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166화 (166/294)

< 가면을 쓴 사나이 (4) >

“일단 주제를 특정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하게. 아, 그리고 자네. 그전에 표정 좀 풀게나. 보고 있는 내가 불안해지는군.”

나의 권유에 이승만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전하. [소인]은 지난 3년간······ 지도교수 우드로 윌슨의 곁에서 많은 것을 수학하며 보고 배웠습니다.”

이승만은 잠시 자신의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은 후, 그간 모아 두었던 이야기보따리를 내게 풀기 시작했다.

“윌슨은 굉장히 뛰어난 행정가이자, 교육자입니다. 취임한 지 약 팔 년 만에 프린스턴 대학을 한 단계 더 높은 대학으로 성장시킨 최고의 학장이니까요. 그간의 실적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승만의 주장은 모두 사실이다.

우드로 윌슨은 프린스턴 고유의 소규모 스터디그룹인 프리셉트(precepts)를 창안한 자.

더욱이 연구 파트에 장학금을 몰아주며, 프린스턴을 동부 제일의 연구중심 대학으로 변모시켰다.

이에.

십 위권 언저리에 있던 프린스턴은 십 년도 안 되어 동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명문대로 성장했다.

“하긴, 그 점은 나 또한 동의하네. 윌슨이 없었다면, 프린스턴은 그저 그런 대학에 머물렀을 것이네.”

“예. 하지만 세상 어디에나 그렇듯,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그다음에 잔뜩 할 모양인지, 이승만은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훑었다.

지금 우리 둘이 있는 장소는 다름 아닌 윌슨이 추천해 준 곳.

행여나 누가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나 신중한 모습을 보인 거다.

“윌슨은 머리가 비상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면의 인성이 개차반입니다.”

“어떤 면에서?”

“일단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두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좀 더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게나.”

“요새 학계와 정계에 진보주의 정책이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윌슨은 이 정책을 누구보다 지지하지 않던가?”

“세간에는 그리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거짓입니다.”

“뭐라?”

“대중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눈속임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속으로 이승만의 주장에 동의했다.

지난 7인회 회동 때.

월스트리트의 거물 J.P.모건이 우드로 윌슨을 차기 대통령 후보로 추천하지 않았던가?

우드로 윌슨이 진짜로 월가에 적대적인, 뼛속까지 진보주의자였다면 모건이 그의 이름을 언급했을 리가.

‘원 역사에서도 윌슨은 임기 초반에만 반짝 진보주의 정책을 입안했지.’

공화당 정부에서도 질질 입법이 미루어지던 연방준비제도 법안이 윌슨 정부 아래에서 통과된 것을 보아라.

그것도 모건의 뜻이 고대로 반영된 상태에서 법이 통과되지 않았던가?

“누구나 그런 이중적인 면모를 내면에 갖추고 있다지만······ 윌슨은 그 정도가 너무나도 심합니다.”

이승만은 작심한 듯, 제 스승인 윌슨을 힐난했다.

‘효’와 ‘충’을 중시하던, 다른 한인 유학생이라면 절대로 그리 행동하지 않았겠지만.

이승만은 달랐다.

이미 여러 번 그의 옛 스승이었던 서재필을 비난하는 행보를 내게 보였기에, 나는 그의 행동이 새삼스럽지 않다고 여겼다.

“더욱이 윌슨은 그렇지 않은 척하지만, 뼛속부터 피부까지 인종차별주의 사상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학장에 취임한 후, 프린스턴 대학의 소수인종 학생 수를 보십시오. 아주 급격히 그 수가 줄어들지 않았습니까?”

이승만은 해당 주제를 꺼내 들며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인종차별에 굉장히 민감한 모습을 보였기에, 특별히 주의한 거다.

“지난 3년간 프린스턴 대학에 새로이 입학한 동양인은 [소인] 말고는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

“윌슨 학장은 백일우월주의 단체의 주장에 동조하며, 흑인의 입학 또한 금지했습니다. 교칙 제정 전, 막판에는 뒤로 슬쩍 물러났지만······ 프린스턴 대학의 교직원이라면, 누가 이 정책을 끝까지 밀었는지 잘 알 것입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의 시선 끝에는 지역 신문이 하나 놓여 있었다.

오늘 발간된 신문도 아니고.

일주일 전에 나온 신문으로, 제1면에는 윌슨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사진 속에 윌슨은 소수인종 학생들 사이에서 밝게 웃고 있었는데.

누가 이 자리에 이 신문을 놓았는지, 바보가 아니면 그 정체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언론에는 이리 자신을 소개해 놓고, 정작 하는 짓은 목화재배나 하는 남부 농장주들과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지.’

