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61화 (61/294)

< 헤이그, 그 이후 (2) >

“자자, 많이들 기다리셨지요? 식객분들께서 드실 따끈따끈한 식사가 나왔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숙박업이 발달하지 않았다.

지역 간 왕래가 잦지 않아서다.

객잔이나 여각같이 여행자들이 따로 머무는 시설은 한양이나 평양 등 큰 도시에나 존재했는데.

먼 거리를 오가는 상인들이나 선비들은 해당 지역 내 유지들의 집에 머물며 하루를 신세 지곤 했다.

“이 집 인심 보소.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하네그려.”

막 수저를 뜨고 있는, 한양에서 포목점을 운영했던 윤성환만 해도 그랬다.

윤성환 역시 여각이 아닌 경주의 한 부잣집에 머무르며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하고 있었다.

“아이고. 최 진사께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 주시오.”

“내, 내 말도! 꼭 전해 주게.”

“거, 윤 씨. 아까 하던 말이나 좀 계속해 보시오. 영석대감이 가지고 있는 땅을 판다고? 그 형제들도 그렇고?”

이곳에는 윤성환 말고도 다수의 식객이 있었다.

다들 전국에서 왔기에, 끼니를 때우며 전국에서 돌고 있는 정보를 서로 교환하곤 했다.

윤성환이 과메기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으며, 하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렇소. 그들이 보통 부자요? 명동을 포함한 상당수의 한양 땅이 전부 그들 소유요.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시장에 내놓겠다니까, 도성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그 많은 땅을 전부?”

“이 사람이 속고만 살았나? 글쎄, 좋은 땅을 선점하려고 다들 새벽부터 그 집 대문 앞으로 모여들었다니까?”

윤성환은 남은 국에 밥을 말며,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정보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소문에는 달러나 엔화, 파운드화같이 외국돈을 가지고 오면 조금 더 값을 할인해 준다고 했소이다. 다들 관심이 있으면 당장 도성으로 올라가 보시오.”

“외국돈을 우대한다고? 보아하니 이 땅을 떠날 생각이구먼.”

“그럴 수도 있겠지. 높으신 양반들이 정보 습득 하나는 끝내주니까. 아마도 우리가 모르는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겠소?”

최진사 댁에서 일하던 산범은 식객들에게 점심 식사를 나누어 주며,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열심히 경청했다.

그리고는 머릿속으로 주요 정보를 암기해 나갔다.

‘이 소식은 꼭 나리께 알려야겠다.’

산범의 고용인인 최현식은 최진사로 불리기도 했지만, 최부자라는 호칭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한양에 있는 이석영네만큼이나 땅이 많았기에 경주 최부자로 불렸는데, 최현식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 지역 내에서 명망이 굉장히 높았다.

보통 흉년 때, 주변 땅을 사들이며 곳간을 불렸던 부자들과의 행보와는 자못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식객들에게 밥을 융숭히 대접하며, 경주 주변에서는 쉽게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선점했다.

바로 지금처럼.

“나리! 나리!”

점심상을 다시 정리한 후 산범은 재빨리 최진사의 사랑채로 이동했다.

오늘 들은 이야기를 꼭 최현식에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 * *

“글쎄 말입니다. 한양에 사는 이 씨 형제들이 알짜배기 땅들을 모조리 처분하고 있답니다.”

최현식은 산범이 보고하는 정보를 머리에 저장하며 고민했다.

“흠······.”

그는 회상했다.

비슷한 소식을 지난주에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거론되었던 인물은 순천에 살았던 만석꾼 김 씨였는데.’

만석꾼은 일 년에 수입이 만석이나 되는 거부를 말한다.

이석영, 최현식 등이 만석꾼에 속했는데, 천석꾼은 몰라도 만석꾼은 전국에서 백 명이 채 안 되었다.

‘수원에 사는 거부 윤 씨도 그렇고, 충주에 살던 또 다른 만석꾼 한 씨도 그렇고. 다들 가산을 전부 처분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고 있군.’

21세기로 따지면 100대 재벌 회장 중 셋이 가산을 전부 정리하고 외지로 떠난 셈이었다.

“산범아.”

“예, 대감마님.”

“첫째부터 넷째까지, 모두 사랑채로 데리고 오너라.”

“예.”

최현식은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지난 2년 전부터.

식객들에게서 들려왔던 한 정보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는데.

방금 그에 관한 답을 자신의 머릿속에서 막 정했기 때문이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최현식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첫째 최준부터 최윤, 최완, 최순까지, 모두 자신을 닮아서 그런지 몰라도 머리가 명석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준아, 이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으로 생각하느냐?”

“······.”

최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느 조선인과 다르지 않게 유학을 신봉했고, 유학에서 충은 효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다.

그랬기에, 이 나라가 멸망의 길로 향한다는 걸 밝히고 싶진 않았다.

“다들 말하지 않아도 대충 예상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아비는 특단의 조처를 내리려고 한다.”

최현식의 입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여기 모인 넷 중 셋을 저 먼 미국까지 유학 보낼 것이라고 천명한 거다.

“일본이 아니고 태, 태평양 건너 미국에 말입니까?”

