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73화 (73/294)

< 워싱턴 (2) >

뉴욕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워싱턴 D.C.에 방문할 것인지.

코텔류 재무장관은 그 자리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흠······.”

그의 깜짝 제안에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이내 후자를 택했다.

“워싱턴에 가겠네. 루스벨트가 날 간절하게 찾는다는데, 어찌 거절한단 말인가?”

“잘 선택하셨습니다.”

모건이 전면으로 나선 이후, 이번 금융공황은 빠르게 수습되어 가고 있었다.

그 말은 즉, 뉴욕에서 내가 할 일은 더 없다는 소리다.

‘워싱턴 D.C. 방문 또한 언제든 가능한 일이지만, 이 나라의 우두머리인 루스벨트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지.’

그랬기에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워싱턴에 방문할 생각이었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네. 당장은 내려가기 힘드네.”

“어째서입니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네.”

방문 시기는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아닌 내가 정하고자 했다.

루스벨트에 관한 정보를 내 머릿속에서 정리해야 하고.

무엇보다 내 손에 주도권이 있음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가만히 있는 날 찾고 있다니까. 분명, 내게 무언가를 부탁하려고 워싱턴에 부르는 것이겠지.’

그렇다는 것은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단 뜻이겠다.

나는 재차 양해를 구하며 코텔류를 설득했다.

“자네 먼저 내려가 있게나.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바로 따라 내려가겠네.”

“그리하시겠다면······ 알겠습니다.”

3년 전이었다면, 절대로 이리 행동하지 못했을 거다.

감히 살아 있는 권력에 어찌 까분단 말인가?

하지만 그의 임기는 이제 겨우 1년 남짓 남은 상태다.

뭐.

당장 기자회견을 열어 3선 도전을 천명한다면, 루스벨트는 내년 선거에서도 또다시 승리하며 대통령 자리를 꿰차겠지만.

‘그만큼 루스벨트는 이 나라 미국인들이 사랑하던 정치인이니까.’

하지만 그는 3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대중에게 선언하며 스스로 레임덕에 빠졌다.

이번 금융공황 사태로 그의 인기 또한 조금 사그라들고 있었기에, 이리 강하게 나가도 별문제 없을 것 같다.

“자네는 잠시 모건에게 들렀다 오게.”

“예, 전하.”

코텔류가 물러나자마자 나는 최현우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모건을 비롯한 뉴욕의 터줏대감들에게 나의 다음 목적지를 알린 것이다.

‘어떻게 쌓은 친분인데, 오해를 살 수는 없지.’

그들과 루스벨트는 상극이니까.

정적이라고 볼 수 있는 루스벨트를 내가 아무 말도 없이 만난다면 분명 의심을 할 터.

돈 많은 이들을 적으로 돌린다면 자칫 피곤해질 수도 있기에, 나는 신중히 행동하고자 했다.

‘지난번처럼 양다리를 걸치자.’

뉴욕의 언론재벌 허스트만 봐도 그렇다.

나름대로 양쪽 세력에 발을 하나씩 담그면서 제 이익을 취하고 있지 않던가?

두 세력 사이를 왔다 하는 사례는 제법 된다.

그랬기에 나 역시도 앞선 전략을 되풀이하며 내 이득을 최대한 챙길 생각이었다.

“이 왕자님. 부동산 중개인과 계약을 끝냈습니다.”

뉴욕에서 해야 할 업무도 진짜 다 끝났네.

슬슬 워싱턴으로 가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내 일행들에게 다음 목적지를 알렸다.

“모두 짐을 싸게. 내일 워싱턴으로 갈 것일세.”

* * *

“워싱턴역에 도착했습니다.”

로비스트 박병준으로 이 도시에서 무려 12년을 살았다.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다음으로 추억이 많은 이곳.

오랜만에 워싱턴에 방문하니 옛······ 아니지, 미래 생각이 났다.

‘워싱턴 D.C.의 풍경은 앞선 샌프란시스코나 뉴욕과는 다르게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군.’

샌프란시스코는 대지진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이 완전히 변했다.

뉴욕 역시 1930년대 대호황 때 고층 빌딩이 대거 들어섰기에, 지금의 모습은 현대와는 사뭇 달랐고.

반면, 워싱턴은 21세기와 비교해도 똑같을 정도로 별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여긴, 내가 뻔질나게 드나들던 곳인데 말이야.’

퇴근 후 술 한잔을 했던 선술집도 그대로다.

점심 끼니를 때웠던 카페테리아도 거리에 보이고.

으으······.

콧대 높은 연방의원들과 식사하느라 초보 시절에 진을 잔뜩 뺐던 레스토랑도 보이네.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내 뇌리를 스쳤다.

