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160화 (160/294)

< 크리스티&소더비 (2) >

“왕자님.”

“월터?”

어라?

월터가 이 시각에 웬일이지?

분명 프라이빗 경매는 내일 저녁에 진행된다고 들었는데.

“무슨 일인가?”

“본 경매는 내일 시작되지만, 사전에 신청한 VVIP에 한해서 본 경매에 나올 물건들을 오늘 먼저 보여 주는데 말입니다.”

“오! 그래?”

“예. 혹시 저와 함께 이동하시겠습니까?”

미리 제작된 카탈로그를 쓱 한 번 훑어보는 것보단 실물을 직접 감상하는 게 백번 더 낫긴 하지.

“그러도록 하지.”

“이쪽입니다.”

월터와 함께 자동차를 타며 런던 시내로 이동했다.

평소 오페라 공연이 열리는 거대한 음악 홀에서 이번 경매 행사가 진행되는 모양인지, 우리 둘이 탄 차가 그곳 앞에 멈췄다.

“입장하기 전에, 몇 가지 관련 규칙을 왕자님께 미리 알려드릴까 합니다.”

경매 방식은 각 행사의 주최자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지난날 참석했던 행사는 뉴욕시와 모건이 주최한 행사였다.

그때는 어린이 환자들을 위한 기부 경매 방식이라서 그런지, 다들 좋은 의미로 통 크게 금액을 적어 내곤 했다.

“그러니까 이번 크리스티 사에서 주최하는 경매는 자신의 신분을 숨길 수 있는 비밀 경매라는 말이지?”

“예.”

신분을 숨길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점이 뒤따라온다.

경매에 오가는 돈의 출처를 굳이 대중에게 밝히지 않아도 되며.

동시에 적법한 절차 없이 영국으로 유입된 유물 또한 한껏 쇼핑할 수 있게 된다.

“왕자님을 위한 가면들을 몇 개를 들고 왔는데 말입니다. 내일, 어떤 걸 쓰시겠습니까?”

월터는 여러 가면 중 공작새 깃털이 가득한 가면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간단하게 흰색 바탕에 진주들이 박혀 있는 가면을 선택하며 월터에게 미소 지었다.

‘각 잡고 꾸민 후, 내일 경매 행사에 참석한다면······ 사람들이 내 정체를 모르겠군.’

가면을 쓰게 되면 백인과 황인을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더욱이.

손에 장갑이라도 낀다면 이를 구분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진다.

본 행사의 취지대로 내 정체를 제대로 숨길 수 있다는 거다.

“왕자님.”

“말하게.”

“왕자님께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월터를 바라보며 나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무슨 제안인데 그리도 비장한 표정을 짓는 건가?”

“최근에 왕자님과 저희 가문 사이에, 살짝 불편한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아주 사소한 오해가 있긴 했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뒤끝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하지만 지난날, 자네 부친의 사과로 나는 그 앙금을 풀었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월터는 남작과 다르게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더욱이.

제 아비와 다르게 이스라엘 독립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나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죽을 위기를 넘겼기에.

그는 무언가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내게서 느끼는 듯했다.

“어제 사과로는 살짝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왕자님께 한 가지를 제안할까 하는데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월터의 제안을 경청했다.

꽤 흥미로운 제안이었기에, 나는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니까······ 이번에 경매되는 물품 중 한 가지를 내게 선물하겠다고?”

“예.”

“내가 덜컥 비싼 그림이라도 고른다면, 어쩌려고?”

오늘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백만 불 이상 하는 초고가 유물이라도 등장하면, 어찌 감당하려고 저럴까?

‘예를 들면 이집트의 투탕카멘 가면이 나온다면? 대박일 거다.’

예나 지금이나 금붙이로 된 고대 유물은 그 가격이 상당했으니까.

특히나 서양인들은.

이집트의 보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서로 가지겠다며 경쟁을 해 댔다.

“저희 가문의 업보인데 어쩔 수 없지요. 저는 그저 왕자님께서 제게 자비심을 베푸시길 빌겠습니다.”

“흠, 알겠네.”

나도 양심이 있기에, 그런 짓은 하지는 않을 거다.

적당한 선에서 하나 사 달라고 해야지.

“내 꼭 원하는 것을 찾은 후 자네에게 알리도록 하겠네.”

월터와 함께 자동차에서 내린 후, 행사장으로 행했다.

이후.

남작이 건넸던 초대장과는 다른 또 다른 초대장을 그들에게 건넸다.

“확인되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알겠네.”

* * *

“내일 배포할 카탈로그입니다. 오늘 관람에 앞서 참고해 주십시오.”

