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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164화 (164/294)

< 가면을 쓴 사나이 (2) >

미국의 대학 시스템은 현대 대한민국과 조금 다르다.

입학 전형부터 서로 달라 둘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긴 그렇지만.

다양한 전형이 존재하고 기부 입학 제도도 있기에, 미국대학 입학 문턱이 조금 더 낮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학은 명문대일수록 졸업하는 과정에서 중도 탈락자가 많이 생겨난다.

그렇기에 명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은 온전히 졸업하기 위해서라도 새벽까지 공부해야 했다.

시험 기간에 아이비리그 최상위 대학 교정들은 그야말로 조용해지는데, 이는 모두 수강하는 과목에서 하나라도 낙제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침묵을 넘어 침울한 분위기까지 풍기기도 했는데, 이런 분위기는 9월 초부터 5월 초까지 계속되곤 했다.

『들어오게.』

하지만 매년 5월 말이 되면, 교정의 분위기는 180도 바뀐다.

고된 학위 과정을 감내한 학생들이 드디어 졸업하게 되니까.

『훌륭하네. 미스터 리. 그대의 졸업논문은 정말이지 흠잡을 곳이 없구먼.』

이승만은 동부 최상위 대학인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막.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학장실 문고리를 돌리는 중이었다.

자신의 졸업을 최종 심사해 준 지도교수 우드로 윌슨이 그의 박사학위 논문승인을 막 통과시켜서다.

“해냈다. 나이스!”

그의 졸업학점은 A-.

A+도 아니고, 생각보다 별로 높지 않구나 여길 수도 있지만, 이 시대 프린스턴은 학점을 굉장히 짜게 주기로 유명했다.

학점 디플레 시대.

A- 학점은 상위 5%에게나 주었기에, 굉장히 선방한 셈이라고 볼 수 있다.

‘정말이지 어렵게 따냈다. 피와 땀으로 쟁취해 낸 박사학위로구나.’

이승만은 외국인이었기에, 다른 학생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했다.

그랬기에 지난 3년간.

이승만은 매주 코피까지 흘리며, 정말이지 빡빡하게 공부해야만 했다.

‘한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따게 되었다. 드디어 수많은 한인 사이에서 비빌 언덕이 생겼어.’

원 역사에서 이승만의 졸업학점은 C+였다.

하지만 지금은 A-.

이승만이 이렇게 학위에 목숨까지 걸면서 지독하게 매달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이는 전부 다 이강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강이 원 역사와 다르게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에서 활약하면서, 이승만의 입지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니까.

아주아주 멀지만, 이승만은 양녕대군파 16대손으로 조선의 건국 군주 이성계와 피가 한 방울 섞인 자다.

원 역사에서는 왕실 종법을 잘 모르던 이들에게 이를 좀 꼬아 설명하여, 이승만은 미국에서 왕자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이강이 등장한 이상 이를 속여 말할 수가 없었다.

진짜 왕자 앞에서 왕자 행세를 했다가는 사기꾼 취급받기 딱 좋았기 때문이다.

『프린스 리. 런던을 떠나 뉴욕으로 향해. 세기의 투자가라고 꼽히는 프린스 리. 그의 다음 투자 종목은 무엇일까?』

경제학 강의를 하는 교정 건물 근처를 지나가서일까?

땅바닥에 경제신문인 월스트리트저널이 굴러다닌다.

제5면에 이강의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이승만은 이를 한 번 쓱 보고는 다시금 자신의 기숙사로 이동했다.

‘날이 갈수록 나와 의왕의 격차는 벌어지고 있구나.’

경제적인 면에서도 그렇고.

교민사회의 위상도 그렇고.

이승만에게 있어서 이강은 이제 따라잡을 수 없는 크나큰 태산이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내가 전하를 뛰어넘을 가능성은 0이 되었어.’

이강을 넘기 위해서는 딱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은 바로 종교다.

이강이 기독교를 부정한다면?

그래서 교민 사이에서 온갖 말이 튀어나온다면?

