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에서만 할 수 있는 일 >
수많은 아이디어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시대 유럽은 미국만큼이나 돈이 될만한 아이템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으니까.
“이 왕자님, 어서 오십시오.”
하지만 나는 다른 일은 전부 제쳐 두고, 헤이그 중심부에 있는 중앙병원부터 방문했다.
내 사람이 될 이가 현재 이곳에 입원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왕자님, 헤이그 중앙병원의 병원장인 닥터 지브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름대로 고위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인사가 병원 정문에서부터 날 맞이했다.
잘 보이기 위해 연신 굽신거렸는데, 아마도 이번에 사귄 나의 새 친구 때문인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헨드릭에게 또 신세를 지는군.’
헨드릭은 네덜란드 여왕의 부군이다.
그런 자가 직접 부탁을 했으니, 일개 병원장으로서는 마냥 가볍게 여길 수 없었다.
그는 눈알을 팽글팽글 굴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반갑군. 그나저나 지난밤에 입원했던 이준이라는 환자 말일세. 상태는 좀 어떠한가?”
지난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준을 발견했다.
앞으로 무슨 계획이 있나 확인하러 갔다가, 우연하게도 이를 목격한 거다.
이준을 급히 중앙병원으로 호송했는데, 어제의 긴박한 상황을 회상하자니 아직도 손에서 땀이 나는 것 같다.
“지난밤에 열이 41도까지 올랐지만, 다행히도 위험한 고비는 넘겼습니다.”
지브리는 최대한 친절하고 세심하게 이준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밤새 얼음찜질을 했지요. 신께서 도우셨는지 열이 금방 잡혔습니다. 며칠만 이 병원에서 집중적으로 치료받으면 금방 병을 훌훌 털어 낼 것입니다.”
지브리가 살짝 걱정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에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안 좋은 일?”
“예. 이런 증상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자주 생겨납니다. 재발할 수도 있으니 각별히 신경 써야 할 것입니다.”
여름에 독감이라도 걸렸나 생각했는데,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에 화병이 생겼나 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향후 이준을 잘 지켜보겠다고 지브리에게 약조했다.
‘그나저나······ 위험했다.’
내가 그때 그 방에 들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이 머나먼 객지에 유명을 달리했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이쪽입니다.”
나는 지브리의 안내를 받으며, 이준이 입원하고 있는 병실로 향했다.
“이 왕자님.”
“오셨습니까?”
두 사내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나를 반겼다.
“다들 앉게나.”
나와 함께 온 지브리는 이준의 상태를 한 번 더 체크하고는 이내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는 병실을 나가기 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자신을 찾아오라고 명함까지 주며 끝까지 나를 신경 썼다.
나는 지브리 명함을 나전칠기로 된 명함첩에 보관한 후,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두 특사의 얼굴을 보았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설마 밤이라도 새운 것인가?”
“······.”
“······.”
샜네, 샜어.
나는 그들의 어깨를 두들기며 다른 특사들의 건강 상태도 살폈다.
“그러다가 자네들까지 쓰러지면 어쩌려고. 여긴 나와 내 일행들에게 맡기고 잠시 눈이라도 붙이게나.”
“괘, 괜찮습니다.”
“진짜로 저희는 멀쩡합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이상설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우물쭈물 움직여 댔다.
“전하.”
“말하게.”
“간밤에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지나갔는데 말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위종이 이상설을 거들었다.
“맞습니다. 전하께서 확인하지 않았다면 이준 선생은 아마도······.”
“됐네, 거기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이 앞에서 죽었을 거란 표현을 쓰기엔 좀 그래.
나는 이위종의 말을 자르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두 특사를 달랬다.
“사내들이 그리 눈물을 흘려서야 쓰나? 마음이 이리 여려서 어디에 써먹을꼬.”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탄식을 내뱉으며 그들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앞으로 몇 배는 더 힘들 것일세. 지금보다 훨씬 더.”
간밤에 하려던 이야기를 여기서 마저 풀어 볼 생각이다.
“아! 맞다. 내 그대들에게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자네들 말이야······ 이제 어떡할 것인가?”
나는 팔짱을 끼며, 병원 침대에서 잠을 자는 이준의 얼굴을 쓱 훑어보았다.