유물들의 간략한 정보가 기재된 책자를 받아 든 후, 나는 경매 물품이 전시된 행사장 안으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혹시 이 문화재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본 유물은 이집트에서 온 보물로······.”

행사장 곳곳에는 유물을 지키고 이를 안내하는 직원들로 가득했다.

행여 도둑이라도 맞을까.

관람하는 사람의 인원수까지 제안하며 프리 오픈런 행사를 하는 듯했다.

‘오!’

이집트 대피라미드에서 발굴된 파라오의 물품들도 보이고.

그리스 신전에서 몰래 떼어 내어 가져온 석상도 몇몇 개 눈에 띈다.

‘상당한 고품질의 문화재들이군.’

대부분이 영국령 식민지에서 왔다.

혐성 중 최고의 혐성국은 영국이라고, 그 옛날 해적질하던 버릇을 못 버리고 이리저리 전 세계 문화재들을 수집하는 모양이다.

여러 물품을 감상하다가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내 이목을 사로잡는 그림 하나가 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지리네.”

고대 문화재들 속에.

비교적 근대에 만들어진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의 자화상이라니!’

그 옆에는 7년 전에 사망한 폴 고갱의 작품 또한 떡하니 존재했다.

‘이게, 여기 있다고?’

18세기.

‘젊은 베르베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작가 괴테의 작품도 있다.

또 다른 유명작인 ‘파우스트.’

그 초고본이 이번 경매에 나온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하나같이 국보급 유물들만 있네.’

일부는 그 가격이 이미 엄청나게 올랐지만.

아직 상당수는 그 진정한 가치가 컬렉터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가격이 예상보다 굉장히 저렴했다.

이강 컬렉션을 만들 아주 좋은 기회기에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하나하나 물품들을 눈에 익혔다.

“손님, 이 작품은 저 멀리 조선에서 건너온 미술품입니다.”

수많은 문화재를 감상하고 있는 가운데 월터가 저 멀리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목청이 큰 큐레이터가 월터를 향해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을 가리켜 흔히들 석파란이라고 부릅니다.”

월터에게 설명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가 워낙 컸기에.

내 귀에도 아주 잘 들렸다.

그랬기에 그 설명이 아주 콕콕 내게 전달되었다.

“손님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이강 왕자라고······ 요즘 세간에서 그 이름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습니까?”

이 몸뚱이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 작품이 영국에 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동안 말없이 월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 이강 왕자의 친조부께서 직접 그리신 작품입니다. 소문으로는 석파란의 경우 작품 수가 워낙 많아서 투자 가치가 별로 높지는 않으나, 혹 이강 왕자와 대담을 나누려고 하신다면······.”

이를 사서 내게 어필하는 것은 어떻겠냐며, 내 앞에 있는 작품의 가치를 큐레이터가 설명했다.

“헉.”

나의 깜짝 등장에 큐레이터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재빠르게 대원군의 석파란을 둘러보았다.

‘이건······. 시중에 흔히 굴러다니는 석파란이 아니군.’

난초 그림 한편에 한자들이 적혀 있다.

이강의 몸에 빙의한 덕분인지 이를 쉬이 해석할 수 있었다.

『무술초을미 석파 칠십구세 병부작』

문자 그대로.

‘1898년 초 을미 날에, 석파(대원군)가 79세의 병든 몸으로 난을 쳤다’라는 뜻이다.

흥선대원군이 1898년 2월에 사망했으니, 거의 마지막 유작이라고 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건······.’

지를 수밖에 없는 작품이네.

설마.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번 경매에 이 작품이 나올 걸 미리 알고 있었을까?

‘남작은 이 바닥 큰손이니, 이 정보를 먼저 들었을지도.’

월터가 왜 그리 당당하게 내게 선물을 하나 하고 싶다고 선언했는지 이해가 간다.

피붙이의 유작인데.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답은 정해졌군.”

“이걸 원하신다는 뜻입니까?”

“그래.”

나의 대답에 월터가 씩 웃었다.

쳇.

더 비싼 걸 요구하고 싶었는데.

뭐,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확실하게 가질 수 있게, 로스차일드에게 이를 맡길 예정이었다.

‘아!’

살짝 재미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월터는 내 마음도 모르고 다른 물품을 관람하기 위해 서둘러 다른 유물이 전시된 전시관 쪽으로 이동했다.

“이거······ 아마도 내 조부의 마지막 유작인 것 같군.”

“예?”

“여기 그리 적혀 있더군. 무술초을미. 내 조부께서 돌아가시기 삼 주 전일세.”

