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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240화 (240/294)

< 재회 (3) >

아론은 내 손을 꼭 잡으며 간절히 부탁했다.

이에 나는 한쪽 눈썹을 살짝 씰룩거리면서 되물었다.

“자네 말고, 아일랜드를 도와 달라?”

“예.”

어두워진 내 표정 때문일까?

아론은 눈치를 보며, 조금 전에 언급했던 내 말을 인용했다.

“아까 저희 삼 형제에게 퇴직금을 건네주지 못하여, 두고두고 후회하였다고 말씀하셨지요?”

“······.”

“이번이 기회입니다. 지난날의 우리 삼 형제의 노고를 부디 결산해 주십시오. 그리해 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겠습니다.”

퇴직금은 물론이고.

지난 오 년 동안의 밀린 이자, 아니지 오백 년 치 이자를 선급으로 지급해 달라는 거네.

이거.

“왕자님. 부탁드립니다.”

짧디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다음 행동이 내 사업과 대한제국 독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빠르게 계산할 수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며 손을 야멸차게 빼지 않고, 일단 옛 우리말부터 하나 거론하기 시작했다.

“조선 속담에 제 코가 석 자라는 말이 있네.”

“······.”

“무슨 뜻으로 쓰이는지 아는가?”

아론이 잡고 있던 내 손을 풀며 살짝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희에게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닌 듯합니다.”

“어째서 그리 해석한 것이지?”

“왕자님께서 본국의 속담을 인용할 때는 보통 설득하기 힘든 상대방과 대화를 막 시작할 때 사용하시니까요.”

이거, 이거.

몇 년 같이 지냈다고 내 평소 습관을 파악당한 건가?

“왕자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내용이 대충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

“죄송합니다. 이거 제가 너무 무리한 부탁을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한 것 같습니다.”

지난 5년 동안, 아론은 꽤 많이 성장한 것 같다.

밀 때 밀고, 당길 때 당기는.

협상 기술을 제대로 배운 모양.

“아, 형님 포기하실 겁니까?”

굿캅, 베드캅 전술도 아니고.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맥스가 아론을 대신하여 나서기 시작했다.

“뽀스랑 또 언제 만날 기회가 있다고, 이리 지레 포기하는 겁니까?”

맥스가 내게로 다가오며 무릎을 꿇었다.

“뽀스. 도와주세요.”

“······.”

“우리 아일랜드인들은 지난 몇백 년 동안, 영국인들에게 핍박당하고 착취당했습니다. 앞선 대기근 때, 아일랜드 본섬의 1/4이 아사한 사건, 왕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감자 대기근은 아주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었기에, 나 역시도 이를 세계사 시간에 배웠다.

더욱이 이 둘이 빙의 전에 이강에게도 한마디 한 거 같고.

이에, 나는 살짝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그러자 맥스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하던 말을 이어 갔다.

“저희가 처음 만날 때, 그때 보스께서는 저희 국적을 들으며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마도 같은 처지라서 그리 반응하셨을 테지요.”

“······.”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아직도 수많은 우리 동포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맥스. 그만하거라. 왕자님께서는 이미 거절 의사를 밝히셨다.”

“아, 형. 무슨 소리예요. 끝까지 설득해야지요. 아아!”

아론이 맥스를 강제로 일으키며 그를 내 곁에서 떨어트렸다.

“왕자님. 송구하옵니다.”

“······.”

“저희는 그만 일어나보겠습니다. 듣자 하니 이번 주말에,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계신다 들었습니다. 오늘내일 휴식을 푹 취해 두셔야 다음 일정에 집중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론은 내게 이리 말하고 그의 동생들에게 호통을 쳤다.

“맥스! 카플란! 어서 가자.”

“아. 형님!”

옆에서 우적우적 내가 차려 준 스낵을 먹고 있던 카플란이 맥스를 둘러업고 호텔 방문을 나섰다.

아론은 반항하고 있는 동생의 뒤를 따라가다가 무언가 두고 간 것이 떠올랐다는 표정을 지어대며.

다시금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제 명함입니다. 총지배인을 통해 맥스의 명함은 받으셨겠지만, 제 명함은 아직 드리지 않은 것 같아서······ 이 왕자님께 이리 드립니다.”

아론은 명함을 내게 건네며 다음 말을 속삭였다.

“정보조사나 워싱턴 정계에 로비를 맡기시고 싶으시면 이쪽에 연락해 주십시오. 지인 할인가로 모시겠습니다.”