이런 천우신조 같은 기회가 찾아온다면, 이승만은 교민사회에서 새로운 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날 결혼식에서 이강이 공식적으로 세례를 받고.

더욱이 교민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일본 놈들에 의해 이강이 습격당하면서, 이 마지막 희망도 물거품이 되었다.

‘운도 좋아. 하필이면 성경책이 안주머니에 딱 있고······.’

방탄 성경 사건 이후.

교민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이 이강을 구했다는 말이 숱하게 돌았다.

그랬기에.

진짜로 이승만이 이강을 뛰어넘을 가능성은 0이 되었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태산이라면, 내 편으로 구워삶아야지. 반드시 의왕의 최측근이 되어야 한다.’

언젠가부터 이승만은 이강을 두고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그의 위상 아래에서 자신이 이인자로 클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아, 미스터 리.』

『예. 윌슨 교수님.』

『자네, 이틀 뒤에 우리 집에서 열리는 저녁 만찬에 오겠는가?』

이강은 가끔 미래를 아는 것처럼 행동해 댈 때가 있다.

이강은 이승만이 프린스턴에 입학할 때 한 가지를 당부했다.

윌슨을 지켜보라고.

‘일단은 의왕 전하가 내게 시킨 일부터 하도록 하자.’

* * *

이승만은 우드로 윌슨의 집 앞에 도착했다.

똑똑-

이승만은 노크한 후, 크게 날숨을 내뱉었다.

윌슨의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이제 시작이야.’

박사학위를 따게 됨으로써,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되었다고 생각했다.

이 시대.

아이비리그에서 박사까지 딴 고학력자는 별로 많지 않았기에, 나름대로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한 거다.

“학장님, 그간 건강하셨습니까?”

“아! 왔는가? 안으로 들어오게.”

윌슨은 문 앞에 직접 나와서 이승만을 맞이했다.

그의 집 안으로 들어서자, 이승만의 눈에 윌슨의 가족들과 함께 몇몇 손님들이 들어왔다.

“다들 교내를 왔다 갔다 하며 한 번씩은 얼굴을 마주했을 텐데. 여기 방금 도착한 학생은 대한제국에서 온 미스터 리네.”

저녁 식사에 홀로 초대받은 줄 알았는데 말이다.

몇몇 불청객이 보인다.

이번에 막 학사 학위를 딴 흑인 청년도 눈에 익고.

정치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백인 여성도 눈에 띈다.

북미 원주민 출신으로 보이는 몸이 좋은 사내까지.

그야말로 온갖 인종이 윌슨의 집에 한데 모여 있다.

‘기자?’

윌슨은 현재 뉴저지주 주지사직에 민주당 후보로 선출된 상태였다.

이에 이승만은 윌슨이 자신을 왜 이곳에 초대한 것인지 1초도 안 되어서 깨달았다.

‘선거에 날 이용할 셈이군.’

윌슨은 영리하게도 뉴저지주에 사는 중도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자신의 제자들을 이용하고자 했다.

자신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위해서다.

그가 출마한 뉴저지주는 남북전쟁 당시, 노예해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북부주다.

한 마디로 대대로 공화당 텃밭이라는 뜻.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해 주셔야 합니다.”

윌슨은 세간에 유행하고 있는 진보주의를 선거 신조로 내세우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인종 문제에도 유화한 모습을 보이며, 중도 표심을 사로잡고자 했다.

이는 꽤 효과적인 정책이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윌슨이 공화당 후보를 제치고 선두를 달리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으니까.

“자자, 끝났습니다. 이제 식사하십시오. 저는 옆에서 구경만 하겠습니다.”

윌슨은 앞서가는 선거전에서 쐐기를 박기 위해 이승만을 다시 한번 이용하고자 했다.

윌슨은 기자들 앞에서 소수 인종 제자들을 보란 듯이 소개했다.

“미스터 리. 여기 있는 이들에게 자네 소개를 좀 해주게나. 다들 자네 얼굴만 보고 있지 않던가?”

이용당했다는 것에 이승만은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이번 저녁 만찬은 자신에게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기회였다.

