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206화 (206/294)

< 공세의 시작 (1) >

미국에 온 지 근 6년.

“아이고. 의왕 전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한인과 접촉했다.

미국 각지에서 이들과 접선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주로 서부에 머무를 때 만났는데.

이는 현재 한인들의 터전이 서부 3개 주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뉴욕 별궁에, 미천한 소인들을 이리 초대해 주시다니······ 정말이지 감개가 무량합니다.”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한 한인들은 대다수가 이와 같은 말을 하며 눈물을 보인다.

열에 아홉은 정말이지 비슷한 행동을 해 댔기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그들이 인사를 끝마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새해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전하. 올해 한 해는 부디 복 많이 받으시옵소서.”

“그래. 자네들도 새해 복 아주 많이 받게나.”

설을 맞아 동부에 사는 한인들을 모조리 우리 집으로 초청했다.

1906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했던 것처럼 그들을 한데 불러 모은 거다.

‘생각보다 많은데?’

1907년.

멘해튼에 별장을 샀을 때만 해도, 뉴욕에서 한인들을 발견하기는 모래 속에 바늘을 찾는 것처럼 어려웠는데.

지금은 우리 집 별장을 꽉 채우고 남을 정도로 가득하다.

아마도.

원 역사보다 더 빠르게 동부 지역에 교민들이 진출하며 한인타운이 생겨나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이주 속도가 대단히 가파르니까. 듣자 하니 협회에 등록한 교민 수가 20만을 넘었다고 하던데.’

하와이섬과 미 서부 3개 주에 국한되어 있던 한인들의 이주 지역이 동부까지 확장되고 있다.

여러 이유 때문이겠다.

내가 사 놓은 땅은 한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먼저 온 이들이 상급지를 전부 점유하고 있기에.

뒤따라온 이들은 이보다 못한 곳에 터를 잡거나 새로운 곳을 개척해야 했다.

대다수는 서부에 머무르고 있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이들도 더러 있기 마련.

그들은 좀 더 일거리가 풍부한 동부로 눈을 돌리기도 했는데,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들이 그들이었다.

“건강이 최고일세. 새로 이민 온 일가친척들 도와준다고, 종일 무리하며 몸을 너무 혹사하지 말게나.”

나는 백여 명의 교민들과 일일이 새해 인사를 나누며 덕담을 주고받았다.

아!

그저 조언만 하지는 않았다.

덕담 뒤에, 두툼한 세뱃돈을 건네주며 그들을 힘껏 응원했다.

“아이고, 전하.”

“······가, 감사하옵니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들의 출신은 다양하다.

배움의 끈이 긴 이들이 있는가 한편, 출신이 천한 이들도 존재했다.

“헉. 전하.”

일상생활 예절을 익히지 못하여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어 보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은 안에 담긴 달러 뭉치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너무 많사옵니다.”

“그렇습니다. 소인들에게, 이리 많이 안 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서부와는 달리 동부에는 한인들이 별로 없다네. 이는 서부가 좀 더 안착하기 편해서겠지.”

“······.”

“다른 이들과 달리 그대들은 맨몸 하나만을 이끌고 이곳에 새로이 정착했네. 나는 자네들의 용기를 응원하네. 마치, 내가 학생일 적, 홀로 살았던 추억이 떠오르거든.”

“······.”

“여유가 있기에, 그대들의 고단함을 조금이라고 돕고 싶다네. 부디, 내 마음을 이해해 주게나.”

나는 못 받겠다고 엄살을 피는 이들에게 친히 세뱃돈을 다시 건네주며, 그들의 노고를 위로했다.

이에 교민들은 다시금 눈물을 훔치며 내게 고마운지 고개를 여러 번 숙이기도 했다.

“감사드리옵니다.”

“아닐세. 아! 오랜만에 고국의 정취나 물씬 느끼고 가게나. 저기, 자네들이 먹을 음식들을 잔뜩 차려 놓았네.”

뉴욕 별장 한편에 마련된 행사 부수로 교민들이 이동한다.

그곳에는 대한제국에서나 먹을 수 있었던 우리네 전통 음식이 가득했다.

“와!”

“고기다!”

개중에는 이 시대 궁중 음식으로 알려져 있던, 불고기나 너비아니도 준비되어 있었다.

수라간에서 일했던 상궁들과 대령 숙수가 이를 직접 조리했기에, 배고픈 교민들은 게 눈 감추듯이 음식들을 제 입에 쓸어 담기 시작했다.

“오후에 열릴 행사 역시도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하게.”

“예. 전하.”

오전과 점심에, 동부에 있는 한인들이 우리 집을 방문한다면, 오후와 저녁에는 귀빈들이 이곳에 들리게 된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교민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최현우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다음 일정을 차질 없이 준비하도록 일렀다.

* * *

“이 왕자님.”