“전하, 백악관에 도착했습니다.”

제법 어둑어둑해진 저녁.

나는 나를 태웠던 자동차에서 내린 후, 백악관에 입장할 준비를 했다.

“이 왕자님.”

공교롭게도 루스벨트 내각의 주요 인사들이 백악관 정문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

나는 한 명 한 명 시선을 교환하며 인사를 했다.

“코텔류 재무장관. 반갑군.”

“안녕하십니까? 이 왕자님.”

“그대는······.”

나는 코텔류 재무장관 옆에 서 있는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는 내게 손을 쑥 내밀며 활짝 웃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짐 윌슨이라고 합니다.”

“아! 미 연방정부의 농무장관이로군.”

“예. 지지난해 열렸던 샌프란시스코 연회 때 말입니다. 그 행사에서 이 왕자님과 한 번 만날 뻔했었는데······ 혹시 그때 기억하십니까?”

그럼.

내가 처음으로 미국 사교계에 데뷔한 날이 아니던가?

이자 얼굴 한번 보겠다고 캘리포니아 유명인사들과 2층에서 몇 시간 죽치고 앉아 있었는데 말이다.

기억이 안 날 수가.

“몸은 좀 어떤가? 그때 감기 때문에 연회에 불참하지 않았었나?”

“예. 그때의 무례를 왕자님께 사죄하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와.

새삼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체감할 기회네.

불과 1-2년 전에는 주지사나 연방정부 관리 좀 만나 보겠다고, 5만 달러씩 기부해야 했는데 말이다.

지금은 딱히 부르지 않아도 이리 내 앞에 오다니.

‘짐 윌슨······.’

나는 재빨리 이자에 관한 정보를 떠올려 보았다.

‘공화당 내각에서 10년 동안 장관직을 꿰차고 있는 자다. 어찌 보면 대단한 놈이지.’

다른 건 몰라도 눈치 하나는 끝내주겠다.

대통령이 3번이나 바뀌었지만, 이자는 계속 농무장관 직을 고수하고 있으니까.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치력 없이는 이리 오래 워싱턴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하긴. 그러니 오늘 같은 자리에 얼굴을 쓱 들이미는 것이겠지.’

나는 짐 윌슨에 관한 정보를 되새기며 그와 악수했다.

“이 왕자님, 백악관에는 한번 와 보셨습니까?”

“아닐세. 처음이네.”

“그렇다면 저희가 백악관 곳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희만 따라오시지요.”

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박병준으로 살 때, 이곳에 꽤 많이 출입했거든.’

몇 번 와 봤다.

물론 1900년대 말고 현대에.

직원들과 함께 오바마와 트럼프를 만났던 기억이 급히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론 대통령을 이리 직접 만나는 건 몇 번 안 되지만.’

주로 백악관 보좌관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로비스트의 주된 업무는 입법 로비.

의회도 의회지만.

백악관과 사전에 교감이 있어야 법이 통과될 수 있기에, 보좌관들과의 정기적인 만남은 필수였다.

‘일 말고 다른 일로 오기도 했지.’

두세 번 한국에 살던 친척들과 함께 투어로도 방문해 본 적이 있다.

백악관은 관광지이기도 하니까.

그렇기에 처음 백악관에 방문했을 때처럼 가슴이 미칠 듯이 뛰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거, 너무나도 기대되는군.”

로비스트, 그리고 왕자는 거짓말을 달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다.

나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을 한껏 지으며, 백악관 안쪽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왕자님. 이쪽입니다.”

내각 일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고 있는데,

그때.

“꺄악- 거기 아무도 없어요?”

어떤 여인이 허겁지겁 내게로 달려왔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소리를 치면서 말이다.

* * *

“살려 주세요! 덩치 큰 어떤 남자가 저를 위협하며 때리려고 했어요. 다들 뒤에 오는 저자 좀 막아 주세요. 꺅-”

응?

내게로 달려오고 있는 여인이 갑자기 발을 헛디뎠다.

“어, 어?”

“어, 어!”

내게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었기에 그 관성이 아직 제법 남아 있었다.

“조, 조심······.”

발을 접질렸기에 하체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자연스럽게 상체 역시 바닥 쪽으로 향하고 있는 상황.

그대로 두면 꼴사납게 내 앞에서 넘어지게 될 것이 분명했다.

“억-”

넘어지는 그녀를 안았다.

그런데 그 뒤 상황은 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는 멋있게 딱 그 상태에서 여인을 붙잡던데.

나는 여인을 앉고 홀라당 뒤로 넘어졌다.

그녀가 너무 빨리 달린 나머지 제자리에서 그녀를 꽉 잡을 수 없었으니까.

