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덤 (2) >
다음 날 저녁.
“전하, 이근상이 찾아왔습니다.”
반가운 얼굴이 돌아왔다.
“들어오라 전하게.”
술병을 앓는 건지, 이근상은 한 손으로 제 배를 쥔 채 다가왔다.
‘저 나이에 그리 술을 퍼부었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지.’
나는 그런 이근상을 보며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에 대한 그런 감정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주먹을 꽉 쥔 채로 나는 이근상을 바라봤다.
“그래. 어제 나눈 이야기들, 밤새 좀 생각해 보았나?”
할 말은 이미 다 했다.
활동지원금 금액만 서로 맞추면 되는 상황.
나는 오십만 달러로는 턱도 없다는 견해를 고수할 생각이다.
“어제의 자네와 오늘의 자네는 다르겠지. 그래, 오늘의 그대는 내게 무엇을 제시할 것인가?”
이근상이 식은땀을 닦으며 내 물음에 답했다.
“소인이 혼자 판단할 일이 아니라 사료되어, 어제 나누었던 대화를 귀비 마마께 고했습니다.”
이근상이 봉투를 내게 건넸다.
어제 보았던 그 서류 봉투였는데 조금 더 두툼했다.
“전보를 통하였기에 다행히도 그 답을 속히 들을 수 있었나이다.”
그가 건넨 서류 봉투를 다시금 열어 보았다.
어제 제안했던 금액은 50만 달러.
‘허······.’
날이 바뀌면서 이자라도 붙은 건가?
금액이 두 배로 불어나 있었다.
“이번에는 부디······ 귀비 마마의 진심을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도깨비방망이를 가진 느낌이다.
뚝딱-
한 번 내려치면 황금이 튀어나온다.
‘여기서 한 번 더 참는다면, 이근상은 내게 얼마를 제시하려나?’
나는 이근상의 표정을 살피며 그를 한번 떠 보았다.
“어제보다는 조금 더 금액이 많아졌군.”
“조금이라뇨? 무려 오십만 불이나 더 제시하였사옵니다. 전하.”
그 말대로, 이근상은 어젯밤의 두 배나 되는 금액을 제시했다.
그것도 하루 만에.
‘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닐 거고······. 귀비가 이자를 엄청나게 총애하고 있던 걸까?’
한 번에 오십만 달러를 올려주다니······.
‘이근상의 주장대로, 오십만 달러만 해도 엄청난 거금이긴 하지.’
대한제국의 궁내청이 1년 동안 사용할 만큼 큰 금액.
이걸 하루 만에 구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도 이근상은 하루 만에 오십만 달러나 되는 채권을 내게 다시 제시했다.’
비행기도 없는 시대.
한양에서 이 큰 거금이 하루 만에 배달될 리도 만무하다.
‘일본놈들에게 빌렸을까?’
정황상, 귀비는 제 아들을 다다음 후계자로 올리기 위해 눈이 돌아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을 테지.
국내외 안팎으로 우군을 찾고 있을 텐데, 그녀에게 있어서 일본은 매력적인 동맹일 것이다.
‘귀비 역시 일본을 엄청나게 경계하고 있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서로 뜻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다면 잠시 손을 잡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한 가지가 걸린다.
내 손에 들려 있는 채권은 영국이나 미국 은행에서 발행한 은행권.
일본 놈들과 귀비가 손을 잡았다면, 달러나 파운드 대신 엔화 채권이 내 손에 들려 있어야 했다.
‘일본인들이 굳이 파운드나 달러를 이근상에게 빌려줄 리도 없을 거고.’
엔화 채권은 일본인들에게 유용하다.
내가 이를 현금화한다면 그 시기와 목적을 대충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거금을 찾는 과정에서 내게 호의를 베푼다며 생색을 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설은 하나.’
애초에 귀비가 이근상에게 백만 달러를 줬다는 것이겠지.
