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208화 (208/294)

< 대서양 저편에서 (1) >

“길리엄! 길리엄!”

이른 아침부터 누군가가 길리엄을 애타게 찾아 댄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그의 정체는 바로 모건 주니어였다.

“어······.”

길리엄은 밤새 굳게 닫혔던 방문을 열었다가 그만 얼어붙었다.

자신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내의 얼굴이 병자처럼 새하얗게 질려 버려서다.

“도, 도련님?”

“그, 그리 서 있지만 말고.”

“예?”

모건 주니어는 화장실 옆에 축 늘어진 채로, 살짝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저기, 시내라도 가서 의사 좀 데리고 오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30분 후.

길리엄은 허둥지둥 모건가의 별채로 빠르게 복귀했다.

당연하게도 이 근방에서 제일가는 의사가 그와 동행했는데.

출장을 온 의원은 이리저리 모건 주니어의 병세를 살피다가 짧게 병명을 진단했다.

“급성 장염이십니다.”

“그, 급성 장염?”

“예. 혹시 지난밤에 무엇을 드셨습니까?”

“······.”

잠시 머뭇거리는 모건 주니어.

의사는 고개를 돌려서 주변을 살피어 보았다.

“샴페인과 홍삼을 드셨군요.”

아직 방 안에는 여자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의원은 대충 전날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측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 들어, 런던의 귀족들 사이에서 급성 장염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무슨 연유로 그런 일이 발생한단 말입니까?”

“뭐, 다들······ 지난밤 먹었던 것들을 숨겨 대기에,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추정컨대 질 나쁘고 오래된 홍삼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호, 홍삼이요?”

“예. 그렇습니다.”

모건 주니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다.

홍삼은 동양에서 온 비약이지 않던가?

그는 길리엄을 시켜 어제 먹은 홍삼의 포장지를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도, 도련님. 어제 드신 홍삼들입니다. 그런데······.”

“어?”

길리엄이 이상한 점을 찾아냈는지, 들고 있던 포장지를 모건 주니어에게 넘기며 뒷말을 끌어 댄다.

모건은 이를 살피다가 길리엄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눈치챘다.

“힐 컴퍼니 제품이 아니군. 전일본인삼유통사의 유사 상품이야.”

홍삼이라는 상품이 돈이 되니, 이놈 저놈 달려들기 시작했다.

대한제국의 보호자를 자처한 일본도 그중 하나였다.

그들은 대한제국 황실의 홍삼 독점권을 무효로 한 후, 확보한 물량 중 일부를 자국 자본가가 차린 회사에 배분했다.

그 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는지.

얼뜨기가 책임자가 되었는데, 그는 값비싼 홍삼을 아무런 주의 없이 유통해서 현재 세계 각지에서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는 중이었다.

“홍삼은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보관해야 하는 상품입니다. 상온에 오랜 시간 내버려 두면, 다른 음식처럼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건 주니어의 뇌리에 한 가지 조언이 스쳐 지나갔다.

‘이 왕자가 짤막하게 이를 언급하기도 했지.’

홍삼을 구매한다면, 상온 보관 말고 냉장 보관을 추천했다.

이강이 전에 했던 조언이 막 모건 주니어의 머릿속을 떠다니자, 그는 살짝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를 간과했다가는, 이렇게 부대표님처럼 그다음 날 배탈이 나기도 한답니다. 앞으로는 주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의원은 신실한 청교도였기에, 매춘부와 하룻밤을 지낸 모건 주니어를 살짝 경멸하듯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감정을 최대한 감췄고.

모건 주니어 역시 자신의 끓는 배에만 현재 집중하고 있었기에.

이를 눈치채지는 못했다.

“어쨌든. 한동안은 이곳에 머물며 휴식을 취하시지요.”

의원은 돌아갈 채비를 챙기며 모건 주니어에게 이곳을 떠나지 말 것을 권유했다.

