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싱턴 개소식 (1) >
1915년 4월 30일.
워싱턴에 머무르고 있는 내게, 서신 하나가 전달되었다.
발신인은 베를린에 있는 이위종.
『벌써 봄이 왔습니다. 뉴욕 별채에 곧 이화나무 꽃이 필 텐데 말이죠. 벌써 그곳이 그리워지려고 합니다······.』
안에 적힌 내용은 평범했다.
이전부터 계속 주고받던, 별 내용 없는 안부 인사가 전부.
하지만 적혀 있는 단어들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펴보면, 이번에 특정 키워드가 하나 편지 안에 추가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이화나무 꽃이 필 때라······.’
‘이화꽃’은 레닌을 말한다.
중간에 누군가가 이를 가로채어 나보다 먼저 서신의 내용을 읽었을 때, 그 내용이 외부로 유출돼서는 안 되기에.
독일로 떠나기 전에 우리 둘은 미리 입을 맞춰 두었다.
‘드디어 이 키워드가 보이기 시작하는군.’
이위종이 아무 의미도 없이 이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는 말은 독일 측이 레닌과 슬슬 접촉을 시작했다는 말이겠지.
‘아직 꽃이 만개했다는 표현을 적지 않았으니, 러시아로 이송된 것은 아닌가 보군.’
지금쯤 빌헬름은 사람을 보내어 레닌과 접촉을 하고 있을 거다.
그냥 레닌을 러시아로 돌려보내 줄 수도 있겠으나.
독일은 기왕 레닌 카드를 활용한다면, 본전 이상을 뽑고 싶어 할 것이 분명했다.
원 역사에서도 본국으로 귀환하고 싶은 레닌을 상대로 모종의 협상을 하지 않았던가?
‘러시아는 그때 독일에 많은 것을 양보하였다. 밀약 때문인지, 그때 러시아의 급박한 상황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덕분에 수많은 동유럽 국가들이 탄생했지.’
그때 체결된 국경선은 해당 지역에 어느 민족이 사는지가 기준이었는데.
이 시대는 민족주의가 유행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동유럽 쪽 신생 국가들을 자신들의 영향권 안으로 편입시키려고 했어.’
왜냐고?
그야 이 시기, 러시아제국에서 독립하는 동유럽 국가들은 독일이 부족했던 자원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백 년 뒤.
원 역사에서 러시아와 한창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만 해도 그렇다.
우크라이나는 프랑스와 함께 유럽에서 손꼽히는 밀 생산지다.
‘단순히, 식량 문제만 해결되는 것이 아니야.’
캅카스 지역으로 눈을 돌리면, 그곳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바쿠 유전이 존재한다.
석유 말고도 철, 석탄, 동광 등 각종 광산이 신생국 영토에 수두룩하게 존재했기에.
독일은 만약 러시아와 단독 강화에 성공하고 이 지역을 자신의 영향권 안으로 둔다면, 해상 봉쇄 때문에 헐떡였던 보급 문제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게 된다.
‘동맹국의 분전을 바라는 나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지.’
물론, 부작용이 생겨날 수도 있다.
잘못하여 카이저가 오판하기라도 한다면?
상황이 묘하게 꼬일 수도 있으니까.
‘기존에 나만을 의존하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간 망설였던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카드를 다시금 꺼내 들 수도 있다.’
물론.
이 가정은 최악의 상황을 두고 계산한 것이기에, 벌써 이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 전에 융커들이 카이저를 설득할 수도 있고, 빌헬름이 계속하여 내 조언을 경청할 수도 있으니. 일단 나는 카이저를 감시하며 동시에 나만의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할 거다.’
이에 나는 오늘 들어온 국채가격 변동 사례부터 살폈다.
특정 국가의 국채가격이 많이 하락한 것을 확인한 나는 급히 우현식으로 내 방으로 불렀다.
“영국 국채가격이 지난밤 사이에 많이 내려갔군.”
“소인 또한 그 연유가 궁금하여, 사방팔방 뛰어다녔는데 말입니다. 글쎄, 영국군이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갈리폴리반도에서 대패했다 합니다.”
나의 개입으로 일부 역사는 바뀌기도 하지만,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했다.
갈리폴리 상륙 작전 같은 경우가 바로 후자의 사례다.
‘영국 역시 독일만큼이나 이 전쟁을 조기에 끝내고 싶어 하지.’
그러기 위해서 영국은 동맹국의 주요 축 중 하나인 오스만을 단번에 무력화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대규모 병력을 갈리폴리에 투입하며 승부수를 걸었다.
“소문에는 칠십만 이상의 대군을 동원했다는 이야기가 돌던데 말입니다.”
“칠십만이나?”
“예. 그렇다고 합니다.”
