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이그, 그 이후 >
“회의에 참여한 특사 사칭범들은 어떻게 처리할 생각이오?”
전 총리이자 사이온지 긴모치의 평생 맞수인 가쓰라 다로.
그가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뜨며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말씀해 보시오, 총리.”
“······.”
가쓰라 다로는 대조선 강경파 파벌의 우두머리였다.
그는 조선의 병합에 유보적이었던 현 총리 사이온지 긴모치의 외교정책을 줄곧 비판해 왔는데,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현 사태를 즐겼다.
“말이 없구려. 이토 통감! 그렇다면 이번엔 통감인 그대가 한번 답변해 보시오.”
가쓰라는 불편한 기색을 대놓고 표출하며 고개를 살며시 이토에게로 돌렸다.
이토의 직책이 바로 조선인들을 관리하는 조선 통감이었기 때문이다.
“흠흠, 특사 사칭범들은 우리 일본제국을 모욕했습니다. 당연한 이치지만, 그들은 곧 법정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랜만에 옳은 말을 하는구려.”
이토 히로부미는 비아냥거리는 가쓰라를 무시한 채, 특사 사칭범들의 처분 문제를 동료 의원들에게 설명했다.
“모레, 한양에서 궐석 재판이 열릴 예정입니다. 그때 이 사건을 상세히 다룰 생각입니다.”
궐석 재판은 피의자 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재판을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쇼를 하겠단 뜻이다.
이토는 이 사실을 동료 의원들에게 밝히며, 그들의 분노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고자 노력했다.
“통감. 그대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지만, 한마디 하겠소. 특사 사칭범들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할 것이오.”
가쓰라 다로가 미리 준비해 둔 종이 뭉치를 제국의회 본회의장 바닥에 내던졌다.
“그놈들 때문에 이번에 우리 일본이 국제사회에서 아주 단단히 망신을 당했소. 어느 국가 거를 것 없이 말이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등.
각국의 언어로 길게 작성되어 있던 신문 기사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하나같이 일본에 안 좋은 이야기들뿐이었다.
‘악의 제국’이라느니.
‘절대 악’이라느니.
듣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단어들이 가득했기에, 총리와 통감은 눈을 찌푸리며 이를 애써 외면했다.
가쓰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재차 강력처벌을 주문했다.
“반드시 응징해야 하오. 이대로 두면, 제2, 제3의 헤이그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소. 참석자 전원에게 사형을 구형해 본보기를 보여 주시오. 내 말 알겠소?”
민주사회에서는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삼권을 분립한다.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가쓰라 다로는 이를 무시하는 행위를 대놓고 의회에서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이럴 땔수록 감성보다는 이성에 기반을 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저 머저리가 이때다 싶어서 날뛰기 시작하는군.’
이토는 이런 가쓰라 다로가 싫었다.
그는 군국주의를 신봉하며, 자꾸 군인 출신들을 정치인으로 기용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런 흐름이 결코 일본제국에 도움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가쓰라 다로를 막기 위해서는 자신처럼 깨어 있는 정치인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토의 평소 신념이었다.
‘이강 그놈 때문이야. 저 머저리가 펄펄 날뛰는 것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상대 파벌인 가쓰라 다로가 다시금 총리 자리를 꿰찰 수도 있기에, 이토는 이 일을 최대한 빠르게 수습하려고 했다.
“알겠소. 내 사법부에 따로 연락을 넣어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 세 사람 모두에게 사형을 구형하도록 이야기해 두겠소.”
“잠깐만! 잠깐만!”
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가쓰라 다로가 번쩍 손을 들며 외쳤다.
“본인이 알기론 이번 사태의 주동자는 세 명이 아니라 네 명이라고 들었소.”
“······.”
“설마 가장 중요한 한 놈의 처리를 쏙 빼고, 그냥 넘어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이토가 골이 아픈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오른손으로 만지작만지작하며 가쓰라 다로를 노려보았다.
이에 가쓰라는 지지 않고 그 큰 눈을 껌뻑이지도 않으며 이토와 눈싸움을 시작했다.
“조선의 둘째 왕자 이강, 그놈은 어떻게 처리할 것이오?”
두 거물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설마 이대로 그냥 넘어가려는 것은 아니겠지?”
“빙빙 돌려 말하지 마시오. 원하는 것이 뭐요, 가쓰라 다로 의원.”
가쓰라 다로는 제 오른손 검지를 치켜들며 한 단어를 내뱉었다.
“법.치.주.의.”
“······.”
“죄가 있으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오. 아무리 그자가 왕자라고 해도 말이오. 그자는 선을 넘었소.”