“곧 배를 타야 하는데, 이를 취소하란 말입니까?”

“부대표님.”

“······.”

“자신의 병세를 너무 가볍게 생각했다가, 큰일이 날 수도 있습니다.”

의원은 장염의 무서움을 강조했다.

“더욱이 병세가 좋아진 듯하다가 다시금 나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니 제 조언을 따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막말로 행사에 참석했다가 지리시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일 것이다.

더욱이.

이대로는 참석을 하더라도 얼굴만 비추고는 사흘 이상을 방 안에만 박혀 있어야 할 거다.

기자들이나 귀빈들과 소통도 하지 못하고 화장실에서만 내리 지내야 할 것이 분명했기에.

모건 주니어는 의원의 조언을 따르기로 했다.

“전화, 전화를 이리 주게나.”

모건 주니어는 급히 화이트 스타 라인으로 전화를 걸었다.

“브루스 사장님. 예, 모건입니다. 이거 어쩌지요? 이 좋은 날에, 안 좋은 소식부터 하나 전해 드리게 생겼습니다. 제가 어젯밤에 상한 것을 먹었는지, 그만 배탈이 좀 났는데······.”

* * *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모건 주니어의 전화를 막 끊은 브루스.

그를 바라보며 타이태닉의 첫 항해를 담당하게 된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이 입을 뗐다.

“사장님. 무슨 안 좋은 소식이라도 있습니까?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셨습니다.”

브루스는 이에,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모건 부대표가 이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다더군.”

“VIP를 빼놓고 첫 항해를 하란 말입니까?”

“그래.”

에드워드는 팔짱을 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댔다.

“나 참. 무슨 일 때문에 막바지에 이리 틱- 하고 불참을 선언한단 말입니까?”

“몸이 아프다는군.”

“······.”

“뭐, 아프다는 양반을 강제로 태울 수도 없고. 안타깝게도 VIP 전용 선실은 텅 비운 채 출항해야 할 것이네.”

세계적인 부자답게.

모건 가문은 자신들만의 전용 객실을 타이태닉에 갖춘 상태였다.

브루스가 이를 거론하자, 에드워드가 살짝 못마땅한 표정으로 콧방귀를 뀌어 댔다.

“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네요. 모건 일가의 해운업 천대는 예부터 유명했으니까요.”

에드워드가 술을 한잔 홀짝이며 뒷말을 해 댔다.

“해운 사업이 미래다. 말로는 철도와 철강 다음으로, 모건 그룹의 차기 먹거리라고 주야장천 외쳐대고 있지만······ 투입한 자금 규모만 보면 앞선 두 산업과 엄청나게 차이 나지요.”

“······.”

“더욱이 우리 해운 산업을 대하는 두 부자의 태도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자들은 옛 관례를 죄다 무시하고 다닙니다. 저번 진수식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하긴.”

브루스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진수선을 절단할 때 여인들이 샴페인 병을 깨트리지 않습니까?”

“그렇지.”

보통은 해운사 사주의 부인이나 딸이 이 행사를 담당하는데.

모건가는 이를 미신이라고 매도하며 그냥 넘어갔다.

오랜 뱃사람이었던 에드워드는 이를 거론하며 모건을 힐난했다.

“모건 일가는 이를 생략했죠. 18세기부터 이어져 온 오랜 전통인데 말입니다. 후- 그러다가 바다의 분노를 사게 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나 원.”

에드워드가 또다시 술을 홀짝인다.

출항이 코앞인데.

또다시 술을 먹다니.

브루스는 에드워드의 행동이 못마땅했지만, 이 시대 선장들은 원체 술고래들이 많았기에 그러려니 했다.

“뭐, 우리야······ 그놈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신세가 아니던가?”

이번 기회를 통해 모건 대표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했는데.

브루스는 살짝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에드워드 선장을 바라보았다.