“알다시피, 이젠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네.”
“그렇지요. 입국 즉시 체포된 후, 사형당할 것입니다.”
“그래.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왜놈들,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일세.”
내가 거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 아닌 예언을 국제사회에서 퍼부었으니까.
나 대신 엄한 세 특사에게 화풀이할 것만 같았다.
“자네들, 따로 계획이라도 세워 두었는가?”
“······.”
“······.”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니 없다는 뜻이네.
하긴.
미래를 생각하는 이들이었다면, 고종의 밀지 따위는 받지도 않았을 거다.
이를 수락하는 순간 불타고 있는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드는 셈이었으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진정한 애국자들이네.’
내 앞에 있는 이들은 조국의 무사 존립이라는 목표 하나만을 바라보고 달렸던, 내일이 없는 이들이었다.
“계획을 짜 두지 않았다면, 나와 함께 미국으로 가세나. 내 자네들이 먹고살 만한 기반은 마련해 줄 수 있네.”
내 앞에 있는 자들은 여태껏 만나 왔던 인재들보다도 탐이 나는 위인들이었다.
일단 이들은 매우 충성스럽다.
반쯤 허수아비가 된 고종의 밀지를 고민 없이 받들어 수행할 정도로.
그것 하나만으로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간다.
애매한 놈들보다 진짜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하니까.
‘능력도 출중하지.’
더불어 어학 능력부터 첩보 능력까지, 여러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세 인재 다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전하.”
“말하게.”
이상설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혹, 워싱턴에 들를 수 있나이까?”
“워싱턴? 뉴욕도 아니고 그곳은 왜 가려고 하는가?”
아!
설마······.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면담이라도 요청할 생각인가?”
“······예.”
이 사태가 터졌는데도 미련을 못 버렸구나.
조미수호통상조약 중 거중조정(居中調停)이라는 세부 항목을 거론할 심산인 듯했다.
“만날 수야 있겠지. 자네들 말고 나라면 말이야.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말게나. 여기 회의 때처럼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일세.”
“······.”
“······.”
이위종과 이상설의 얼굴이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이젠 진짜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둘 다 내 말을 들어 보게.”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두 특사를 바라보았다.
“저 먼 태평양 건너에서도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네. 나를 보게나. 지난 2년간 내가 허투루 살았는가?”
만국평화회의 출입부터 막혔다.
모두 내 개인적인 역량으로 이를 해결했지.
왕자라는 신분을 이용하기도 했지만.
이 시대의 만능열쇠라고 불리는 황금을 이용해서 사건을 해결하기도 했기에, 나는 이 점을 강조했다.
“대한제국이 국권을 다시금 회복하려면, 힘을 길러야 하네.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 나는 타지에서 노력 중이네.”
두 특사의 손을 한곳에 모은 후, 나는 그들의 손을 꼭 잡았다.
“하지만 알다시피 나는 저 먼 미국에서 홀로 왜놈들과 싸우는 것은 쉽지 않네. 그래서 절실히 사람을 구하고 있네. 나를 도와줄 믿을 만한 이들을 말이야.”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니 함께 가세나. 내 자네들이 꼭 필요하네.”
“······.”
“······.”
당장 이 자리에서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거절하지도 않았다.
반쯤 성공했다는 말.
‘거의 넘어왔군.’
여기서 세 사람을 두고 모르쇠로 방관할 수도 있었다.
특사 삼인방은 이제 나를 따르는 것을 빼고는 선택지가 없으니까.
조금만 참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내게로 오는 것과 마음 넓게 품어주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 여기에······ 자네 식구들 이름과 사는 곳들을 적게나.”
두 특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그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자네들의 피붙이들이 아직 고국에 남아 있지 않은가? 이제 미국에서 살아야 할 텐데······ 그자들도 데리고 와야지.”
“······!”
특사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잊고 있던 피붙이들이 생각나서겠지.
“생이별한 채로 평생 얼굴도 안 보고 살 순 없네. 더욱이 왜놈들이 자네 식구들을 가만히 두겠는가? 지속해서 그들을 감시하고 괴롭힐 것일세.”
역적의 자손이라고 조리돌림을 하며 못살게 굴겠지.
동시에 회유도 할 것이다.
