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민 구출 (2) (지도첨부) >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 교민들이 있는 유카탄반도까지는 거리가 꽤 된다.
이동 경로 역시 험난했다.
배를 타고 태평양 연안 항구도시 라사로 카르데나스에 도착한 다음, 기차를 타고 중간기착지인 멕시코시티까지 가야 하니까.
여기까지만 해도 보름이 소요된다.
이렇게 이동하더라도, 이는 아직 절반 지점에 도달한 것뿐이란 점이다.
대서양 연안 베라크루즈 항까지 또다시 기차를 타야 하고.
이후에는 배를 타고 이동해 프로그레소 항을 거쳐, 메리다와 칸쿤에 도착해야 이 긴 여정이 마무리된다.
“마음 단단히 준비하게. 멕시코는 여기 미국과는 아주 다르네.”
윤치호에게 내일 당장 출발한다곤 했지만, 진짜로 그리 떠날 수는 없었다.
왕복으로 두 달은 족히 걸릴 긴 일정.
따라서 준비할 것이 좀 많았다.
‘일단 언어권이 다르다는 게 문제야. 통역부터 구해야 한다.’
미국은 영어를 쓰지만, 멕시코는 미국과 다르게 스페인어를 쓴다.
‘다행인 것은 내가 스페인어를 조금 할 수 있다는 거지. 제2 외국어로 스페인어를 선택했던 것이 신의 한 수군.’
미국 역시 한국처럼 외국어를 배운다.
동부는 프랑스어를, 서부는 스페인어를 주로 선택했다.
이는 지역적 특색 때문이다.
서부는 중남미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며 가게에 다들 스페인어를 병용하고 있는 곳이 많아졌으니까.
덕분에 능통하진 않지만 대충 무슨 말을 하는지, 간단한 생활 스페인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 왕자님, 여기 파블로와 조르반니가 왕자님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고맙네.”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지아니니의 측근 중 일부가 나를 따라 멕시코로 함께 간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는 8할가량 유사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언어가 소통되는 것은 아니지만, 지아니니는 내게 도움이 되리라 여겨 두 측근을 내 옆에 붙여 주었다.
‘어휴, 몸들이 다들 엄청나네.’
통역사로 고용된 것이지만, 몸만 보면 경호원이라 해도 무방했다.
실제로, 총도 제법 잘 쏜다고 하고.
저들을 보고 있자니, 맥스가 왜 툭하면 지아니니 일파를 마피아라고 놀리는지 이해가 가는 것 같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 왕자님.”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인사도 깍두기처럼 무섭게 하네.
나는 그들과 악수를 하며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네. 이번 여정에서 자네들을 많이 의지할 것 같으니 잘 부탁하네.”
아론을 비롯한 아일랜드 삼 형제는 파블로와 조르반니의 등장에 위기를 느꼈는지, 제 가슴을 통통 쳐 대며 으스댔다.
“보스, 저희만 믿으시지요.”
“맞습니다, 뽀스. 저희가 저희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뽀스를 꼭 지키겠습니다.”
무슨 사절단을 꾸린 것처럼 규모가 엄청나게 커졌다.
이는 경호 인력이 많이 추가되어서다.
치안 상태는 사실 20세기 초 미국이나 멕시코나 비슷했지만, 심리적으로 좀 불안하니까.
아무래도 외국이지 않은가?
더욱이 멕시코는 현대에도 치안이 막장인 곳으로 유명하고.
“자자, 이제 진짜 출발하도록 하지.”
* * *
“자네 시간 좀 있나? 있다면, 나와 이야기 좀 하세나.”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 연안 항구도시 라사로 카르데나스까지는 열흘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배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기에 굉장히 따분하다.
이럴 때는 대화를 통해 몰랐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최고.
이에 나는 윤치호를 급히 불렀다.
“자네에게 물어볼 것이 많네.”
“말씀하십시오.”
“내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지난번에 자네를 처음 보았을 때, 자네는 구당(유길준)과 싸우고 있었네. 기억하는가?”
“맞습니다.”
“구당이 말하길 예전에 자네가 구당의 계획을 밀고했다 하던데. 사실인가?”
윤치호는 힐끗 내 시선을 회피했다.
전형적으로 죄책감이 들 때, 행동하는 패턴.
옆에는 유길준도 있었기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맞습니다. 밀고자는 저였습니다.”
하지만 내게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던 것인지 이내 내가 물어보았던 정보를 실토했다.
이에 내 옆에 서 있던 유길준은 다시 한번 배신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옛 혁명 동지 입에서 직접 이를 전해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이 개자식······.”
유길준은 굉장히 분노했다.
역도로 몰려, 아들 둘을 제외한 나머지 식구가 처형당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난 4년 동안 일본에서 반강제로 가택 연금을 당했고.
다시금 윤치호의 멱살을 유길준이 잡으려고 시도했다.
