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163화 (163/294)

< 가면을 쓴 사나이 (1) >

“빌어먹을······.”

가쓰라 다로는 머리를 쥐어짜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어 댔다.

일이 뜻대로 잘 풀리지 않아서다.

“어째, 어제 하는 말과 오늘 하는 말이 이리도 다르단 말인가? 설마 남작이 나를 가지고 논 것인가?”

외채를 연장해 주겠다고 장담하더니.

하루아침에 말을 바꾼다.

채권자가 절대 ‘갑’이라지만.

로스차일드 남작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가쓰라 다로는 속이 미칠 듯이 답답해졌다.

그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문서들과 각종 필기 용품을 제 두 팔로 쓸어 담고는 책상 밑으로 내동댕이쳤다.

“에잇!”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총리 관저에 한바탕 울려 퍼졌다.

이에 비서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가쓰라가 있는 집무실로 들어왔다.

“각하, 진정하십시오.”

“······.”

“위기 상황일수록 각하께서 혼란한 우리 일본을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아시아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물론.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는 이미 못 볼 꼴을 자주 보여 주긴 하지만.

가쓰라는 자신에게 간언하는 비서들을 바라보며 간신히 놓고 있던 정신 줄을 다시금 붙잡았다.

“유키무라.”

“예. 각하.”

“이번에 상환해야 하는 국채는 얼마인가? 언제까지 영국 놈들에게 갚아야 하지?”

오늘 아침에도 보고한 것 같은데.

유키무라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정보를 다시금 앵무새처럼 읊었다.

“한 3주 정도 남은 것 같습니다. 갚아야 할 금액은 영국 돈으로 오백만 파운드, 엔화로는 사천만 엔 정도 됩니다.”

이에 가쓰라가 탄식하며 천장 위를 바라보았다.

하늘을 원망한 거다.

“개새끼들.”

가쓰라는 외통수에 빠졌다.

영국의 요구대로 군축을 받아들이면, 내각의 일원인 해군대신이 반발할 거다.

군축을 무효로 하는 조건으로 전임 사이온지 총리를 배반하고 가쓰라에게 넘어온 것이 바로 해군 군부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외에서 끌어 쓴 외채를 안 갚고 짼다면?

디폴트에 빠지며, 일본 경제가 단번에 나락으로 빠질 것이다.

“묘안이 없군.”

아, 아까 가정 중 하나를 정정한다.

군축한다면, 해군은 물론 육군마저도 가쓰라에게 등을 돌릴 거다.

그들 역시 군축이라는 단어에는 학을 떼는 족속들이니까.

“빌어먹을 귀축영미 놈들. 좋다고 돈 빌려줄 때는 언제고. 감히 재정 건전성을 핑계로 대일본제국의 내정을 간섭하려고 해?”

어떤 선택을 하든, 제3 차 가쓰라 내각은 붕괴할 거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겨우 3주.

그 안에 그가 소망하던 한 가지 대업을 마무리해야 했다.

시간이 제법 촉박했기에, 가쓰라는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비서를 찾았다.

“유키무라.”

“예.”

“소네 통감에게 전화를 걸게나. 어서! 시간이 없네.”

2년 전인 1908년.

조선과 일본을 잇는 국제 전화 케이블이 설치되었다.

이에.

두 나라에 사는 고위층들은 바로 옆에 사는 이웃처럼 시차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일세.”

가쓰라는 소네 통감이 수화기를 들자마자,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한 가지를 통보했다.

“이 주 안에 한일병합을 끝내게. 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고? 말이 왜 안 되나? 그간 준비를 착착 진행하지 않았던가?”

소네 통감으로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다.

다짜고짜.

말도 안 되는 마감 시간을 윗선에서 정해 준 셈이니까.

하지만 가쓰라는 그를 윽박지르며 시간이 없다고 재촉했다.

