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왕자가 미국갔다 안 돌아옴-260화 (260/294)

< 모두가 배고픈 시기 (3) >

1915년은 모두가 굶주렸던 한 해였다.

얼마나 간절하냐.

그리고 어떤 것을 배고파하냐는.

각자 달랐지만.

뱃속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허기로, 모두가 조금씩 미쳐 가고 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러시아 채권을······ 매각하라고 하셨습니까?”

희망찬 1916년.

새해 아침.

이날 역시도 크리스마스처럼 가족과 보내는 날이었기에, 나는 인척이라고 볼 수 있는 존 록펠러와 함께 브런치를 먹는 중이었다.

“그렇다네.”

커피를 홀짝이던 록펠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말에 반응한다.

갑작스러운 나의 권유에, 록펠러는 어안이 살짝 벙벙한 듯 멍한 표정을 지어 댔다.

“일부도 아니고, 전량을 다 매각하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올 1월 말까지는 완료해야 할 것이네.”

“어째서지요?”

반독점법 소송 이후, 웬만하면 내 권유를 따르던 록펠러가 살짝 의문을 표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한 달 안에.

가지고 있던 러시아 채권 전부 털게 된다면, 꽤 큰 손해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 둘만이 러시아 채권을 보유한 것이 아니니까.”

“······.”

“신탁회사에, 우리를 믿고 러시아 채권들을 맡겨 둔 고객님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만 튀면 욕먹고 음모론만 생겨난다고.

이런 오물은 웬만하면 다 같이 맞아야 한다.

그래야.

진실이 이상한 소문쯤으로 와전되고.

나아가 설화나 도시 괴담 같은 전설쯤으로 치부될 터니까.

“그들의 자산 또한 매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안 그랬다가는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록펠러의 표정을 더욱더 복잡해졌다.

자신을 위해 주는 내 모습이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러시아 국채를 가진 고객들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더욱이 큰 손해를 볼지도 모르는 부탁을 내가 이 타이밍에, 다시금 했다는 것 또한 살짝 신경 쓰이겠지.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까?”

사람은 무릇 제5의 감각인, 촉이 있다.

성공한 경영자일수록.

이러한 촉이 일반인들보다 발달하기 마련인데.

록펠러는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는지, 걱정하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현재 러시아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설명했다.

“연말에 러시아로 떠난 수송선들, 자네도 기억할 것일세. 이번에 미국에서 생산된 밀을 잔뜩 싣고 떠났던.”

“예예. 오늘도 두 척이 추가로 뉴욕항을 떠나지 않습니까?”

“그래그래. 그것들이 러시아 시민들에게 잘 전달되고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고 하더군.”

서구의 다른 나라와는 달리 러시아는 아직도 전제 정치를 이어 가고 있었다.

그 말은 즉.

후진적인 행정 체계가 아직도 존속한다는 뜻이며.

전시 체계에서 시민들에게 나누어져야 하는 식량 배급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허허.”

“그 때문인지 민심이 차르에게서 크게 돌아서고 있는 모양일세.”

아까도 언급했듯이 러시아는 아직도 전제정 형태를 띤다.

그 말은 즉.

모든 결정은 차르의 손에서 결정되며, 그 책임 또한 온전히 니콜라이의 몫이 된다는 뜻이겠다.

발을 빼고 싶어 해도.

전쟁 초반.

총사령관 자리를 니콜라이가 겸임하는 희대의 악수를 두었기에.

차르는 현재 책임 논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는 최악의 상황에 부닥쳤다.

“들리는 풍문에는 대규모 시위가 수도에서 곧 일어날 것이라고 하더군.”

전쟁으로 유럽의 시민들이 졸졸 배를 주리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중.

러시아와 프랑스 쪽 사정이 최악이라는 것은 록펠러도 이미 파악한 상황.

하지만 나의 예언 아닌 예언에도.

록펠러는 계속하여 러시아 채권을 파는 것을 망설였다.

“그래도, 왕자님께서 그리 행동하신다면······ 차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왕자님께서는 차르의 재정관리인이십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자리를 빼앗기실 수도 있습니다.”

봐라.

내 걱정을 해 주면서 방금 내가 했던 말을 취소하기를 유도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좀 더 사태를 관망하시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에.

콧방귀를 껴 대며 마시고 있던 커피를 탁- 하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빼앗고자 한다면 뺏으라지! 그깟 러시아 왕실, 재정관리인 자리가 뭔 대수라고. 나라가 다 망하게 생겼는데.”

“······.”

“내일부로, 러시아 왕실의 공식 운용자금이 러시아로 돌아갈 것이네. 아! 자네에게만 말해 두는 것이지만, 차르의 비자금 또한 런던 계좌로 이동할 예정이라네.”

물론.

니콜라이가 맡겨 둔 돈 중 가장 큰 비중을 자랑하는 비공식 비자금은 우리 회사 계좌에 계속 머무를 거다.

이것은 록펠러에게 굳이 알려 줄 이유가 없었기에, 속으로 마지막 말을 삼키려 웨이터에게 다시금 커피 한잔을 내오라고 부탁했다.

