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196화 (196/294)

< 중원에서 온 손님 (2) >

뉴욕 별채 1층에 자리한 응접실.

현재 그곳에는 세 명의 동양인 손님이 앉아 있었다.

“반갑군.”

내 앞에서 차를 홀짝이는 아이신기오로 우칭.

우칭 옆에서 눈알을 열심히 굴리고 있던 정체를 모르는 중국인.

마지막으로 건넛방에서 우리 이야기를 몰래 엿듣고 있을 쑨원까지.

이곳에 온 목적은 다 다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보인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제 조국을 사랑하는 것 같다.

“공친왕은 잘 지내는가? 듣자 하니 경친왕이 내각총리대신 자리에 올라서 살짝 껄끄러운 상황이 연출된 것 같은데 말이야.”

“허허. 옛말에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하던데······ 출처를 알 수 없는 괴소문이 미국에도 퍼졌나 봅니다.”

아이신기오로 우칭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대며 내 말을 부인했다.

“두 전하께서는 소문과 달리 사이가 아주 좋으십니다.”

“그런가?”

“예. 믿어 주십시오.”

믿어 달라니까 의심스럽다.

계속 정체 모르는 이를 힐긋힐긋 바라보며 눈치를 보니 더더욱 안 믿기고.

우칭의 답변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 보였다.

“다행이구먼. 하긴 같은 청나라 황족인데 사이가 나쁠 리가 없지. 아마도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무리가 공작을 벌인 것 같구먼.”

우칭의 안색은 지난번에 만났을 때보다 더 안 좋았다.

나는 살짝 걱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그를 떠보았다.

“그나저나 우리 4년 만에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가? 지난번에 뉴욕 자선 경매행사에서 한번 보았던 거로 기억하는데 말이야.”

“예. 그렇습니다. 지금 마시고 있는 찻잔 역시 그때 제가 경매로 내놓은 물품 중 하나였습니다.”

부자들은 본래 가세가 기울면, 집 안에 있던 골동품부터 팔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나씩 외부에 팔며 생활비를 충당하는데, 공친왕부와 청 역시 사정은 비슷했다.

“그때보다 안색이 더 안 좋아진 모양인데, 건강은 괜찮은가?”

“요새 일이 조금 많아서 살짝 피곤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흠흠.”

옆에 앉아 있던 정체 모르는 동양인이 차를 들이켜다가 헛기침을 한다.

우칭에게 무언의 제스처를 취한 것 같다.

아마도 자신을 빨리 소개해 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겠지.

‘성격 한번 급하네.’

슬쩍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이를 바라보며 내가 우칭에게 물었다.

“그대 곁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이는 누구인가?”

“경친왕부에서 온 특사이옵니다.”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경친왕부에서 온 중원인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소개를 하기 시작했다.

“아이신기오로 따밍입니다.”

“오호. 자네도 황족 출신인가 보군.”

“예. 현 경친왕 전하의 둘째 아들로 의왕 전하를 뵈러 이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렇군.”

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옛 내각과 현 내각의 핵심 인재가 손을 잡고 이곳에 왔다는 말이지.”

우칭은 공친왕부의 사람.

반면 따밍은 경친왕 쪽 인물.

대충 사이즈가 나온다.

보통은 이렇게 라이벌 관계라면 함께 찾아오지 않는데.

‘현 내각의 수장인 경친왕이 공친왕의 옛사람까지 끌어다 쓸 정도라면.’

청나라 정부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대충 짐작이 된다.

이놈들.

정말로 돈줄이 마른 모양이다.

‘우칭은 나와 한번 대화를 나눈 사이다.’

우칭을 대동한 것은 나와의 협상에서 조금이라도 성공할 여지를 높이기 위해서겠지.

안면을 튼 이가 처음 보는 이보다는 협상에서 성공할 확률이 더 높으니까.

“그래. 내게 무엇을 제안하려고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것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의왕 전하.”