“어, 자네?”

우리 집에 방문한 서양인 중, 몇몇 아는 얼굴이 내 눈에 띄었다.

개중에는 조지 파디도 있었는데, 그가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이로군.”

“예. 이 왕자님. 선거 때문에 너무나도 바빠서 한동안 얼굴을 뵙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캘리포니아 주지사에서 연방 상원으로 반 등급 신분이 상승한 조지 파디.

그가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고, 왕자님께 소개해 드리고 싶은 이도 있어서······ 바쁘실 텐데 이곳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슬쩍 곁눈질하니, 그와 함께 온 일행들의 얼굴이 보인다.

하나같이 돈 좀 있어 보이는 전형적인 백인 엘리트들 같았다.

“그래?”

나는 다시금 조지 파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모름지기 주선자가 소개하기 전까지는 대화를 걸지 않는 것이 미국 최상류층들의 대화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지 파디가 언제 그들을 내게 소개하나 간을 보고 있었는데.

파디가 대뜸 다른 이야기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그 전에, 이 왕자님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오늘이 음력으로 설(Lunar New Year’s Day)이라고 하던데 말입니다. 제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조지 파디는 ‘중국설’ 대신 ‘음력설’이라는 표현을 쓰며 내게 이를 축하하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중심가에는 차이나타운이 아주 크게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서부에서는 중국인들의 영향력이 상당히 큰 곳.

나는 당연하게도 후자가 아닌 전자를 사용하리라 생각했는데.

조지 파디는 제대로 된 단어를 구사하며 내게 점수를 땄다.

“오늘이 ‘설’인 것은, 그대가 어떻게 알았지?”

나의 물음에 조지 파디가 피식 웃으며 그 옆에 서 있는 한 동양인을 가리켰다.

“어? 전에도 한번 언급했었는데······ 제 비서 중 하나가 한인입니다. 미스터 정이 그것을 알려 주더라고요.”

“오호.”

고개를 돌리자, 조지 파디의 비서 하나가 반걸음 앞으로 나오며 자기소개하기 시작했다.

“정만득이라고 합니다. 의왕 전하.”

“그래. 반갑군.”

어쩌면 이자가 파디의 파랑새가 될 수도 있기에, 나는 그의 얼굴을 빠르게 암기했다.

‘익문사도 이자를 알고 있겠지?’

모른다고 해도.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소개를 받았기 때문에.

당장 배경을 조사하기 시작할 거다.

조지 파티는 차기 공화당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자이니까.

그와 가교 구실을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인재가 될 것이기에, 사전에 포섭해야 했다.

“파디 의원을 성심성의껏 모시게.”

“예.”

활짝 웃으며 정만득과 인사를 나누자, 조지 파디는 만족했다는 듯이 한동안 뿌듯한 표정을 지어 댔다.

이후 그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두 명의 엘리트들을 소개했다.

“내친김에 여기, 함께 온 친구들까지 소개하겠습니다. 여기 제 오른쪽에 서 있는 두 명의 친구들은 이번에 저와 함께 연방상원의원으로 선출된 새내기 의원들입니다.”

연방의원은 미국의 입법부 인재 중 최상위에 자리한 인물들이다.

그중에도 상원의원은 각 주에서 두 명밖에 뽑지 않는 자들.

조지 파디는 그런 엘리트들을 지금 내게 소개하고 있었다.

“워싱턴주와 오리건주에서 당선된 초선 의원들입니다. 아! 저와 같은 공화당 소속이고요. 자자, 자네들도 인사드리게. 서부에서 제일 유명한 이 왕자님이시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언제 시간 되시면 제 지역구에도 한 번 방문해 주시지요.”

두 상원의원의 지역구는 서부 해안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내 영향력이 제법 있는 주들.

그렇기에, 바쁜 연초에 번거롭지만 뉴욕까지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오리건과 워싱턴주에서 나의 영향력은 상당하니까.

“반갑네. 내 기회가 된다면 따로 연락 한번 하겠네. 그때 조용한 자리에서 밥이나 함께했으면 좋겠군.”

이들과도 하고 싶은 말이 많으나.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일단은 조지 파디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눠야 했기에, 이 둘을 홍삼이 진열된 행사 부스로 보냈다.

“새해 초부터, 여기저기에서 전화가 오고 있답니다. 이 왕자님.”

독대를 할 수 있게 되자, 조지 파디가 편지나 전화로는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전화?”

“왕자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에 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지 않습니까?”

“아.”

“어떤 이는 제 선택을 두고 바보라고 비웃는 이도 있긴 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조지 파디의 주장에 동의했기에, 나 역시 재빨리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래.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더 높은 자리로 올라설 아주 좋은 징검다리라고 생각하네.”