“러, 런던에 말입니까?”

보통의 사람들은 비자금에 크게 반응하겠지만, 록펠러는 다른 단어에 더더욱 크게 반응했다.

“그래.”

록펠러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망명을 준비할 정도로 상황이 심각합니까?”

“아직은 아닐세. 곧 그렇게 되겠지만······.”

나는 살짝 뒷말을 끌며 이 사태에 중심에 있는 니콜라이를 언급했다.

“하지만 차르는 아직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네. 조언을 해 줘도 그저 흘려들을 뿐.”

나는 오른손 검지로 테이블을 톡톡 치다가 이를 멈추며 록펠러에게 말했다.

“물론 나아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네. 여태껏, 중요한 순간에서 니키가 해 왔던 선택을 보게나.”

1905년에 일어났던 혁명도 그렇고.

라스푸틴을 아직도 끼고도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니콜라이와 친하지만 그의 국정 능력은 영 꽝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겠다.

“제 소유에 있는 뉴욕시티은행만 해도······ 물량이 상당한데 말입니다.”

이에.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록펠러가 내게 말했다.

“왕자님과 제가 러시아 채권을 시장에 쏟아 낸다면, 자칫 채권값이 단기적으로 폭락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누가 누굴 걱정해 주는 거야.

나는 이미 나 정리했다고.

“케미컬투자은행은 러시아 채권이 별로 없다네. 아메리카 신탁에나 조금 있을 뿐이지.”

“······!”

아무리 친해도 본래 나부터 사는 법이다.

이후에 주변에 있는 친지들을 챙기는 법이고.

록펠러가 살짝 실망하는 표정을 보이자 나는 팔짱을 끼며 그에게 물었다.

“왜? 내가 너무 늦게 알려 줘서 그런가?”

“······.”

“그러게. 내 러시아 채권은 신중히 투자하라고 전쟁 초반부터 내내 조언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나는 러시아 쪽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네.”

그나마.

차르와의 인연을 생각해서 초반에 조금 투자했다가, 서서히 이를 매각하는 형식으로 대응했다.

아무리.

러시아 국채에 프리미엄을 붙여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것은 내가 다가올 미래를 이미 알고 있고.

그것을 또 부추기고 있었기에 그리 행동했던 것이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난 경고했네. 이를 수용하고 말고는 자네 선택일세.”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록펠러를 다시 보며 조언했다.

“아! 채권 말고 러시아 쪽 부동산이나 기업에 투자한, 자네 고객들이 꽤 있지?”

“예. 그렇습니다만.”

“그것도 싹 정리하라고 조언하게나.”

“전부요?”

“그래.”

나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러시아에 관해 조언했다.

“둠스데이가 오고 있네. 하루라도 빨리 러시아에서 떠나는 자가 승자가 될 것일세.”

* * *

러시아 국채를 전부 매각해라.

록펠러에게 이를 당당하게 경고할 수 있었던 것은 익문사의 역할이 컸다.

‘레닌이 세계 여성의 날을 시작으로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답니다.’

원 역사에서도 일어났던 폭동.

그때는 지금보다 딱 1년 늦었던 1917년 여성의 날에 시작되었는데.

이번 역사는 그날이 앞당겨졌다.

‘시위하기 좋은 날이지.’

젊은 장정들이 죄다 군대로 차출되어 끌려갔다.

수도에는 노인과 여성들밖에 남겨지지 않은 상황.

‘여성의 날을 기념한다며 대규모로 시위대가 모인 후, 빵을 달라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한다면?’

시위에 참여할 마음이 없었던 이들도 그 구호를 외치겠지.

배고프니까.

죽을 거 같으니까.

니콜라이에게, 자신들의 목소리가 전해지기만을 애원하며 마지막 희망을 끈을 부여잡을 거다.

‘유혈사태라도 일어난다면······.’

그때부터 선동이 시작될 거다.

공산당원들과 반정부시위대가 이들의 분노를 부추기며 황실 일원들이 사는 궁을 포위하겠지.

그랬기에.

나는 원 역사보다는 이르지만, 레닌이 막후에서 기획한 이번 혁명이 성공하리라 생각했다.

‘그때보다 러시아는 더 큰 피해를 보고 있으니까.’

바르샤바를 넘어, 벨라루스의 수도였던 민스크 역시 독일군에게 진즉 점령되었다.

계속해서 독일군이 동진하는 상황.

러시아군에게는 악몽과도 다름없는 전황이었는데.

이에 상당수 군부 인사들은 니키의 무능함에 벌써 하나둘 지쳐 가고 있다고 한다.

그랬기에.

원 역사보다 조금 더 빠르지만,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지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더욱이······.’

이렇게 외부에서 나 또한 시장을 흔들어 대고 있지 않은가?

러시아의 비극적인 상황을 거론하며 가지고 있는 채권들을 던지기 시작하면.

러시아 국채는 똥값이 될 것이고.

신규 국채 발행은 엄두도 못 낼 거다.

‘동맹국이 이기든, 서로 물고 뜯고 해서 둘 다 지치든.’