경친왕의 아들이라는 자가 먼저 입을 뗐다.

역시나.

이놈은 우칭과 달리 성격이 엄청나게 급한 놈이었다.

‘잘 꿰어 먹기 좋겠네.’

협상에서 성질 급한 놈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은 없으니까.

그 상대가 돈을 빌리려는 놈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희 대청은 현재 대외 차관이 필요합니다.”

“하하하.”

나는 한껏 웃어 대며 이 둘을 번갈아 보았다.

“젊어서 그런지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아주 호탕하게 말하는군.”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경친왕 아들놈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래. 얼마를 원하는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정확한 수치를 말하게나.”

“일단은 삼천만 달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삼천만 달러?”

허세가 심한 중원인들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셈을 잘 못 해서 그럴까?

삼천만 달러가 별것 아닌 돈처럼 말을 해댄다.

‘삼천만 달러 정도면······.’

미국 20대 부자 안에 들어야 만질 수 있는 재산인데 말이다.

나는 일단 이들의 말을 계속하여 들어보기로 했다.

“한 번에 채권으로 주시기 힘드시다면, 현물도 좋습니다. 무기나 해군 전함을 양도받는 것 또한 총리께서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래? 내게 빌린 차관 대다수를 군비 증강에 투입할 모양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경친왕의 아들이 짧게 단답형으로 내 물음에 답했다.

나는 이에 더는 질문을 하지 않으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러자, 공친왕부에서 온 우칭이 서둘러 보충 설명을 해 대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 대청에는 백만의 군대가 존재합니다.”

백만의 군대라.

예나 지금이나 아직도 크게 부풀려서 말하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내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어 대자, 우칭이 빠르게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중 양이들이나 관동군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군대는 북양 군대뿐입니다. 북양 군대 역시 우리 대청의 군대이긴 하지만······.”

우칭이 살짝 망설인다.

이에 경친왕부에서 온 따밍이 바통을 이어받아서 하던 말을 끝냈다.

“내각총리대신께서는 좀 더 가까이서 베이징을 호위할 수 있는 황실 직속의 군대를 하나 설립하고자 하십니다.”

오호.

북양군벌의 일인자인 위안스카이를 못 믿고 있긴 하구나.

하긴.

위안스카이는 한인이다.

더욱이 품 안에 야망이 숨기고 있기로도 유명했기에, 머리가 나쁜 청나라 황족들도 그의 숨은 속셈을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을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액의 군자금이 필요하겠군.”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꼭 현금이 아니어도 된다는 말이지.”

“예.”

현금을 빌려주는 것과.

무기 같은 군사 현물을 차관 형식으로 빌려주는 것은 꽤 많은 차이가 난다.

돈은 말 그대로 돈이지만.

현물은 값어치를 어떻게 측정했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니까.

막말로 가치 측정을 뻥튀기하여 두세 배 높게 장부에 기재할 수도 있는 것이 현물 제공이다.

지금 이자들이 말하는 군함만 해도 그래.

대한제국 황궁에서 계집질이나 하며 소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고종만 해도 예전에 비슷한 사기를 당한 것이 있다.

쓰레기 같은 고철 덩어리 양무호를 그 시대 100만 원에 달하는 거금으로 구매하지 않았던가?

‘새것도 아니고 중고였는데 말이지.’

눈 땡이 맞았을 때는 아프지만, 역으로 파는 처지라면?

이보다 좋은 거래는 없을 것이다.

‘현재 청 상황은 꽤 급해.’

하루가 다르게 정국이 어지러워지고 있는 상황.

관련 책임자들에게 돈을 조금 쥐여 주고, 일본이 했던 희대의 배 장사를 나 또한 해 본다면?

청을 상대로 거액의 부채를 남겨 놓을 수 있을 테다.

‘곧 망할 것이지만.’

이후에 청을 계승한다는 세력은 계속하여 나온다.