자세한 숫자까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째 원 역사보다 병력이 더 많이 투입된 것 같다.
‘개중에는 식민지에서 차출된 병사들도 상당하다던데.’
이들이 대거 갈려 나갔다는 이야기는 영국의 식민지 장악력 또한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는 이야기일 터.
어째서 그리 생각하냐고?
그야.
본국을 위해 전투에 임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영국을 위해 투입된 병사들이니까.
남의 전쟁에서 무수한 자국의 청년들이 희생당했는데, 과연 반발하지 않을 이들이 얼마나 존재하겠는가?
‘동원되는 해군 쪽 병력도 대거 늘어난 것 같은데.’
도거뱅크 해전의 승리가 이렇게 눈덩이처럼 굴러간 것일까?
갈리폴리에 몰방할 수 있도록?
“오스만을 단번에 굴복시키기 위해, 아주 작정한 듯 화력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처칠 장관이······ 야심만만하게 계획한 작전이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피해는 어느 정도라던가?”
“정확한 사상자 규모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현지 분위기는 매우 비관적이었습니다.”
그래.
안 좋겠지.
갈리폴리 상륙 작전은 처칠의 흑역사가 아니던가?
억제기를 달지 못할망정.
이를 더 증폭시켰으니, 피해는 배가 되리라.
‘그보다, 뉴욕 자본가들의 상당수가 영국군 쪽에 사람을 심어 둔 모양이군.’
아직 ‘더 머니’에 정확한 피해 규모가 보도되지 않았는데도, 영국 국채가 이리 박살 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하긴. 그 많은 돈을 투자했는데, 끄나풀들을 런던에 안 심어 놨을 리가 없지.’
뉴욕의 자본가들은 다른 나라 전쟁채권보다 영국 전쟁채권을 선호했다.
몸짓이 제법 큰 금융기관일수록, 이러한 경향은 더욱더 심했다.
영국의 참패 소식은 그들이 투자한 투자금 폭락으로 이어지기에, 그들은 다른 나라 소식보다 영국군 소식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경쟁자들보다 빨리 입수하여 조금이라도 더 이득 보기 위해서겠지.
“정보입수에서 다른 세력들보다 밀리면 안 되네. 우리 측 정보요원들을 런던에 추가로 파견하게.”
“예.”
“아, 그리고 런던에 파견 중인 이 박사에게도 이를 언급하며 군 쪽에 인맥들을 더 쌓으라고 전하고.”
“예. 그리하겠습니다.”
우현식이 내 집무실에서 나가자.
“전하.”
비서실장인 최현우가 빠르게 바통터치를 하며 내 방에 발을 내디뎠다.
“무슨 일인가?”
“사흘 뒤에, 합성협회 워싱턴 지부 개소식을 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때 참석하는 외빈 명단을 좀 추려 왔는데 말입니다.”
비서실장인 최현우가 들고 있는 초청 명단을 내게 쓱 건넸다.
혹시나 빠진 외빈이 있나 하는 표정을 지어 댔다.
‘흠······.’
합성협회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다.
그동안은 교민들의 권익을 수호하는 단체로서 활동했다면.
작년부터는 이익단체로 거듭나며 본격적으로 로비활동을 시행하는 중이다.
미국에서 로비의 중심지는 당연하게도 워싱턴.
그렇기에.
샌프란시스코 본부 말고도 워싱턴에 지부 하나를 더 내야 했는데.
이러한 지부 개소식에 미국의 난다긴다하는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한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수가 내 초청에 응했군.”
“선거가 코앞입니다. 전하.”
미국의 선출직 임기는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하원의원은 2년.
대통령은 4년.
상원은 6년.
그렇기에 미국은 퐁당퐁당 4년에 한 번씩 대선과 총선이 함께 치러지는데.
다음번 선거가 딱 그 케이스였다.
‘내년 10월에 치러지던가?’
지금은 4월.
본 선거까지는 아직 1년하고도 반년이나 더 남아 있다.
뭐?
벌써 선거 준비를 한다고?
하며 놀랄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관점에서나 그리 생각할 수 있는 거고.
당사자들은 달랐다.
‘본 선거에 앞서서 자신이 속한 당에서 후보로 뽑혀야 하기도하고.’
더불어.
선거에는 돈이 필요하다.
“다들, 후원금 좀 부탁한다고. 얼굴도장 찍으러 오겠다는 거군.”
“그렇겠지요?”
선거라는 제도 자체는 엄청나게 민주적이나, 모순적이게도 이러한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하다.
나는 미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더욱이 5년 전부터는 정치자금을 아끼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뿌려 대고 있기에.
한 푼이라도 아쉬운 초보 정치인들부터, 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현역 의원들.