“안 그러면 자네나 나, 둘 다 대업을 완료하지 못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될 것일세. 그리된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못 할 짓을 하는 셈이야. 내 말 잘 알아들었나?”

쾅-

가쓰라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도 뭔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댔다.

후-

그는 줄담배와 함께 고급 위스키로 속을 달래며 현 상황을 조금 잊고자 했다.

“유키무라.”

“예. 총리 각하.”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 작금의 상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제일 싫어하는 인물의 얼굴이 자꾸 떠오를 뿐이었다.

“영국 정부의 이번 움직임에는······ 빌어먹을 이강, 그 자식이 뒤에 있겠지?”

“······.”

“지금쯤, 뉴욕으로 막 떠나는 배를 탔을 텐데 말이야.”

가쓰라의 비서였던 유키무라는 침묵했다.

일본 우익들에게 있어서 ‘이강’이라는 이름은 그야말로 발작 버튼, 그 자체였으니까.

함부로 이에 관해 덧붙이는 말을 했다가는 재떨이로 정수리를 세게 처맞을 수도 있다.

그랬기에.

그는 조금 욕받이가 되더라도 침묵하는 것을 선택했다.

“하- 이강, 그놈의 재수 없는 새끼. 끝까지 나를 방해하다니. 에잇, 퉤!”

비서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하지 않자, 가쓰라는 유키무라를 흘겨보다가 재떨이에 가래를 내뱉었다.

그러면서 다시금 이강을 생각했다.

‘이강 이놈. 어떻게 엿 먹일 방법이 없을까?’

* * *

“소네 통감이 또다시 사람을 보냈단 말인가?”

“예.”

“쯧쯧. 두 나라를 합치는 작업이 쉬운 일도 아닌데. 이리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처리하려 하다니.”

박제순은 지난번 피습사건으로 죽은 임선준을 대신하여 대한제국의 내부대신이 된 정치인이다.

“노력은 하겠다고 전하게.”

“······.”

“뭐 하는가? 가 보게.”

그는 여느 친일파 관료들과 마찬가지고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사회성도 대단히 좋아서 한양 내각에서 싹싹하기로 유명한 똥파리 같은 자였다.

“윤 총리. 그간 강령하셨습니까?”

“오셨습니까? 박 내부대신.”

세간에서 회자는 별명처럼.

박제순은 똥파리같이 손을 싹싹 비벼 대며 신임 총리를 맞이했다.

“축하드립니다. 죽은 이 대감에 이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르시게 되셨군요.”

윤택영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선 양반들 특유의 겸양을 떨어 댔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도 여러 번 강조하여서······ 내 어쩔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수락하였소이다.”

“이리 어려운 시기에, 용기를 내 주시다니. 정말이지 감사합니다.”

“아니외다.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윤택영은 상석에 앉은 후, 박제순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박 내부대신.”

“말씀하십시오. 총리.”

“혹시 지난번에 소네 통감이 지시한 조선 귀족령 명단 작성 말이외다. 진행 상황이 어디까지 되었소이까?”

이완용이 사망한 후,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합병 절차는 지지부진해졌다.

일본 정부는 이에, 반발이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정책부터 시행했다.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의 법률과 행정 체계를 일원화하는 과정을 몰래몰래 진행한 것.

조선 귀족령 입법 과정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구려.”

조선은 일본과 다르게 오등작 제도가 없었다.

개국 이후 동아시아 내에서 제후국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국을 선언하고, 대한제국으로 국명이 바뀌면서 오등작 제도 역시 유명무실하지만 부활했다.

일본은 사문화된 제도를 다시금 살리며, 일본의 화족처럼 조선에도 귀족 계층들을 공식적으로 명문화하려고 했다.

“이름 옆에 빨간 점이 쳐진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게······ 작위를 준다고 했는데, 공개적으로 거부한 인물들이외다.”

“허허.”

어느 놈이 감히 작위를 거부한단 말인가?

