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기레기 (2) >
나는 재차 술을 홀짝이며, 허스트의 전신을 쓱 훑어보았다.
그는 무릎 위에 손깍지를 올려 둔 채로 의자에 등을 기댄, 아주 편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대화도 나누진 않은 상태지만, 얼핏 보기만 해도 그에게서 대단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준비를 아주 단단히 했나 보군.”
텅 빈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허스트의 모습을 감탄했다.
내 반응이 만족스러웠는지, 허스트는 한쪽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내게 답했다.
“지난 20여 년 동안 언론계에 저만의 제국을 구축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구역은 제 구역입니다.”
그래.
허스트는 우리가 흔히 아는 조지프 ‘퓰리처’와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언론인이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이 분야에서는 그가 제일이지.
‘특히 선동과 날조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일 거다.’
그의 능력은 이미 여러 차례 검증되었다.
십여 년 전만 해도 그렇다.
뉴욕 저널에 기고된 기사 하나 때문에, 그의 의중대로 미국 연방정부가 필리핀을 두고 스페인과 전쟁을 하게 되지 않았던가?
‘지난번엔 그 능력을 활용하여 나를 돕기도 했었지.’
일본의 궁내대신이었던 다나카 미츠아키가 대한제국에 왔다가 경천사 10층 석탑을 몰래 가져가지 않았던가?
허스트는 이때, 내 요청에 따라 그와 일본 정부의 뻔뻔한 행태를 힐난하며 아주 끈질기게 물어뜯었다.
덕분에 경천사 10층 석탑은 일본에서 대한제국으로 무사히 반환되었다.
그 과정에서, 미국 내 일본의 평판이 한번 뭉텅 깎여 나갔었고.
‘내 편일 때는 든든한 자야.’
나는 이를 회상하며, 허스트와의 지난 약속을 상기했다.
그는 분명, 내게 세 번의 호의를 베풀겠다고 약속했다.
왜냐고?
그야 내 조언 덕분에 큰 이득을 보았으니까.
조기에 영국채권을 팔아서, 금융위기 속에서도 제 재산을 지켜 내지 않았던가?
‘경천사 석탑 건으로 한 번, 그리고 이번 건으로 한 번 더 도움을 받게 된다면······.’
3에서 2를 빼면.
아직.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은 셈이네.
그렇기에 나는 부담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스트의 제안을 수락했다.
“자네의 제안을 수락하지. 거절한다면, 내 크게 후회할 것 같으니.”
“왕자님의 선택,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스트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후, 주변을 쓱 살폈다.
우리가 앉아 있던 포커 테이블은 가벽이 세워진 덕분에 외부와 독립되어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도 없어 보였지만, 혹시나 누가 엿듣고 있을지도 몰랐기에 허스트는 이를 재차 확인했다.
“이 왕자님. 안에 있는 내용물을 한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는 품 안에 숨겨 놓고 있던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낸 후 내게 넘겼다.
나 또한 서류 봉투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꺼내 조심스레 확인했다.
“사진들이군.”
“예.”
“여기 이 남자는 누구인가?”
“더럼 스티븐슨이라는 기자입니다.”
아.
조선 총독부까지 방문했다던 일본의 충견이 이리 생겼구나.
내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자, 허스트가 만족하며 내게 물었다.
“왕자님도 이미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지만, 이자가 주축이 되어서 왕자님을 헐뜯고 있습니다.”
나는 계속하여 사진들을 넘겼다.
허스트는 여러 사진을 건넸는데 백인이 단독으로 찍혀 있는 것도 있었고, 스티븐슨이 동양인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도 있었다.
“배후에는 당연하게도······.”
“일본 정부입니다.”
허스트가 다시금 자리에 앉으며 진지한 어조로 나를 불렀다.
“왕자님.”
“말하게.”
“왕자님이 생각하시기엔, 현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선 어떤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까?”
“흠, 글쎄······.”
미리 생각해 둔 바를 말할까 했지만, 우선 한번 튕겨 보기로 했다.
“여러 방도가 존재하지 않겠나?”
“예. 그중 왕자님께서는 기사의 정정과 반박 기사를 선택하셨더군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허스트가 내 대응 방식을 평가했다.
“뭐, 나쁘진 않습니다. 다만, 한 발 뒤에 물러서서 대응하는 방식은 좋은 방도가 아닙니다.”
맞다.
수습은 본디 입었던 피해를 복구하는 행위니까.
10을 손해 본다면, 잘해야 8이나 9 정도만 회복할 수 있다.