그리고 거물이 되기 위해 꿈틀대는 대선 잠룡들까지.
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자들은 이번 개소식을 기회 삼아 나와 친분을 쌓으려고 시도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 열심히 씨를 뿌려 놔야겠지.”
그래야 나중에 수확하지 않겠는가?
비록.
쭉정이들이 대다수긴 하더라도.
동화 속에 나오는 ‘잭의 콩나무’처럼.
무럭무럭 성장하여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자라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을 테니까.
* * *
이번 행사의 주체는 나다.
그렇기에.
공식적인 개소식이 시작되기 두 시간 전부터 합성협회 워싱턴 지부 건물에 도착하며 만반의 준비를 기했다.
“아이고. 이 왕자님.”
“다프네 대사?”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미국 정치인들도 급하지만, 유럽의 대사들은 더더욱 급하기에.
다프네 대사는 예정된 시간보다도 한참을 앞서서 이곳에 도착했다.
“이 왕자님. 요즘 쌍둥이들 건강은 좀 어떻습니까?”
다프네는 프랑스 대사다.
프랑스야, 뭐 독일이나 러시아보다 더 사정이 낫지 않아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만.
프랑스도 만만치 않게 상황이 굉장히 어려웠다.
‘독일군이 수도 파리30km근방까지 접근했다고 하던가?’
참호전 때문에 서부전선은 쉽사리 전황이 바뀌고 있지는 않지만.
독가스가 잘만 터지면 하루에도 3km 정도는 쑥 밀어 버릴 수 있기에, 프랑스는 정말이지 풍전등화 같은 상황이다.
더욱이 최근에 이러한 위기를 모면하겠다고 ‘진격 앞으로’를 외쳤다가 대참사가 한번 일어났기에.
다프네는 급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네.”
그렇다고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자기네 전쟁채권 좀 팔아 달라고 하면 체면이 안 선다.
외교는 본디 아름답게 돌려서 말하는 것이 그 능력.
그렇기에 다프네는 괜히 마음에도 없는 내 자식들 근황을 물어보며 나와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옛말에 아이들을 보면, 시간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던데······ 요즘 따라 그 말이 확 와닿고 있다네.”
“하긴, 그렇죠.”
다프네는 동의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훌쩍 자라니까요.”
“그렇지. 지금, 이 순간을 하나라도 빠짐없이 기록하기 위해서 나는 틈만 나면 사진을 찍는다네. 자네도 한번 그리해 보게나.”
“예.”
다프네는 눈알을 굴리며 나를 흘깃 쳐다보았다.
“이 왕자님.”
“말하게.”
“저, 저희 쪽 전쟁채권 판매에 관해 이야기해 드릴 것이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그렇지 하고.
다프네와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려는 찰라.
“이 왕자님. 안녕하십니까?”
칼 독일 대사가 다프네와 나, 이 둘 사이에 껴들며 내게 인사를 해 댔다.
“다프네 대사와 뭐 재미난 이야기라도 나누고 계셨나 봅니다.”
“아, 다프네 대사가 우리 아이들에 관해 좀 물어봐서 말이야.”
“아! 그렇군요.”
칼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프네를 바라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댔다.
이에 다프네는 주먹을 꽉 쥐었다.
적국의 대사가 앞에 있기에.
전쟁 관련 이야기를 쉬이 꺼낼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나중에 따로 한번 만나자고.’
중력 효과가 작용하기라도 하는지.
대사 둘과 내가 한자리에 있으니, 다른 대사들도 어찌 알고 이쪽으로 꾸역꾸역 합류한다.
“제임스 대사. 오랜만입니다.”
다프네가 같은 편인 영국대사를 반기며 환영 인사를 먼저 했다.
“자네.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군.”
“영국군이 갈리폴리에서 거하게 말아먹지 않았습니까? 안색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독일 측 칼 대사가 특유의 톡 쏘는 말투로 빈정거리자.
“거, 좋은 자리에서 서로 얼굴 붉히는 발언은 삼갑시다.”
“민간인에게 독가스까지 쏜 놈들입니다. 불문율이란 불문율은 다 깨고 다니는 자들인데 기대할 것을 기대하십시오.”
영국과 프랑스 대사들은 지난날의 독가스 사용을 힐난하며 칼 대사의 빈정거림을 되받아쳤다.
“의왕 전하.”
아아······.
대사들의 기 싸움으로 잠깐 정신이 없었는데 말이다.
반가운 손님이 이곳에 찾아왔다고 한다.
‘상무부 장관이라······.’
나는 한데 모여 있는 대사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내 잠시 뒤에 오겠네.”
“예?”
“미 행정부 쪽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는군. 자네들은 잠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게나.”
< 워싱턴 개소식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