이근상은 내게 오십만 달러만 제시하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지려 했을 것이다.
내가 어젯밤 제안을 수락했다면, 눈먼 돈을 중간에서 떼먹을 수 있었을 테니까.
‘귀비에게 보고했다는 것도 거짓일 가능성이 있다.’
애초에 백만 불을 가져왔으면, 그 최대치를 내게 다시 제안했으면 되었을 테니까.
대충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후자일 테야. 백 프로. 거금 앞에 장사는 없으니까.’
로비스트로 일할 때 이런 배달 사고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로비 활동은 미국에서 합법.
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여타 국가에서는 제법 많이 불법이었다.
때문에 나는 잘 맡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주로 일하는 주변 동료 중 가끔 그런 사건을 수임하는 것을 보곤 했다.
불법적인 일이다 보니 액수가 상당히 컸고, 눈먼 돈이 오갔기에 그때마다 중간에 사고가 났다.
아마, 지금도 비슷한 상황이겠지.
‘괘씸하군.’
참자.
감정을 우선하면 안 된다.
차분하게 지금 상황부터 정리해야 했다.
애초에 백만 달러를 가져왔다면, 아직 여력이 있다는 소리.
“부족하네.”
“예? 전하 농담이 과하십니다. 백만 달러가 얼마나 큰 돈인 줄 아십니까?”
“알지. 백만 달러면 2년간 궁내부를 운영할 수 있는 거금일세.”
“그리 잘 아시면서, 어찌 그리 무리한 요구를 하시는 것입니까?”
말이 되냐는 듯한 그 표정에,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이근상을 노려봤다.
“지난번에도 말했듯, 미국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이번에 제대로 활동할 생각일세. 미국은 대국. 우리에겐 백만 달러라는 돈이 크지만, 미국에서는 지방 유지들도 다들 백만 달러 정도는 우습게 가지고 있네.”
미국에서도 백만 달러를 가진 이는 별로 없다만.
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은 이근상이 이를 알 턱은 없기에, 나는 뻔뻔스럽게 돈을 더 요구하며 이근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무리라는 것도 알고 있지만······ 원활한 활동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네.”
“······.”
“그 대신. 내 한 가지를 더 약속하지. 활동자금을 더 지원해 준다면······.”
묵묵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이근상이 부들부들 떨다 말고 귀를 쫑긋 세웠다.
“내 식솔들을 전부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겠네.”
믿기지 않지만, 나는 유부남이다.
빙의한 몸뚱이가 어릴 적에 이미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부인되는 여인을 홀로 남겨 놓을 수는 없었기에, 일단 그녀를 미국으로 호출할 생각이었다.
“의왕비를 포함한 내 식솔들 모두를 뜻하는 것일세.”
“진심이십니까?”
“그래. 그래야 전력을 기울이며 미국에서 활동하지 않겠나? 미국에서 한동안 지내야 할 테니 그편이 편하겠지.”
그리 행동한다면, 귀비는 환영하겠지.
1~2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해외에 머무를 테니까.
영왕이 차차기 후계자로 공식 지목되더라도,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를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될 터.
후계위라는 것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 어찌 될지 모르는 자리이기도 했다.
막말로 직전에 갈릴 수도 있다는 말.
오랜 기간 미국에서 머물겠다는 나의 제안은 분명 귀비의 귀에 솔깃하게 만들 것이다.
변수가 제거되니까.
“지금보다 더 많은 활동비를 제시한다면······ 내 자네에게 내 가산을 처분할 권리 또한 위임하겠네.”
더불어 이근상에게도 솔깃한 제안을 던졌다.
‘이근상은 전형적인 모리배다.’
그는 관료로서의 역량이 크게 부족하지만, 잔머리 하나만큼은 잘 돌아가는 인간이었다.
부수입을 챙길 기회를 아는 자.
어제도 그러지 않았던가?
