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더미 위에 핀 새싹 (4) >
“혀, 현물도 괜찮으시다고요?”
“그래. 가리지 않네. 자네 말대로 나는 현금이 궁한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발을 떼며, 마드리 집무실 한편에 걸려 있는 지도로 향했다.
“주식도, 채권도 좋네. 부동산을 양도해 줘도 괜찮지.”
미주 전역이 그려진 지도를 보며, 미국의 도시를 하나하나 가리켰다.
“하루빨리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네. 이를 현금화하는 수고 정도야 내 감수하겠네.”
나는 피식 웃으며, 마드리에게 시선을 다시금 돌렸다.
“아! 커머셜유니온사 정도면 이쪽 보험 업계에서도 꽤 규모가 크지 않은가? 그렇다는 말은, 남겨 놓은 자산도 좀 있겠지?”
보험사의 수익 구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사업 이익’이다.
사업이익은 고객이 매달 내는 보험료와 사고 터지면 지급하는 보험금의 차익을 뜻한다.
‘간단히 숫자로도 표시할 수 있는데, 이를 보통 손해율이라고 한다.’
낸 돈과 줄 돈이 같을 때의 손해율을 보통 100으로 잡는다.
100 이하면 보험사가,
100 이상은 고객이 이득을 본다 생각하면 되는데, 보통은 70-80 정도가 평균이다.
큰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보험사가 이득을 보는 구조.
‘지난 50년간은 계속 80 이하로 나오며 꿀 좀 빨았겠지. 물론 이번 사건 때문에 그동안 벌어 놓은 것을 모조리 다 토해내겠지만.’
사업 이익을 제외하고도 보험사는 추가로 돈을 번다.
고객이 보험료를 낸 후, 보험금을 수령하기까지.
빈 시간 동안 자산을 굴려 가며 수익을 낼 수 있는데, 이걸 ‘운영 이익’ 혹은 ‘자본 이익’이라고 부른다.
‘보험사도 투자한다는 소리지.’
커머셜유니온은 역사가 길다.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았다는 것은 체계가 잡혀 있다는 뜻.
그들 역시 분명 자산 운용 부서가 따로 존재할 거다.
‘그러니······. 현금은 부족할지 몰라도 다른 자산은 많을 거야.’
남은 자산이 정말 없다면, 이미 파산선언을 했겠지.
내 기억에 커머셜유니온은 현대에도 존재하기에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혹, 이 보험사가 소유하고 있는 자산 리스트를 내가 한번 살펴볼 수 있겠나?”
마드리는 침묵했다.
이는 보험회사의 영업 비밀에 해당할 수도 있는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에 마드리를 압박했다.
“목록을 살펴봐야, 내 원하는 물건을 선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설마 주는 대로 받으라는 소리를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
“시간이 걸린다면, 자네가 알고 있는 목록이라도 건네주게나. 그중 인수할 게 있나 내가 살펴보겠네.”
마드리는 지점장이다.
본사 직원이 아니기에 보험사가 운용하는 자산을 상세히 알지는 못할 거다.
‘주식이나 채권은 모른다 쳐도······ 인근 부동산 목록 정도는 알 터.’
보험사들은 특히나 부동산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
인플레이션 헷지에 제격이니까.
십 년 혹은 이십 년이란 긴 시간을 두고 보면, 땅은 설사 보합(가격 유지)으로 끝날지언정 손해는 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주식이나 채권보다 더 안전한 투자처라 말할 수 있다.
‘뉴욕의 즐비한 빌딩들만 봐도 그래.’
대한민국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강남스타일에 나오는 강남 거리만 가도 태반이 보험회사나 자산 운용 소유 건물일 거다.
고개를 돌려보면 **생명 건물이 보이고.
잠깐 걷다 보면 ##화재 빌딩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는 @@손해보험.
바로 건너편에는 $$라이프 소유의 사무실이 보이는 게 현실.
“왕자님.”
침묵하고 있던 마드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말하게.”
“실은 제가 이 샌프란시스코 지점에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쪽 정세를 잘은 모릅니다.”
“그래? 그전에는 어디 있었는데 그러는가?”
“워싱턴에 있었습니다.”
“오! 그래?”
워싱턴이면 더 좋지.
어엿한 미합중국의 수도가 아닌가?
땅값이 오르면 올랐지, 절대로 떨어질 리 없는 곳이다.
‘마침, 워싱턴에도 별채가 하나 필요했는데 말이야.’
지금이야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낸다고 쳐도.
시간이 흘러 내가 성장하면 나는 반드시 동부로 진출해야 한다.
미국 경제의 수도는 뉴욕이며, 정치의 수도는 워싱턴이니까.
그곳에 내 거처가 될 만한 곳을 미리 마련해 두는 것도 좋겠지.
“괜찮네. 워싱턴이든 뉴욕이든 내 알아서 현금화할 테니, 자네가 아는 부동산 목록을 내게 넘기게나. 내 보고 12만 달러에 해당하는 자산들을 골라 보겠네.”
마드리가 당황하는 얼굴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본다.