이토 히로부미가 콧방귀를 뀌며 제정신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미칠 파장은 생각이나 하고 그딴 말을 내뱉는 것이오?”
“그딴 말?”
“내 과격하게 말하긴 했지만, 맞는 말이 아니오? 이강 왕자에게 사형이라도 구형하자는 말이오?”
“그래, 사형. 내가 말하고 싶었던 단어로군.”
“미쳤군.”
이토는 폭주하는 가쓰라 다로를 향해 한껏 비웃으며 썩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고 있군.”
“우리 대일본제국을 위해서는 내 한 몸 미칠 수도 있지. 지금 아무 조처도 하지 않으면 이강 그자는 계속 날뛸 것이오. 그렇지 않소?”
“그렇다고 사형을 구형한들 뭐가 달라진다고? 이강, 그는 현재 유럽에 있소만. 더욱이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그대 눈엔 안 보이오?”
이강이 일본 혹은 조선에 있었다면, 강경론자들의 주장대로 강력한 처벌을 내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강은 현재 서구에 있다.
네덜란드 정부에, 미국 정부에 이강의 신병을 넘겨달라고 요청한다면······.
그들이 이강을 송환할까?
‘어림도 없는 일이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짓을 병신처럼 계속 주장하다니······.
이토는 그런 가쓰라를 보며 세상이 말세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저자가 다음 총리로 거론되는 것은 우리 일본에 있어 재앙이다.’
이토가 가쓰라에 관한 재평가를 제 머릿속에 하고 있을 때.
가쓰라가 다시 한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 입 밖으로 꺼냈다.
“이강이 언제까지 유럽에 있으리라 생각하오? 돌아오지 않는다면 강제로 끌고 올 수도 있소.”
뭐?
왕족을 납치한다고?
그것도 아시아가 아닌 구미 열강에서?
성공했을 때는 둘째 치고, 실패했을 때만 가정해도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미친 새끼였네.’
이토는 머리를 굴렸다.
현재 가쓰라는 자신에게 유리한 정국을 놓치고 싶지 않아 보였다.
그렇기에 신성한 의회에서 저런 무리수를 계속 두는 것이겠지.
이토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가쓰라의 도발에 대응했다.
“망상은 머릿속에서나 하시오. 가쓰라 의원.”
“망상이라니, 어찌 그런 무도한 말을······.”
조선인들은 밟으면 밟을수록 더 강력하게 저항한다.
그래서 이토는 유화 정책을 통해 조선인들을 위에서부터 회유하고자 했다.
한 놈씩.
한 놈씩.
일본 편으로 만든 후, 그 뒤에 천천히 두 나라를 하나로 만들면 큰 저항 없이 꿀꺽 삼킬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반면, 멍청한 가쓰라는 이토와 반대 생각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 저딴 말을 지껄이는 것이겠지.
“여기서 발언했던 내용이 조선인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을 크게 자극할 것이오. 그건 전 총리인 그대가 더욱더 잘 알 텐데?”
“여전하군. 조선인들 눈치나 살랑살랑 보는 것은.”
이에 가쓰라 다로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대며 이토의 속을 긁었다.
“뭐요?”
“왜, 내 말이 틀렸는가? 사실 이번 사건의 책임자는 하야시 외무대신에게도 있지만, 통감 그대에게도 있소만?”
“그만.”
가만히 지켜보던 사이온지가 이내 고성을 버럭 질러 대며 둘 사이 다툼을 일시적으로 멈추게 했다.
“우리까지 싸워서야 되겠소?”
평소 사이온지는 논쟁을 꺼렸다.
그는 이 기나긴 말다툼을 서둘러 종결하고자 했다.
“이렇게 합시다. 이강 그놈을 이대로 둘 순 없으니까, 가쓰라 의원의 주장대로 의왕의 직위를 박탈하도록 합시다.”
“총리!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통감. 이리 대응해야 국제사회에 우리들의 의지를 알릴 수 있소.”
“······.”
이토가 입을 다물자, 사이온지는 계속하여 추가 대책을 쏟아내었다.
“더불어 네 특사의 여권도 강제로 만료시키고 각국에 송환 요청을 합시다. 압박하는 모양새라도 보이자는 말입니다. 아! 이토 통감. 그대는 퇴위 전 조선왕을 겁박하여 칙서 하나를 작성하도록 하세요. 이강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게 조선왕을 설득하란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가쓰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또 더 없냐는 눈빛으로 이토와 사이온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조선 측 관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협조하라고 이르세요.”
“알겠습니다. 귀비에게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아들에게 왕세제 자리를 던져 주면 귀비가 잠시나마 우리의 말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죄의 구형은 얼마로 할 것입니까?”