“맞습니다. 테디(시어도어)가 대통령에 오르기 전까지만 해도 부통령 자리는 정치적으로 무덤에 가까운 자리였지만, 이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맞다.

현 부통령이자 루스벨트의 오랜 친우인 찰스 워런 역시도 주요 대권 주자로 불리고 있으니까.

물론.

그가 대통령 후보에 뽑힐 가능성은 없지만, 전보다 부통령의 영향력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나는 이를 언급하며 조지 파디에게 미래를 내다보고 정치하라 권했다.

“테디의 힘이 조금 줄어서 그렇지, 당내에서 그자의 영향력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워런이 다음 대통령 후보가 되었을 것이네.”

“예.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자네도 이를 반면교사 삼아서 적극적으로 활용해 보게나. 무슨 뜻인지 알지? 당내에서 자네 파벌을 늘려 보라는 뜻이네.”

* * *

조지 파디와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이 왕자님.”

익숙한 얼굴이 내게 접근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중앙은행 건 논의 때문에 7인회가 조지아주에서 모였을 때.

옵서버로 참여했던 놈.

의회에서 해당 법안 입법을 주도하고 있던 알드리치 상원의원이었다.

“사돈과 함께 왔습니다.”

그 옆에는 내가 익히 아는 인물이 함께하고 있었다.

록펠러였다.

“아무리 바빠도 한 번씩은 이리 얼굴을 마주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왕자님과 저는 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니까요.”

알드리치는 내게 친한 척을 한껏 해 대며 접근했다.

이에 록펠러가 힐끗 그를 보며 찰나의 순간, 인상을 구겼다.

“아! 그러고 보니 자네 딸이 록펠러 이사장의 며느리였지?”

“그렇습니다.”

알드리치의 주장대로 다리 하나를 건너면 그와는 인척이 되는 관계였기에, 나는 뒤늦게 기억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뼉을 한번 쳤다.

물론 록펠러의 표정을 계속하여 관찰하면서 말이다.

“내 이를 잊고 있었네. 암, 자네와 나는 가족 되는 사이지. 그래그래. 반갑네. 우리 자주자주 연락하고 지내세나.”

“예.”

나는 알드리치에게 살짝 관심을 두는 척하며, 그의 근황을 묻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중앙은행 설립 법안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심의는 대충 끝났다고 하던데.”

“조만간 하원에서 표결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래?”

“예.”

알드리치는 미국의 법안 통과 과정을 내게 간략히 설명했다.

다 알고 있었지만, 나는 살짝 갸우뚱하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때론, 멍청한 척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어떤 과정이 더 남아 있는가?”

“상원으로 넘어온 후, 대통령의 사인이 있겠지요.”

“그렇군.”

전문 분야를 설명할 기회가 오자, 알드리치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열변을 토했다.

그래도 내가 못 알아듣는 척을 하자,알드리치가 등산에 빗대며 이를 쉽게 풀어 설명했다.

“의원들끼리 대충 합의를 보았기에, 법안 통과까지 9부 능선은 넘은 셈입니다.”

“아, 그런가?”

“예.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드리치는 이번 법에 걸림돌이 되었던 세력들을 하나씩 거론했다.

“민주당 진보주의 진영이 살짝 반발하고 있으나, 그 정도로는 법안 통과에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욱이 루스벨트 역시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가파른 물가 상승 때문에, 임기를 다한 대통령이 거부권을 쓸 가능성이 없다며 알드리치가 나를 안심시켰다.

“알드리치 의원?”

그때였다.

싸구려 양복으로 치장을 한 백인 하나가 우리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누구?”

“썬데이 타임스의 하워드 에릭슨입니다.”

“기자로군.”

“예. 그렇습니다.”

하워드 에릭슨이라는 기자는 마치, 좋은 먹잇감을 발견한 표범이라도 되는 듯.

입맛을 다시며 우리 일행들 면면을 일일이 둘러보았다.

“마침, 록펠러 이사장과 이 왕자도 여기 계시는군요.”

기자는 모두와 눈빛을 교환한 후, 알드리치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에게 물었다.

“의원님. 최근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알드리치 의원께서 뉴욕의 자본가들에게 거액의 정치 자금을 받으셨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뭐, 뭐라?”

알드리치가 당황한다.

이에 하워드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 대가로 중앙은행 법 통과를 약속하셨다는데 말입니다. 이에 대해 따로 하실 말이 있으십니까?”

“무, 무슨 허튼소리를 그리 장황하게 하는가? 나는 그런 약조 따위를 확약받은 적이 없다네.”

“글쎄요. 익명의 제보자 주장은 다르던데요. 뉴욕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모건 대표가 의원님께 100만 달러를 건넸다고 들었습니다. 이를 입증할 증거를 곧 건네받을 예정인데 말입니다. 혹시 그사이에, 제게 하실 말은 없습니까?”

< 공세의 시작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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