간판만 계승하는 것은 아니고.

이전에 체결한 조약이나 채무 역시 상속해야 하기에, 현재 청에 빚을 지워놓는다면 차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할 수도 있을 테다.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베이징에서 온 청 황족들을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기관총을 비롯한 각종 화기는 물론이고, 최신 군함까지 원한다······.”

“예. 그렇습니다.”

총기 생산이나 화약 생산은 이회영이 소유하고 있는 회사에 외주를 주면 되겠고.

전함을 구축하는 것은 미국에 널려 있는 조선소 중 하나를 인수해서 거래하면 될 것 같다.

미 정부나 미 군부와 이야기를 좀 해야겠지만, 딱히 제지받을 일은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건과 담보는?”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가자, 경친왕의 둘째 아들은 제품에 고이 보관하고 있던 서류 하나를 내게 들이밀었다.

내각총리대신이 대충 이 정도 선에서 합의 보라는 일종의 기준선이 적혀 있는 문서 같았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청의 재정 상황은 엉망일세.”

이를 받아서 읽기 전.

두 청나라 황족에게 내가 눈을 번뜩였다.

일단 후려치기 기술부터 선보였던 거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부채들만 해도 엄청나지. 내가 보기엔 아직 상환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되네만.”

모건과 로스차일드, 록펠러 등등.

여러 서구 은행권에서 여러 차례 퇴짜를 맞고 내게 찾아왔을 테다.

나는 이를 언급하며 좋지 않은 조건이라면 단박에 거절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기간은 30년. 금리는 15% 복리라······.”

금리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하네.

초고금리다.

단리도 아니고 복리기에 이자 부담은 더할 거고.

‘복리로 15%면, 5년마다 원금이 두 배씩 늘어난다는 건데.’

뭔 생각으로 얘네는 내 돈을 빌리려고 하는 것인가?

“계약 체결 즉시 간도의 영유권은 완전히 이양된다? 대한제국 한양 정부가 아닌, 내 개인에게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그것도 비밀리에 말입니다.”

꽤 머리를 썼네.

무능한 한양 정부에 이를 뺏긴다면, 일본군이 자칫 간도 지역으로 진격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나는 청 정부의 제안을 좋게 생각하며 계속하여 다음 내용을 읽어 갔다.

“다음 내용은 재미나군.”

“향후 왕자님께서 한반도로 돌아오신다면······ 그리되어 왕자님만의 나라를 세우신다면, 청 황실은 왕자님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드린다는 조항 말입니까?”

“그래.”

조선 말기.

숱하게 타국 내정을 간섭하던 버릇을 못 버리기라도 한 듯.

몇몇 조항이 눈에 거슬린다.

‘생각도 안 하고 있는데 말이다.’

나를 아주 권력의 화신으로 본다.

나는 재미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음 조항들을 계속하여 읽어 갔다.

“만약, 만기 내에 이를 못 갚을 시, 목단강 동쪽 지방을 추가로 내게 이양한다.”

근대로 따지면 별로 쓸모없는 땅이지만, 관개수로만 제대로 구축한다면 대규모 농지를 조성할 수 있는 땅이다.

이런 땅을 담보로 걸 정도면 아주 자신이 있나 본데 말이다.

“철도 국유화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삼 년 내에 이를 전부 상환할 수 있으니까요.”

아!

생각해 보니 이걸 믿고 이리 초고금리로 내게 돈을 빌리고자 하는 것이구나.

어떻게든 급한 불을 끄고 그다음에는 인프라 시설로 돈을 갚겠다는 거네.

“그렇단 말이지?”

누구나 계획은 그럴듯하게 잘 세운다.

실천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고꾸라질 뿐.

“아, 근데 말이야. 최근에 청나라 내부 사정이 조금 시끄럽다는데, 그것은 잘 해결되고 있는가?”

