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니게임 (3) >
11월 셋째 주부터, 유럽 각국의 전쟁채권이 뉴욕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조르비 은행장.”
“말씀하십시오. 체이스 판사님.”
“이번에 프랑스에서 발행한 전쟁채권 말이야. 눈길이 좀 가는데, 어찌 생각하나?”
첫 판매 대상은 당연하게도 미국의 큰손들이었다.
미국 서민들의 소득이 유럽 중산층들과 비교해서 증가하고 있다지만, 아직은 뉴욕의 자본가들이나 투자기관을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전쟁채권의 판매 대행을 받은 주요 금융기관들은 이 두 세력을 대상으로 우선하여 영업을 개시했다.
“글쎄요. 저는 영국 채권도 손이 잘 안 가서요.”
“그래?”
“예······ 일단 제 친지들에게는 상황을 지켜보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생각보다 뜨뜻미지근했다.
원 역사보다 협상국 측이 더 크게 밀려서, 초반 정세만 놓고 본다면 동맹국 측이 상당히 많이 유리해졌으니까.
“하긴, 오스만이 참전하여 전황이 협상국 측에 불리해지긴 했지.”
“예. 영국이 세계 제일이긴 하지만······ 이번처럼 실수가 뻥뻥 터진다면 전쟁 양상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긴 합니다.”
체이스 판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제.
한 잡지에서 보았던 기사 내용을 방금 조르비가 언급했기 때문이다.
“아, 자네도 그 책자를 보는가?”
“더 머니 말입니까?”
“그래.”
“예. 여기만큼 유럽의 전황이 잘 기고된 언론은 없으니까요.”
“듣자 하니 이강 왕자가 이 잡지 회사 주인이라고 하던데 말이야.”
“아, 그렇습니까? 저는 록펠러 이사장에게 추천받아서 록펠러 가문 쪽이 이를 발행하는 줄 알았습니다.”
조르비는 모건보다는 록펠러와 친한 뉴욕의 자본가였다.
그래서일까?
더 머니라는 잡지가 출시되고 바로 이것을 정독할 수 있었는데.
덕분에 그의 고객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널리 알려 줄 수 있게 되어서, 충성 고객들에게 신뢰를 얻고 있었다.
“저희 은행 창고에 더 머니가 쌓여 있는데, 한 부 가져가시겠습니까?”
“오! 그래도 되나? 나도 잭슨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라······ 상세 내용이 궁금했는데 말이야.”
“제가 바로 창고에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군.”
정보가 없었다면 이름빨 하나만 믿고 영국 채권이나 프랑스 채권 쪽에 투자했을 거다.
하지만 더 머니라는 잡지로 인해 유럽의 상황이 2주마다 한 번씩 미국인들에게 알려지고 있다.
이번에.
오스만 참전은 전적으로 처칠의 실수라는 것이 미국인들에게 알려진 것 또한 이 때문.
“아무튼 영국의 전쟁채권 구매는 시기상조라는 말이지?”
“예.”
투자처가 전쟁채권 하나였으면, 둘 중 하나를 골랐겠지만.
이들 말고도 수익을 불릴 수단은 많았기에, 뉴욕의 자본가들은 섣불리 전쟁채권에 돈을 쓰지 않고 차분히 채권 판매가가 낮아지길 기다렸다.
“아, 이번 주에 베들레헴 스틸 주식이 30%나 올랐던데. 조르비 은행장도 이 주식을 꽤 들고 있던가?”
“예.”
"잡지는 고맙네. 내 조만간 다시 들르겠네."
전쟁 특수가 기대되었기에, 개인들은 물론이고 큰손들도 미국 주식에 올인 하고 있었다.
그나마 안정적인 투자를 원하는 이들이 전쟁채권 쪽에 기웃거렸는데.
이마저도 다른 대체품이 시장에 나오며 관심이 푹 꺼졌다.
“조르비 은행장.”
“요한슨? 아니 이거 몇 년 만인가? 와이프랑 함께 스웨덴으로 떠난 줄 알았는데.”
“유럽의 상황이 개차반이라, 내 다시금 미국으로 돌아왔네.”
“그렇구먼. 그나저나 자네 안색이 많이 좋아 보이는군.”
“뭐,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잔고가 증가하는데, 울상을 하고 다녀서야 쓰겠는가?”
체이스 판사가 은행을 떠난 후, 조르비는 오랜 친우인 요한슨과 재회하게 되었다.
“아! 어제 나온 소칼의 회사채 말이야. 자네 회사는 입찰에 참여했는가?”
“물론이지. 애쏘. 소코니만큼 안정적인 회사인데. 회사채를 언제 또 발행할 줄 알고 이를 지나친단 말인가?”
“자네 말이 맞네. 지금 같은 시기에는 미국의 석유회사 회사채들이 유럽 각국의 전쟁채권보다도 낫지.”
멕시코 내전으로 멕시코 쪽 유전 시설이 멈췄다.
폭도들 때문이다.
러시아 쪽 바쿠 유전 역시 붉은 혁명이 일어난다면 언제든 생산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 가운데.