“부대표는 그렇다고 쳐도, 워싱턴에 계신 모건 대표께서 이번 항해에 각별하게 관심을 보이고 계시네. 그러니, 자네도 이번만큼은 최선을 다하게.”

에드워드는 또다시 술잔을 비우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예예.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기록 경쟁이 바다 위에서 벌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대서양을 횡단하는 데 보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곤 한다.

하지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그 시간이 점점 단축되고 있었다.

한 달에서 3주.

3주에서 보름.

보름에서 열흘까지.

항해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는데.

이번에 첫 항해를 하는 타이태닉은 기존 기록을 깰 것으로 기대되고 있었다.

“시간은 금이다. 부자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명언이지.”

“그렇죠.”

타이태닉은 그냥 여객선이 아니다.

최신형 호화 여객선.

‘삼등석 손님을 만석으로 받아 봤자, 남는 것이 없지. 우리 화이트 스타 라인은 일등석 손님 유치에 열을 올려야 한다.’

영국 정부의 보조금으로 촉발된 해운 산업의 저가 운임 경쟁 속에서.

딱 초호화 여객선 산업만 현재 자유롭다고 볼 수 있다.

부자들에게 있어서 가격은 그리 중요한 결정 요소가 아니었다.

부대시설이 얼마나 좋냐?

더불어 항해 시간이 얼마나 짧냐 정도가 그들의 주요 구매 포인트였다.

‘목표는 일주일이다.’

돈이 되는 것은 일등석 승객이었기에, 브루스는 이번에 제대로 이를 홍보하여서 자신이 맡는 회사의 수익을 극대화할 생각이었다.

그래야, 차기 IMM 해운 트러스트 회장 자리에 도전할 수 있을 테니까.

야망이 대단했던 사내였기에, 그는 계속하여 에드워드 선장을 압박했다.

“그러니 조금 무리해서라도 빠르게 뉴욕에 도착해야 할 것이네.”

“예예. 믿고 맡겨 주십시오. 사장님.”

에드워드는 남은 술을 죄다 제 술잔에 따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붕-

승선 시간이 다가왔다는 뱃고동 소리가 아주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이에 비싼 돈을 주고 타이태닉의 첫 항해를 즐기겠다는 손님들이 우르르 선착장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브루스는 이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앞으로 닥칠 미래를 몰랐기에, 너무나 설레는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 거다.

* * *

타이태닉이 한참 대서양을 항해할 때.

모건은 원 역사와 다르게 미국에 있었다.

IMM과 US 스틸 반독점 판결 임박한 상황에서, 유럽으로 이동해 해운 쪽에 집중하기보다는.

사법계 인사들 로비에 집중하는 것이 더 급했기 때문이다.

“아이고. 모건 대표님.”

“허스트 대표. 오랜만이로군.”

언론사 사장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건은 술잔을 돌렸다.

그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대형 경제신문사들 사주들만 따로 모아서 반독점법 관련 소문을 경청했다.

“축하드립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판결이 나진 않았지만, 대법원 내부에서는 벌써 소문이 퍼지고 있나 봅니다.”

“무슨 소문?”

“이번 반독점법 소송은 모건 대표에게 유리하게 그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요.”

“오. 진짜 그런 이야기가 언론계에 돌고 있소?”

“예. 판결이 날 때까지, 다른 변수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리되겠죠. 다들 제 주장에 동의하시지요?”

언론사 사주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모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제 잔을 비웠다.

“정말이지 다행이로군.”

“어찌 보면 모건 대표께서는 참으로 운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허스트가 피식 웃으며 모건의 20년 지기 경쟁자를 언급했다.

“작년에 우리 미국을 강타했던 인플레이션이 없었다면, US 스틸이나 IMM은 스탠다드 오일과 같은 운명을 걸었을 테니까요.”

“하하하. 나 또한 허스트 대표의 주장에 동의하오. 내 오늘 록펠러 이사장을 만나서 그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말씀하셨습니까?”