둘 중 하나가 이루어지려면, 동부전선이 하루라도 빨리 정리되는 것이 맞다.

이후 서부 전선에서 각자의 영혼을 걸고 아주 대차게 싸워 대야, 내 구상대로 미래가 흘러가지 않겠나?

‘조금 사악한 것 같지만.’

어쩌겠어.

이래야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데.

나는 집안 한편에 있던, 니키와 함께 찍었던 사진 액자를 안 보이게 치우며 그다음 일을 계획했다.

* * *

새해 첫날이 그렇게 지나갔다.

평소대로.

집무실에 가득 쌓인 문서들을 확인하다가 그사이에 낀 편지 한 장을 찾아낼 수 있었다.

“흠. 황 군이 보낸 건가?”

내가 들고 있는 사진의 발신자는 바로 황기환이었다.

멕시코로 파견된.

한인 최초의 웨스트포인트 졸업자이자, 전생에선 항일 독립운동가로 유명했던 자.

무엇을 보냈냐 편지 봉투를 찢은 후 확인했는데, 그 안에는 누렇게 뜬 편지지와 함께 사진 몇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건, 우리 회사 건 트럭이 아닌가?’

미군에게 나는 건 트럭을 대량 납품했다.

기동전을 위해서.

말 대신 건 트럭을 사용하라고 제안했고, 미 군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이번 전쟁에서 실전에 처음으로 투입되게 되었다.

‘잘 지내나 보네.’

황기환은 퍼싱과 함께 건 트럭 앞에서 사진 찍는 자세를 취하며 해당 부대에서 잘 지내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게 알려 왔다.

‘오호, 그나저나 광전사와도 함께 사진을 찍었군.’

무표정한 퍼싱과는 달리 한껏 웃고 있는 미군의 유명한 똘아이 하나를 보며.

나는 크게 박장대소했다.

이에.

이를 지켜보던 최현우가 일거리를 가져다주다 말고 내게 물었다.

“무슨 재미난 것이라고 발견하신 모양입니다.”

대충 뭉개고 넘어가기엔, 너무 크게 웃어 대서.

나는 최현우에게 사진 하나를 건네며 다음 말을 했다.

“첫 씨앗이 잘 발아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세.”

“아, 지난해 웨스트포인트에서 졸업했던 육사 생도군요.”

“그래. 자랑스러운 한인 출신 육사 생도지.”

나는 최현우를 바라보며 이전에 시켰던 일들을 물었다.

“지난번에 만났던 웨스트포인트 졸업 생도들 말이야. 계속해서 잘 관리하고는 있겠지?”

“예.”

집무실 한편에 걸어 놓은.

별들의 기수 출신 졸업생들과의 사진을 바라보며 내가 재차 강조했다.

“다수가 거목으로 성장할 것이니, 아낌없이 지원하게나.”

내가 무슨 지원을 할 수 있겠냐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미 정치계에서 크나큰 후원자가 되고 있다.

‘군부 또한 정치권과 연결되어 있지.’

퍼싱만 해도 그렇다.

그 스스로 현재 자리를 꿰찼겠는가?

장인이었던 워런 연방 상원의원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정도로 높이 승진하지는 못했을 거다.

‘미 군부에 영향력을 높이는 작업은 슬슬 진행되고 있다.’

아! 그보다.

지지난해부터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다른 작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연구비가 꽤 많이 소요되었군.”

폭격기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리&라이트 사의 비행기들은 동시대 최강의 스펙을 자랑하고 있으니까.

“그런데도 아직도 완성품이 나오고 있지 않다니······.”

“제가 디트로이트로 가서, 좀 더 재촉해 볼까요?”

“그래 주겠나?”

나는 최현우를 바라보며 탱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탱크는 지지부진한 참호전을 타파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네. 전황을 바꿀 게임체인저지.”

개발만 된다면.

이 정도 개발비쯤이야, 퉁 칠 수 있다.

독일이나 영국이 이것들을 전부 사들일 테니까.

‘이를 협상 카드로 사용할 수도 있겠고.’

그나저나······.

중국은, 아주 난리네.

위안스카이의 말로가 보인다.

각지에서 군벌들이 넉 달 전에 세워진 중화제국을 향해 다시금 반기를 들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들놈 하나 잘못 두어서 이 사달이 나다니······.”

자식 농사는 중요하다.

잘못 키운 후계자 때문에 천년의 제국이 무너지기도 하는데.

현재 중화제국이 딱 그랬다.

‘한 명을 위한 신문이라.’

위안스카이의 장남이라는 놈이 제 아버지의 황제 즉위를 부추기려고 헛짓거리를 해 댔다.

단 한 명을 위한 신문을 발행하는 일을 저질렀는데.

이에 위안스카이는 지금도 정세를 오판하며 장님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북경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

‘중국, 특히 만주 쪽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김구는 잘해 줘야 할 텐데······.

“전하! 전하!”

“무슨 일인가?”

막 내 집무실을 나갔던 최현우가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유, 유럽에서 큰일이 터졌답니다.”

“유럽?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 모두가 배고픈 시기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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