각국의 석유 수요는 폭발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에도 널리 보급되고 있는 자동차 덕분에 석유 산업은 한동안 날개를 달고 비상할 예정이다.
이강과 록펠러는 회사채를 대량 발행하며 유동성을 한껏 흡수하는 중이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추가로 시설 투자를 하면서 시장을 선점할 생각이었으니까.
더불어 영국의 자금 수급도 방해하고 말이다.
* * *
워싱턴에는 백악관이, 런던에는 다우닝가 총리 관저가 있는 것처럼.
파리 중심부에는 프랑스 대통령의 집무실인 엘리제궁이 존재했다.
“각하. 들어가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현재 이곳에는 프랑스 제3공화국 10대 대통령인 레몽 푸앵카레가 기거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평소라면 정치인들만이 찾아왔겠지만, 현재는 전시 상황.
그렇기에 수많은 군 장성들이 이곳을 제집처럼 들락거리며, 푸앵카레에게 돌아가는 전황을 보고하는 중이었다.
프랑스군의 총사령관인 조제프 조프르도 그중 하나였다.
“내, 아침에 전달받은 보고서를 아주 꼼꼼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조프르가 푸앵카레에게 정기보고를 하러 오는 날이다.
푸앵카레는 조프르에게 따뜻한 민트티를 한잔을 건네며, 그를 흘깃 쳐다보았다.
“지난번 보고받았을 때와 전황이 매우 비슷하던데.”
오른손 검지로 아침에 받은 보고서를 톡톡 쳐 댔던 푸앵카레 대통령.
습관적으로 반복하던 행동을 멈추고 조프르에게 매섭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집중해서 보았기에 다행이지. 휙휙 넘겼다면, 지난주 보고서와 구분하지 못했을 정도로 비슷하더군요.”
“······.”
“이거 자칫 잘못하면 장기전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푸앵카레가 목소리를 지긋이 깔며 조프르를 압박했다.
파리에 있는 어느 시민도 전쟁이 1년 이상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정치인은 민의를 대변하는 자리.
그렇기에.
푸앵카레는 살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조프르 총사령관을 은연중에 닦달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각하.”
이에 조프르는 허둥지둥 손사래를 치며 푸앵카레 대통령을 안심시켰다.
“총사령관의 생각은 여기 수없이 쌓여 있는 보고서들과는 다른가 봅니다?”
조프르가 침을 한번 꿀꺽 삼키며 푸앵카레를 바라보았다.
“내년 여름 이전에······ 확실히 결판이 날 것입니다.”
조프르의 장담에 푸앵카레가 무슨 개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을 지어 댄다.
이에,
조프르가 다시 한번 푸앵카레를 안심시켰다.
“우리도 그렇지만, 독일 놈들도 이번 전쟁을 질질 끌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요.”
푸앵카레는 오랜만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프르 사령관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겠지요. 영국에게 해상봉쇄 당하는 것만큼 고달픈 일은 없을 테니까요.”
영국의 해상봉쇄에 크게 당했던 나라가 바로 백 년 전 프랑스이지 않은가?
나폴레옹 시대긴 하지만, 그 교훈이 아직도 선조들과 기록들을 통해 전해졌기에.
영국의 해상봉쇄가 얼마나 지독한지는 프랑스 관리들이 독일 관리들보다도 더 빠삭하게 알 정도였다.
“예. 그렇습니다. 독일 놈들도 나름 타개책을 찾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긴 합니다만······.”
독일은 현재 총력을 다하여 전군에 보급품을 대고 있었다.
공기 중에서 질소도 뽑아내고 집 안에 있는 철제, 동제 생필품들도 수거하며 군대에 들이붓고 있는 상황.
“아, 그러고 보니 그 일도 있었네요.”
네덜란드를 통해서 미국의 곡물을 우회 수입하기도 했는데.
영국이 네덜란드에 이를 엄중하게 항의하여 더는 이 방법을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일은 더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내 영국을 통해 네덜란드에 단단히 엄포를 놓았으니까요.”
“잘하셨습니다.”
“내친김에······ 루마니아 유전에서 나는 기름 수출까지 막았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미국과 루마니아 측에서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기존 계약 이행을 들먹이면서 말입니다.”
세계대전 개전 전, 소칼과 애쏘를 통해 장기 계약한 원유 거래.
영국의 해상봉쇄에 숨이 콱 막혀 있는 독일에, 이 계약은 진짜로 산소호흡기 같은 계약이었다.
다른 것들은 어떻게 쥐어짜서 아껴서 사용할 수 있지만.
원유 생산만큼은 그렇지 못하니까.
“그때, 이 왕자가 입찰을 권했을 때 확 들어가서 이를 먼저 확보했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자존심이 뭔지, 외무장관이 반대하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습니다. 나 원.”
루마니아 유전은 유럽 내륙에 자리한 유전이었기에, 영국의 해상봉쇄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록펠러와 이강이 로스차일드에게 이를 전격 인수한 다음, 유럽 각국에 비싼 가격으로 입찰을 권유했는데.
그때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끼어들어 독일과의 계약을 방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들은 두고두고 후회하는 중이었다.