“알겠네.”

“더불어······.”

아론은 마지막 희망을 듬뿍 담아서, 훗날을 기약했다.

“혹시나 마음이 바뀌신다면 제게 꼭 연락해 주십시오.”

“······.”

“우리 400만 재미 아일랜드인들은 아주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습니다. 왕자님께서 이들을 가엽게 여기어, 도움을 주신다면 다들 평생 이를 잊지 못할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 한 가지만큼은 약조할 수 있습니다.”

* * *

“아론이 오늘 호텔에 들렀단 말입니까?”

“그래.”

삼 형제가 호텔을 떠난 후, 나는 익문사 최고책임자인 이위종을 내 거처로 불러들였다.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일단은 돌려보냈네.”

“잘하셨습니다.”

이위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세계 최고 혐성국의 위험성을 내게 강조했다.

“영국은 초강대국입니다. 그치들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전하께서 크게 당하실 수도 있습니다.”

“동의하네.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장수말벌 집을 몽둥이로 냅다 갈기면, 온몸에 독침을 맞게 되지 않던가?”

잘못하면 죽기까지 한다.

황소개구리가 대한민국 생태계를 파괴하듯, 장수말벌도 아시아에서 건너와 미국 양봉 업계를 뒤집어 놨는데.

가끔 뉴스에서 장수말벌에 쏘여 쇼크사한 기사들을 접한 기억이 있었기에.

나는 이를 예시로 들며 주의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예. 그렇습니다. 영국은 장수말벌보다도 더한 놈들이니 아주 신중히 움직이셔야 할 것입니다.”

다양한 전후 시나리오를 구상 중이다.

동맹국이 이긴다면 몰라도······.

양패구상을 노리거나 협상국이 이기기라도 한다면.

영국의 선택에 따라서 우리 대한제국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역린이니까. 자칫 잘못하면 내가 덤터기를 쓸 것이다.’

영국의 정보력은 여타 국가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만만하게 보면 큰코다칠 수 있다는 소리.

“일단은 이자부터 조사를 좀 해 주게나.”

그렇기에 나는 삼 형제가 손을 내밀었을 때, 바로 손잡지 않았다.

5년간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내 기억 속에 삼 형제들은 허술하기 짝이 없던 이들이다.

내가 아일랜드를 돕고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나 알릴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했다.

“이게 누구입니까?”

삼형제의 입에서 나왔던 이름.

로저 케이스먼트가 적힌 쪽지를 이위종에게 건넸다.

고개를 갸웃하는 이위종을 보며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일랜드 반군 측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같네.”

“우두머리요?”

“그래. 반군 측 우두머리가 아니더라고 해도, 주요 인물일 테야. 이번에 미국에 입국한 후, 재미 아일랜드 인들을 만나고 다니며 자금을 모으는 모양일세.”

이위종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내가 무슨 이유로 이자를 조사하라는지, 잘 알겠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이놈의 신상을 샅샅이 조사한 후, 독일 측에 관련 정보를 비밀리에 넘기게나.”

“영국이 아니고 독일에 말입니까?”

“그래.”

나는 다음 말을 하며 한 가지를 강조했다.

“아! 우리 쪽에서 관련 정보를 넘겼다는 것을 영국이 절대로 알아서는 안 되네.”

“차도지계를 계획하시나 봅니다.”

그간 해 왔던 이쪽 경험 때문인지, 이위종은 ‘척’하면 ‘척’하고 알아들었다.

“맞네. 아 그리고. 여기, 이 자 또한 조사해 주게나.”

나는 품 안에 있던 다른 쪽지 하나를 마저 꺼내며 이를 이위종에게 넘겼다.

“독일로 망명을 온 러시아인일세.”

“러시아인이요?”

“그래. 앞선 로저 케이스먼트와 함께 아주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자이니······ 이자의 신상 역시 아주 꼼꼼하게 조사해야 할 것이네.”

아일랜드 인은 그렇다고 쳐도 러시아인은 뭐지?

하는 표정을 이위종이 잠깐 지어 보였다.

하지만 내 명령이었기에, 이위종은 이내 쪽지를 호주머니에 고이 보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믿고 맡겨 주십시오.”

* * *

야심한 시각.

뉴욕시 외곽에 있는 호화 별장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지고 가로등만이 켜져 있는 이곳에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집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수십의 수행원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며, 손님을 맞았다.