“구당!”
이에 나는 탁자를 쾅 치며 유길준을 노려보았다.
“또 한 번 경솔하게 몸부터 쓰는군.”
“······송구하옵니다. 소인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였습니다.”
“지켜보는 것이 힘들면 잠시 나가보게나. 내 이따가 좌옹이 한 이야기를 요약해 알려 주겠네.”
“아닙니다. 조용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유길준이 분을 삭이며 내게 조금 떨어져서 이를 지켜보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후, 나는 윤치호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혹, 이유를 말해 줄 수 있겠나?”
윤치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물었다.
“그전에 전하께 한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말하게.”
“구당은 전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 큰일을 벌컥 저지르려 했습니다. 화를 내셔야 할 분은 전하이십니다. 그런데 어찌 전하께서는 구당을 꾸짖지 않고, 그의 편을 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시는 것입니까?”
윤치호의 말대로 이 몸이 귀국하지 못한 것은 유길준 때문이다.
구당 덕분에 고종 황제의 신임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진짜 이강일 때나 해당하는 사항이지.’
나는 1905년 4월쯤에 이 몸에 빙의했다.
내 미래지식 때문이라도 나는 미국에 계속 머물고자 했기에, 유길준에게 딱히 억한 감정은 없었다.
하지만 이를 사실 그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마치 성인군자인 것처럼 나 자신을 포장하며 윤치호의 물음에 답했다.
“나는 구당을 용서했네. 지난날의 잘못은 다 잊고 이제 내 사람으로 삼기로 했지.”
나는 손깍지를 끼며 윤치호를 바라보았다.
“자, 아까 내가 물었던 질문으로 돌아가도록 하지. 자네는 왜 구당을 배신했는가? 껄끄럽다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다만, 자네의 행동을 이해하고 싶어서 묻는 것이니 솔직하게 말해 주게.”
“······그렇게 말씀해 주신다면 솔직하게, 제 가슴속에 깊이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겠습니다.”
윤치호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내 의중을 떠보듯 말했다.
이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말하게나.”
“밀고한 이유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구당의 계획이 터무니없다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터무니없다?”
“예. 구당은 일본에서 막 유학을 갔다 돌아온 젊은 군사 장교들을 모아다가 정변을 기획했습니다. 제2의 갑신정변을 꿈꾼 것이지요.”
갑신정변(甲申政變).
삼일천하라 불렸던 그 사건이 다시 언급되었다.
원래는 하나도 몰랐다.
하지만 최근 지나간 한국사를 되새기며 이 사건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게 되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갑신정변에 관한 이야기를 되새겼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정변의 끝이 어떠하였습니까?”
알면서 뭘 묻는가?
어찌 되었긴.
망했지.
그것도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진적으로 일을 추진했다가, 온건 개화파 세력까지 죄다 숙청되지 않았던가?
“소인은 이를 분석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갑신정변의 실패는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해서였습니다.”
그렇지.
아주 제대로 분석했네.
“민중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다들 무지하고 준비가 안 되어 있지요. 중간관리들 역시 여전히 부패합니다.”
응?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이상한 방향으로 결론이 도출되는 거지?
“이런 상태에서 또 한 번 정변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게 성공하겠습니까? 더욱이 구당은 현 황제 폐하를 폐한 후, 전하를 그 자리에 앉히려고 했습니다. 지난 정변보다도 더 과격하게 말입니다.”
무언가.
나와 생각이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지만, 대충 윤치호가 왜 유길준의 혁명을 고변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물었다.
“아아, 잘 알겠네. 내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데 말이야.”
“말씀하십시오.”
“그대의 눈엔, 5년 전의 나 또한 미덥지 못했나 보군.”
윤치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내 말에 동의했다.
“권력이란 것이 그러니까요. 아무리 전하께서 미국으로 유학을 오셨다 해도, 더불어 정치에 관심이 별로 없으셔도. 왕권을 쉬이 내려놓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권력의 화신 고종의 옆에서 수십 년을 보낸 윤치호다.
보고 들은 것이 있기에 결국 나 또한 입헌군주제를 쉬이 도입하지 못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것도 그렇지만, 그 당시엔 내 평이 그리 좋지도 않았으니까. 자네가 그것 때문에 망설일 수도 있었겠군.”
“맞습니다. 솔직히 이번에 전하를 뵙지 않았더라면 소인은 그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간에 알려지길 전하께서는······.”
“여자를 밝히고, 돈을 펑펑 써 대며,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정평이 나 있었지.”
1901년이면 한창 엄 귀비가 이강에 관한 비방을 도성 전역에 퍼트리고 다닐 때니까.
실제로 이강 또한 미국에서 그렇게 행동하고 다녔기에 한양 관료들은 다들 이강을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봤을 거다.
“아, 이번에 날 보지 않았다면 계속 그리 생각했다 했는데······ 지금은 좀 변하였는가?”