“아! 당분간은 숨을 고르며 전열을 다듬는 데 집중한다고 하셨지요?”
기분 나쁜 기억은 오랫동안 되새기는 것이 아니다.
푸앵카레는 조프르 사령관을 보며 앞으로 있을 반격 계획을 물었다.
“예. 춘계 대공세를 막아내고 베를린으로 진격할 계획을 짜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러시아의 협조가 필수인데 말이죠.”
푸앵카레가 그의 집무실 한편에 자리하고 있는 세계지도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동부전선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조프르 사령관이 살짝 주저하다가 좋은 소식부터 전했다.
“러시아 놈들이 용케도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이번 세계대전에 참전한 열강 중 오스트리아군이 제일 최약체라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
푸앵카레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별로 놀랍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좀 더 북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독일 쪽은요?”
“······.”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상황이 별로인가 보군요.”
조프르 사령관이 이제는 동맹국이 된 러시아를 두둔하며 독일의 선전을 내려쳤다.
“그래도,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느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 군부 인사들은 동부전선을 비관적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올해 안에 바르샤바가 함락될지도 모른다던데.”
동부전선은 아직도 독일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여러 이유 때문이겠다.
러시아 군부의 웃대가리들이 엉망이고, 군기도 형편없으며.
이를 해결한다고 내놓은 대책이 차르인 니콜라이의 총사령관 취임이 아니던가?
더불어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독일, 거기에 최근에 합류한 오스만까지.
세 나라와 삼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방어해야 하는 전선이 프랑스와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기에.
석 달 전부터 전선이 고정되며 기나긴 대치전이 이어가고 있는 프랑스와는 다르게 전선이 쭉쭉 밀리고 있었다.
“이거 자칫······ 독일보다 러시아가 더 먼저 밀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푸앵카레가 근심 어린 표정을 지으며 동부전선 전황이 표시된 지도를 바라보았다.
“각하.”
“말씀하세요.”
“어젯밤, 파리에 눈이 내렸습니다.”
“······.”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계대전 그리고 보불 전쟁이 일어나기 전, 프랑스의 오랜 주적 중 하나는 바로 러시아였다.
나폴레옹이 유럽은 통일했지만, 영국과 러시아.
이 두 나라를 잡지 못하여 결국 몰락하게 되었으니까.
프랑스는 이 시기를 통해 영국의 해상봉쇄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경험했지만.
다른 한 가지도 깨닫게 되었는데 그 소중한 경험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러시아군이 개판이긴 하지만, 그들의 매서운 겨울 기후 하나만큼은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독일의 겨울 날씨도 추운 편이긴 하지만, 러시아만큼 온몸이 얼어붙을 정도로 매섭게 춥지는 않았다.
조프르가 이를 언급했다.
“더욱이 겨울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한동안 독일은 동부로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긴, 라스푸티차가 시작되니······ 쉽지 않겠군요.”
“예.”
조프르 사령관의 전망대로라면, 조만간 독일군은 움직임을 멈추게 될 거다.
그리고 서서히 굶어 죽게 될 것이다.
‘믿을 만한 첩자에 따르면, 독일 측에서 신무기를 개발 중이라고 하던데······.’
뭐, 신무기라는 것이 복불복 형태를 띠기에.
이강이 만든 폭격기처럼 전황을 크게 바꿀 만한 무기는 쉬이 만들어지지 않을 거다.
푸앵카레는 그리 생각하며 행복회로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 오스만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일본이 우리 측에 합류하였다고 전에 말씀해주셨지요?”
“아, 예.”
“그치들은 뭘 하고 있답니까?”
일본제국은 프랑스에서 너무나도 멀찍이 떨어져 있는 우군이다.
그랬기에 조프르 사령관 역시도 지난날 기억을 가까스로 쥐어짜야 했다.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칭다오가 지난주 초쯤에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아, 그래요? 그건 그렇다고 치고······ 이곳 유럽에는 언제 원정군을 파병해 준답니까?”
일본이 칭다오를 함락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독일은 현재 유럽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
영국 해군에 의해 해상봉쇄도 당하고 있기에, 자국의 식민지들을 돌볼 여력이 전혀 없었다.
더욱이 푸앵카레는 아시아 쪽 전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관심이 하나도 없었다.
자국의 수도 파리 인근 100km 지점까지 독일군이 밀어닥친 상황에, 저 먼 타 대륙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파병 계획은 아직 들은 바가 없어서······.”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 대사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호출하고 있었다.
한 명의 군사라도 아쉬운 상황에서, 영국의 유일한 동맹이라고 볼 수 있는 일본의 협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관련 소식을 입수하는 대로 바로 엘리제궁에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요.”
푸앵카레는 일본이 이번에 그들을 도와주리라 생각했다.
파병하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고.
언제, 어디에, 얼마나 많은 병력이 오느냐만이 문제일 정도.
그의 머릿속에, 일본의 이미지가 워낙 좋기도 했고.
세계대전에 참전한 협상국이라면 당연하게도 주전장인 유럽에 발을 들여야 하니까.
적어도.
상식적인 상대라면 그리 행동하리라 푸앵카레는 믿었다.
< 머니게임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