가쓰라의 물음에 사이온지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기한 위리안치형으로 합의를 보도록 합시다.”
“허허, 기어코 사형 구형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까?”
“이래 봬도 이강은 왕자입니다. 의왕 작위를 거둬들인다고 해도요. 이토 통감의 주장대로 앞으로 미칠 파장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쯧쯧.”
가쓰라가 혀를 끌끌 차며 회의장을 떠날 준비를 했다.
“내가 총리 자리에 앉아 있었으면 그리 처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전처럼 여우 사냥을 은밀히 지시했을 것인데······.”
금기어인 여우 사냥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온건파 의원들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제정신이냐는 눈빛으로 가쓰라를 바라보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허허실실 웃었다.
“농담이오. 다들 내 말에 그리 촉각을 곤두세우면 어디 가서 내 말 한마디라도 쉬이 꺼낼 수 있겠소?”
가쓰라는 어깨를 으쓱한 후, 본회의장을 나섰다.
이토와 사이온지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통감.”
“말씀하시지요. 총리대신.”
“오랜만에 본국에 온 것 같은데, 내 따로 할 말이 있소?”
“우리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소.”
사이온지와 이토는 그렇게 둘이 비밀 대담하게 되었다.
폭주하려는 가쓰라를 견제하기 위해선 둘의 지혜를 하나로 모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황제 폐하, 전격 양위 발표!』
『27일, 황위를 폐하의 맏아들이자 황태자인 이척 전하에게 황위 넘길 예정.』
『[사설] 황상의 진심인가, 아니면 일본제국의 농간인가? 그 진실은 한국 통감인 이토만 알 것이다.』
“이 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눈앞이 캄캄하군.”
이석영은 흔히 오성과 한음으로 알려진 이항복의 후손이었다.
그와 그의 형제들은 명동 일대부터 양평까지, 수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대한제국의 거부였다.
“말세야. 말세.”
이석영은 느끼고 있었다.
오백 년 역사를 가진 이 나라의 끝이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그것도 선조들이 한평생 무시해 온 왜놈들에 의해서 종묘사직이 무너지게 될 것 같았다.
“나리.”
“말하게.”
“풍문에 의하면 왜놈들이 토지 조사를 준비 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석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그렇겠지. 우리 조선의 물산을 빼앗으려면, 일단 이 나라의 곳간부터 파악해야 할 테니까.”
이석영은 그 앞에서 굽신거리고 있는 최영세를 바라보며 물었다.
“영세야.”
“예, 나리.”
“지금 우리 집 아래에 있는 농지 말이다. 얼마 정도 있는지 아느냐?”
“글쎄요. 워낙 넓어서,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것은 땅문서를 전부 확인해야 알겠지요. 혹시 왜놈들 때문입니까? 그들이 토지 조사를 시행할 수도 있으니 미리미리 준비하시려는 것입니까?”
이석영은 가타부타 다른 말은 꺼내지 않고 다음 말을 명령했다.
“당장 알아보도록 하여라.”
“예.”
“아, 그리고 형님과 아우들에게 이곳으로 잠시 와 달라고 전하거라.”
“예.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이석영의 시선은 다시금 신문 쪽으로 옮겨 갔다.
퇴위 소식 바로 옆에 황제의 두 번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서술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어 보이는군.”
나라가 망하고 있지만, 완전히 망해 가고 있지는 않았다.
특히 저 멀리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의친왕 이강은 이석영이 생각했을 때, 굉장히 영특해 보였다.
‘자신의 세력을 모으고 있다. 훗날을 대비하고 있어.’
지난번 왜놈들의 조치로 외국으로 나가는 길이 끊겼는데도 불구하고, 의왕은 은밀히 제 사람을 보내 미주 이민 권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번에 헤이그에서 연설한 것도 그렇고, 그의 수하들이 이 한반도에서 활동하는 것도 그렇고.
의왕은 확실히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듯했다.
그것이 단기적인 계획일지, 아니면 자신이 죽을 때까지 행해지지 않을 긴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말라 죽어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아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이상, 의왕에게 기댈 수밖에.’
앞으로 이 나라의 백성들은 점점 더 빈곤해질 거다.
본격적으로 왜놈들이 이 나라를 통치하기 시작한다면, 지금껏 보여 왔던 행패는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할 테니까.
‘미국으로 간다.’
본래는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후, 그곳에서 일본에 대항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의왕이라는 정신적 지주 옆에서 독립활동을 한다면 좀 더 빨리 일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고, 형님. 날 불렀소?”
이석영의 동생 중 하나인 이시영이 막 대문을 넘었다.
이석영은 조용히 동생을 부르며 자신이 계획하고 있던 미래를 동생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헤이그, 그 이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