이런 역겨운 위선 행동은 다음번 대통령 선거까지 이어질 것이다.

이를 모르는 흑인들은 윌슨이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여 투표할 거고.

‘정작 대통령에 당선된 다음에는 강력한 흑백 분리 정책을 입안했지.’

윌슨의 지휘 아래, 미국 연방정부는 강력한 흑백 분리 정책을 펼친다.

예를 들면 화장실을 갈 때.

소수인종들은 소수인종만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아야 하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책을 입안한 놈이 바로 윌슨과 윌슨 아래에 있는 내각 일원들이었다.

“저라면······ 윌슨의 정계 입문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전하의 정치적 행보에 해가 되면 되었지, 득이 될 것 같지는 않으니까요.”

동의한다.

내가 아무리 왕자이긴 하지만, 나 역시 피부색은 백인으로서는 ‘노란’색이니까.

“그래도, 자네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야.”

“······.”

“그는 자네의 스승이 아닌가?”

내 앞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진짜로 진심이 담긴 것인가?

이승만은 격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살짝 화를 내기도 했다.

“[소인]에게 도움이 된다고 해도, 우리 한인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소인]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대한제국의 신민입니다.”

나는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윌슨의 성향은 잘 알겠네. 여기까지 듣도록 하지.”

“······.”

“자, 그다음으로 넘어가세. 그래. 자네가 보기에, 윌슨은 무엇에 취약한가? 그의 약점은 뭐라고 생각하지?”

* * *

윌슨의 약점은 당연하게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점이다.

정계에 입문할 것을 2년 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기에, 그의 문제 되는 발언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고맙네. 자네의 조언 덕분에 많은 것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네.”

더욱이.

윌슨은 극심한 애처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윌슨은 그의 부인에게 너무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부인 쪽을 공략한다면, 또 다른 약점을 발견할 수도 있을 터.

“그래. 자네는 졸업 후 무엇을 할 생각인가?”

윌슨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다음 주제는 당연하게도 이승만에 관한 미래였다.

“소인은······ 소인의 능력을 어디에 사용할지 고민 중입니다.”

나는 이승만과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까이에서 이승만의 표정을 하나하나 생생하게 다 관찰할 수 있었다.

‘저 표정, 참 익숙하단 말이야.’

가만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집중하니, 내 머릿속에 있는 추억 하나가 급히 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생각났다. 그래!’

21세기.

로비스트로 활동할 때, 저런 모습들을 참 많이 보았는데 말이다.

무언가 간절히 원할 때.

특히나 영향력 있는 높은 어르신에게 잘 보이기를 원할 때.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을 향하여 특유의 부담되는 표정들을 짓곤 했었는데.

‘나 또한 신입일 때 저랬지······.’

이승만이 딱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딴에는 상대가 이를 모를 거로 생각하겠지만, 사람 관계를 많이 맺어 본, 닳고 닳은 이라면 모두 다 파악할 수 있는 표정.

지금 이승만이 딱 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아서인가?’

정치인 이승만이 아니라, 정치학 박사 이승만이라서 그런지 아직 제 본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몇 번 시행착오를 겪게 되면 곧 깨우치겠지만.

아직은 풋내기 정치인 지망생에 불과했으니까.

“일단은 미국에 있는 한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데 말입니다.”

나는 티 내지 않고 이승만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하며 그가 어떤 점이 달라졌나 분석했다.

“혹시나 [소인]의 능력이 전하께 도움이 된다면, 전하의 곁에서 일하고 싶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승만은 내가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부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묘하게 달라졌다.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소인’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방향이 어서 빨리 잡혔으면 좋겠군. 생각이 정리된다면 언제 한번 나를 찾아오게나.”

이승만은 직접적으로 특정 자리를 언급하지 않고 계속하여 이를 빙빙 돌려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에.

그가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며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이승만이 무언가를 먼저 요구하길 원했으니까.

한 수 더 숙이고 들어오는 편이, 그를 제어하기 쉽기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계속하여 그의 열정을 모른 척했다.

“아, 전하. 전하께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 있습니다.”

“무엇인가?”

“그게······.”

이승만이 무언가 고해성사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필립 제이슨이 나에 관한 비방을 자네에게 했다고?”

“예.”

조바심이 나서 그런가?

이승만은 또다시 서재필을 언급하며 자신이 얼마나 내게 진심으로 충성을 하는지는 증명하고자 했다.

“알겠네. 내게 이를 알려 주어서 정말이지 고맙네.”

이승만은 자못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조금 더 다가왔다.

“어찌 대응하실 것입니까?”