귀비가 건넨 비자금 중 절반을 챙기려고 했다.
돈에 욕심이 원체 많기에, 이 제안이 무슨 뜻인지는 이근상도 분명 잘 알 것이다.
“어떤가? 제법 구미가 당기지 않은가?”
이근상이 열심히 눈알을 굴린다.
그간의 행동거지로 봐선, 열심히 계산 중일 테지.
활동비는 얼마로 올려야 내가 만족할지.
귀비는 어떻게 반응할지.
무엇보다, 자신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은 얼마나 될지.
각각을 전부 다 계산하느라 머리가 터질 만큼 복잡할 거다.
“이주 일의 말미를 주겠네. 그때까지 별 제안이 없다면······.”
톡톡-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행동을 보였다.
싸 두었던 짐을 건드린 것.
대한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이다.
꿀꺽-
이근상이 침을 삼킨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지금 나의 행동을 해석했을 것이다.
“뭐 하는가? 어서 움직이지 않고.”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근상은 객실을 떠났다.
나는 허겁지겁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 * *
그로부터 이 주가 더 지났다.
‘드디어······.’
내 손에 이백만 달러라는 거금이 들어왔다.
이근상이 결국 일을 낸 거다.
‘이걸 종잣돈으로 삼는다면, 미국에서도 쉬이 활동할 수 있겠지.’
더불어 헐버트에게서도 소식이 왔다.
상해에 막 도착한 모양이다.
“왕자님. 이제 떠나시는 것입니까?”
“그래.”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짐을 쌀 수 있었다.
“아쉽습니다.”
사카모토는 명목상 일본 정부에서 나의 편의를 위해 파견한 관료다.
그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잔뜩 지으며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간 열심히 날 감시했으면서······.’
두 얼굴을 가진 사카모토.
그를 바라보며, 나 역시 아쉬운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좀 더 친해질 수 있었는데, 어찌어찌 내 귀국에만 온 신경을 쓰다 보니 만날 기회가 없었군.”
“혹, 시간이 되신다면 미국 유학을 잠시 미루실 수는 없으십니까? 이대로 헤어지기엔 너무 아쉽습니다.”
마음에 없는 소리도 하네.
하여간 일본인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입에서 거짓말이 튀어나온다.
나는 사카모토의 어깨를 두들기며 완곡히 그의 제안에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떠나야지. 더 늦기 전에 학업을 마무리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원래 공부하던 로어노크 대학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학위가 아니다.
가방끈보단 돈과 권력이 내게 더 필요하다.
“아쉽군요. 총리 각하께서도 왕자님과 교류하고 싶어 하셨는데······ 며칠만 더 계신다면 제가 이를 추진할 수도 있습니다.”
“아닐세.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알겠습니다.”
“혹시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 또 만나지. 너무 섭섭해하지 말게.”
서로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계속 뱉어냈다.
로비스트로 살아왔지만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기에, 나는 이만 이자와 헤어지고자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카모토가 날 붙잡았다.
“왕자님, 여기······.”
사카모토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뭐야?
이거.
“각하께서 왕자님께 건네라 하셨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또한 수많은 유학생을 배출하지 않았습니까? 타지에서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저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근래에 재물복이 넘쳐나는 것인가?
이놈이건 저놈이건 돈을 물어다 주네.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쓱 돌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우현식이 나의 신호를 잘못 이해하고 봉투를 냅다 챙긴 후 안에 내용물을 확인했다.
“전하. 엔화 채권입니다.”
역시······.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먼.
사카모토가 재빨리 뒷말을 이으며 내게 답했다.
“양국 간의 우호를 위한 우리 일본 정부의 배려라 생각해 주십시오. 미국 현지에도 아국의 투자자가 세운 은행이 있으니, 그곳에서 이를 현금화하시면 유학 생활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덧붙여 자신들이 배려할 테니, 가지고 있는 돈을 예치하라 권하기도 했다.