익문사에서 보고한 바로는 쓰촨성 인근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발했다고 한다.

그 규모가 생각보다 거대하다던데.

“농민들의 폭동이야 늘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도······.”

“의왕 전하. 대한제국과는 다르게 우리 청의 영토는 거대합니다.”

뜬금없이 경친왕의 아들이 중원 대륙의 크기를 언급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지요. 하지만 저희 청국은 이를 지난 이백 년간 아주 효과적으로 관리했습니다.”

“······.”

“더하여 더욱 효과적으로 민중을 제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 것이고요.”

자신감 넘치네.

미래를 한치도 못 보고.

나는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천만 달러어치에 해당하는 무기를 올해 말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출하하겠네.”

“감사합니다.”

“나머지 군함과 관련된 건은 내년까지 관련 조항을 협의토록 하세나. 어떤가? 이 정도면 서로 만족할 만한 거래 같은데.”

나는 떠나려는 두 황족을 잡았다.

“아, 그리고. 잠시만 기다리게.”

“아직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두 청년이 자리를 뜨려다 말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그들에게 손짓하며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오라고 권했다.

“자네들 윗전에게, 더 나아가 청나라 황실에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네.”

“······무엇입니까?”

“가까이 오게나.”

머뭇거리는 두 청나라 황실 일원을 바라보며 내가 미소 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말하는 것일세. 밖에 있는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까. 이리로 오게.”

“아, 예.”

소곤소곤.

두 황족에게 속에 있던 한 가지를 제안했다.

굳이 작게 말한 것은 쑨원의 귀에 이 제안이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살펴 가게나.”

* * *

베이징에서 온 무리가 막 내 집을 떠났다.

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나는 다시금 응접실로 돌아왔다.

텅 빈 실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얇게 가림막처럼 처져 있던 중문이 내 눈에 들어온다.

“오래 기다렸는가?”

“······.”

중문을 힘껏 열어젖히니 내가 있던 방이 쑨원이 앉아 있는 옆방과 하나로 이어졌다.

뚜벅뚜벅-

나는 쑨원의 앞자리로 이동한 후, 차게 식어 있는 찻잔을 냉큼 집었다.

이후 몇 시간 전에 따랐던 것으로 추정된 녹차를 쭉 들이켰다.

“차 맛이 좋군. 역시 광저우에서 온 상등품일세. 정말이지 찻잎에 풍미가 가득하지 않던가?”

“······.”

쑨원은 계속하여 입을 꾹 다물었다.

뭐 이유는 여러 가지 중 하나겠다.

조금 전, 나와 청나라 황족들 간의 대화 내용을 복기하느라 그런 것일 수도 있겠고.

살짝 서운해서 소극적으로나마 묵언 수행을 할 수도 있겠지.

몇 시간 동안 기다렸으니까, 충분히 기분이 상할 만하다.

하지만 표정은 의외로 무표정이었다.

‘표정도 숨길 줄 알고. 참을성도 좀 있구먼.’

나는 쑨원의 인성을 기존보다 조금 더 높게 상향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옆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는 잘 경청하였는가?”

“예.”

드디어 쑨원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쑨원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좀 더 쉽게 대화를 할 수 있겠군. 지난번에 자네, 내게 이런 제안을 했지, 아마.”

쑨원은 자신이 만든 혁명단체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었다.

“동시에 청 조정의 차관 제공 요청을 거절해 달라고 했는데 말이야.”

“그랬었지요.”

“그래. 아까도 들었듯이 청 조정은 내게 여러 가지를 약조했네.”

“······.”

“모두 내게 이득이 되는 제안이었지. 그래. 자네가 내게 담보로 걸 수 있는 제안은 무엇인가? 아! 말하기 전에 잠시 생각하게나. 조금 전 청 조정이 언급했던 조건을 회상해 보며, 신중하게 말을 해 보라는 뜻일세.”

< 중원에서 온 손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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