“일단은 지켜볼 생각이네.”

“······.”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으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선황 폐하의 아들일세.”

나는 오 년 전 일을 회상했다.

일본에서 막 떠나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현지 교민 중 상당수는 날 적대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에 있을 때, 내 행실을 고까워하는 이도 있지만.

다수는 내가 고종의 아들이었기에 극도로 불신하는 표정을 지었던 거다.

“선황께서 그간 많은 업보를 쌓아 두 셨기에, 일부는 필연적으로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네.”

이승만은 지금 내게 겉으로나마 호의를 보이지만, 서재필은 다르다.

원인이 무엇이겠나?

전부 아버지 때문이다.

‘고종에게 쌓인 원한이 극에 달하니까. 나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고종은 40년간 임금으로 재위를 하며, 많은 정책은 입안했다.

일부는 끝까지 밀어붙이기도 했지만, 대다수는 1년도 안 되어서 그 방향이 심히 변했다.

이런 변화는 극심한 경제 위기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때로 정치적 숙청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랬기에.

상당수는 고종으로 인해 큰 피해를 보았다.

‘내 앞에 있는 이승만은 옥에서 고문을 받고, 서재필은 가족을 잃었지.’

이승만과 서재필이 다르게 행동하는 것은 나와 고종에게 쌓인 원한의 차이가 다르기 때문일 거다.

이승만은 이를 잊을 수 있지만, 서재필은 이를 극복할 수 없을 만큼 고종을 증오하니까.

‘교민 중 일부는 서재필과 비슷하겠지.’

실력으로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고종과 나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밖에는 없지.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열심히 내 일을 할 생각이었다.

* * *

우드로 윌슨에 관한 이야기를 이승만과 나누며,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 결과.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미래를 크게 바꿀 수도 있어. 하지만 윌슨이 대통령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사업가는 무릇 정치적 성향을 지니면 안 된다.

진보는 진보 나름대로.

보수는 보수 나름대로.

도움이 되니까.

‘지금은 진보의 시간이지.’

극심한 빈부의 격차 때문에, 미국인들은 현재 진보주의 정책을 원한다.

세계대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미국인 모두가 잘살게 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계속될 거다.

‘웃긴 건, 진보의 시대에 바로 인종차별 법안이 입법되었다는 사실이야.’

우드로 윌슨의 흑백 분리 정책은 단순히 흑인들에 대한 차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는 흑인을 넘어 다른 인종, 아시안들을 향한 차별로 이어질 거다.

동양인들의 전면적인 이민 금지가 그다음 순번이 될 것이 뻔했기에,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보아서는 안 되었다.

“이 왕자님.”

“윌슨 학장.”

속으로는 잔뜩 경계하고 있었지만, 이를 티 낼 만큼 나는 하수가 아니다.

그랬기에 방긋 웃으며 윌슨과 악수를 했다.

“이승만 군이 말하길 자네가 날 그토록 보고 싶다고 했다던데. 그래. 무슨 일인가? 무슨 연유로 날 보고자 한 것이지?”

윌슨은 나의 속마음을 몰랐기에, 나를 굉장히 호의적으로 대했다.

그는 조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현 상황이 어떤지 내게 고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번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정치 자금이 많이 필요할 때로군.”

“예. 그렇습니다.”

당장에 윌슨의 앞길을 방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되면 또 다른 미지의 인물이 민주당 후보로 나올 거다.

‘현시대 민주당 후보들은 죄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윌슨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해. 나는 그의 약점을 잘 알고 있으니까.’

주지사가 되고 다음번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될 때까지.

나는 우드로 윌슨을 아주 적극적으로 후원할 생각이다.

“자네가 이승만 군을 잘 가르쳐 주었으니, 내 자네를 믿고 후원하겠네. 그래. 내 당장 십만 불을 자네 선거 캠프에 투척할 생각인데 말이야.”

“감사합니다. 아, 이 왕자님.”

“말하게.”

“록펠러 대표에게도 다리를 좀 놔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는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록펠러 대표가 자네를 만나기 꺼리나?”

“예.”

하긴.

록펠러는 강성 공화당원이다.

그에 반해 우드로 윌슨은 민주당 후보.

“내 언제 시간을 한번 마련해 보겠네.”

“예. 감사합니다.

주지사 선거까지는 팍팍 밀어줄 생각이었기에.

우드로 윌슨의 부탁을 수락했다.

이에 윌슨은 꾸벅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연신 감사하다고 내게 인사를 해 댔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러지. 내 조만간 사람을 보내겠네.”

“예. 그럼 살펴 들어가십시오.”

< 가면을 쓴 사나이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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