“그래.”

경주에서 일본은 별로 멀지 않았다.

그렇기에 셋째 최완은 가까운 일본으로 잠시 유학 갔다 오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은 달랐다.

최 씨 형제들은 어안이 벙벙한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연신 눈을 껌벅였다.

“진심이십니까?”

“그럼 이 아비가 허언을 하겠느냐?”

최현식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소유하고 있던 농토의 8할 이상을 처분한 후, 여기 앉아 있는 아들들에게 나누어 줄 것이라고 밝혔다.

“아, 아버님.”

“따, 땅을 전부 팔게 되면······.”

“걱정하지 말아라. 선산은 남겨 둘 것이니까. 제사는 지내야지.”

최현식은 유학자였기에 자신만은 이곳에 남을 작정이었다.

“넷 중 하나는 이곳에 남아야 하느니라.”

앞서, 사 형제 중 셋만 유학을 보내겠다고 했다.

한 명은 미국이 아닌 이곳 경주에 남길 생각인데 이는 최현식이 잘못되었을 때, 그때를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래, 누가 이곳에 남아 이 아비와 함께 선산을 지킬 것이냐?”

“제가 남겠습니다.”

둘째인 최윤이 네 자식 중 가장 빠르게 손을 들었다.

“저희 중 소자가 제일 머리가 나쁩니다. 고향에 머무르며 선산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최현식은 최윤의 답변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 원한다면 그리하여라. 마음 같아서는 첫째를 남기고 싶지만, 윤이 네 말대로 준이의 능력을 썩히게 둘 수는 없으니까. 둘째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당장 연해주로 떠날 준비를 해라.”

최현식은 그간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지만, 준비는 철저히 해 두었다.

아들 넷의 여권을 전부 발급해 둔 것만 해도 그렇다.

한양에서 발급 심사를 까다롭게 하기 전에, 전부 끝냈다.

전부 식객들이 미리 알려 준 정보 때문이다.

최현식은 다른 식객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자식들에게 만나야 할 인물을 알려 줬다.

“연해주에서, 김덕배라는 자와 이민우라는 자를 만나거라.”

이민우와 김덕배는 조선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강의 사람들이다.

이민우는 주로 이민자들을 모집하는 모집책 역할을 하고 있고.

김덕배는 연해주까지 이동시킨 후, 미주로 가는 배에 태우는 접선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최현식의 명령에 최부잣집 삼 형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큰절을 올렸다.

“소자, 동생들과 함께 미국에 잘 다녀오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부디 무탈하셔야 합니다.”

“끼니는 거르지 마시고, 꼭 챙기십시오.”

밥심으로 사는 민족답게 막내 최순은 제 아비에게 끼니를 꼭 챙기라고 부탁했다.

최현식은 만족하는지, 눈물을 글썽이며 제 아들을 바라보았다.

머나먼 타지로 보내는 것이었기에, 제 의지와는 다르게 눈가가 촉촉해진 것이었다.

* * *

“도산!”

안창호는 이위종과 함께 뉴욕에 갔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이후, 교육 사업 때문에 다시금 대한제국에 방문했는데.

그의 오랜 동지라 부를 수 있는 양기탁, 신채호, 이동휘 등이 평안도 남포항에서 안창호를 반겼다.

“멀리서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자자, 여독부터 푸세나.”

다들 안창호를 반기며 술을 권했다.

안창호는 잔을 비우며, 현재 돌아가고 있는 국내정세부터 파악했다.

“한양은 어찌 돌아가고 있는가?”

“이 나라야, 늘 그렇듯 간신들과 매국노가 판치고 있지.”

“풍전등화일세.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나오네.”

“진짜 우리가 나서야 하네. 이대로 두었다가는 진짜 나라가 망할 것일세.”

안창호가 남포에 모인 동지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다들 마음의 준비는 다 끝냈다는 말인가?”

“그렇지.”

“이 몸 하나 바쳐 이 나라를 구할 준비가 되었네.”

이동휘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안창호를 바라보며, 그에게 현 상황을 말해 주었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대로 이 나라를 구할 새로운 단체를 만들도록 하세나. 이름은 여기 윤강(양기탁) 선생이 제안했던 대로 신민회가 좋겠군.”

안창호 옆에 앉아 있던 양기탁이 급히 입을 열었다.

“아, 도산! 그나저나 그 소식 들었는가? 영석대감께서 미국으로 떠나신다더군.”

“영석대감께서? 나는 언질을 받지 못했는데······.”

안창호는 미주 내에서 영향력이 이강 다음으로 큰 인물이었다.

이석영 정도 되는 거물이면, 안창호에게 미리 연락할 만도 한데.

안창호는 이를 듣지 못했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결정하신 것 같네. 아마, 의왕 전하 때문이겠지.”

“아······.”

안창호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강의 명성은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까.

“큰일일세.”

이동휘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양기탁과 안창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활동자금을 모으려면 영석대감 같은 분들의 후원이 절실한데 말이야. 지금이라도 대감 댁에 방문해서 떠나시기 전에 후원을 요청해야 하지 않겠나?”

