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랜 B (2) >
기존 노선을 계속하여 고수할 것인가?
혹은, 역사의 큰 흐름에 순응하고 한발 물러설 것인가?
‘아니면, 만약을 생각해서 짜 둔 플랜 B를 시행할 것인가?’
셋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오늘 당장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밀며, 셋 중 하나를 결정하라고 떠밀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그랬기에 나는 일단 당장 해야 하는 조치부터 시행했다.
독일에 있는 카이저에게, 무제한 잠수함 작전 시행을 재고하라고 요청한 것.
“그래, 독일 측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송구하옵니다. 전하.”
약 일주일 뒤.
한동안 독일에 머물며 이상설을 도왔던 이위종이 미국에 돌아왔다.
이위종은 그가 보았던 독일의 어두운 상황을 내게 상세하게 전하며, 침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카이저는 아직 설득할 여지가 있어 보이지만, 독일 군부 측이 완고합니다.”
하긴.
자국의 병사들이 쫄쫄 배를 주리는 상황에서, 적들은 대서양 건너에서 온 밀과 옥수수로 배를 채우고 있다.
이런 상황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겠지.
아니라면, 적 또한 자국의 병사들처럼 쫄쫄 굶게 만들던가.
“군부가 황실보다 권력이 더 강해졌단 말이지?”
“예. 당장 이를 견제할 세력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일을 물릴 수 없을 듯합니다.”
쩝-
입맛이 썼다.
“어쩔 수 없군.”
“예. 아쉽지만, 신에게 기도하는 수밖에는 남은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기도한다고, 원하는 것이 얻어지나?
나는 이 작전의 결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랬기에 굉장히 회의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위종 역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았는데도 빠르게 제 업무에 복귀하겠다고 내게 고한 후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기존 노선을 고수하는 것은 힘들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둘.
두 선택지를 만지작거리며, 일단 둘 다 사용할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일까 확인부터 했다.
* * *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아직은 행운의 여신이 독일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미국인들이 다치거나 죽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 독일을 향해 웃어 주지는 않을 터.
시한 폭탄을 들고 있는 것만 같다.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오늘 자 신문을 살핀 후, 최현우를 불렀다.
“신형 폭격기는 어느 정도 개발이 진척되었나?”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최현우가 관련된 보고서를 내게 건네며 말을 이어 갔다.
“더하여 지난번에 전하께서 언급하신, 항공모함용 폭격기 역시 개발을 끝내고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답니다.”
“조종사들은 몇이나 확보한 상태인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우리 비행학교에서 졸업한 한인들 수가 얼마였던가?”
최현우가 가용할 수 있는 그들의 머릿수를 계산하며 내게 알렸다.
“고국으로 돌아간 자도 있고, 다른 쪽으로 빠진 이도 있기에 확인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상당수는 내 소유의 회사에서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로 실어 나르는 우편, 택배 사업을 꾸준히 확장 중이었으니까.
지금도 미국 전역에서.
민간화물 조종사로 일하며 비행기를 몰고 있는 중이었다.
“탱크는?”
“진흙탕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만 본다면 아직 많이 미흡한 것 같지만······ 몇몇 자연조건 아래에서는 실전에 투입해도 문제는 없을 정도로 연구가 진척된 것 같습니다.”
대충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는 알겠다.
복잡해진 머리를 식히기 위해.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실로 향했다.
“요즘 따라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그때였다.
침실로 들어온 에델이 말을 걸었다.
“최근에, 무슨 근심 어린 일이라도 생겼나 봐요?”
“바다 건너에서 독일 측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했다고 하오.”
그래서?
그게 뭔데?
하는 표정으로 에델이 눈을 깜박거린다.
나는 이 작전 때문에 생겨나는 피해들을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 일로 애먼 민간인들이 사망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좀 그렇소. 잘못하면, 미국인들이나 한인들 또한 피해 볼 수 있으니까.”
“아······.”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던, 에델 역시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 댔다.
“미국인들도 사망할 수 있다면 큰일이 날 수도 있겠네요.”
“그렇소. 그리된다면 미국 또한 이번 전쟁에 휩쓸릴 수 있겠지.”
에델은 새초롬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아국의 세계대전 참전은, 왕자님께도 해가 되는 일인가요?”
“살짝?”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에델을 바라보았다.