지역 언론인들과 인연을 쌓을 수도 있고, 윌슨의 보좌진들과 연락처를 교환할 수도 있으며.

명문 대학인 프린스턴 대학의 소수인종 학생 중 능력이 제법 출중한 자들과 우정을 쌓을 수 있었으니까.

“안녕하십니까. 승만 리라 합니다. 정치학, 국제법을 이중 전공했으며 여기 계신 윌슨 학장님의 지도로 이번에 박사 졸업논문을 완성했습니다.”

“아! 다음 주면 박사학위를 받게 되니, 지금부터 닥터 리(이 박사)로 불러야겠군. 하하하.”

윌슨은 이승만을 바라보며 프린스턴에서 공부하던 시절, 여러 일화를 소개했다.

이승만이 성공리에 졸업하게 될 수 있었던 공은 모두 지도 교수였던 자신의 덕이라고 은근히 돌려서 말하기도 했다.

“입에 착착 달라붙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 지금부터라도 자기소개할 때 박사라고 칭하게나.”

“예.”

“아무튼 여기 내 오른편에 서 있는 닥터 리는 향후 대한제국의 미래를 바꿀 큰 인재일세. 자자, 미래의 거물들과 인사들 나누게나.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오늘은 자네도 정신 좀 바짝 차려야 할 것일세.”

윌슨은 평소 대식가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상하게도 나이프와 포크 질을 몇 번 한 후, 멈췄다.

소수 인종 제자들과 식사를 하는 것이 살짝 꺼려졌기 때문이다.

이에 이승만 역시 밥을 적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스승에, 예비 거물 정치인기도 한 윌슨이 식사는 뒤로한 채 자꾸 말을 걸어댔으니까.

“닥터 리.”

“예, 말씀하십시오. 윌슨 교수님.”

“그······ 혹시 말이야.”

윌슨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승만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자네, 이강 왕자와 인연이 있는가?”

“예?”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네. 자네와 이강 왕자의 성이 같아서 말이야.”

“아!”

사적으로 만난 자리에서 윌슨은 별 시답지 않은 질문만을 던져 댔다.

유일하게.

영양가 있는 질문은 바로 이번 질문.

이강과 이승만의 관계가 어떻게 되냐는 질문이다.

이승만은 잠시 고민하다가 윌슨을 바라보았다.

“저는 이 왕자님께서 설립한 재단의 장학생으로 활동하는 중입니다. 제가 첫 번째 박사학위를 받게 될 장학생이 되는지라, 차후 한 번은 이 왕자님과 만날 기회가 있습니다.”

“그래?”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남에게 드러내는 일이 없었던 윌슨.

그는 탐욕 가득한 번뜩이는 눈빛으로 그의 제자인 이승만을 쓱 쳐다보았다.

“그렇단 말이지.”

윌슨이 무언가를 작게 속삭였다.

지도교수로서 이승만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것인데, 이승만은 눈을 가늘게 뜨며 이를 경청했다.

그 뒤 살짝 미소를 날리며 윌슨에게 답했다.

“이 왕자님과 만나길 원하신다고요? 제가 한번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 * *

“우남(이승만).”

저 멀리서 누군가 이승만의 호를 외쳤다.

익히 아는 목소리.

이승만은 반가운지 그 목소리의 정체를 향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우성(박용만), 검은(정순만).”

이승만과 박용만, 그리고 정순만이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했다.

셋은 한인 교민사회에서 ‘삼만’이라고 불릴 만큼 친한 사이였기에, 그런 모습을 보인 거다.

“와 줘서 고맙네. 내 졸업식을 홀로 끝내야 하나 내심 씁쓸해했는데 말이야.”

“뭘.”

“의형제 사이인데, 이정도야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민 초기.

지금 한데 모인 셋은 하와이에서 함께 똘똘 뭉쳐 다녔다.

이승만은 그때를 추억하며 박용만과 정순만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검은, 자네 손에 들고 있는 꽃은 무엇인가?”

