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50화 (50/294)

< 뉴욕의 지배자 >

똑똑-

내가 머무는 일등실 칸으로 누가 찾아왔는지, 노크 소리가 났다.

“보스, 혹시 주무십니까?”

눈을 뜬 후 고개를 돌려 그 정체를 확인했다.

아론이었다.

“아닐세. 막 일어났네.”

“열차 승무원이 말하길, 10분 뒤에 뉴욕 중앙역에 도착할 예정이랍니다. 슬슬 내리실 준비를 하시지요.”

“알겠네.”

졸린 눈을 비비며 나는 내 개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후, 일행들의 호위를 받으며 뉴욕 역사에 발을 내디뎠다.

잠시.

제자리에서 서서 눈을 감기도 했는데, 이는 뉴욕의 공기를 천천히 마시기 위함이었다.

흠, 스멜~

오줌 지린내가 난다.

기차역에서부터 이리 진하게 풍기는 것을 보니, 내가 알고 있던 그 뉴욕인가 보네.

‘어휴, 하수구 옆을 기어 다니는 쥐새끼들 좀 보소.’

여전히 사람을 겁내지 않구나.

역시 뉴욕 생쥐들은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다.

‘오랜만에 보는 옛 친구를 만나는 기분이군.’

뉴욕시는 내 고향이었던 샌프란시스코만큼이나 추억이 참 많은 도시였다.

현대인 박병준으로 살 때.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후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뉴욕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빡빡하게 공부하고 일했던 기억들뿐이로군.’

맨해튼 중심부에 자리한 증권회사에서 브로커 업무를 관둘 때까지, 나는 이 도시에서 무려 11년을 거주했다.

강산이 한 번 크게 바뀔 만큼 살았고, 더불어 로비스트로 일하며 뉴욕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니.

좋든 싫든 기억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왕자님. 먼저 타시지요.”

“알겠네.”

기차역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많은 마차 중 하나를 골라, 우리 일행은 호텔로 향했다.

자투리 시간 동안 뉴욕의 도시 풍경 또한 중간중간 감상할 수 있었는데, 21세기 초와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 비교하는 재미로 시간을 훌쩍 보냈다.

‘1900년대 뉴욕은 현대와는 다른 의미로 멋있군.’

살았던 연도만 따지면 샌프란시스코와 워싱턴 다음으로 오래 거주했던 곳이기에 뉴욕이 고향인 이들만은 못하지만, 나는 뉴욕 시내 명소를 제법 많이 꿰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한때 뉴욕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세계무역센터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도.

크라이슬러 빌딩 역시도 지어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몇 익숙한 건물들은 시야에 잡혔다.

“이 왕자님. 저곳이 바로 플랫 아이언 빌딩이라고 합니다. 다리미처럼 생기지 않았습니까?”

좁은 부지에 건물을 지어야 했기에, 플랫 아이언 빌딩은 다른 건물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바라보면 건물 밑면이 삼각형으로 생겼다.

21세기에 이 빌딩에 방문했을 때, ‘이 건물이 무려 백 년이나 되었구나.’ 하며 감탄했었는데.

지금은 지어진 지, 겨우 오 년도 안 되었다니.

다른 의미로 놀랍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현대의 형태가 보이긴 하네.’

뉴욕은 이리 완성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강의 기억 속에 있는 한양의 모습은 그야말로 시골 같은 분위기였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내 계획이 성공해서, 언젠가 내가 대한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많은 돈을 쏟아부어야만 21세기 서울의 모습을 구현할 수 있을 듯하다.

‘지금의 뉴욕도 한 번에 뚝딱 만들어진 건 아닌 셈이니까.’

무려 백여 년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씩 개발되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제2차 세계대전까지 또 40년간을 크게 성장하게 될 테고.

한양을 아니, 대한민국을 재건하게 되면 그만한 시간을 뛰어넘어가며 발전시켜야 한다.

몇십 배는 더 힘들겠네.