다들 이동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체 운영을 위해서는 활동자금이 필요하기 마련이니까.

턱-

그때였다.

안창호가 서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게 뭔가?”

이에 안창호는 가지고 온 달러 뭉치를 꺼내며, 여기 모인 동지들에게 돈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내리신 금일봉일세.”

“금일봉?”

“그래. 의왕 전하께서는 교육과 후학양성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시네. 마치, 우리처럼 말이야.”

자리에 모였던 이들은 안창호가 건넨 달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진짜 이게 다 달러인가 의심한 거다.

그 정도로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거······.”

성격이 급한 이승훈은 그 자리에서 달러가 얼마나 많은지 세어 보기도 했다.

“이만 달러나 되는군. 생각보다 큰 금액인데, 이리 큰돈을 받아도 괜찮은가?”

안창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일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는 미국에서 손에 꼽히시는 거부시네. 뛰어난 두뇌와 빠른 판단력으로 매시간 가지고 계신 돈을 불리고 계시지.”

안창호는 제 재산이 아닌데도 무언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이강과 사이가 긴밀해졌기 때문이다.

“이 큰돈을 자네에게 맡겼다고?”

“그래. 이건 내가 받은 자금 중 일부일세.”

이강은 안창호에게 후학 양성 자금을 맡겼다.

안창호는 일부를 사용해 교민들을 위한 초·중·고등학교를 샌프란시스코에 세웠으며.

남은 돈은 대한제국과 만주에 교육기관을 건립하며 모조리 사용할 예정이었다.

“그나저나, 도산······ 미국에 있을 때 우리 신민회의 통용장정을 만들었다고 들었는데, 그것이나 한번 보세나.”

“여기 있네.”

안창호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신채호는 안창호가 건넨 서류를 읽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항목은 무엇인가? 민주공화국이 아니고 입헌군주국을 꾀한다고 적혀 있지 않은가?”

신재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의왕 때문에 이런 통용장정 조항을 만든 것인가?”

“그렇다네.”

“허허, 이 사람.”

모임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안창호는 자신이 어찌 이런 통용장정 항목을 작성했는지 급히 그 이유를 설명했다.

“의왕은 다른 분들과는 다르네. 영왕이나 새 황제와는 결이 다른 분이실세.”

“······.”

“물러나신 황제 폐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분일세. 절대권력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나를 믿어 보게나.”

다들 조용하다.

고종의 말도 안 되는 권력욕에 다들 질려 있는 상태였기에, 안창호의 호언장담을 다들 믿지 못했다.

“정 못마땅하면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가세나. 거기서 의왕 전하를 뵙고, 이야기를 나누세. 그리하면 자네 마음이 금세 바뀔 것이네.”

안창호가 다시금 동지들에게 호소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나를 한 번만 믿어 주게나.”

신채호와 양기탁 등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로 안창호의 영향력은 이 단체에서 상당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최근에 보도된 기사도 그들의 마음을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헤이그에서 의왕 이강이 큰일을 해내지 않았던가?

“알겠네. 아, 강조하지만 이 금일봉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세.”

물론.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과는 정반대로, 이강이 건넨 활동자금도 한몫했다.

금일봉만 받고 입을 싹 닫기에는 그 금액이 너무나도 컸으니까.

* * *

헤이그에 머물며, 나는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교차 점검을 했다.

『뉴욕증시, 지난주 혼란을 이겨 내고 반등 성공.』

나흘 전, 미국의 대표 인덱스인 다우존스 산업지수가 크게 폭락했다.

심리적 저항선이라고 불리는 70선이 무너진 것.

벌써 고점에서 30%나 빠진 것인데, 안타까운 건 아직도 바닥이 아니라는 거다.

‘1907년 금융공황이 한창일 때, 막 50선을 뚫었다고 하니까.’

그때가 찐바닥이고, 지금이 70 언저리니까.

무릎 정도 왔다고 보면 되겠네.

‘리버모어는 내 조언을 이해했는지, 너무 무리하지 않고 적절히 수익을 올리고 있군.’

전보를 통해 꾸준히 관련 소식을 보고 받고 있다.

지난주에 일어났던 대폭락이 있기 전까지, 약 4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니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더 많겠네.

나는 흐뭇하게 다른 외신 경제면을 정독하다가 다음 기사를 발견했다.

『미국 연방정부, 내년도 미국 경제는 여전히 고속성장이 가능하다고 밝혀. 유럽의 일부 전문가들은 이에 고개를 갸웃하며 의구심을 표명.』

뭐, 증시가 고점 대비 30% 빠졌으니.

빠질 만큼 다 빠졌다고 생각해서 이런 대담을 했겠지.

아니면, 외국인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 발표를 했을 수도 있겠고.

‘좀 더 유럽에 있어야겠네.’

아직 찐바닥이 아니다.

괜히 옆에서 구경하다가 진짜 위기가 닥치면 불똥을 맞을 수도 있으니까.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조금만 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 유럽에서 뭘 해야 할까?’

그렇다는 말은 곧 유럽에서 좀 더 머물러야 한다는 뜻이다.

< 헤이그, 그 이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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