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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132화 (132/294)

< 로열 더치 (5) (지도첨부) >

딸랑-딸랑-

구리로 된 풍경종 종소리가 카페 안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어서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이쪽입니다.”

거대한 체구의 서양인이 내 경호원의 안내를 받으며, 내가 앉아 있는 창가 쪽 테이블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이 왕자님.”

“그대는······.”

그는 모자부터 벗으며 자기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헨리 데터르딩입니다. 오늘 막 이 자리에 참석하기로 한 로열 더치 사의 대표이지요.”

“아! 자네로군. 반갑네.”

아직 서 있는 헨리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는 살짝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와!

21세기 원 역사에서도 그렇고, 이강의 몸에 빙의한 지금도 그렇고.

네덜란드인들은 키가 엄청나게 크구나.

“이쪽에 앉게나.”

“예.”

덩치가 큰 거인이 앉아서 그런 것일까?

내 앞에 놓여 있던 소파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래로 움푹 꺼졌다.

나는 그런 헨리의 앉아 있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아, 자네 혼자 왔는가? 셀 측 인사는 어디에 두고?”

나는 셀의 창시자 마커스 새뮤얼을 찾으며 몸을 살짝 들썩였다.

“설마, 오늘 불참하는 건가?”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양해를 구했다.

“예.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새뮤얼의 권한은 제가 전적으로 위임받아 놓았습니다. 오늘 협상에는 지장이 없을 것입니다.”

“알겠네.”

마커스 새뮤얼은 7년 전부터 영국 정치계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런던시장에서 퇴임한 이후에도 줄곧 정계를 서성이며 경영계로 다시 복귀하지 않은 상태.

이 때문에 세계 2위의 거대 석유 회사는 현재 헨리 데터르딩 손에서 홀로 경영되고 있었다.

“그럼, 협상을 시작해볼까요?”

“그러도록 하지.”

여왕을 묘하게 닮은 것인가?

아니면,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실리를 극한으로 추구해서일까?

헨리 대표는 스몰토크 따위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이야기했다.

“왕자님께서 이번 유상증자에 참여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더불어 네덜란드 동인도령의 석유 탐사권과 채굴권 일부를 원하신다고도 말씀 주셨고요?”

“그렇네.”

“왕실 인사들 그리고 정부 관료들과 밤새 대화를 나누었는데 말입니다. 아, 여기. 카페라테 한 잔 주게나.”

헨리는 점원에게서 카페라테를 한잔시킨 후, 자신의 서류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두 가지 서류 뭉텅이가 그의 가방에서 튀어나왔다.

하나는 유상증가 관련 건이고, 또 하나는 양도받을 탐사권 관련 서류였다.

“주문하신 카페라테입니다.”

헨리는 피곤한지 그 뜨거운 커피를 한 번에 전부 들이켰다.

이후, 관련 서류들을 내게 전해주었다.

“일단 쉬운 건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유상증자 건은 쉬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오, 그래?”

“예. 왕자님같이 유능하고 돈 많으신 투자자분은 언제나 환영이니까요. 물론 록펠러 가문이 조금 연결고리가 있어서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헨리 대표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여왕님께서 이 왕자님을 신뢰하시기에, 믿고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록펠러의 세작은 아니겠지?’ 하는 표정을 살짝 짓는 것 같다.

실제로 로열 더치 사는 록펠러의 스탠다드 오일이랑 세계 석유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기에, 그런 표정을 보일만 했지만.

내가 록펠러의 진짜 사위도 아니고, 록펠러 동생의 막내딸과 결혼한 사이고.

더불어 내가 이번 증자에 참여해도 경영권을 위협하는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일단 의심만 하고 넘어가기로 한 것 같다.

“하지만 탐사권과 채굴권은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조금 번거로워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계약서 하나에 많게는 몇백만 달러가 오갈 수도 있으니까.

이해가 간다.

헨리는 내가 원하는 지역들을 지도와 서류를 동시 교차하며 확인했다.

“현재 우리 로열 더치가 자체적으로 탐사 중인 지역은 일단 양도 후보군에서 제외했습니다. 여왕님께서는 공동 탐사를 지시하셨지만, 어디까지나 미개발 지역만을 언급하셨으니까요.”

“그래.”

안타깝다.

먹음직스러운 쿠칭 유전 같은 곳은 제외되는 셈이니까.

“탐사를 꽤 많이 진행하고 있군.”

거대 기업답게 오십 군데에서 원유를 찾고 있다고 한다.

물론.

실질적으로 땅속까지 탐사한 곳이 열 군데밖에 안 되겠지만.

이미 침 발라놓은 곳은 이번에 양도받을 수 없기에, 나는 이들을 목록에서 제외하며 다른 먹거리들이 있나 살폈다.