이자를 후하게 쳐준다는 뒷말을 붙이며.
‘대한제국 관료들과 다르게······.’
참으로 꼼꼼하단 말이야.
돈만 밝히는 왕자였다면 혹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카모토는 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많이 쏟아냈기 때문이다.
꿀꺽-
우현식이 침을 한 번 삼킨 후 나를 바라보았다.
‘아, 맞다. 우현식은 아직 모르고 있지.’
고종의 비자금을 내가 확보했는지, 더불어 귀비가 나에게 얼마나 많은 활동비를 건넸는지.
그는 모른다.
‘우현식에게 나는 땡전 한 푼 없는 상사다.’
내 계좌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그는 당장 내게 저들의 제안을 수락하라 무언의 눈빛을 보냈다.
“미안하지만 받을 수 없네.”
하지만 나는 이를 단박에 거절했다.
나의 반응에 우현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큰돈을 왜 거절하느냐는 원망이 가득 담긴 눈빛을 계속하여 쏘아댔다.
“예? 그게...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사카모토 또한 당황한 듯 보였다.
나는 거절의 이유를 설명했다.
“나는 왕자지만 동시에 폐하의 신하네. 한 나라의 외교관이라 할 수도 있는 내가 어찌 녹봉 외에 다른 것을 받는단 말인가? 그것도 타국의 관료가 건넨 돈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다 나의 미래를 위해 내린 결정이다.
일본은 대한제국의 정적.
두 나라 관계가 나빠졌으면 나빠지겠지, 좋아지진 않을 거다.
‘독이 든 성배야. 저들이 주는 돈은.’
시간이 흘러, 내가 일본 정부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져 봐라.
그 즉시 나는 한인사회에서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국내에 있는 조선인이나, 해외에 있는 조선인이나, 조선인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일본에 대한 반감은 대단했다.
‘재미교포들은 내 지지기반이다.’
비록 아직 수는 적지만, 재미교포들은 내게 반드시 힘이 될 것이다.
‘미래를 봐야 해.’
시간이 지나면 재미교포들은 모두 미국으로 귀화할 것이고, 시민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시민권이 있는 자들은 전부 투표권을 가지게 되겠지.
미국의 양대 가치.
하나는 자본주의라면, 다른 하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꽃은 바로 투표.
‘나는 재미교포들의 수장이 되어야 해.’
그래서 이들을 대표하여 미국 정치인들과 협상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당장의 배고픔에서 벗어나자고 저들의 돈을 받으면 안 되었다.
“돈은 그만 넣어 두게. 내 성의만 받겠네.”
옆에 있던 우현식이 재차 침을 꼴깍 삼켰다.
무려 50만 엔이라는 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내가 한 말이 다 옳기에 뭐라고 나를 말리지도 못하는 상황.
한숨만 푹 쉰다.
재정담당관의 원망에 가까운 눈빛을 뒤로하며, 나는 한 가지를 더 명령했다.
“호텔료도 전부 완납하게 한 푼도 깎지 말고 전부.”
“······예. 전하.”
끝까지 선을 긋는 모습에 사카모토는 뭔가 아쉬운지, 입을 쩝쩝대며 내 주위에서 떠나질 못했다.
그런 사카모토를 무시한 채, 나는 일행들을 재촉했다.
“늦겠군. 오늘 떠나는 배를 놓치면 앞으로 사흘을 더 기다려야 하네.”
지옥 같은 동경.
하루라도 더 빨리 떠나고 싶다.
‘함께해서 더러웠다, 다신 만나지 말자.’
뿌-우-
출발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와 함께 동경의 전경이 점점 멀어진다.
나는 이를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다음 목적지는······.’
헐버트와 재회하기로 약속한 곳은 샌프란시스코.
하지만 그 전에 잠시 방문해야 할 곳이 있다.
‘환상의 섬 하와이. 내가 간다.’
< 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