속마음이 들린다.
이게 아닌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빠져나갈까, 하면서 지금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겠지.
“왜? 생각이 바뀌었는가? 내키지 않는다면 그냥 현금으로 줘도 좋네. 나야 달러나 금화가 더 좋지.”
나는 이번 협상에서 절대적인 갑이다.
계약에 따라 보험금을 받을 권리가 분명 존재하니까.
현금 대신 현물로 받겠다는 것 또한 내가 한발 양보하는 것이기에, 마드리도 더는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으······.”
마드리가 계속 신음만 내며 눈알을 굴린다.
나는 그런 마드리에게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번 주말 전까지 우리 집으로 사람을 보내게나. 그렇지 않는다면 내 커머셜유니온사가 현금으로 보험금을 지급한다고 알겠네.”
결국, 마드리는 내 제안을 수락했다.
당장 현금이 부족하니까.
“상부와······ 연락을 좀 해 보겠습니다.”
“알겠네.”
이야기를 잘 끝내고, 마드리 집무실에서 나왔다.
때마침, 지아니니도 부지점장 사무실 문을 막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일은 잘 해결되었나?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나 보군.”
나야 받을 보험금이 많다 치더라도 지아니니는 BOI 건물 하나일 텐데.
“잡담이 좀 길어져서 그리되었습니다.”
지아니니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잡담?”
“예. 부지점장인 데릭이라고 아시죠? 그 자식이 묻더군요. 어찌 다른 은행들은 전부 영업을 못 하고 있는데, 저만 영업을 하냐고요. 그래서 말해 줬죠. 정어리를 싣고 X 빠지게 시내를 누빈, 그 전설 같은 일화를 말입니다.”
물론 내 제안 덕분에 BOI의 자산을 지킬 수 있었다는 말 또한 빼먹지 않았다고 한다.
후······.
지아니니 녀석.
왜 자꾸 내 아이디어라고 이 동네 저 동네 소문내고 다니는 거야.
저러니까 내가 미래를 안다 어쩐다 이런 소문이 퍼지지.
“왜 한숨은 쉬고 계십니까?”
너 때문이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다.
나름대로 나를 배려해서 이 동네 저 동네에 소문내고 다니는 것 같은데.
그래서 다음 고민을 지아니니에게 말했다.
“이제 시작이니 그렇네.”
“시작이요?”
“그래. 이제 겨우 한 곳 끝났으니까.”
앞으로 열일곱 곳은 더 돌아야 한다.
물론 지아니니한테는 구체적인 숫자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 봤자 나한테 좋을 건 없으니까.
“하긴······ 이번처럼 계속 줄 서서 기다려야 하면 그것도 곤혹스럽겠습니다.”
“그렇지. 아무튼 얼른 이 건물을 나서세나. 마드리도 퇴근해야 하지 않겠나?”
나 때문에 한동안 마드리가 바쁠 테니, 오늘 퇴근이라도 일찍 하게 배려해줘야겠지.
“이쪽으로 가시지요.”
“그래.”
나는 지아니니와 함께 커머셜유니온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또 다른 보험사로 향했다.
* * *
전에 이야기했던 대로, 나는 다양한 보험사를 순회했다.
보험사마다 수령한 보험금의 형태는 조금씩 달랐다.
현금을 받는 게 최선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보험사가 비슷한 실정이기에, 가지고 있는 유동성 현금이 바짝 말라서 일부는 현물로 받아야 했다.
‘애트너 보험사에서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땅을 얻을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인근 부동산은 현재도 많이 가지고 있지만, 나는 굳이 애트너 사 소유의 부지 또한 기꺼이 인수했다.
왜냐고?
막 인수한 이 땅 근처가 전부 내 소유의 부동산이었으니까.
‘알박기처럼 그 땅만 내 것이 아니어서 거슬렸는데 말이야. 잘 되었어.’
천사들의 도시인 LA 땅 인수 역시 만족한다.
LA는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이후 급속히 성장하는 캘리포니아의 대도시다.
상대적으로 지진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기후도 좋기 때문이다.
‘커머셜유니온 사가 건넨 건물도 예상 외로 좋아.’
마드리가 건넨 부동산은 이강의 기억 속에도 존재했다.
워싱턴 D.C.에 있는 대한제국 대사관 인근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주인인 이강은 대사관을 자주 들리며 그 인근으로 자주 산책했다.
근처에 막 지은 이쁜 건물이 하나 존재했는데, 그게 바로 이번에 내가 인수한 건물이었다.
‘언제 한번 한양에도 연락해 봐야지.’
생각해 보니 대사관 건물은 고종 이름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놈들이 언제 어떻게 이를 빼앗아 갈 수도 있으니, 내가 먼저 챙겨야지.
“전하. 이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지금은, 재정 담당인 우현식과 함께 보험사에서 건네받은 재산을 정리 중이었다.
우현식이 종이 하나를 흔들며 내게 물었다.
“자동차 회사 주식 증서네.”
“자동차 회사요? 아하······ 그 말 없이 굴러다니는 차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래.”
