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4년 한·중·일 (2) >
필리핀 마닐라 중심부에 자리한 고급 숙소.
마당만 해도 100평은 될듯한 대저택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이쪽입니다.”
막 건물 안으로 들어선 남자의 직업은 이발사였다.
여느 필리핀인처럼 얼굴이 까맸는데, 그에 반해 이 집의 주인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현지인과는 다르게 피부가 제법 하얬다.
“그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화교 혹은 동아시아에서 온 이민자로 추정되는 남자는 의자에 앉은 채 이발사에게 제 목을 내주었다.
쓱쓱-
남에게 수염이 깎이는 것이 꽤 익숙한 모양인지, 남자는 긴장하지 않고 편히 눈을 감으며 수염을 다듬었다.
“다 되었습니다.”
이발사의 외침에, 동양인 남자가 감았던 눈을 단번에 확 떴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자는 정면에 배치된 거울을 보며, 그 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감상했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십니까?”
“······.”
이발사의 물음에도 남자는 한동안 묵묵부답이었다.
그러다가 이내 자신의 늙어 가는 얼굴을 보며 불만을 툭-하고 토로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소, 송구하옵니다. 마음에 안 드시는 곳이 있다면, 다시금 수염을 다듬겠습니다.”
“아닐세. 그저 내 초라한 모습을 보고 혼잣말을 한 것뿐이네.”
거울 앞에 있는 남자는 한때 중원대륙을 손에 잠시나마 넣었던 자였다.
남자의 정체는 쑨원.
그는 중원대륙이 아닌 필리핀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작금의 상황이 비관적인지 이내 울상을 지어 댔다.
“자네는 이만 나가 보게.”
“예.”
이 시대 유행대로.
콧수염만 남긴 채 수염을 다듬은 쑨원은 거실 한편에 놓인 영어 신문을 쓱 바라보았다.
이후 마당으로 나온 그는 새파란 마닐라 하늘을 바라보며 혼자 주절거렸다.
“오늘도 동지 하나가 세상을 떴군······.”
중국의 제2차 혁명.
혹은 계축전쟁이라고 불리는 내전에서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완패했다.
이 사건으로 쑨원은 남중국에서의 영향력을 위안스카이에게 모두 빼앗겼다.
그것도 모자라, 신변까지 위험한 상황이 되었기에.
필리핀으로 피신을 와야만 했다.
‘안 선생의 경고대로 일본은 우리 동지들을 북경으로 압송했다.’
필리핀으로 피신 오기 전, 쑨원은 마닐라가 아닌 도쿄로 갈까도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이 계획을 접었다.
일본이 쑨원과 이강의 밀약을 안다고 안중근이 그에게 귀띔을 줬기 때문이다.
‘제길. 내 말을 들었으면······.’
쑨원과 이강 사이의 거래를 확인한 일본제국은 쑨원을 친 이강파 혹은 친한파라고 단정하였다.
이에 일본으로 향한 쑨원의 동지들은 다들 일본 정부에 체포되어 위안스카이에게 압송되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죽음뿐.
쑨원은 이를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쉬었다.
“계십니까?”
“아, 안 선생? 안 선생이시오?”
그런 쑨원에게 안중근이 다시금 찾아왔다.
안중근은 그간 쑨원의 필리핀 망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했다.
중원대륙에서 가진 쑨원의 위상을 생각하여 그리 행동한 것인데.
덕분에 쑨원은 안중근과 아주 친해지며, 그에게 종종 의지했다.
“안 선생. 오랜만입니다.”
“그간 일 때문에 바빠서 자주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쑨원은 안중근을 정보요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안창호처럼 안중근을 이강의 대리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렇기에.
경계심 하나 없이 그를 자신의 숙소로 맞이했다.
“얼마 남지는 않지만, 내 중원에서 떠날 때 싸 들고 온 고급 차이외다. 한잔 쭉 들이키십시오.”
“어유. 이 귀한걸. 제가 이리 주셔도 됩니까?”
“내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아닙니까? 만약 일본으로 갔다면 지금쯤 물고기 밥이나 돼지 사료가 되었을 겁니다.”
쑨원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한사코 마다하는 안중근에게 귀한 광둥산 녹차를 대접했다.
“진짜로 그리되었다면, 원혼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겠지요. 혁명 완수를 눈앞에서 놓친 꼴이니······. 어디 쉬이 눈을 감았겠소이까?”
안중근은 대답 대신 이해한다는 표정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론 한마디 말보다는 남의 말을 백 마디 들어 줄 때가 더 효과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기에 그리 행동한 거다.
“쑨 대인.”
안중근은 한참 쑨원의 한풀이를 들어 주다가 고개를 돌려 한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거실 한편에 늘어져 있는 빈 술병들 더미에 시선을 고정한 것인데.
“예. 안 선생.”
“외람되고, 어찌 보면 주제를 넘는 말이지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이 쑨원은 언제든 안 선생의 고언을 경청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자신만만해하는 쑨원에게 안중근이 한 가지를 충고했다.
“건강을 생각하여 술을 좀 줄이십시오.”