거액의 하사금까지 주는데.

윤택영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어댔다.

“주로 의왕과 연관된 인물들이 이를 한사코 거부하고 있소이다.”

대표적으로 유길준이 있다.

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저 먼 미 서부에서 팔짝팔짝 뛰며, 성을 냈다고 한다.

“그럼, 여기 검은색 점은?”

“조심스럽지만 작위를 승낙한 이들이지요. 아, 점을 안 찍어 놓은 이들은 아직 확답을 주지 않은 이들이외다.”

윤택영은 들고 온 돋보기로 명단을 하나씩 확인한 후, 머릿속에 있던 의문을 박제순에게 물었다.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들에게도 작위를 내릴 모양입니다?”

“예. 소네 통감이 하도 이를 강조하여서.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이를 반영했소이다.”

“그렇소이까? 아, 그런데. 이들 옆에는 전부 점이 안 찍혀 있습니다?”

“대양 너머에 살기에 아직 확답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래도 뭐, 일단 명단에는 올려놓았소이다.”

대충.

조선 귀족령에 관한 일 처리는 이쯤에서 끝내도 좋을 것 같고.

윤택영은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혹시 박 내부대신도 그 소식을 들었습니까? 그······.”

윤택영 역시 대한제국의 신료인지라 차마 그 단어를 꺼내지는 못했다.

이에 박제순이 답답한지.

뒷말을 끌고 있던 윤택영의 말을 받아쳤다.

“한일합방 관련 소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렇소이다.”

“조금 전에 소네 통감의 통지문을 막 수령하긴 했지요. 막 취임한 윤 총리께도 소네 통감이 사람을 보낸 모양이로군요.”

박제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윤택영을 떠보았다.

“혹시, 총리께서는 통감의 권유를 수락하실 생각이십니까?”

윤택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제순은 이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댔다.

“윤 총리. 신중히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황제 폐하와 상황께서 이 움직임에 굉장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소이다.”

“압니다.”

“을사년과는 상황이 제법 다릅니다. 예전에는 우리의 권유를 따라 주셨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외다. 한 달이 걸려도 설득하기 힘들 텐데, 그걸 어째 이 주 만에 해낸단 말입니까?”

윤택영은 현 황제인 순종의 장인 되는 인물이다.

그랬기에.

대한제국 황실의 반응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의왕의 사람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

“목숨은 하나입니다. 이 짓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 아닙니까?”

박제순은 누구보다 시류를 잘 읽는 인간이었다.

그는 윤택영의 선택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칭했다.

“가쓰라 총리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일본의 동맹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이 공개적으로 총리를 압박하고 있으니까요.”

윤택영이 한일합방을 공론화한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내각의 일원이었던 박제순 역시 찬반 의견을 밝혀야 한다.

하지만 윤택영이 영리하게 시간을 끈다면?

박제순은 별 욕 먹지 않고 자리를 보존하며 나라 녹을 타 먹을 수 있을 거다.

그랬기에 박제순은 윤택영을 재차 설득했다.

“가쓰라는 내우외환에 빠진 꼴입니다. 그러니 적당히 시간이나 질질 끌면서 거친 폭풍우를 피해 갑시다. 괜히 똥물 뒤집어쓰지 맙시다.”

가만히 이를 듣고 있던 윤택영이 성을 냈다.

“박 내부대신은 평생 남의 눈치만 보고 살 작정입니까?”

“예? 그게 무슨······.”

윤택영은 현재 재정 상황이 별로 좋지 못했다.

씀씀이가 아주 헤프고.

도박도 자주 하여 곳간이 텅텅- 비어 있는 상황.

일본 정부가 그에게 접근해 거액의 은사금을 약속하지 않았더라면, 윤택영 역시 박제순과 비슷하게 은신하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았을 거다.

하지만 지금 그는 파산 직전이었기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당장.