“아······.”

작게 속삭인 후, 윙크를 살짝 찡긋했다.

‘자자. 일하라고.’

큐레이터는 내가 떠난 후.

이 작품을 설명할 때, 방금 언질 준 부분을 부연 설명하겠지?

‘뭐 내 돈으로 사는 건 아니니까.’

같은 석파란인데 얼마나 값이 오르려나?

바다를 건너왔다고.

그래도 웃돈이 붙어서 추정가가 천 파운드라는데.

와락.

남작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예상하며 나는 전시를 즐겁게 돌았다.

제법 흥미를 끄는 작품들이 아직도 많았기에,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를 감상했다.

* * *

석파란은 2만 파운드에 낙찰되었다.

초기 추정가보다 무려 20배나 그 가치가 불어난 셈이었다.

‘유출된 한국 문화재가 생각보다 별로 없군.’

여러 이유 때문이겠다.

우선,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들은 대부분이 현재 일본에 있다.

더욱이 아직.

보호국일 뿐이지, 병합되지는 않은 상황.

그 덕분에 해외로 아국의 문화재들이 밀반출되지 않은 것 같았다.

‘병합되지 않고 계속 보호국으로 남아야 하는 이유를 여기서 또 찾는군.’

그로부터 이틀이 또 지났다.

크리스티 사의 비밀 프라이빗 경매가 끝난 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근처에서 또 다른 경매가 열렸는데.

세계 경매 시장의 다른 한 축을 맡고 있던 소더비 경매사의 주최로 그다음 경매가 행해졌다.

“안녕하십니까? 이 왕자님.”

“반갑네.”

일반인이 참여할 수 없는 프라이빗 형식의 경매이긴 했지만, 이전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가지고 계신 초대장을 제가 건네주시지요.”

“여기 있네.”

“확인했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저를 따라오시지요.”

소더비가 주최하는 경매는 이전 경매 방식과는 다르게 가면 따위를 쓰는 비밀 경매가 아니었다.

좀 더 오픈된 형태로, 참여한 이들은 각각의 면면을 서로 확인할 수가 있었다.

“오랜만이군. 허스트 대표.”

“아, 왕자님께서도 이번 경매에 참석하셨군요.”

“그럼.”

요새는 좀 뜸하게 참석하는, 보헤미안 클럽의 정회원들이 다수 보였다.

덕분에.

그들 모두에게 아쉬운 소리를 듣게 되었다.

모임에 참석 좀 하라고 압박을 받은 거다.

“이 왕자님.”

“그대는?”

“마이클 갠트리 소더비입니다. 오늘 이 행사를 주최한 소더비 경매사의 창업주 후손입니다. 현재 부대표를 역임하고 있답니다.”

“아!”

“반갑습니다.”

마이클은 내게 오늘 잘 부탁한다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이곳에서 왕자님을 만나게 될 줄이야. 왕자님께선 요새 어떤 화가를 주로 후원하고 계십니까?”

“글쎄. 특정 인물을 정해 두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을 사들이고 있어서······ 딱히 한 사람을 특정하여 꼬집기가 힘들군.”

“아하 그러시군요. 오늘 신인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그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시고, 한편으로는 힘이 돼 주시지요.”

지난 5년 동안 나는 간간이 미술계에서 자금을 쏟아부으며 이름 있는 컬렉터가 되었다.

더욱이 나는 모건과 록펠러에 이어 미국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사내다.

떠오르는 작가를 한껏 밀어줄 자본력도 있고.

남들과는 다르게 작품도 제법 잘 봐서, 다들 내가 샀던 예술품이라고 하면 웃돈이 붙은 상황이다.

그래서일까?

소더비의 창업주 후손은 내게 연신 굽신거리며, 이번에도 많은 작품을 구매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야, 자신의 사업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일 거다.

“그래. 알겠네. 내 슬슬 둘러보면서 이야기를 좀 나눠 보겠네.”

이번에 열리는 소더비 경매는 살짝 특이했다.

생존하는 예술가들이 직접 오늘 경매장에 참석한다고 한다.

이미 제 손을 떠난 작품들까지 스스로 나와서 직접 풀어 설명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알린다고 한다.

‘그 대가는 신작 홍보인가?’

경매이면서 동시에 전시회인 셈이네.

참으로 신기한 방식이다.

‘주요 화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더욱이.

직접 예술가들에게서 그 작품에 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니.

정말이지 좋은 기회였다.

“혹시 이 왕자님이십니까?”

“누구?”

“반갑습니다. 뭉크라고 합니다.”

< 크리스티&소더비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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