“전하께서는 이전부터 관심 보이시지 않았습니까? 결국, 이 회사의 주식을 소유하시게 되었군요.”
이강은 자동차에 굉장히 열광적이었다.
이 점은 나와 이강의 공통점이라 볼 수 있다.
나 역시 스포츠카를 엄청나게 사랑했던 남자니까.
“이건 어느 보험사에서 양도받으신 것입니까?”
“하트포드 사에서 받았네.”
라크로스로 유명한 뷰익 모터스의 주식을 인도받았다.
‘GM의 전신이 되는 주식을 얻을 줄이야.’
자동차 회사의 주식은 꽤 유망 전도하다.
21세기 빅테크라 불리는 IT 기업처럼, 현재의 자동차 기업은 그야말로 쭉쭉 커 가는 성장주니까.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겪으면서 자동차 주식은 더욱더 폭등하게 된다.’
지진 후, 화재를 진압할 때 자동차를 기반으로 하는 소방차가 사용되었다.
이에 미국인들은 자동차가 마차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는 것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연말쯤 이를 팔 것이니, 너무 정을 주진 말게나.”
물론, 오래 들고 있을 주식은 아니다.
이유는 간단하다.
앞으로 1년 후 1907년에 대공황이 발생하는데, 그때 이 주식은 절반이나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현식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내가 벌인 투자가 하나같이 대박을 내고 있었기에 나의 결정에 토를 안 단 거다.
“이제 남은 곳은 어디인가?”
“로이드 오브 런던 정도만이 남았사옵니다. 전하.”
로이드 보험사라.
로이드는 현재 가장 큰 보험사다.
현대에서도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항상 드는 회사.
“전하. 로이드사에 들르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게······ 교민들이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로이드는 가장 큰 보험사다.
내 기억 속에 확실하게 보험금을 지급하는 회사는 로이드 정도였다.
그렇기에 나는 교민들에게 이를 강력히 추천했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예. 다들 영어에 취약해서······.”
“알겠네. 내 기꺼이 그들을 돕겠네.”
교민들을 한데 모을 예정이다.
그들에게 위임장을 받을 생각이었으니까.
* * *
“아이고, 전하.”
“이렇게 또 신세만 지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다들 나만 바라보면 꾸뻑꾸뻑 절을 한다.
나는 그들을 일으켜 세우며 교민들을 다독였다.
‘이거,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도 하겠군.’
그만큼 샌프란시스코 교민사회에서 나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나는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우현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위임장을 다 받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저 보스.”
그때, 옆에 있던 아론이 날 급히 불렀다.
그의 말투와 행동으로 볼 때 무언가, 내게 원하는 게 있는 듯했다.
“부탁드릴 것이 좀 있습니다.”
“부탁?”
뭔데? 무슨 부탁을 할 예정이기에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지?
혹시, 독립이라도 하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돈이 필요한가?
“말하게. 내 듣고 생각해 보겠네.”
“저, 그게······.”
아론의 막냇동생 맥스가 가슴을 쿵쿵 치며 앞으로 나섰다.
“어휴······ 또 답답하게 하네. 내가 형님 대신 뽀스께 말해 드리리다. 뽀스! 형님이 사귀고 있는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현재 보험금을 못 받고 있다 합니다.”
응?
보험금을 못 받고 있다고?
“예비 장인뿐만 아니라 다수가 아주 속만 끙끙 앓고 있습니다. 보험사들 습성이 그렇지 않습니까?”
맞다.
보험료 낼 때는 간이든 쓸개든 다 내어줄 것처럼 사근사근 대하지만.
보험금 줄 때는 무서운 마피아처럼 이리저리 온갖 핑계는 다 대며 최대한 미루고, 어떻게든 보험금을 깎으려고 한다.
‘그나마 내가 왕자니까 말이 먹히는 거지.’
힘없는 일개 소시민이었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
현물은커녕 지점장과도 만나지 못할 거다.
영어도 못 하는 교민들도 마찬가지.
보험사에 들렸다면 낭패를 보았을 거다.
‘아일랜드계나 이탈리아계 이민자들 역시 차별을 받고 있지.’
그들은 주류 백인이 아니니까.
“뽀스께서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
일단 침묵했다.
어찌 행동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산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인 합성협회 대표다.’
교민들을 대표할 권리는 있다.
하지만 생판 나와 인연이 없는 자들까지 챙겨야 할까?
‘하지만 그들에게도 신세를 지게 하는 건, 나중에 내게도 이득이 될 텐데.’
잠시 머리를 굴리며 계산을 하고 있는데.
“전하.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사람? 바쁘다고 조금만 기다리라 하게. 아론과 간만에 이야기 중이니까.”
내가 미루자, 최현우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더욱 다가왔다.
“그게 실은······.”
뭐?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사람을 보냈다고?
그자가 왜?
“아마도 감사패를 증정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소문으론, 이번 재난을 주제로 내일부터 주지사와 시장이 미팅을 한답니다.”
< 잿더미 위에 핀 새싹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