‘나 또한 다른 방법을 병행하려고 했는데······.’
허스트는 무엇을 제안할까?
나는 속으로 이를 궁금해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추가적인 대응책이 필요하단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혜안을 내게 알려 주게.”
허스트가 씩 웃으며 내 물음에 답했다.
“왕자님께서도 일본 정부를 향해 공격의 포문을 여십시오. 옛말에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했으니까요.”
허스트는 지난번 석탑 사건 때처럼, 일본의 만행을 미국에 알리겠다고 선언했다.
“제가 일본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왕자님께서만 아시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으면, 꼭 저한테만 제보해 주십시오.”
일본은 이상하리만큼 이미지가 아주 좋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일본의 어두운 면면을 전 세계에 알린다면, 일본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콩깍지가 벗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흠. 일본에 관한 재미난 이야기라······.”
나는 자극적인 기삿거리를 속으로 고민했다.
‘뭐 기사로 실을 수 있는 후보군은 아주 많지.’
미국은 기본적으로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다.
청교도들은 21세기에도 그렇지만, 그보다 백 년 전이었던 지금은 더더욱 보수적이었다.
‘청교도들이 발작하는 버튼들이 몇 개 있지.’
대중의 흥미를 집중시킬.
성(性)에 관한 한 가지 사례가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대와 중세 일본은 남색에 아주 관대했다.’
성인과 성인 사이에 있었던 일도 아니고.
무려, 성인과‘미성년’ 간에 벌어졌던 일본 특유의 전통문화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진실을 알게 되면, 혀를 찰 수밖에 없을 거다.’
비교적 이쪽에 관대한 현대 미국의 민주당 지지자들 또한 경악할 만한 사실들이니까.
나는 허스트의 입을 빌려, 이를 미 전역에 알리고자 마음먹었다.
“몇 가지가 떠오르는군. 정리하여 자네에게만 제공하겠네.”
“감사합니다.”
허스트는 자극적인 기사를 실어서 제 잇속을 챙기고.
나는 일본에 맞불을 놓으며 싸울 수 있고.
서로 이득이 되는 행위였기에 허스트 또한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아! 왕자님.”
“말하게.”
“동시에 다른 비책 또한 취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언론사 인수 같은 활동을 말하는 것인가?”
“예. 그렇습니다.”
허스트가 몇몇 언론사의 사명을 거론했다.
모두 일본 정부의 우호적인 기사들을 써재끼던 지역 일간지들이었다.
“거기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일본 정부에 후원을 받는 기자들 역시 왕자님께서 반드시 매수하셔야 할 것입니다.”
중립이었던 기자들을 매수한다면 내 편이 하나 늘어나는 셈이지만.
일본 정부의 편이었던 기자를 매수한다면 그 효과는 두 배.
아니지, 세 배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으니까.
허스트가 이를 강조했다.
‘돈만을 쫓는 자라면 충분히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
스티븐슨처럼 와패니즈 사상에 물들어 있다면 조금 힘들겠지만.
“아! 마지막으로. 교민들을 단속해 주십시오.”
“교민들을?”
“예.”
허스트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지금 제가 소유한 언론사가 몇 군데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일단 내가 아는 정보부터 허스트에게 말했다.
“작은 지역 언론사까지 합치면, 이십 군데가 넘지.”
“맞습니다.”
허스트가 손가락을 튕기며, 내게 자신의 그룹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뉴욕에서 대성했지만, 저희 그룹의 시작은 여기 캘리포니아입니다. 선친께서 샌프란시스코의 아주 작은 타블로이드지를 물려주셨는데, 제가 이를 토대로 제 제국을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허스트는 제 손으로 가슴을 퉁퉁 치며, 자신이 얼마나 캘리포니아를 사랑하는지 애향심까지 들먹이며 내게 설명했다.
“저는 캘리포니아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뉴욕에 있으면서도 항상 서부를 신경 쓰고 있었지요.”
“그랬군.”
“예. 그래서 말입니다. 제가 이 지역 언론인들과 꽤 친분이 있는데······.”
그의 품에서 또 다른 서류 봉투가 나왔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얇은 서류 봉투였다.
나는 이를 받자마자 안에 있던 것을 확인했다.
아까와는 다르게, 사진이 아닌 종이 한 장이 그 안에 담겨 있었는데.
이를 슬쩍 살펴보니, 종이 전면에는 글자가 빼곡이 적혀 있었다.
“내일이나 모레쯤에 요런 기사가 캘리포니아 전역에 나온다더군요.”