그렇게 나는 아주아주 먼 미래를 상상하며, 1900년대 뉴욕의 모습을 슬쩍 훑었다.

시간이 흐르고.

내가 탄 마차는 우리가 앞으로 석 달이나 묶을 J&J 호텔에 도착했다.

“왕자님, 짐은 나중에 마저 풀고 일단 밖으로 나가시지요.”

“알겠네.”

호텔에 잠시 들른 후, 지아니니와 함께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뉴욕의 금융가였다.

내 목적은 1907년 금융공황에서 한탕 잡으려는 거고, 지아니니는 선진금융기법을 배우고 싶어 했으니까.

둘의 뉴욕 방문 목적이 같았기에, 우리는 별다른 이견 없이 호텔 건너편에 있는 한 증권사 건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휴, 제때 도착했군.”

지아니니와 나는 막 들어온 제임스&윌 증권사 건물 내부를 둘러보며, 월가에 분위기를 슬슬 만끽하였다.

* * *

“제임스. US 스틸 500주, 시장가로 빨리 매수해 주게.”

“아니. 왜 이리 느려 터졌어? 내가 저놈보다 먼저 왔잖아. 내 명의의 GE 주식을 전량 매도해 달라니까, 뭐 하는가?”

“아메리칸 타바코 55주. 3.35달러에 콜?”

“제임스, 아까 주문했던 US 스틸 500주. 취소네. 뭐 이미 사들였다고? 이런, 우라질. 이럴 때만 행동이 빨라요.”

막 들어간 뉴욕의 증권사 지점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 시장 같았다.

고성이 오가는 것은 기본.

삿대질은 옵션이요.

쌍욕 박으며 입으로 쌈박질하는 광경도 가끔 보였다.

“자네가 추천한 베이스 광업회사 말이야. 요즘 따라 왜 이리 주가가 내려가는 건가? 혹시 내게 엿먹이러고 이 주식을 추천한 것은 아니겠지?”

“아니, 씨발. 보험사들은 뭘 하길래 이리 굼벵이처럼 주가가 기어. 이쯤 하면 바짝 반등할 때도 되지 않았어? 내가 가지고 있는 주식의 5할 이상은 보험사 주식이라고. 계속 이러다간 난 죽어. 아주 골로 간다고.”

“이 왕자님. &&@$#, *#@$##@.”

바로 옆에 있는 지아니니의 말도 잘 안 들릴 정도로 장내는 혼돈, 그 자체였다.

“······.”

“······.”

소란스러운 증권사 내부 분위기에, 나와 지아니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적응하지 못했다.

대지진 때 창고에서 이재민들의 대출을 진두지휘했던 지아니니지만, 뉴욕 증권시장의 시끄러움은 전자와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시끄러웠기에 당황하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이렇게 난장판일 줄은 몰라서 당황스러웠고.

“좋았어! 이대로 조금만 더, 한 이 년 정도면 이렇게 계속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백만장자도 꿈은 아니겠군.”

여기저기서 탐욕이 섞인 발언들이 오갔다.

“아, 안 돼. 5%만 더 떨어지면 완전 청산 당한다고. 씨발, 이 주식 데이비드 네 놈이 추천했지! 데이비드, 네놈이 물어내!”

반대편에서는 끝없이 절망하고.

상반된 두 감정이 공존하는 이곳.

아, 드디어 ‘진짜’ 뉴욕에 온 기분이 확 든다.

“잠시 밖으로 나가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아니니의 팔을 잡고 그를 증권사 건물 밖으로 끌고 갔다.

“어휴, 씨발.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지아니니는 나오자마자, 제임스&윌 증권사 현판을 질린 듯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팔짱을 끼며 지아니니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래. 뉴욕의 진짜 첫인상이 어떤가?”

“샌프란시스코와 분위기가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게.”

“X 같습니다. 기가 쫙 빨려서 지금 너무 피곤합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군요.”

