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216화 (216/294)

< 리허설 (2) >

‘선선하군.’

뉴욕은 현재 완연한 늦가을로 접어들었다.

가로수에서 떨어지는 낙엽들이 길거리에 수북한 가운데.

나는 현재 차를 타고 이동 중이었다.

“케미컬투자은행으로 가세.”

“예. 전하.”

조금 전.

아메리카 신탁 본사의 2/4분기 영업실적 보고를 전달받았다.

그 결과는 대박.

IMM 공매도로 거금을 챙겼기에, 이번 상반기 순이익은 평년보다 2배 이상 높아졌다고 한다.

‘아메리카 신탁이 이런데, 케네디는 어떤 성과를 보이려나?’

로스차일드 남작에게서 인수한 케미컬투자은행.

처음 이를 건네받았을 땐.

그저 유구한 역사를 가진, 껍데기뿐인 금융기관이었다.

하지만 지난봄에 케네디가 공매도로 한창 돈을 벌어 대면서 다시금 부흥에 성공했다.

정확한 이익 규모는 이따 보고받겠지만.

투자 안목이 좋은 케네디가 실무 책임담당자로 있고, 아메리칸 신탁보다 좀 더 공격적으로 자금을 운용하고 있었기에.

오늘 아침에 보고받았던 것보다는 결과가 더 좋을 것으로 예상된다.

“어이쿠.”

케네디에게로 향하는 길.

내가 탄 자동차가 갑자기 급정거했다.

바람에 날린 선거 포스터가 내가 탄 자동차 운전사의 시야를 가리며, 사고가 날 뻔한 거다.

“뭔 놈의 쓰레기가 이리도 많은지······ 선거를 두 번 치렀다가는 뉴욕이 쓰레기 산이 될 것 같습니다.”

최현우는 길거리에 쌓여 있는 선거 구호 포스터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현재 뉴욕의 거리는 낙엽이 반, 선거 구호 포스터가 반이다.

어제 막 대선이 끝났기에, 이리 거리가 종이들로 어지럽혀진 것.

간간이 양측의 지지자로 보이는 봉사자들이 빗자루와 봉투를 들고나와 거리에 가득한 선거 캠페인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다.

하지만 버려진 쓰레기양이 원체 많아 쉬이 정리되지 않고 있다.

“서민들의 진정한 대통령, 휴즈 만세!”

지지자들은 지루한지 청소하다가도 차들이 지나가면, 어제 흔들었던 선거 캠페인 포스터를 흔들며 장난을 쳐 댔다.

최현우가 창문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이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이내 다시 내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뗐다.

“전하.”

“듣고 있네.”

“이번 선거는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상해? 뭐가?”

“선거가 끝났는데도······ 아직 그 열기가 식질 않는 것을 보십시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난번 선거와는 참으로 그 양상이 다르지 않습니까? 4년 전에는 비교적 차분하게 선거 운동을 했었던 것 같은데. 양측 모두 말입니다.”

최현우의 물음에 나는 팔짱을 잠시 꼈다가 이내 답했다.

“그때 치러졌던 선거는 사실상 그 결과가 정해진 선거였으니까.”

“예? 그랬습니까?”

“그럼.”

1907년 금융위기로 살짝 주춤거리긴 했어도, 그 당시 루스벨트의 인기는 상당했다.

그런 루스벨트가 원 역사와 다르게 3선에 도전했다.

민주당 후보가 나름대로 분전하긴 했으나, 열세를 만회할 수 없었기에.

선거 종반에는 선거비라도 아끼겠다는 심정으로 유세 규모를 줄였다.

“오랜만에 새 인물 둘이 맞붙는 선거이네. 이번 선거에서 지면 적게는 4년, 길게는 8년 동안 백악관을 내줘야 하지.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말일세.”

그러기에 양당은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이에 최현우가 몸을 떨며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 전역이 선거로 몸살을 앓고 있던데······ 이렇게 나라가 뒤집힐 것 같은, 큰 행사를 4년마다 치르다니. 미국인들도 참 대단합니다.”