“······.”
“대인께서는 아직 못다 한 대업이 남아 있으십니다.”
안중근은 쑨원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기분 상하지 않게 살살 타일렀다.
“이를 이루려면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입니다. 서양 열강들이 치밀하게 짜 놓은 독소 조약들이 아직 중원 내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요.”
안중근은 한발 더 나아가 한 인물을 거론했다.
“더욱이 전하께서도 대인의 안위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고 계십니다.”
“의왕께서요?”
서구 열강의 외면 속에 오직 이강만이 쑨원을 지속해서 후원하고 있다.
쑨원의 제1 후원자라고 볼 수 있는 이강의 이름이 나오자, 쑨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미국에 들렀을 때, 한동안 의왕 전하의 저택에 기거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요.”
“그때 의왕께서 대인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셨던 것 같습니다. 식사 중, 반주로 독주를 자주 폭음하시는 것을 두고 많이 걱정하셨답니다.”
“의왕께서 내 안위를 그리도 걱정해 주셨다니······. 영광이로군요.”
망명한 정치인으로서 뒤웅박 신세가 되었기에, 함께 도망쳐 온 동지들도 쑨원을 요즘 멀리하고 있다.
그런데.
타국의 왕자라는 자가 쑨원을 이리도 챙겨 주고 있다.
마누라가 할 법한 건강 걱정까지 해 주니, 쑨원으로서는 자연스레 눈가가 촉촉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 약속하리라. 앞으로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술을 마시지 않으리라.”
원 역사에서 쑨원은 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오랜 폭음 습관 덕에 이미 간이 많이 망가진 상태지만, 지금부터라도 신경을 쓴다면 쑨원의 생명이 조금은 더 늘어날 것이라고 이강은 예상했다.
이런 기대에 부합하기라도 하는 듯.
쑨원은 절주를 선언하며 이강의 충고를 어느 정도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
하지만 본디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는 말이 있듯.
쑨원의 절주 역시 내일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다도상을 치우고 금세 술상을 내온 쑨원은 안중근과 거하게 한잔하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안 선생께서는 내가 한심해 보이십니까?”
“아닙니다.”
“아니긴요. 의왕께서 그리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내 막판에 모리배들의 간언만 믿다가 이리 남중국까지 내주게 되었습니다.”
안중근이 제법 편해져서일까?
쑨원은 취기가 올라오는데도 계속하여 술을 마시며 안중근에게 살짝 주사를 부려 댔다.
이에 안중근이 쑨원을 어린아이 달래듯, 토닥였다.
“어렵디어려운 혁명이 어찌 한 번에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
“다시금 기회가 올 것입니다.”
안중근의 위로에 쑨원이 한쪽 눈썹을 꿈틀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내게 또다시 기회가 오겠소이까?”
“그럼요.”
쑨원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중근의 예상을 부정했다.
“거지발싸개 같은 위안스카이는 내 혁명 동지들을 하나씩 차례대로 숙청하고 있습니다.”
쑨원의 주장대로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의원으로 당선된 국민당 정치인들을 암살하거나 체포하며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 피의 숙청을 계속하여 진행되는 중이었기에, 쑨원의 눈이 뒤집힐 만했다.
“이러다 중원의 그 독재자 놈에게 홀라당 넘어갈까 두렵습니다.”
“쑨 대인께서는 중원의 미래가 그리될 것이라 예상하십니까?”
“아닙니까? 위안스카이는 날이 갈수록 제 권력을 강화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에.
안중근은 고개를 내저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다릅니다.”
“안 선생의 생각은 내 예상과는 반대라고요?”
“예. 위안스카이는 그저 사상 누각을 쌓고 있을 뿐입니다. 민심을 읽지 못하는 지도자는 언젠간 백성들의 손에 끌려 내려지기 마련이니까요.”
안중근은 한 가지를 강조하며 쑨원에게 중국의 미래를 슬쩍 흘렸다.
“지금은 그가 독재 권력을 공고히 구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돌아가는 정세를 오판하여 황제 자리에 오르기라도 한다면······. 단번에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진 날개 잃은 천사처럼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을 것입니다.”
“위, 위안스카이가 대총통을 넘어, 황제를 참칭한다고 하셨습니까?”
“예. 믿을 만한 소식통에 따르면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자리를 노릴 흉계를 계획하고 있다 합니다.”
“허허.”
정치 짬밥이 얼마인데.
위안스카이가 그런 자살골을 뻥 하고 찰까.
쑨원은 안중근의 말을 믿지 않았다.
“날 위로해 준다고 소설 같은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해 대시는구려.”
스스로 자신을 황제라 칭하는 행위는 중세시대에도 굉장히 위험한 행위다.
현재 중국은 위안스카이의 북양 군벌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지만, 지방 각지에는 크고 작은 군벌들이 난립하여 존치하는 상황.
자칫.
이들을 모두 적으로 돌릴 수 있기에, 섣불리 황제라 참칭하는 행위는 자살행위와도 같았다.
“진짜로, 믿을 만한 소식통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그리 말씀하시니 섭섭합니다.”
