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메리칸 기레기 (4) >
“들어오십시오.”
더럼 스티븐슨은 호텔 방 문을 아주 조심스레 열었다.
그 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와 나의 일행들을 쓱- 한번 쳐다본 후, 천천히 뒷걸음치며 창가로 이동했다.
툭툭-
하지만 불안감은 감출 수 없었는지, 손톱을 연신 물어뜯는 중이었다.
밖을 힐끗힐끗 쳐다보기도 했고.
“무엇을 그리 보고 있는가?”
우리 일행이 호텔 방 안에 완전히 들어왔는데도, 스티븐슨은 계속 그런 행동을 하였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와 창밖 풍경을 그저 번갈아 보기만 했다.
‘흠······.’
나는 그가 무언의 시위를 하고 있다 해석했다.
그의 권유에 따라 이동한 후 창문까지 열었다.
이후, 바깥을 바라보았는데.
호텔 인근에는 피켓을 들고 있는 아시아인들이 가득했다.
“스티븐슨은 정정하라!”
“정정하라! 정정하라!”
“스티븐슨은 사죄하라!”
“사죄하라! 사죄하라!”
전부 한인들이다.
그들은 어설픈 영어 발음으로 구호를 외치며 스티븐슨을 압박하고 있었다.
‘위에서 보니 또 다른 느낌이군.’
가슴이 콩닥콩닥 뛸 거다.
스티븐슨은 겁이 많으니까.
쾅-
열었던 창문을 세차게 닫은 후, 창가에 몸을 기댔다.
이후, ‘그래서 어쩌라고, 다 네가 연 기자회견이 아니냐?’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스티븐슨이 비로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바쁘신 분께서 이곳까지 찾아오셨습니까?”
언중유골이라는 사자성어처럼, 그의 말속에는 뼈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것도 아주 날카로운.
나는 내 오른손을 가슴 주머니에 넣으며 무언가를 찾았다.
흠칫-
스티븐슨은 몸을 살짝 움찔했다.
마치 내가 안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는 듯한 모습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쯧쯧. 왕족이 대낮에 호텔 방까지 찾아와서 저격하겠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스티븐슨은 거기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단단히 겁에 질려 판단력 자체가 많이 흐려진 것 같았다.
나는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낸 후, 스티븐슨에게 이를 건넸다.
“받게나.”
“이게 무엇입니까?”
“위로금일세.”
스티븐슨은 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탁자 위에 올려 둔 돈 봉투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는 이내 다시금 창가로 다가와선 한인들의 시위 모습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우리 교민들이 지난번 기자회견에서 자네를 구타하지 않았던가? 그 일에 대한 보상일세.”
이에 나는 돈 봉투를 툭툭 치며, 그가 이 돈을 왜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스티븐슨은 차가운 목소리로 날 향해 쏘아붙였다.
“혹시 제가 고소할까 봐 그러십니까? 네 명의 용의자가 왕자님께 찾아가 살려 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했답니까?”
나는 한 가지 숨겨진 사실을 스티븐슨에게 알렸다.
“그들을 말리고 자네를 지킨 것도 동양인이었네. 자넨 경황이 없어서 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겠지만.”
스티븐슨이 내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래. 자네를 경호하던 이들 모두 나의 사람이었지.”
“······.”
“자네가 예뻐서 도와준 것은 아닐세. 자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일이 더 커질 테니까 막은 것뿐이지.”
스티븐슨은 잠시 과거를 생각하는 척했다.
자신을 지켰던 이들의 면면을 다시금 회상해 본 거다.
“왕자님께서 절 구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한인 교민들에게 이리 얻어맞기 전에 그래 주셨다면 더 고마웠겠지만 말이죠.”
스티븐슨은 비아냥을 가득 담아서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그때 생긴 상처를 내게 보여 줬는데, 마치 넌 병 주고 약 주냐는 식의 눈빛이었다.
“저는 저를 폭행한 한인들을 고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봉투는 가져가시지요.”