선거에 살짝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최현우가 아직 중세시대의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겠지.

평생을 왕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살다가, 자신의 손으로 대표자를 뽑게 생겼는데.

그게 어찌 익숙할까?

‘더욱이 그는 내 측근이니까. 빠르게 적응하고 있는 다른 교민들과는 좀 다르지.’

나는 시민권을 가진.

소수의 교민에게 적극적인 투표를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는 그 집단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자리였기에.

일단 소수지만, 투표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역시도 이익 집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만방에 알린 거다.

“미국인들은 참으로 돈이 남아도나 봅니다. 양측 모두가 이번 선거 때 어마어마한 선거 자금을 쏟아붓지 않았습니까?”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우현식.

그는 조용히 있다가 최현우의 주장에 동의하는지.

이를 돈과 연결하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전하의 정치기부금 또한 있을 텐데······ 쩝. 매번 느끼지만 참으로 아깝습니다.”

20세기 대한민국도 그렇지만, 선거는 돈 먹는 하마다.

미국 역시도 그랬는데, 미국의 정치비평가들은 이런 미국의 선거 행위를 두고 금권선거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했네. 이 모든 것은 다, 투자라고 생각하게나. 발상을 그리 전환한다면 속이 좀 편해질 것일세.”

정치자금을 마냥 아까워해서는 안 된다.

미국에서 정치자금을 기부하는 것은 해당 정치인에게 영향력을 사는 행위이기도 하니까.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가장 쉬운 일이다.’

돈이 없을 때는 뭔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구절이었으나.

막상 궤도에 오르고 보니 이 말이 내게 절실히 와 닿는다.

‘굳은 신념을 가진 이가 가장 위험하지. 좋든 나쁘든 제 신념대로 행동하니까.’

그렇기에 나는 미국에 온 직후부터 열심히 정치자금을 뿌려 대고 있었다.

돈으로 회유할 수 있는 미국 지도층에게 호감을 사며 혹시나 모를 만약에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아이고, 오셨습니까.”

케미컬투자은행에 도착하자마자 케네디가 급히 본사 건물 앞까지 나와 나를 반겼다.

그는 이번 상반기 투자 성과를 요약한 자료를 건네며 내게 자신의 실력을 한껏 자랑하기 시작했다.

“전하.”

“응? 무슨 일인가?”

한참 IMM 공매도 건에 관하여 보고를 받고 있는데 말이다.

최현우가 급히 나를 찾아왔다.

“휴즈 후보자, 아니지. 당선인께서 전하께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휴즈가 이겼다고?”

“예. 당선인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 어찌할까요?”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은 분열되지 않았다.

선거를 뒤집을 수 있는 변수들 또한 진즉 차단된 상태.

그리하여 원 역사와 다르게 우드로 윌슨은 워싱턴에 입성하지 못했다.

‘당선인과의 전화 통화라니······.’

미 행정부의 수장이 되면 전화를 돌릴 곳이 많아진다.

아직은 대서양을 횡단하는 국제전화선이 설치되지 않아, 서구 열강에 당선 축하 전화를 받을 일은 없겠지만.

국내 여러 지지자에게 전화를 걸어 대며, 그간의 노고를 위로해야 한다.

‘나는 몇 번째려나······.’

갑자기 궁금해진다.

중요도가 높을수록, 무릇 앞에 통화하기 마련이니까.

나는 꿈틀대는 호기심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휴즈의 전화를 받았다.

* * *

휴즈는 뉴욕 주지사를 지냈다.

전직 주지사답게, 그의 저택은 맨해튼 한가운데 자리했는데.

현재 뉴욕의 수많은 명사는 맨해튼 인근에 머물며 휴즈를 만나길 고대했다.

그가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에 말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보내고 싶어서였다.

나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다행히도 나는 록펠러와 함께 그의 집에 초대받게 되었다.

“당선인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뉴욕의 난다긴다하는 정·재계 인사들이 총집합한 상황.