‘오, 여긴 아직 탐사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동남아시아의 거대 유전 4곳 중 2곳이 아직 미개발 상태다.

내가 이곳의 탐사권과 채굴권을 확보한다면, 돈은 물론 미래에 일본의 목줄을 꽉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았다.

“팔렘방과 보조네고로도 원하신다고요?”

“그래.”

헨리는 아쉬운 표정으로 두 지역을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검은 황금이 나온다면, 나와 나누어 먹어야 하기에 입맛을 다시는 것 같다.

‘팔렘방 유전이 내 손안에 들어오게 된다니.’

이곳은 원 역사에서 1930년대, 세계 최대의 유전 시설이 있던 곳이다.

연 800만 톤 이상의 원유가 뽑혀 나오던 곳.

1940년대 일본의 석유 소비량이 500만 톤을 상회했는데, 이를 전부 커버할 만큼이나 대단위 유전으로.

나는 이를 로열 더치 사장에게서 양도받은 후, 재빨리 계약서에 사인했다.

“회사 법무팀과 네덜란드 왕실, 그리고 네덜란드 정부와 함께 법률 검토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금알 낳는 거위를 방금 내게 양도해줬다는 것을 헨리가 알까?

그랬다면, 억울해서 가슴을 마구 두들겼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른 시일 내에 끝내주게. 유럽에 오래 있을 것은 아니라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 * *

탐사권, 채굴권 협상이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오 년 뒤에는 내 재산이 두 배 이상으로 불어날 거다.

그만큼 내가 확보하고자 하는 두 유전은 엄청나게 수익성이 좋은 자원의 보고였으니까.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석유 수요량이 폭발한다. 지금 탐사를 시작하면 딱 그때쯤 시추가 시작되겠군.’

돈 굴러들어오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다.

그랬기에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더욱이 네덜란드 방문은 유럽 순방 중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다음 일정 역시도 좋은 결과가 따라올 것만 같았으니까.

모름지기 첫 단추가 아주 잘 맞춰져야 다음 단계 역시 착착 진행되지 않던가?

‘네덜란드에서 남은 것은 하나, 마무리를 잘하는 것이지.’

이번 순방의 주목표는 달성되었다.

하지만 아직 작은 것들이 남아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보기로 한 헨드릭과의 관계다.

“리!”

“헨드릭!”

빌헬미나 여왕과의 독대 이후, 협상 때문에 헨드릭과 사냥 약속을 한 차례 미뤘다.

나는 이것부터 사과했다.

“미안하게 되었네. 멋대로 약속을 미룬 것도 그러고, 자네 지분을 맘대로 처분하는 것도 그렇고. 내 자네 얼굴을 볼 면목이 없네.”

“듣자 하니, 헬레나가 먼저 지분매각을 제안했다던데. 자네가 내게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래도······ 자네에게 언질을 줬어야 했네.”

헨드릭을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히려 나를 토닥였다.

“괜찮네. 진짜로 말이야.”

헨드릭은 여왕과의 독대에서 내가 제안한 주식교환 제안을 이해해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출신성분 때문에 헬레나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네. 말은 안 했겠지만, 지난 2년 동안 영국에게 압박을 당하고 있었더라고.”

헨드릭을 이후, 서쪽을 바라보며 미간을 아주 좁게 오므렸다.

“분노해야 할 대상은 자네가 아니고 저기, 섬나라 놈들일세.”

맞다.

이번 사태의 원흉은 바로 영국 놈들이지.

“러시아나 독일을 비난하고 있지만, 정작 유럽의` 최고 트러블메이커는 자기네들인데 말이야. 정말이지 상종 못 할 놈들일세.”

“그래.”

21세기 국제사회에 온갖 분쟁은 전부 영국이 그 발판을 마련해놓았다고 보면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도 그렇고.

파키스탄-인도 분쟁도 그렇고.

거의 모든 분쟁은 전부 영국놈들 때문에 생겨났다.

나는 이를 회상하며 헨드릭의 투정에 맞장구쳐 주었다.

“아, 여기 받게나.”

“뭔가?”

“자네가 받을 로열 더치사 주식일세. 관련 정보를 내가 따로 추려서 정리해봤는데, 한번 확인해보게.”

서류를 확인한 헨드릭.

그는 2년 만에 불어난 자신의 재산을 보며 제법 놀란 듯 눈을 껌뻑였다.

“이거, 내 생각보다 너무 금액이 많은 것 같은데?”

“여왕이 리&라이트 사의 주식을 상대적으로 고평가해줬더라고. 아마도 경영권 프리미엄을 붙여준 모양이야. 자네가 팔고 싶어서 파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군.”

나는 헨드릭의 어깨를 두들기며 그를 위로했다.