뿌- 찍-

씨벌.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가운데 옷 찢어지는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흔들리는 진동까지 느껴졌다.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레이디. 괜찮습니까?”

당장 눈을 부라리며 쌍욕을 박고 싶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기에 나는 정체 모를 여성의 안위부터 걱정해 주었다.

그러자.

“아······.”

낯선 여인은 얼굴만 빨개진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왕자님!”

그때였다.

코텔류 재무장관이 질린 얼굴을 한 채로 내게 다가왔다.

“이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아니, 괜찮지 않아.

괜찮으면 벌써 자리 털고 일어났겠지.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이 여인 좀 일으켜 봐.

“엘리스 아가씨.”

그는 엘리스라는 여인을 내게서 떼어낸 후, 여인을 쏘아보며 구박했다.

“귀빈이 오셨는데 이리 또 장난을 치시면 어떡합니까? 더군다나 이분은 왕자님이십니다. 엘리스 아가씨께서 함부로 대하실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엘리스?

그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느낌이 왔다.

빌어먹을 계집애······.

루스벨트의 첫째 딸이네.

‘유명한 파티걸을 만나게 되었군.’

서부에는 내가 있다면, 동부에는 그녀가 있다.

그 소문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기에 절로 그녀에 관한 정보가 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이, 이 왕자님이라고요?”

눈을 껌뻑이는 엘리스를 향해 나는 빙그레 웃었다.

얼굴이 빨개진 여인을 향해 쌍욕을 내뱉었다간 내 이미지만 망가지거든.

“맞소. 이렇게 민망한 상태에서 자기소개하게 되다니 유감이군. 반갑소. 엘리스 영애.”

나는 그리 말한 후,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어 냈다.

더불어 내 바지 상태 역시 확인했는데.

“와, 왕자님. 바지가······.”

코텔류는 찢어진 내 바지를 보며 경악했다.

‘알아. 안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마.

사람들이 내 엉덩이만 보잖아.

“엘리스!”

그때였다.

저 멀리, 백악관 안쪽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엘리스! 엘리스!”

오늘의 주인공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등장했네.

천천히 걸어가서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속옷이 보이는 바람에 나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이, 이 왕자님.”

시어도어 또한 지금의 돌발상황에 제법 당황한 모양인지, 관자놀이를 연신 주무르며 내 옆에 있는 엘리스를 노려보았다.

시어도어가 화를 잔뜩 내며 엘리스 곁으로 뛰어왔다.

그는 엘리스의 팔을 세게 부여잡으며 백악관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엘리스, 너는 당장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

“어서!”

“······네.”

엘리스는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백악관으로 이내 달려갔다.

‘아까, 덩치 큰 남자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의 정체가 바로 시어도어구나.

아이고.

장난 한번 치려다가 제대로 사고를 치고 돌아간 모양이네.

‘제 딸은 어째 통제가 잘 안 되나 봐.’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이 빨개진 시어도어를 향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영애분이 많이 활발하군요.”

코텔류 재무장관이 재빨리 우리 둘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오늘은 그나마 조용하신 편입니다. 평소에는 얼마나 장난이 심하신지······ 힉-”

농무장관을 10년이나 한 짐 윌슨이 입을 주절거리고 있는 코텔류를 향해 옆구리를 꾹 찔렀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심기가 꽤 사나우니 조심하라는 뜻일까?

“다 큰 딸 때문에 민폐를 끼치게 되었군요. 이 왕자님. 이거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루스벨트가 다시 내게 사과했다.

이에, 짐 윌슨이 재빨리 제 정장 상의를 벗었다.

그다음 내게 건넸는데, 아마도 구멍 난 바지를 가리라는 뜻이겠다.

‘아깐 가만히 있더니······.’

대통령이 오니까 이 난리야.

아······.

상사 앞에서 점수 따겠다는 거구나.

나는 짐 윌슨이 건네준 상의로 내 엉덩이를 가린 후, 시어도어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보다시피 지금······ 여유가 없어서 말입니다.”

“아. 예.”

루스벨트가 허공을 가르고 있는 제 오른손을 급히 거둔다.

나는 그런 루스벨트를 보며 급히 한 가지를 부탁했다.

“혹시 안에 남는 바지 하나 있습니까? 이러고 다니긴 좀 민망해서······.”

“서둘러 찾아보겠습니다. 일단, 제 집무실 안으로 이동부터 하시지요.”

본의 아니게 미국의 대통령에게 신세 좀 지게 됐네.

만남 초반 호재가 내게 찾아온 셈이다.

나는 내 찢어진 바지를 가리며 백악관으로 출입했다.

그 후 재빨리 탈의실에서 루스벨트가 건네준 새 바지로 갈아입었다.

< 워싱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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