“예. 사실 전하를 만나기 전부터 살짝 긴가민가했습니다.”
“어째서지?”
“지난해 말부터 전하에 관한 소문이 한양에 떠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전과는 상반된 정보였지요.”
투자에 크게 성공하고.
교민들을 모아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의 이미지를 개선했다.
더욱이 장학재단을 따로 마련해 신진양성까지 돕고 있기에, 고국에서 내 평이 엄청나게 좋아진 모양이다.
미주 이민이 늘고 있었던 것도, 모두 조선 백성들이 나한테 한 줌의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다들 이역만리 땅을 건너 내게로 온 것이겠지.
“몇몇은 의왕 전하를 두고 마치 돌아가신······.”
“내 할아버님이 생각난다 떠들고 있나 보군.”
“맞습니다. 정확하십니다. 아직도 많은 백성이 전하를 그리워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흥선대원군과 비교되는 것은 조선에서는 굉장히 영광이다.
말년에 당백전과 경복궁 중건 공사 때문에 욕을 많이 먹긴 했어도.
또 그만한 인물이 없었기에, 노년층과 빈곤층 사이에서는 아직도 흥선대원군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나는 그간 나누었던 대화를 토대로 윤치호를 한번 분석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능력은 있어.’
특히나 어학 능력은 매우 뛰어난 것 같다.
현지인도 어려워하는 라틴어와 프랑스 계열 고급 어휘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고 있고.
다른 언어들 또한 두루 능통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혁명 동지라 불리던 자를 밀고한 자다. 한 번 배신했다면, 두 번 배신할 수도 있지.’
더불어 방관적인 태도를 계속 보이는 것도 문제고.
갑신정변을 기획할 때도 그래.
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성공을 바라며 정변 세력 근처를 서성이지 않았던가?
유길준이 또 다른 혁명을 모색할 때도,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실패할 것 같으니 먼저 밀고하고.
을사늑약이 체결될 때도 마찬가지다.
본인 주장으로는 강하게 반대했다고 하지만, 다른 이의 주장을 들어 보면 그렇지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완용처럼 적극적으로 외교권 양도에 찬동한 것도 아니긴 했지만.
‘이자는, 좀 더 지켜봐야겠군.’
정말로 내게 쓸 만한 자인지, 아니면 허우대만 좋은지는 직접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
나는 윤치호를 그리 평가하며 그를 자리에서 물렸다.
* * *
멕시코시티에 도착한 후,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윤치호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윤치호 주도로 멕시코 중앙 정부와 협상이 시작되었다.
“전하, 농무부 대표와 약속을 잡았사옵니다.”
사전에 연락하지 않았지만, 윤치호는 멕시코 고위층들과 연쇄적으로 만남 약속을 성사시켰다.
아마 내 이름을 팔았기 때문이겠지.
일국의 왕자가 방문했는데, 그냥 돌려보낼 정부 인사는 없으니까.
“죄송합니다, 저희 멕시코 정부는 안타깝게도 도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만남이 성사되었다고 해서 회담 내용까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국의 이익을 먼저 따지며 우리의 부탁을 외면했다.
“대한제국은 이제 외교권이 없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일본 정부에서 공문이 하나 내려왔는데 말입니다.”
“뭐라 하던가? 대우는 해 주되 내가 원하는 부탁은 들어주지 말라던가?”
“예.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
“······.”
이리될 줄은 대충 예상하였다.
헐버트를 감시하고 있다고 윤치호가 말했으니까.
그보다 내가 더 눈엣가시일 테니 내 일거수일투족은 이미 동경에서 파악하고 있으리라.
‘이미 윤치호가 나를 만나러 온 시점에서 이 계획은 일본에 탄로 났겠지.’
농무부, 외무부, 외무부 산하 이민청.
여러 중앙기관을 다 들리는데도 성과가 없다.
그러자.
“전하, 어찌합니까?”
윤치호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는 딱 거기까지만 행동했다.
안타까워하되, 딱히 추가적인 행동은 하지 않았던 것.
“안타깝지만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는 교민들이 노예처럼 일하고 있는 유카탄반도에도 방문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만큼 했으면 다 했다는 건가? 졌지만 잘 싸웠다고 생각하나?’
졌는데 뭘 잘 싸웠어.
이겨야 모든 것을 얻어 가는데.
‘보아하니, 원 역사에서는 실패로 끝날 것 같은데.’
윤치호가 주도했었고, 이대로 끝난다면 그리되겠지.
“슬슬. 내가 나설 차례가 왔군.”
나의 말에 윤치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날 설득했다.
“전하. 이쯤 하였으면 폐하께서도 전하의 노고를 알아주실 것입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나는 이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윤치호를 바라보았다.
“한번 날 지켜보게. 협상은 이제부터 시작이네.”
< 교민 구출 (2) (지도첨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