“방산 산업도 좋지만 석유 산업이야말로 다음 백 년을 책임질 먹거리이네. 자넬 위로하고자 그저 내뱉은 말이 아닐세. 진짜로 검은 황금이라고 불려도 되네. 당장 리&라이트 사의 비행기만 보더라고 석유가 사용되지 않은가?”

헨드릭이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이거, 본의 아니게 섬나라 얌체들 덕분에 내 자산만 늘어나게 생겼군.”

“뭐, 그런 셈이지.”

“이렇게 된 김에 자네 석유 사업이 대박이 났으면 좋겠군. 나 또한 한 다리 걸치게 되었으니 말이야.”

오늘은 골프가 아닌 사냥을 하는 날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와 헨드릭에 손에는 골프채 대신 사냥용 소총이 들려 있었다.

우리 둘은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사냥감이 있어 보이는 곳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아, 그나저나······.”

헨드릭이 이동하다가 말고 잠시 멈췄다.

그는 경호원들을 잠시 물리게 한 다음에 내게 귓속말을 했다.

“자네 지난 독대 때, 헬레나(빌헬미나 여왕 애칭)에게 무슨 조언이라도 해줬는가?”

“조언?”

헨드릭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이 갔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모르는 척을 했다.

‘괜히 솔직하게 말했다가 사이가 껄끄러워질 수도 있어.’

부부 사이의 관계는 굉장히 사적인 영역이다.

지난밤, 오지랖 부린 것을 헨드릭이 언짢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에.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슨 조언?”

“자네와 독대를 나눈 후, 왠지 모르게 헬레나가 내 농담에 반응하는 것 같아서. 마치, 신혼 때처럼 나만 보면 웃곤 하네. 아주 어색할 정도로 말이야.”

역시나!

헬레나는 문제점을 알려주면 바로바로 반영하는 기계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는 여인이었다.

헨드릭의 농담에 반응을 잘해달라는 조언을 해주자마자 바로 반응했나 보다.

문제는 살짝 과해서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아니, 내가 던진 썰렁한 농담에도 밝게 웃었다니까? 원래라면 정색하며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는데.”

“그전에는 자네와 대화할 때, 헬레나가 하나도 웃지 않았었나?”

“그럼. 어찌나 차가웠던지 나조차도 놀랐을 지경이었는걸?”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글쎄.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아! 알 것 같네.”

“뭔데?”

“최근에 자네와 자네 부인이, 다시금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던가?”

“그렇지.”

“그 덕분에 헬레나도 자네 농담에 반응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

“그럼. 그 이유 빼곤 이리 갑자기 변할 수는 없겠지.”

헨드릭을 고개를 끄덕이며 내 조언에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무튼 자네가 준 영약 때문에, 내 삶이 많이 변했네. 고맙네.”

“뭘, 친구 사이에······.”

나 또한 많이 도움받았다고.

덕분에 동남아 최대의 유전도 내 손안에 들어가게 되었는걸.

“아, 혹시 말이야.”

헨드릭이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 말을 꺼냈다.

“이번에 자네 아이가 태어난다면...”

또?

이놈도 내 자식과 결혼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왜? 자네 아이와 우리 아이를 이어주려고? 아서게. 임자가 이미 있네.”

“그, 그래?”

헨드릭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건 아니고 내가 대부를 좀 해주고 싶다 말하려고 했는데...”

헨드릭은 ‘듣고 보니 미래 내 아이의 배우자감을 찜해놓은 것도 괜찮겠군.’이라며 혼잣말을 주억거렸다.

‘왜 이래, 진짜 다들.’

이러다가 빅토리아 여왕이나 테레지아 여왕처럼, 온 상류층에 내 자식들로 도배해놓겠네.

“어! 저기. 헨드릭 공.”

“무슨 일인가?”

“북북서쪽 500m 거리에 수, 수사슴을 발견했습니다.”

사냥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선발대로 나가 있던 정찰병이 급히 우리 쪽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이에 헨드릭과 나는 실탄을 장전하며 사냥에 나설 준비를 했다.

“노닥거릴 시간은 끝났군. 슬슬 이동하세나.”

“그래.”

헨드릭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사격 자세를 취하며 내게 이야기했다.

“첫발은 내가 쏘겠네. 지난번 골프 때도 그렇지만, 오늘 컨디션이 아주 좋거든.”

어차피 이번 사냥감도 헨드릭에게 양보해줄 생각이었다.

우리 둘 사이 관계를 위해 끝까지 접대할 생각이었으니까.

탕-

수사슴이 쓰러졌다.

헨드릭은 신이 난 듯 만세를 외치며 수사슴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런 헨드릭을 바라보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미래에 내 아이의 대부가 될지도 모르는 이가 어떤 인물인지 다시 한번 그의 신상정보를 되새겨보았기 때문이다.

< 로열 더치 (5) (지도첨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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