스티븐슨은 전직 외교관이자, 기자다.
눈치 하나는 그래도 있는 놈.
지금 한인들을 고소했다가는 더 큰 화를 당할 수도 있다는 건 그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돈 봉투를 힘껏 그에게로 밀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래도 받게나. 치료는 해야지. 자네의 정신적인 상처까지 고려하여서 챙겨 두었으니, 부디 내 호의를 봐서라도 받아 주게.”
“······.”
스티븐슨은 팔짱을 끼며 계속 거부하는 척했지만, 마지못해 받는다는 듯 슬며시 돈 봉투를 건네받았다.
돈 봉투가 꽤 두껍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제 안주머니에 집어넣기도 했다.
‘이걸로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지만······.’
아주 작게.
나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울릴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작은 틈을 어떻게 더 크게 벌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창 너머로 보이는 한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대가 살아왔던 이력을 살펴보았네. 확인해 보니 꽤 인상적이더군. 일본 정부가 왜 그대에게 훈장까지 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네.”
타국과 일본의 동등한 외교 협정을 위해 지난 십 년 동안 노력했으니까.
나라도 챙겨 줬을 것이다.
“예. 사람은 피부색으로 차별할 수는 없으니까요.”
스티븐슨은 사실 열성적인 공화당 지지자였다.
내가 그 과거를 언급하자, 그는 자신의 신조를 거론하며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은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소연했다.
“그러게······ 그리 선량하고 똑똑한 자네가 어찌하여 천 년 동안 앙숙 관계인 두 나라 사이에 끼게 된 것인가?”
천 년?
스티븐슨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한제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일 중 근래에 있었던 일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의 해묵은 감정은 천 년 전부터 시작되었네. 고대 시절부터 그들은 우리 한민족을 약탈하며 괴롭혔거든.”
왜구와의 싸움부터.
임진왜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애증의 역사를 나는 일일이 열거했다.
처음에는 그도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냐는 표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스티븐슨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와 독일, 영국과 러시아만큼.
두 나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서겠지.
“자네는 양국 국민 사이의 단단히 꼬여 있는 실타래 같은 국민감정을 너무나도 가볍게 봤네. 더욱이 자네는 우리 교민들을 대놓고 모욕했어······. 그것도 여기 샌프란시스코에서 말이야.”
스티븐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오늘 내가 했던 말 중 이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으니까.
“나 하나로 족했어야지. 쯧쯧.”
스티븐슨은 돈만으로 회유되는 자가 아니었다.
이럴 땐 다채로운 방법으로 상대를 압박해야 한다.
감정에 호소하거나.
겁을 주거나.
아니면, 믿었던 아군의 숨은 진실을 알려 줘서 배신감을 느끼게 하거나.
나는 이 세 가지를 회유와 함께 계속 실행할 생각이다.
“자네는 똑똑하니까. 아마도 나만 가지고 늘어질 생각이었겠지만······ 누군가가 뒤에서 자네를 부추겼겠지?”
작금의 상황은 스티븐슨 그가 아니고 다른 외부 변수라는 것을 꼭 집으며 퇴로를 열어 주었다.
스티븐슨은 내 말에 집중하는 표정을 지어 댔다.
“뻔해. 일본 정부겠지.”
“······.”
“여기 샌프란시스코 영사가 자네에게 언질을 줬을 것일세. 교민들을 자극하라고 말이야.”
스티븐슨이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부정하지 않는다.
이는 긍정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된다는 뜻이겠지.
“안타깝군. 이번 사태에서 자네의 잘못은 하나일세. 일본 정부를 너무 믿은 것이 실수란 말이지.”
이 말을 끝으로 나는 우현식에게 눈 신호를 보냈다.
우현식은 들고 있던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낸 후, 그에게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일본 영사관에서 보낸 서신이네.”
지난 닷새 동안 나는 꾸준히 일본 비방 관련 자료를 일본 영사관에 보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 내각의 비리 정보 역시 계속하여 송부했다.