“흠······.”
나는 빠르게 그 안에 있던 내용을 살폈다.
읽다 보니 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어졌다.
“나를 흔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교민들의 이미지까지 깎아 먹을 생각이군.”
허스트는 미 서부 언론인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본 정부가 차후에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허스트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왕자님이 곧 한인이고, 한인 교민들이 곧 왕자님이지 않습니까?”
나는 생각보다 매우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에, 허스트는 일본 정부의 공략 방식이 바뀌고 있다고 평했다.
“멍청한 스티븐슨은 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저는 대충 그의 앞날이 예상됩니다.”
허스트는 잠시 허공을 보다가 이내 나와 다시 시선을 교환했다.
“일본 정부는 한인 교민들을 계속하여 자극할 것입니다. 왕자님께서는 아주 차분히 대응하고 계시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허스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서 전략을 바꾸는 중이다?”
“예. 교민들을 공략해 미국 내 여론을 자신들의 편으로 끌어들이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한인들은 성실하나 몇 가지 단점이 있으니까요. 일부는 성격이 매우 급하지 않습니까?”
허스트는 교민들의 애국심 또한 거론했다.
이는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추후엔 단점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한인들의 애국심을 자극하는 기사만 계속 기고한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
나는 대답하지 않고 주먹을 꽉 쥐었다.
허스트는 이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하고 싶지 않은 미래를 가정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한인 중 한 명이 스티븐슨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진짜 허스트의 예언대로 그리된다면, 미국 내 여론은 개판이 될 거다.
‘미국은 철저히 자국 위주다. 무엇보다 백인 위주의 사회지.’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동양인 이주민이 위대한 현지 백인을 공격하기라도 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한인의 이미지는 좋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파가 사방팔방 주요 언론들을 쑤시며 들고일어나겠지.
“당장 이민법 수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그렇겠지.”
“스티븐슨이 작성했던 기사가 미국 전역에 다시금 퍼질 것입니다.”
대충 예상이 간다.
이후에는 한인들의 추가적인 이민을 막아야 한다며, 각지에서 시위 또한 일어나겠지.
“그래서 말입니다. 이 왕자님.”
허스트가 내게 조금 다가오며 강조했다.
“제가 일본의 계략을 막을 동안, 왕자님께서는 한인을 강력하게 단속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칫 스티븐슨이 대낮에 저격이라도 당한다면, 그간 왕자님께서 해 왔던 일들은 수포가 되게 될 것이니까요.”
* * *
『조선은 일본제국의 도움 없이는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 스스로 존립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지난 을사년 때 체결된 조약은 조선에 있어서 축복이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며, 이강의 헤이그 연설은 참으로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발언이었다.』
허스트와 포커 방에서 주고받았던 기사가 캘리포니아 전역에 퍼졌다.
“전하.”
“호, 혹시······ 이 기사를 읽어 보셨습니까?”
이에 내 주변에서 일하던 안창호, 박용만, 유길준 등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신문 기사를 들고 부르르 떨며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전하를 모욕한 것도 모자라서 일본의 파렴치한 행위를 비호하고 있습니다.”
“이자를 가만히 두면 안 될 것입니다.”
“전하, 당장 이자에게 사람을 보내 기사 정정 요청부터 하겠습니다.”
나는 흥분하던 셋을 진정시킨 후, 한인 돌아가는 사회의 분위기를 물었다.
“교민들은 어찌 행동하고 있던가?”
“다들 모였다 하면 이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래?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아 보입니다. 우리 교민들의 성향을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다들 이 기사를 보며 잔뜩 벼르고 있습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기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내용이니까.
그도 그런 게, 교민들 상당수가 합성협회에 매달 1달러씩의 기부금을 내고 있다.
일부는 장학금에 사용되었지만, 상당수의 기금은 일본에 대항하는 의병들을 위해 쓰일 예정이다.
협회원의 8할 이상은 이를 위한 기부금을 내고 있다.
더불어 막 미국에 온 이들 중 다수는 의병들의 가족들이다.
당연하게 반일 사상이 매우 매우 투철했다.
“일부 성질 급한 이들은 이놈을 죽여 버리겠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닌답니다.”
허스트가 우려하던 바가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에 와닿을 만큼 느꼈다.
“안 그래도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는데 말이야.”
나는 안창호를 바라보며 그에게 명령했다.
“긴급총회를 소집해야 할 것 같네. 교민들을 빠르게 한자리에 모아 주게나.”
< 아메리칸 기레기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