“내가 공들여 짜 놓은 판을 누군가가 흔드는 셈이니까. 살짝 짜증이 날 수밖에 없지.”
“저런.”
“더욱이 모건이나 남작 같은 인물도 아니고······ 그동안 내가 호의를 베풀었던 상대가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니. 살짝 난감하게 되었소.”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향해 에델이 파고든 후, 속삭였다.
“어떻게 하실 것인가요?”
“글쎄?”
아직 정하질 못했다.
다 완성한 줄만 알았던 그림에, 융커들이 똥칠을 거하게 해 댔으니까.
살짝 허탈한 기분 때문에, 평소 팽팽 잘 돌아가던 머리도 요즘 따라 잘 안 돌아갔다.
“포기하실 것은 아니죠?”
“······.”
“제 곁에 있는 왕자님께서는, 일이 틀어졌을 때도 다른 계획을 세우시는 분이시잖아요.”
에델이 뭉쳐 있는 내 어깨를 주무르며, 슬쩍 툭 던지듯 한 가지를 조언했다.
“조금 힘들어도 최선을 다하세요. 그래야 후회가 없죠.”
“······.”
“어머, 표정이 한결 풀어졌네요?”
“그대의 조언을 듣고 있자니, 답답했던 마음 한편이 확 뚫리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그녀가 뭔 원하는지는 나도 잘 안다.
나와 평소 가장 많이 대화하는 상대가 바로 에델이니까.
숨긴다고는 하지만, 가끔 본심이 툭툭 튀어나오는 때도 있고.
주변에서 보고하는 것도 듣곤 하기에, 나는 에델이 무슨 의도로 내게 지금 조언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리로 와요.”
에델은 계속하여 내 뭉친 근육을 풀어 주었다.
“향이 참 좋구려.”
그동안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풀리며, 잠시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내 몸을 자극하는 것 같다.
“어머.”
이에 에델이 마사지를 멈추며 나를 꼬옥 앉았다.
나 또한 에델과 포옹하며 오랜만에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다.
* * *
“잘 다녀와요.”
오늘은 평소답지 않게, 에델이 직접 내게 아침밥을 차려 줬다.
더욱이 차에 올라타기 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뜨거운 키스까지 해 줬다.
‘어제 일 때문인가?’
따뜻하게 배웅까지 해 줬던 에델을 뒤로한 채.
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도착했습니다.”
내가 들린 곳은 고아원이었다.
봉사활동도 봉사활동이지만.
이곳에 들른 한 인물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 왕자님.”
목소리의 주인공은 휴즈.
그는 이미 두 시간 전에 도착해서, 기념사진까지 다 찍은 상태다.
관계자들과의 대담도 끝난 모양.
그래서일까?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휴즈는 내게 접근하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휴즈의 파벌들에게 거액의 정치후원금을 지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다.
저리 꾸벅 인사하는 것을 보면.
‘그럴 만도 하지.’
휴즈는 지난 3년 내내, 전임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즈벨트와는 다르게 제 목소리를 잘 내지 못했다.
모건과 루스벨트파 사이에서 오가다가 제3의 인물로 절충되어서 대통령에 오른 자가 그니까.
그가 속한 파벌은 한 줌.
거기에 록펠러와 내 쪽 의원들이 거들어 줘도, 당내에서 과반을 넘지 못한다.
새 인물들을 수혈하지 않는 한, 다음 집권기 역시도 비슷한 상황.
그렇기에 휴즈는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사람들을 의회에 잔뜩 심고 싶어 했다.
나는 그의 욕망을 채워 주기 위해서 엄청난 정치자금을 그의 측근들에게 대며 그가 의회 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게 지원 중이었다.
“미국이 올바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대통령님처럼 사심 없는 분이 필요합니다. 작금의 혼란한 현실 속에서 오직 미국만을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의회에 많이 입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어중이떠중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물론.
휴즈와 겹치지 않는 선에서, 우리 쪽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록펠러&리 파벌도 계속하여 늘리는 중이다.
남 좋은 일만 하는 바보는 아니니까.
4년 뒤가 어찌 보면 본 게임이라고 볼 수도 있기에.
이번 선거만큼은 아낌없이 정치 후원금을 워싱턴에 뿌리는 중이었다.
“그동안 옆에서 쭉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보는 선구안이 대단하시더군요.”