자칫 분위기에 먹혀서 긴장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전혀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휴즈에게 악수를 청했다.

“매일같이 새벽마다 제가 기도를 했답니다.”

“아, 그렇습니까?”

“예. 당선인만큼 이 나라를 잘 이끌어나갈 인재는 없으니까요. 어휴. 윌슨 그놈이 백악관에 들어서는 장면을 상상하니, 오금이 저려 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예전에는 신분 차이가 있기에 살짝 하대하는 말투를 썼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휴즈는 엄연히 당선인.

미국의 대통령은 통수권자로서 일개 왕국의 왕자보다 어쩌면 신분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맞존대를 해 가며 예전과는 다르게 그를 살짝 어렵게 대한 거다.

‘권력이란 뽕이나 아편 같은, 마약과도 같은 무형물질이지.’

정치인들이 가난한 서민들에게 허리를 굽히면서까지 선거철마다 굽신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그리 동경하던 왕족에게도 존대를 받을 수 있게 되니까.

‘제일 좋을 때다.’

역시 예상대로.

휴즈가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댔다.

그는 내 손을 꽉 잡으며 환대했다.

“이사장님, 그리고 이 왕자님.”

“예.”

“다른 분들도 제게 도움을 많이 주었지만, 이리 제 앞에 있는 두 분이 아니었다면 저는 후보경선조차 뚫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휴즈는 우리 두 사람을 콕 집었다.

그는 지난날의 은혜를 강조하며 이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감사합니다.”

“아! 당선인께서는 대통령직에 취임하신다면, 무엇을 최우선으로 하시고 싶으십니까?”

흔히 하는 무난한 질문을 록펠러가 던졌다.

너무나도 평이하기에, 의례상 답하고 대화가 마무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나, 록펠러나, 휴즈나, 다들 닳고 닳은 위인들.

“본인이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휴즈가 내뱉을 대답은 향후 그의 내각의 방향을 예상할 수 있는 가늠자다.

휴즈는 살짝 고민하다가 한 가지 사례를 언급했다.

“대통령 유고 시 혹은 정상적인 통치를 못 할 때······ 승계 문제를 법률화하는, 자잘하지만 어찌 보면 중요한 문제들을 우선 해결하고 싶습니다.”

감히 대통령이 아니면 꺼낼 수 없는 이야기.

재임 기간.

최고 권력자의 사후를 논하는 일은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니까.

휴즈는 이를 언급하며 다른 대통령들이 하지 못한 법조 시스템 정비를 우선하여 추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역시 법조인 출신이십니다.”

“뭐, 아는 것이 법밖에 없는 뉴욕 촌놈입니다. 여기 계신 두 분께서 제게 조언을 많이 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특히나 경제 쪽은 말입니다.”

다시 한번 휴즈가 우리 둘을 거론했다.

이것은 좋은 일이기도 했고, 안 좋은 신호이기도 했다.

‘그만큼 휴즈의 신뢰를 받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최고 권력자의 애정을 독차지하는 것은 자칫 다른 주변 인물들의 질투를 유발하게 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휴즈가 이를 모를 리도 없고.’

진짜로 고마워서 그런 것인지.

머리를 한번 굴려서 우리 둘을 견제하려고 그런 것인지, 잠시 머리가 아파져 왔다.

“아! 돌아가시기 전에······ 내 여러분께 한 가지를 다짐하고자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본인은 인종, 성별, 나이, 출신을 불문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내각에 기용할 생각입니다. 이점을 꼭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특정 키워드.

그러니까.

인종이라는 단언가 언급되었을 때.

휴즈는 나와 시선을 교환했다.

원 역사에서 휴즈는 인종 문제에 관해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법조 엘리트였는데 말이다.

‘진짜로 내게 주는 선물인가?’

아니면 원 역사의 우드로 윌슨처럼.

립 서비스를 하는 것일까?

우드로 윌슨도 선거 캠페인 때 루스벨트 정부의 인종차별 문제를 지적하며 민주당이 집권하면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선언했다.