일행 중에는 나이 든 노신사도 몇몇 보였지만, 특이하게도 젊은 사내 두 명이 두 집단을 대표하여 주도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예전에······ 런던에서 뵈었던 때가 기억나는데, 로스차일드 대표께서는 그때보다 더 젊어지신 것 같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모건 대표 역시 더 얼굴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

로스차일드와 모건 가문.

이 두 세력은 본격적인 7인회 회의 전, 사전에 입을 맞추기 위해 비밀리에 한자리에 모였다.

새롭게 가주가 된 월터 로스차일드를 모건 주니어가 환대하며 그를 집안으로 안내했다.

“일단은 술부터 한잔할까요?”

“모건 대표. 모건 대표께서는 어떤 술을 즐기십니까?”

“저는 브랜디가 좋습니다. 로스차일드 대표는 어떤 술을 좋아하십니까?”

“저도 같은 거로 주시지요. 아!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어떤 술을 드시겠습니까?”

이 자리에는 두 가문의 새로운 얼굴만이 있지 않았다.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현역으로 활동했던, 로스차일드 남작과 모건 명예대표 역시 한자리에 있었는데.

이 둘은 지난번 스탠다드 오일 공매도 사건으로 철천지원수 사이가 되었기에, 현재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성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아버지. 지난날의 원한은 잊고 좋게좋게 넘어가기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이리 한마디도 안 하시면 제가 여기 있는 월터와 무슨 협상을 하겠습니까?”

두 아들이 앞다투어 화해를 권유하자, JP모건과 로스차일드 남작은 마지못해 악수하며 서로 인사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간 마음고생이 많았나 봅니다. 얼굴이 아주 핼쑥해졌소이다.”

“남작 덕분에 내가 많이 힘들긴 했지요. 남작 소유의 언론사들이 지난날 나를 어찌나 물어뜯던지······ 하마터면 내 손으로 내 목숨을 거둘 뻔했습니다.”

자살은 기독교에서 금기시되는 단어다.

이 위험한 단어가 나오자, 모건 주니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JP모건을 만류했다.

“아버지.”

“됐다. 내가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니고. 진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아직도 분한지, JP모건은 남작을 노려보며 날 선 대화를 이어 갔다.

“네가 내게 계속 희망을 불어넣어 줬기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남작도 이를 알아야 한다.”

남작은 뭐 저런 뒤끝 넘치는 노인네가 다 있어 하는 표정을 지어 댔다.

그럴 만도 한 게.

남작 역시 JP모건 때문에 크나큰 손해를 입었다.

그 여파로.

신대륙쪽 은행 사업을 죄다 접게 되었다.

로스차일드 남작은 이를 살짝 언급할까 하다가, 이내 속으로 냉큼 이 말을 삼키며 JP모건을 바라보았다.

“계속 못난 과거 이야기나 할 것인가? 내 이 먼 곳까지 이 이야기나 하러 온 것이 아니네.”

돈은 본디 감정이 없는 무생물이다.

남작은 이 점을 강조하며, 자신과 거래를 할 것인지를 JP모건에게 물었다.

이에 모건이 반응했다.

“그래. 내게 할 말이 뭔가?”

흔히들 영어는 존댓말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단어와 어투가 어떻게 쓰이냐에 따라서, 영어 역시 평어와 존댓말을 구별할 수 있는데.

현재 JP모건과 로스차일드 남작은 서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표현을 써가며 용건만 간단히 말하자고 선언했다.

“그 전에 민감한 질문 한 가지만 더 물어도 되겠나?”

“내가 버럭 화를 낼 만한 이야기인가 본데, 한번 들어나 보지.”

남작은 피식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JP모건에게 잽을 날렸다.

“해운 트러스트인 IMM이 올 초에 최종 부도 처리되었다며? 그로 인해 꽤 큰 손해를 입었을 텐데······.”

JP모건이 팔짱을 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회장 자리는 진즉 월터와 모건 주니어, 두 아들이 물려받았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두 거물이 동석한 자리였기에, 당연하게도 발언권은 원로들인 JP모건과 남작에게 있었다.

“돈이 좀 궁해졌을 것 같아서 말이지.”

로스차일드 남작이 비릿한 미소를 지어 대며 JP모건에게 제안했다.

“예전과 같이······ 나와 한번 손을 잡지 않을 텐가?”

< 재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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