“도대체 믿을 만한 소식통이 누구입니까?”
안중근이 쑨원의 곁으로 다가가 그 정체를 조용히 밝히자, 쑨원의 표정이 묘해졌다.
“위안커원? 이자, 위안스카이의 서자가 아닙니까? 아!”
쑨원은 무언가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안중근을 바라보았다.
“위안커원의 생모가 조선인이라는 소문을 내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 그래서, 안 선생께서 그리도 확신하는 것이로군요.”
“예.”
쑨원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기 시작한다.
희로애락.
모든 감정이 현재 그의 얼굴 속에 보이는 것 같다고 안중근은 그리 생각했다.
“그리된다면, 진짜로 내게도 기회가 다시금 오겠습니다.”
“예. 각지에서 위안스카이를 끌어내리려고 사방에서 죽창을 들고 일어날 테니까요.”
쑨원이 안중근의 손을 꼭 잡으며 눈을 반짝였다.
“내 하루빨리 중원대륙으로 돌아가셔서 ‘장성 이남’의 혼란을 속히 잠재우도록 노력하겠소이다.”
쑨원도 사람이다.
이전부터 이강이 쑨원에게 줄곧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기에.
적어도 이리 망명지에서는 한인들이 좋아할 만한 발언을 하며 자신의 미래 구상을 밝혔다.
“더불어 일본제국의 압제에 고통받고 있는 대한제국 신민들에게도 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나 고민해 보겠습니다.”
“예. 그럼 이만 쉬십시오.”
* * *
안중근은 그가 마련해 준 쑨원의 저택을 나온 후, 기다리고 있던 요원들과 함께 익문사 마닐라 지부 비밀 건물로 향했다.
“단장님. 쑨원이 마지막에 그리 말했다 하셨습니까?”
“그렇네.”
중국어도 아니고, 영어로 대화했기에 확신할 수 있다.
쑨원은 분명히 ‘장성 이남’이라는 단어를 또다시 사용했다.
“그자의 말을 믿어도 될까요?”
“글쎄.”
안중근은 쑨원이 지금 자신에게 진심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인이란 본디 앞뒤가 다른 종자들.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고, 상황이 바뀌면 또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해혁명 이후, 쑨원은 아직 공식적인 자리에서 장성 이남과 중화민족만의 나라를 주창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아직은 이강의 주장대로 쓸모가 있는 남자였다.
“하지만 기댈 곳이 우리밖에 없으니······. 쉬이 우리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것일세.”
“그렇겠네요.”
익문사 마닐라 지부에 도착한 안중근은 산더미 같은 보고서들을 하나하나 정독하며 요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보고서가 민영익의 최신 근황이라고?”
“예. 상해에서 필리핀으로 넘어온 후, 의왕 전하의 명령을 아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답니다.”
자체적으로 운용했던 비자금을 민영익은 순순히 반환했다.
뻗대다가는 이를 노리는 일본 정부나 돈이 필요한 남중국 지방 군벌에게 암살당할 테니까.
마닐라로 건너온 민영익은 이강의 지시대로 진주 양식 사업을 맡고 있었는데, 탁월한 사업 수완 덕분인지 현지인들을 제법 잘 관리하는 모양이었다.
“일본의 요구사항이라······.”
21개 조 조항을 본 안중근이 혀를 찼다.
“이거 너무하는구먼. 일본 놈들, 간땡이가 배 밖으로 튀어나왔군.”
예부터 중국은 영국이 반쯤 침을 발라 둔, 소위 ‘내 것이다’하고 찜한 나라였다.
이런 중국이라는 식탁에 일본이 밥숟가락을 올리려고 했다.
“그래. 타 국가들의 반응은 어떨 것으로 예상하는가?”
“그게······.”
유럽은 물론이고 저 멀리 아프리카까지, 각국은 아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이다.
크리스마스를 맞이하여 일시적으로 휴전이 성사되었지만, 이 성스러운 휴일이 지나가면 또다시 격렬하게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워야 한다.
“일본만 노났군.”
“맞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지 아주 용을 쓰며 총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태껏 서구 열강의 눈치만 봐 오며 살았던 일본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현재의 자유를 탐닉하는 중이었다.
“올해 여름이 지나기 전······. 우리의 삼남 지역 역시 일본 본토로 편입시킨다는 계획이 있답니다. 지금 일본 정계에 암암리에 돌고 있다던데 말입니다.”
“야마토 계획이라······.”
일본의 이런 마수는 비단 중원에만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에도 영향을 줬는데.
이 계획을 사전에 입수한 안중근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도산도 도산이지만, 김 부단장의 어깨 또한 무겁겠군.”
현재 안창호는 국내에, 김구는 만주 지방에 머물고 있다.
이 둘의 활약에 따라 향후 동아시아 정세가 달라질 수도 있기에, 안중근은 두 사람의 성공을 기원하며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한 대 꺼내 태워 댔다.
참으로 매운 담배였기에, 안중근은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책상 앞에 놓여 있는 보고서들을 노려보았다.
< 1914년 한·중·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