리다가 잔디에 눕는 과정에서도, 나는 쉬지 않고 열심히 눈알을 굴려 댔다.
습관이란 게 무섭다고.
평소 주변을 자세히 관찰하던 버릇이 또 튀어나온 거다.
‘곳곳에 CCTV가 달린 기분이야.’
집마다 있어야 할 TV도 없는 이 시대.
거리엔 가로등도 별로 없다.
하지만 나는 계속 CCTV가 가득한 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이놈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죄다 나를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좌측에서 몸을 풀고 있는 남자도.
정면 벤치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는 척하는 신사도.
호텔 로비에서 손님들을 카페로 안내하는 직원도.
모두 다 나를 흘깃흘깃 바라보며 내 일거수일투족을 은근슬쩍 관찰한다.
이 몸으로 생활한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움직일 때마다 이 녀석들은 집요하게 나를 따라오곤 했다.
‘유심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야.’
저기.
방금 나를 지나쳐가는 노인만 해도 그렇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척하지만, 오늘 아침엔 내 옆자리에 앉아서 조식을 먹었고.
어젯밤에는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근처로 와선 먹지도 않는 술을 시키지 않았던가?
‘이게 과대망상이라면 좋겠지만······.’
로비스트로 활동한 지 어언 십 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나는 프로 로비스트로 밥을 벌어먹었다.
그간의 짬밥이 있기에, 나는 확신했다.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한다는 건, 역으로 나의 움직임 역시 관찰당할 수 있다는 소리지.‘
경쟁업체 직원이 어떤 이익집단을 만나고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조사하는 건 이 업계의 필수 덕목.
그렇기에 나는 CIA 수준은 아니더라도, 누가 나를 따라오고 나를 조사하는지를 대충 눈치챌 수 있었다.
“의왕 전하.”
저 멀리서 누군가가 다가온다.
의왕이라는 왕호를 써 대며.
’신기하게도 왕이라 불린단 말이지. 왕자인데······.‘
빙의된 몸뚱이는 왕가의 피가 흐르는 왕실의 혈족이었다.
문제는, 일본의 왕자가 아닌 조선의 왕자라는 거다.
대륙 진출을 꿈꾸고 있는 일본으로선, 나는 요주의 감시 대상일 것이다.
아까 내가 저들을 감시자라 생각한 것도 이 특별한 신분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일본 고위 관료였으면, 그리 지시했을 테니까.
“······말하라.”
이마의 흥건한 땀을 닦으며 일어섰다.
그 후, 날 따라온 가신에게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다음 약속을 위해 이만 객실로 돌아가심이 어떠십니까?”
조선인 사내가 시계를 보며 내게 재촉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똥 치울 시간이다.
내가 싼 똥이니 내가 치워야 한다.
‘후회된다.’
조선 왕자의 몸에 빙의된 후, 이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소란을 좀 피웠다.
지금 장난하냐고.
세트장에 납치해서 몰카 찍는 거냐고.
너희들 외계인이냐고.
지금 시기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를 써 가며 난동을 부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남의 몸에 빙의된 것도 믿기지 않는 일인데······ 과거로 오기도 했다는 걸 누가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
하-
일주일 전, 그때를 회상하니 머리가 또 지끈거린다.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원래 내가 머물던 객실로 천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의왕 전하. 밖에 있는 손님들을 안으로 들이겠습니다.”
“그래.”
내 앞으로 나이가 지긋한 서양인 한 명과 일본인 한 놈이 다가왔다.
“이자는······.”
“기억나십니까? 외신은 사카모토라 합니다.”
일본 측 정부에서 나온 놈.
표면상 목적은 나를 편의를 봐주라는 것이지만······.
본 목적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아, 저기 서 있는 서양인은 동경병원에서 신경정신과 쪽을 진료하는 의사입니다. 베이크 박사라고 불리지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왕자님.”
“잘 부탁드리오. 박사.”
싸지른 똥을 수습하는 과정은 의외로 간단했다.
의원하고 열심히 면담 한 번 하는 거다.
“왕자님.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예. 뭐부터 이야기해야 합니까?”
미국에서 살았을 때, 이런 검사를 여러 번 했었다.
로비스트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직업.
정신과 진료와 뗄 수 없는 관계기에 제법 경험이 많았다.
“편하게 이야기하십시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환자와 의사 외에 듣는 귀가 제법 많다.
“저흰 잠시 물러가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어차피 이 방에서 나눈 이야기는 저놈 귀에 들어가겠지만.
일단은 내가 당장 불편하기에 속히 일본 관료를 내 방에서 떠나보냈다.
“흠흠. 어떻게 된 일이냐면······.”
방에 베이크 박사와 나, 단둘만 남게 되자 나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난 일주일 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름대로 이유를 포장까지 하며 의사에게 말한 거다.
“지난날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것 같네. 더욱이 그날 전날 미국에서 읽었던 소설을 회상하며 공상에 몰입했지. 그래서 그 사달이 난 것일세.”
나름대로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나의 지난 행동을 본 일부는 내가 반쯤 정신이 나갔다 여길 테지.
지금 내 앞에 있는 놈만 해도 그렇다.
내과 의사가 아닌 신경정신과 의사가 오지 않았나?
“그러니까, 한마디로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 거네.”
자신의 존재를 까먹고.
여기가 몇 년이니 헛소리한 것은 다 술주정이라는 말.
이에 의사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례는 생각보다 흔합니다.”
응?
반응이 왜 이래?
“흔하다?”