특사들의 피붙이들이 제 잘못을 시인하도록.
그들의 아비나 아들을 비난하면, 조선에 있는 일반 백성들을 쉬이 호도할 수 있다.
봐라.
‘저놈들의 식구들도 저치들을 비난하지 않느냐?’ 하며.
나는 이를 방지하고자 가족들 목록을 작성하라 일렀다.
“저, 전하.”
“소신들은 이제 전하밖에 없습니다.”
가족들 이야기를 했기 때문인가?
두 특사가 무릎을 꿇으며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저, 전하. 비천한 제 가족들까지 신경을 쓰시다니······.”
“소신들은 전하를 위해 목숨을 다 바칠 것입니다.”
역시 아무리 비정해도 가족은 차마 외면할 수 없겠지.
나는 그들을 일으키며 내 식구가 된 이들을 챙겼다.
* * *
“전하. 인사 올리옵니다.”
막 병을 이겨 낸 이준은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내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니까, 이 안에 익문사 요원들의 조직도가 적혀 있다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문서 하나를 내게 건넸다.
이 안에 익문사 조직도가 있다고 한다.
기대가 크다.
‘점조직 형태로 이루어져 알지 못했다고 했는데. 응?’
이준이 건넨 문서는 글자 하나 없는 텅 빈 백지였다.
“잘못 가지고 온 것은 아니겠지?”
이거 착한 아이만 보이는, 마법의 종이인가?
“전하. 이 종이에 열을 가하게 되면······.”
“오!”
와, 소름이 쫙 돋네.
마법 영화 속에서 주문을 외우면 비밀의 문이 열리는 것처럼, 열을 가하니 숨겨져 있던 내용이 세상에 막 드러냈다.
“지방에 16명, 도성에 15명, 외국 공관 및 군사 시설에 20명. 그리고 해외에 통신원 9명?”
“예, 그렇습니다.”
이위종이 언어 담당이고, 이상설이 외교무대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면.
세 명의 특사 중 가장 연장자였던 이준은 익문사의 핵심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이위종이나 이상설이 알지 못했던 익문사의 고급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겠지.
“한데 말이야. 조직도는 있는데, 사람 이름은 없군.”
이위종이 재빨리 이준을 거들었다.
“전에도 한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익문사는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이 때문에 황상 폐하를 제외하면, 조직원 전체를 완전히 아는 이는 없다고 보면 됩니다.”
아, 그래?
그럼 골이 좀 아파지는데.
‘고종이 쉬이 이 조직을 내게 양도할 리가 없는데······.’
잠시 고민하고 있던 때.
이준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방법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저희의 비밀 연락 수단을 통해 숨어 있는 조직원들에게 연락을 취하면 될 것입니다. 몇몇 의심 가는 자들부터 시작하십시오. 그러면 전체 요원들은 몰라도 일부는 전하의 사람으로 회유할 수 있을 겁니다.”
오, 그렇겠네.
익문사 조직원이 아니면, 화학비사법으로 작성된 이 글을 읽지 못할 테니까.
‘그나저나······.’
비사법 자체가 아주 마음에 든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진짜 빈 공책처럼 보일 테니까.
내 사람들과 비밀 이야기를 써야 할 때, 이를 활용하면 좋겠네.
‘내 미래 정보를 적어 둔 노트도 이걸로 갱신해야겠다.’
보안에 신경 써야 하니까.
“내 그대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예.”
유럽에 오며 나는 두 가지를 목표로 했다.
고종의 밑에서 벗어나는 것과 익문사 조직을 완전히 인수하는 것.
원 목표 두 가지는 달성한 셈이었기에 마음 한편이 좀 가벼워지는 것 같다.
‘아! 비사법은······.’
화학 기술이 발전하며 생긴 거지?
화학 기술 하면, 유럽에 어느 나라가 생각나는데 말이다.
‘그래, 네덜란드 다음으로 가야 할 방문지는 확정되었네.’
독일에 방문하기 전에, 헨드릭에게 가서 기름칠 좀 더 해야겠다.
독일 출신인 헨드릭이 추천장을 써 준다면, 현 독일 왕실과 좀 더 쉬이 접선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 유럽에서만 할 수 있는 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