나는 피식 웃으며 지아니니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는 천상 상업은행이나 운영하고 살 팔자로군.”

“예? 그게 무슨 뜻인지······.”

무슨 뜻이긴.

5분도 채 안에 있지 않았는데 벌써 지친다는 것은 이런 분위기와 맞지 않는다는 뜻이지.

‘나는 오히려 즐거운데, 지아니니 너는 눈그늘이 벌써 광대까지 내려왔잖아.’

처음엔 당황하긴 했지만, 이젠 흥분이 가시질 않는다.

내게 커다란 기회가 찾아온 것만 같았으니까.

안에는 앳돼 보이는 청년부터.

점잖은 노년의 신사.

아기를 안고 있는 주부.

금융은 하나도 모를 것 같은 아가씨까지.

각양각색의 뉴욕시 시민들이 현금을 제 손에 꽉 쥐며 주식을 거래하고 있지 않았던가?

‘전형적인 고점의 신호지.’

현재는 뉴욕시만 이런 분위기지만, 딱 20여 년 뒤에는 미국 전역이 이리 변한다.

그땐, 진짜로 꼭대기에 왔다는 뜻이겠지.

떨어지는 골짜기도 올해보다 훨씬 더 깊을 거고, 그만큼 오래 갈 것이다.

‘탐욕. 끝없는 탐욕의 끝엔 나락만이 기다리고 있지.’

1907년 공황은 미국의 후진적인 금융 시스템 때문에 발생했지만.

그 이면에는 이런 미국인들의 탐욕도 한몫했다.

미국 경제가 장기적으로 호황을 이어 가며, 투기 자금이 증시로 몰려오고 있었으니까.

나는 이 혼란 속에서 내 재산을 대거 늘려 갈 거다.

계획대로만 되면, 단숨에 미국 최고 부호 중 하나가 되겠지.

“이대로 돌아갈 텐가?”

나는 힐긋 지아니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상태로 보아선 뉴욕에 오래 있으면 제 명에 못 살고 죽을 것만 같았으니까.

“아닙니다. 뉴욕에 온 지 겨우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어찌 돌아갑니까?”

이에 지아니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긴, 그렇긴 하군.”

나는 말을 마치고, 증권사 건물 반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에 지아니니가 급히 나를 따라왔다.

“이 왕자님,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내 아는 사람이 뉴욕에 있네. 이동할 기운이 남아 있다면, 나와 함께 그자에게 가세나. 우리보다는 뉴욕에 관해 해박할 것이니 도움이 될 것일세.”

지아니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여행이나 출장은 현지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이 정석이니까.

그래야 사기도 덜 당하고, 쉬이 지나갈 수 있는 명소도 알게 된다.

“아, 다만. 그자를 만나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할 말이 있네.”

눈을 가늘게 뜨며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지아니니도 나를 따라 목소리를 작게 내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날 쳐다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이 왕자님 말씀을 들으면 손해 보는 법은 없었으니까요. 왕자님의 조언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오늘 만날 자와 이야기할 때는 부디 말을 신중하게 하게나.”

이에 지아니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그자, 생각보다 입이 아주 가볍거든.”

“아······.”

지아니니가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반쯤 똥 밟은 얼굴 같기도 했는데, 이는 지아니니가 입이 가벼운 남자를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천성적으로 마피아 같은 남자였다.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살아왔던 지아니니는 당연하게도 입 또한 무거웠다.

그래서 자신과 정반대되는 자를 만난다고 하니, 표정이 살짝 어그러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지아니니를 보며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

“자네를 위해 하는 말이니, 명심하게. 입을 아주 조심하게나.”

“예.”

* * *

“이 왕자님. 반갑습니다. 이리 빨리 뉴욕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만나고자 한 이는 허스트였다.

허스트 언론 그룹의 총수로, 그는 보헤미안 클럽에서 처음 만났었다.