여차하면 터트리겠다는 의지 또한 표명했는데.
어젯밤 그들이 이에 반응했다.
“그들은 자네가 작성한 이번 기사에 관해 부인하더군. 한 개인의 일탈이라고 부정하며 서로 간 오해를 풀자고 내게 제안했네.”
기사를 보내 일본 내각을 압박한 사실은 쏙 뺐다.
본래 상대를 설득할 때는 좋은 면만 보여 주는 게 상식이니까.
“양국 간의 말도 안 되는 억측이 미 언론을 통해 오가고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더군. 이런 서신이 내게 왔다면, 분명 자네에게도 사람을 보냈을 것으로 생각하네만.”
일본 내각.
사이온지와 이토와 내 제안을 승낙한 이유는 뭘까?
뭐겠어.
선거 때문이지.
올해 6월에 일본 전역에서 제국 의원들을 뽑는 선거가 치러진다.
이때 다수당이 바뀌게 된다면, 현 내각은 교체될 수밖에 없다.
‘어느 정치인이나 그렇듯, 반대파의 득세를 극도로 경계하기 마련이지.’
일본의 온건파는 가쓰라 다로가 이끄는 강경파의 득세를 원치 않았다.
그래서.
내게 별 타격도 입히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미지만 나빠졌다지만, 꼬리를 내리고 내게 휴전을 요청했다.
“내 말이 틀렸는가? 분명 자네에게도 경고했을 거로 생각하네만. 추가 기사를 당분간 기고하지 말라고 말이야.”
“그, 그렇긴 한데······.”
스티븐슨은 입을 막으며 자신의 뒷말을 삼켰다.
겁에 질려 이성을 잠시 잃는 나머지 일본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내게 자백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다만, 정정 기사 이야기는 없지 않았나?”
“······.”
“자네가 그 점을 집요하게 물어봐도, 일본 영사관 측에서는 이에 상부에서 전달받은 것이 없다고 둘러댔을 거야.”
일본인 특유의 매뉴얼 문화.
21세기에도 남아 있는 상태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런 문화가 심했다.
책임을 지기 싫어해서 명령받은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과거 일본인들과 반도체 투자 관련 로비 활동을 했을 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그들은 계속 상부에서 전달받은 것이 없다고 핑계 대며 시간을 끌 것이네. 자네가 이렇게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이야.”
“······.”
“그들은 꼬리 자르기를 하고 있네. 자네를 불러서 불쏘시개로 쓴 후 쏙 빠지려고 하는 것이지.”
사악하게도, 일본 정부는 내게 휴전을 요청하며.
한편으로는 계속 요행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인 중 일부가 스티븐슨을 암살하길 고대했던 거다.
“그들은 항상 그래. 일을 터트리고는 뒤로 숨지.”
만약 내가 교민들을 불러 모아 주의하라고 경고하지 않았다면, 필시 그들이 원했던 일이 터졌을 것이다.
나는 하나하나 그 사실을 열거하며, 스티븐슨에게 의구심을 심어 주었다.
“일본 정부가, 나아가 이토 히로부미가 수많은 기자를 제쳐 두고 자네를 왜 통감부로 불렀을까?”
“뭡니까?”
“쓰고 버리기 좋아서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쓰고 버리기 좋아서라고 했네.”
나는 스티븐슨의 개인 가정사를 언급했다.
“자넨 미혼이니까. 그 말은 즉, 부인과 자식이 없다는 말이지. 다른 이들과 다르게 말이야.”
“······.”
“자네가 죽어도 뭐라고 소송 걸 사람이 없다는 뜻이네. 기껏해야 자네의 형제자매들뿐일 텐데, 그들이 번거롭게 소송을 걸겠는가?”
“······.”
“그래서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자네를 부추긴 것일세. 우리 교민들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하게 만들려고. 은연중에 마수를 뻗으면서.”
스티븐슨은 지일파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하고자 했다.
“일본에서 살았으니, 그들의 문화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일본인들은 절대로 자신의 속마음을 남에게 보여 주지 않네. 특히 교토 사람들이면.”