“뭐, 별건 없고. 그에게 늘 미안하단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지. 이번 사건으로 신세를 진 듯하니까.”

“그렇습니까?”

웃을 타이밍이다.

언론인들은 뉴욕의 지배자인 모건의 눈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허스트는 그들의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이 관찰하다가 이내 모건과 시선을 교환했다.

“모건 대표.”

“듣고 있소.”

“언론인으로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모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의 제스처를 보내자, 허스트가 속에 담아 두었던 질문을 밖으로 내뱉었다.

“철도 회사와 철강 회사에 이어, 해운 회사까지 모건화에 성공하기 직전입니다.”

모건화라는 단어는.

중구난방으로 난립한 소규모 지역 회사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거대 독점 기업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이는 모건이 이런 행위를 주도했기 때문인데.

허스트는 이를 언급하며 핵심 질문을 끝에 이어붙였다.

“그다음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다음이라······.”

모건은 속으로 이리 대답했다.

‘당연하게도 금융업이지.’

가장 돈이 많을 많이 벌 수 있는 산업.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금융업은 가장 파편화된 산업이기도 했다.

‘내 마지막 목표이기도 하지.’

금융 쪽의 모건화 역시도 이미 시작되긴 했다.

중앙은행법과 함께 새로운 은행법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미국의 은행은 한 회사당 한 지점만 보유할 수 있었지만.

본사 말고 다른 지역에도 지점을 설립할 수 있다는 새 법이 통과됨에 따라, 금융 쪽 역시 거대은행의 등장이 예고된 셈이었다.

‘중앙은행법과 달리 이미 이 법은 진즉 상원까지 통과했지.’

루스벨트의 사인도 끝났다.

지아니니라는 놈이 이를 기다렸다는 듯이 미 서부 쪽에 BOA 지점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서부에 국한되는 일.

미국의 국력은 동부 해안가에서 나오기에, 모건은 마음이 그리 급하지는 않았다.

‘금융업마저 손에 넣는다면.’

평생의 맞수였던 록펠러는 물론이고.

그동안 그의 앞에서 뻣뻣하게 거드름 떨던, 이강 그놈마저도 모건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모건은 행복한 미래를 잠시 혼자 상상하다가 이내 현실로 돌아왔다.

“글쎄. 아직은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금융업을 전부 먹는다는 것은 앞선 다른 산업과 다르게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절대적인 규모 자체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나니까.

그렇기에 일단은 사냥하기 위해 갈아 두었던 발톱을 숨겨야 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는, 내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서 말이야. 이제는 손주나 보며, 아들놈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싶군.”

“정말이십니까?”

모건이 잠정 은퇴를 시사하자, 언론사 사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요. 아직 모건 사에는 모건 대표가 필요합니다.”

“그런가?”

“예. 곧 의회에서 법이 곧 통과되겠지만, 중앙은행이 자리를 잡으려면 한동안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적어도 과도기 동안은 대표님께서 이 나라 금융계를 이끌어 가며 경제 안정화에 이바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자네들 주장대로 내 아직 은퇴하기는 이른가 보군. 그래. 참고해보도록 하겠네.”

하하 호호.

모건과 언론사 사주들은 술을 서로 따라주며 앞으로 펼쳐질 미국의 미래에 관해 잠시 이야기를 했다.

“모건 대표님.”

그때였다.

“무슨 일인가?”

“대표님께 잠시 따로 보고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건에게 비보가 들려왔다.

“타, 타이태닉이······ 좌초되었다고?”

“예.”

“사상자는? 얼마나 나왔다는가?”

“그게······.”

아까까지 있었던 모임 장소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대표님!”

“사장님!”

언론사 사주들의 직원들 역시 같은 소식을 그들의 윗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어서였다.

“······.”

“······.”

시끄러워졌던 모임 장소가 이내 조용해진다.

믿을 수 없는 엄청난 비보에 다들 입을 다문 거다.

< 대서양 저편에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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