거액의 은사금을 받기 위해서라도 대한제국은 일본제국과 하나가 되어야만 했다.

그랬기에 윤택영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박제순을 꾸짖었다.

“본인은 내일쯤, 황제 폐하를 한 번 뵙고 다시 한번 권유할 생각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니까요.”

“그래도 반응이 없다면, 겁박이라도 해야지요.”

“······.”

“옳은 길로 군주를 이끄는 것이 참된 신하의 길이 아닙니까?”

옳은 길이 과연 나라를 팔아먹는 일일까?

박제순은 윤택영의 황당한 논리에 살짝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그 자신은 ‘양심이 가책’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윤택영은 그마저도 안 보였기에, 항시 아첨을 늘어놓던 똥파리의 주둥아리가 잠시 멈춘 거다.

“분명, 나는 경고했소이다. 윤 총리.”

“······.”

“이 일에 나를 끌어들이는 짓만 하지 마시오.”

윤택영은 헐레벌떡 내부 관청 건물을 떠나는 박제순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겁쟁이 같으니······.”

* * *

“응?”

윤택영은 한참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이한 기분이 들어서 잠시 눈을 떴다.

“자, 자넨······ 누구인가?”

윤택영의 사랑채 안에 낯선 손님이 하나 들어와 있었다.

어둡기도 하고.

탈까지 쓰고 있기에, 그 정체를 알 수가 없었지만.

반가운 손님은 아니었기에, 윤택영은 등에 식은땀을 흘렸다.

“윤택영.”

밤손님이 윤택영의 이름을 속삭였다.

윤택영은 그저 눈을 껌뻑이며 그를 바라볼 뿐이다.

“현 황후의 친부로 해풍부원군에 봉해진 조선의 마지막 외척.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총리가 되어 나라마저 팔아먹으려는 매국노.”

윤택영의 신분을 줄줄이 읊는 밤손님.

“누, 누구냐?”

“글쎄, 누구일 것 같으냐?”

밤손님이 칼을 들고 이를 윤택영의 목에 겨누고 있었기에, 윤택영은 크게 소리를 지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알을 굴리면서 주변을 살필 수는 있었는데.

개미 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는 듯, 집안은 조용했다.

‘이놈들은 뭐 하는 게야.’

설마, 이 시간에 술을 처먹어서 죄다 뻗은 것은 아니겠지?

윤택영은 제발 아무나 사랑채로 와 달라고 기도하며 탈을 쓴 손님에게 속삭였다.

“워, 원하는 것이 무, 무엇이냐?”

“······.”

“도, 돈을 원한다면 내 죽을 때까지 쓸 거금을 건네주마. 그, 그러니 제발 허튼수작은 생각지도 마라.”

탈을 쓴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살짝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윤택영의 제안을 거절했다.

“뭐래? 돈이 필요했다면 사업을 했지, 이 짓거리를 하고 있겠느냐?”

“······.”

“게다가 네놈이 땡전 한 푼 없다는 것은 장안의 사람들이 죄다 아는 사실이 아니냐? 날 뭐로 보고.”

윤택영은 이에 두 손을 싹싹 빌며 마지막까지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제, 제발! 살려다오. 하라는 것은 뭐든 하겠다.”

“시끄럽고. 저승 가는 길, 지난날 악행을 하나씩 곱씹으며 반성하도록 해라!”

“제, 제발! 컥.”

성대와 기도가 있는 곳을 잘라 내서 그럴까?

윤택영은 비명 한 번 지르지도 못하고 꺽꺽대다가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원 역사에서 일본제국에 은사금을 제일 많이 받았던 윤택영치고는 꽤 허무한 결말이다.

“하- 기분 참 거지 같네.”

윤택영을 암살했던 사내는 자신이 쓰고 있던 ‘각시탈’을 죽은 윤택영의 옆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그 뒤.

그는 옷을 갈아입은 후,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윤택영의 집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 가면을 쓴 사나이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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