“드, 들어 봤습니다. 이를 두고 교코토바라고 하죠.”
“그래.”
나는 가슴을 탕탕 치며 스티븐슨을 바라보았다.
“난······ 그들과 다르네. 내 속마음을 다른 이에게 아주 잘 드러내지.”
“······.”
“그래서 말인데 정정 기사를 써 주게. 나를 위해서.”
대놓고 나를 위해서 정정 기사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자네의 신변을 위해서라도 써 주게.”
“······.”
“자네를 죽음으로 밀어 넣으려는 일본을 위해 이렇게까지 애쓸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정정 보도가 힘들면 기사를 내려 달라는 요청을 데일리 캘리포니아에 해 달라고 권유했다.
그럼 이를 토대로 다른 기사를 써 내려가며 교민들의 흥분을 잠재울 수 있기에, 우회 방법을 그에게 제시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아픈 사람을 내 너무 오래 잡아 두었군.”
이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따라온 일행들 역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에서 생긴 상처로 생각했는데 붉은 반점이었군요. 혹시 말입니다.”
나와 함께 따라온 아일랜드 삼 형제.
그중 맥스가 호텔 방을 나오려고 하다가, 스티븐슨의 얼굴을 잠시 빤히 보며 한 가지를 물었다.
“최근 입안이나 사타구니 같은 데 궤양이 생기진 않았습니까?”
“그, 그건 왜 물으십니까?”
맥스가 호들갑을 떨며 스티븐슨에게 경고했다.
“증상을 보아하니 우리 삼촌처럼 매독에 걸린 것 같아서요. 언제 한번 병원에 가 보십시오.”
“헉······.”
스티븐슨은 못 들을 단어를 들었다는 듯 경악한 표정을 지어 댔다.
나 또한 호텔 방을 떠나다가 맥스의 말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매독?”
“예. 아닐 수도 있겠지만, 미혼이고 일본에 살았으니까요. 높은 확률로 사창가를 들락날락했을 거 아닙니까?”
맥스의 입은 거침이 없었다.
스티븐슨이 놀라는 표정을 짓건 말건 그는 하고 싶었던 말을 계속하여 쏟아 냈다.
“아, 스티븐슨 기자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쇼. 요즘에 좋은 약이 많이 나왔답니다. 듣자 하니 유럽에서는 반짝이는 성분을 추출하여 매독 치료에 사용하고 있다지요? 거······ 이름이 라듐이라고 했던가? 아마 그럴 거입니다.”
응?
라듐?
갑자기 웬 라듐인가.
“작년에 네덜란드인가 독일에 갔을 때, 기술자들 찾는다고 사방을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라이트 형제와 함께 말입니다. 그때 의학 쪽 인재들과도 접촉했었는데, 라듐 이야기를 해 주더라고요. 매독 치료제로 떠오르고 있다면서요.”
라듐이 벌써 추출되었나?
‘순수한 라듐은 아니고, 이 시대에는 합성물로 추출되었을 텐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라듐이 매독 치료제라는 건 생전 처음 듣는 소리인데······.
오히려 방사능 때문에 위험하지 않나?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에 관해 경고하려고 했다.
“맥스! 거, 오지랖은 그만 부리고 냉큼 이리로 와. 집으로 돌아가야지.”
“아, 예. 형님.”
아론이 맥스의 팔을 끌며 그를 스티븐슨 방에서 나오도록 유도했다.
나는 아론의 마지막 말.
오지랖을 떨지 말라는 조언 때문에 차마 라듐의 위험성을 입 밖으로 이야기하지 못했다.
“라듐. 라듐······.”
스티븐슨은 뭐에 홀리기라도 했는지.
궤양이 있는 제 왼팔을 만지며, 우리 일행이 방을 나갈 때까지 계속 라듐이란 단어를 읊어 댔다.
나는 이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이내 그의 모습을 내 시야에서 완전히 지웠다.
< 아메리칸 기레기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