백악관에 들어서고 이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이 문제지만.

선거 때는 여느 깨어 있는 지식인처럼 인종차별 문제를 거론하며 흑백 나아가 아시안 차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었다.

‘지금 이 장소에.’

유색인종은 나밖에 없다.

휴즈도 이를 잘 알고 있는지 인종 관련 질문이 나오면 나를 쳐다보곤 했다.

“다음번엔, 워싱턴에서 만나도록 하지요. 이 왕자님.”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쿵- 쿵- 쿵- 쿵-

뉴욕에 있는 우리 집에서 제법 가까운 민가.

최근에 매입한 이곳에 실내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자자, 어서어서 움직이세.”

“의자는 저쪽에, 협탁은 이쪽에 배치하게나.”

겉으로 보았을 때는 평범한 민가 같지만, 내부는 살짝 달랐다.

마치 미국의 국회 의사당을 본뜬 것만 같은 아우라가 건물 안에서 풍겨 오고 있었으니까.

“전하. 이쪽입니다.”

“그래. 수고했네.”

나는 이곳에서 리허설을 준비할 것이다.

완벽하게 복사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분위기가 비슷하기에.

이곳에서 입을 풀면 실전에서 제법 도움이 될 것 같다.

‘푸조 청문회까지, 보름 남았군.’

재미교포 박병준으로 살며, 한국에 가끔 들른 적이 있다.

호텔에서 한국어로 된 뉴스를 몇 번 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한국과 미국은 참으로 다른 나라는 것을 느꼈다.

‘한국은 희한하게도 법 하나를 입법하게 되면, 피해자의 이름을 붙인단 말이야.’

미국은 살짝 다르다.

해당 법의 진짜 이름 혹은 이를 주도했던 의원들의 성을 따서 앞머리에 달아 준다.

모건이 야심 차게 준비했던 미국중앙은행법만 해도 언론에서는 알드리치법이라고 칭한다.

“자자, 슬슬 시작해 볼까?”

내 고용인들이 대충 청문회 때 나올 예상 질문들을 뽑아 놨다.

나는 이를 살펴보았다.

【타이태닉 사고의 원인을 두고 세간에서 말이 많습니다. 일부는 안전 불감증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다수는 거대 독점 트러스트의 폐해 때문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이 왕자님 또한 거대 독점 트러스트를 운영하시는 것으로 아는데요. 차후 희생자들을 줄일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왕자님께서는 금융기관을 여럿 보유하고 계십니다. 시민들에게 대출해줄 때, 기준과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공매도는 서민의 재산을 약탈해 가는 제도입니다. 이 왕자님의 의견은 무엇입니까?】

【왕자님은 이민자이지만, 이 나라 금융 산업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십니다. 일부는 이를 우려하고 있는데, 왕자님 인생에서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입니까?】

예상했던 것보다도 강도가 약하다.

이는 내 고용인들이 이 질문들을 죄다 작성했기 때문이겠다.

선을 넘은, 무례한 질문들은 알게 모르게 제거되었을 것이니까.

“전하.”

“응?”

“저번에 고용한 컨설턴트들이 막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록펠러의 도움을 받아 정치 컨설턴트들을 초빙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젊어 보이는 청년도 있고.

나이가 그득하게 든 노인도 몇몇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이 왕자님.”

“어서 오게나.”

“시간도 없는데 빠르게 시작할까요?”

“좋지.”

다들 프로 중의 프로인지.

표정이 확 바뀌었다.

“미스터 리. 지금 이 자리에 참석한 순간부터 미스터 리는 더는 프린스 리가 아닙니다. 일개 자본가일 뿐이지요.”

“······.”

“이는 신성한 연방의회에서 미스터 리를 더는 왕자 대우해 주지 않을 것이란 뜻입니다. 제 말, 알아들었습니까?”

“예.”

“본격적인 질문에 앞서서 미스터 리에게 몇 가지를 묻고 싶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의원님.”

“혹시 미스터 리는 이번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였습니까?”

< 리허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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