“아, 이거?”

정순만이 머쓱한지, 손으로 제 머리를 긁적였다.

“내일 졸업식 때 줄 축하 화환을 내 오늘 미리 구매했네.”

“하여튼 성질머리도 참. 내일 줄 화환이면 내일 살 것이지, 오늘 왜 산 건가? 번거롭게.”

“그게, 정문 앞에서 어떤 할머니가 이를 팔고 있어서. 내 이것을 그냥 지나쳐 올 수가 없었네.”

정순만은 참으로 잔정이 많은 타입이다.

저리 일면도 없는.

그것도 같은 한인도 아닌 서양인 할머니를 신경 써 주다니.

이승만은 친구지만,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정순만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에 박용만이 급히 주제를 돌렸다.

“아, 우남. 자네 졸업 기념사진을 찍을 사진 기사는 구했는가?”

“아, 그거? 내 미리 구해 놓긴 했네.”

“그래? 다행이구먼. 구하지 않았다면, 내 직접 찍어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박용만은 학위를 이어 갔던 이승만과 다르게 이강의 밑에서 지난 5년을 굴렸다.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돈도 많았고, 그의 업무상 사진 찍을 일도 더러 있었기에.

그 비싼 카메라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내심 이를 부러워하며 박용만을 흘겨보았다.

“아, 그나저나 자네.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 참, 멀리서 온 우리보다 본국 소식이 더 궁금한가?”

박용만은 못 이기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늘 막 출간된 한인 신문을 이승만의 오른손에 건넸다.

“나는 다 읽었네. 그러니 시간 날 때 기숙사에 돌아가서 한번 읽어 보게나.”

이승만은 그의 친구들이 앞에 있었기에, 당장 신문을 읽고자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1면에 있는 기사 제목이 너무나도 자극적이라서 이내 그 내용을 빠르게 정독했다.

“해풍부원군(윤택영)이 유명을 달리했다고?”

박용만이 이승만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암살당했다고 하네. 자나 깨나 나라만을 생각하는 구국의 의인 손에 죽은 모양일세.”

“······.”

이승만은 사실.

세간에 행해지고 있는 대일 무력투쟁 노선을 그다지 지지하지 않았다.

이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켜서 영미권 열강이 한인들을 경계하리라 생각한 거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친구들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우성. 소문에 의하면 그 윤가 놈 말이야. 거, 꼴 좋게 목이 댕강 잘렸다는구먼.”

“오, 그래?”

“암. 믿을 만한 소식통에 의하면 그렇다니까? 저기, 저승 가는 길에 제 머리 챙기고 가려면 꽤 골이 아플 것일세. 걸을 때마다 해골이 또르르 굴러갈 테니까.”

당장이라도 버럭 화를 내고 싶었지만, 이승만에게 앞에 있는 이들은 그의 친구들이다.

더욱이 자신의 졸업을 축하하러 멀리서 온 절친들이었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속 안에 있던 불만을 꾹 억누르며 맞장구를 쳐 줬다.

“요새 들어 본국에서 의인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는 모양일세.”

“암. 많이 활동하고 있지.”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에 이어, 나라를 팔아먹으려고 하는 외척들까지 그 수급을 베지 않았던가? 이뿐만이 아닐세. 자잘하게 나라를 팔아먹은 놈들까지 모조리 족치고 있네.”

“더 나아가서 우리 한인들의 자본을 쪽쪽 빼먹던 일본 놈들도 족쳐야 하는데. 아직은······ 무리인지 아니면 위에서 자제하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네 통감은 무사한가 보네.”

박용만이 가리키는 윗선은.

아마도 이강일 테다.

다행히도 미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우리 진짜배기 조선 왕자는 극단적인 선택까지는 지시하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어서 힘을 길러야 하는데······.’

그래야.

이강의 옆에서 지금도 열심히 충동질해 대는 극단 무장투쟁론자들을 견제할 수 있지 않겠나?

“어! 저기······.”

“응?”

“서재필 선생이 아니신가?”

< 가면을 쓴 사나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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