이런 발언을 한 놈이 있다고?
나의 물음에 베이크가 답을 했다.
“예. 제가 미국에서 의사로 일할 때 이런 사례를 많이 봤습니다.”
“그래?”
“왕자님과 조금 다른 소동을 벌였지만, 궤는 같다 볼 수 있지요.”
베이크 박사의 경험담에 따르면······.
부잣집.
더 나아가 유럽의 왕족들이 미국에 유학을 왔을 때 더러 이런 어려움을 호소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국에서 대우받던 귀족 자제들이 타국에서 일반인 취급을 받게 되면 속에서 화병이 일어난다는 말이지?”
“제 말은 정확히 그런 뜻이 아니지만, 왕자님께서 그렇게 해석하신다면 뭐······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 맘대로 못 하니까 마음에 병이 생긴다는 거다.
결국에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고.
‘향수병이란 소리를 돌려 말하는군.’
향수병은 다양한 형태로 그 병세가 나타나는 모양이다.
익히 아는.
극심한 우울감을 보이는 놈부터.
도박을 하는 이.
알코올에 의존하는 놈.
기이한 행동을 했던 나까지.
‘그리고 내가 했던 행동이 별거 아닌 것처럼 대하는 걸 보면, 더 심한 사례도 있나 보군.’
나는 손깍지를 낀 다음에 베이크에게 물었다.
“그래서······ 난 뭘 해야 하나? 치료법은 뭔가?”
향수병은 말 그대로 고향을 그리워해서 생기는 정신병이다.
그렇기에 치료법은 간단했다.
보통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면 고쳐지지 않던가?
그걸 염두에 두고 물었지만, 의사의 대답은 달랐다.
“긍정적인 생각을 계속하시면서······ 바깥 활동을 늘리십시오. 어두운 실내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삼가셔야 합니다.”
“또······.”
“제가 처방하는 약을 드시면 한결 나아지실 것입니다.”
“또?”
“없습니다.”
“없다?”
“예.”
내 앞에 있는 의사는 가장 효과적인 처방을 내게 알리지 않았다.
고향으로 가라는 말.
이 말이 뭐가 어렵다고 그리 입을 꾹 다물까?
‘후, 이놈.’
숨은 의도가 있어 보인다.
이 의사 역시 내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꺼리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놈의 활동 영역은 일본이겠지.’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고자 한다면 그들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는 게 제일.
앞으로 몇 번 볼까 말까 한 나를 위해 진심 어린 처방을 해 주기보단, 제 영달을 위해 일본 정부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저놈도 할 게 분명했다.
‘꾀병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을 거야.’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이 몸의 원주인.
그의 기억이 조각조각 난 파일처럼 내게 남아 있었으니까.
‘원주인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지.’
그래서 부왕께 편지도 보내고, 신료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귀환하고 싶다는 주장까지 했었는데.
이번 난동도 그 행동의 연장선이라 보는 것 같았다.
‘어쨌거나······ 이놈도 저놈도 죄다 마음에 들지 않는군.’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씁쓸해지는 것 또한 사실.
환자를 위한다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저버린 놈을 내 앞에서 직접 보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쾌한 감정이 올라왔다.
“알겠네. 그만 가 보게나.”
의원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일분일초라도 내 시야에서 그놈의 얼굴을 치워 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 * *
그래도 나름 신경정신과 의사라고, 그와의 면담이 도움이 되었던 걸까?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간결해졌다.
‘현실부터 직시해야 해.’
나를 진료하는 의사마저 나의 감시자가 될 수 있다.
이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나는 로비스트 박병준이었지. 하지만 이제 난 조선의 둘째 왕자인 의왕 이강이야.’
빙의된 몸의 원주인은 조선의 왕족.
과거 왕정 시대, 왕실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로또 맞은 사례라 할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은 예외다.
타국.
정확히 말해, 조선을 꿀꺽 삼키려는 적성국 일본에서 지내고 있지 않은가?
지금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 X 같은 열도를 떠야 한다.
그래야 두 다리 쭉 뻗고 살 수가 있을 테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일본에 머무른다는 선택지가 제거된 상황.
그러한 가운데,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들려 있다.
‘첫째는······.’
원 몸뚱이의 조국인 조선, 아니지 대한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몸의 원래 주인 또한 조선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유학을 떠났던 미국에 머물지 않고 가까운 열도에서 제 아비에게 귀국 요청을 보내고 있었겠지.
‘하지만 이게······ 진짜 정답일까?’
이민 2세대였던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의 역사를 잘 알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대한제국은 망해.’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안다.
제국주의 시대.
힘이 없는 대한제국은 결국 줄타기를 하다가 일본에 잡아먹힌다.
‘패망한 왕국의 왕족이라.’
그 삶은 어떨까?
과연 지금 일본에서의 삶보다 나을까?
‘글쎄. 이보다 못하면 못했지, 절대로 낫지는 않을 거야.’
아 물론.
민족을 등지고 매국 행렬에 앞장선다면야 편하게 살 수 있겠다만, 적어도 그러고 싶진 않았다.
‘배신자가, 더불어 매국노가 되고 싶진 않다.’
애국심 하나만큼은 끝내주는 미국.
그곳에서 교육받은 나다.
매국 행위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소거법으로 선택지를 하나씩 제거하니, 내게 남은 건 하나였다.
‘그 길뿐인가······.’
원 몸뚱이가 6년 동안 유학했던.
더불어 빙의 전의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곳.
미국.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 사방이 감시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