그때의 인연을 계기로 이번 뉴욕 여정에서 허스트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반갑네. 내 이곳에 일이 있어서 한번 들르게 되었네.”

“아, 그렇군요. 실례지만, 옆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뱅크 오브 이탈리아의 은행장인 아마데오 지아니니네.”

“아! 그분이 이분이시군요.”

“그래. 지아니니 은행장, 여긴 허스트 언론재단의 총수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네.”

“만나서 반갑소.”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킥킥- 이 왕자님께서 재미있는 분을 또 한 분 데리고 오셨군요.”

XOXO.

가십보이가 살짝 거슬리게 웃는 소리를 내며, 지아니니를 한번 위아래로 스캔한다.

그 후, 허스트는 흥미가 다시 떨어졌는지 내게 눈길을 돌렸다.

“아, 이 왕자님.”

“말하게.”

“사실 제가 선약이 있어서 오늘 이 왕자님과 오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래?”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왔는데, 정보 교환도 없이 다시 헤어지게 생겼으니까.

“허스트 사장님.”

“들어오게.”

허스트의 비서로 보이는 인물이 허스트의 집무실로 급히 들어왔다.

그러곤 무언가를 작게 귓속말로 보고했다.

이에 허스트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꿈틀거렸다.

“이 왕자님. 혹시 오늘 저녁에 선약이 있으십니까?”

“자네를 만나러 왔는데 어찌 선약을 잡는단 말인가? 내 저녁과 내일 아침까지의 일정은 모조리 비워 두었네.”

허스트가 밝게 웃으며 손뼉을 ‘착’ 하고 쳤다.

“잘 되었군요. 사실 이 왕자님이 오신다는 소문에, 제가 오늘 선약 잡은 분께 제안했습니다.”

“제안이라면? 무슨 제안을 말하는 건가?”

“멀리서 오신 이 왕자님을 한번 소개해 드리고 싶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아주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오.

허스트와 교류하는 자면, 꽤 상류층일 것 같은데.

나는 지아니니와 슬쩍 시선을 교환한 다음, 다시금 허스트에게로 고개를 돌려 정체불명의 손님에 관해 물었다.

“그자의 이름이 누군가? 혹시 내가 아는 자인가?”

허스트가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이내 아리송한 답변을 남겼다.

“만나진 않으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워낙 유명한 자니 아실 수도 있겠군요. 미리 알려 드리면 재미없으니 이따가 직접 서로 명함을 나누시지요.”

뭐야.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허스트가 재빨리 뒷말을 이어 갔다.

“아, 이 왕자님께서 많이 궁금하신 것 같으니 한 가지 힌트를 드리지요.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그를 두고 뉴욕의 황태자라 부릅니다.”

아!

누군지 알겠다.

이 시기 뉴욕의 황태자라면, 그자밖에 없으니까.

‘드디어 만나게 되는군.’

그나저나 이자와 나,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뉴욕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자는 대표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소문이 파다한 놈인데 말이야.

‘만나 보면 알겠지. 그자의 진짜 실체를 말이야.’

* * *

“어이쿠. 얼굴이 더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아닐세. 허스트 대표야말로 신수가 훤해졌군.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요즘 뉴욕이 많이 조용하지 않습니까?”

“하긴, 재미난 사건이 많이 터져야 자네 신문이 많이 팔릴 테니까. 자네로선 지금처럼 조용한 뉴욕이 더 별로겠군.”

허스트가 낯선 이와 하하 호호 웃으며 악수하다가 이내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아, 소개해 드립니다. 여기 계신 분은 대한제국에서 오신 이강 왕자님이십니다. 이 왕자님. 이쪽은 왕자님께서도 아실지 모르겠지만······.”

“모건 주니어군.”

“오! 모건 씨를 알고 계셨군요.”

허스트가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내며 나와 JP 모건 주니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에 나는 재빠르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갑네. 우리 잘 지내 보도록 하세나.”

< 뉴욕의 지배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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