“아이고, 그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제가 왕자님을 뛰어넘다니요. 한참 멀었습니다. 이 왕자님께서 발굴하신 뉴욕의 투자전문가들만 해도 한 트럭이 넘을 텐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서로가 이득이 되기에, 이런 덕담도 나눌 수 있는 거다.
휴식 시간.
휴즈가 나와 단둘이 고아원 후원 한편을 걸으며 비밀 이야기를 꺼냈다.
“88함대에 대항하는 건함 건조 계획이 조만간, 백악관에서 발표될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서로 이득이 되기에,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거겠지.
나는 정치후원금을 대주고.
휴즈는 내게 이득이 되는 정책을 시행하거나, 미리 언질해 주고.
“지난번에 보내 주신 항공모함이라는 신형 군함을 검토해 보았는데 말입니다.”
“예.”
“제 측근들이 다들 엄지를 척 치켜세우며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말하더군요.”
휴즈는 대서양 건너편에 있는 한 나라를 언급했다.
“영국 역시도 조만간 항공모함을 취역시킬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발 늦었지만 우리 역시도 이를 따라가는 것이 좋다고 다들 제게 조언해 주더군요.”
작금의 미국은 자신들이 강한지 모른다.
아직도 유럽에 밀려 있는 1.5군 국가라는 인식이 강했는데.
이에, 정책 또한 선도하기보다는 유럽이 도입한 것을 빠르게 따라가는 것을 선호했다.
“아!”
휴즈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따로 경고해 주신 부분, 잘 전해 들었습니다. 내 따끔하게 독일 측에 엄포했습니다. 그 작전으로 미국인들이 사망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고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듣자마자, 나는 이를 휴즈에게 알려 줬는데.
이는 미국 역시도 유럽 각국에 사람을 보내 놨기에.
휴즈가 독일에 이를 경고한다면 그들이 혹시 이를 물릴지 않을까 생각하여 그리 행동했던 것이다.
물론.
독일 군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폭주 직전의 기관차처럼, 그들은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리는 중이었으니까.
“혹시······ 진짜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흠.”
만약이지만, 굉장히 불쾌한 가정이다.
판초 비야의 미국인 약탈 사건으로 휴즈는 살짝 이에 민감해진 상황이니까.
그는 얼굴색을 바꾸며 주먹을 꽉 쥐어 댔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참전으로 대응해야겠지요?”
“······.”
“물론 대선 뒤에 말입니다. 이전에도 말했지만, 저는 멍청이가 아닙니다.”
그렇지.
자칫, 선거판을 통째로 뒤흔들.
자충수가 될지도 모르는 정책을 노련한 정치인인 휴즈가 거론하겠는가?
“제게 이리 고급정보들을 넘겨주시는 것을 보면, 왕자님께서도 따로 무언가를 구상해 두시고 있는 것이 있나 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답게, 휴즈는 눈치 역시 빨랐다.
정계나 재계에 있는 거물들은 보통 이런 식으로 정보를 흘리면.
다 원하는 바가 있기 마련인데.
이를 언급하며 내 의사를 물었다.
“제게만 살짝 이를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왕자님께서 무슨 그림을 그리시는지 알아야, 저 또한 발맞추어서 함께 걷지 않겠습니까?”
물론 미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만 함께하겠다는 말을 바로 뒤에 붙이긴 했지만.
휴즈는 최대한 나를 배려해 주려는 표정을 지으며 내 의사를 물었다.
“저는 제 모국의 독립을 원합니다.”
“······.”
“이번 대전이 끝난 다음에 말이죠.”
“흠······.”
휴즈가 잠시 고민하며 나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굉장히, 굉장히 어려운 과제로군요.”
“미국이 유럽에 파병을 결정한다면, 제 수하의 부하들 역시 그곳에 보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번 멕시코 파병처럼요.”
플랜 B 중 한 정책을 거론하자.
휴즈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굉장히 이야기가 복잡해지겠군요. 일단 왕자님의 사병들이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도 문제고.”
정상적인 국가면,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도 않았지만.
대한제국은 일본에 외교권이 빼앗겼다.
나와 한인들은 이 조약이 불법으로 승인된 것이기에, 무효라고 외치지만.
국제사회는 굉장히 냉정하다.
대부분의 국가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인정한 상황이기에.
이번 파병이 과연 인정받을 수 있을지.
더하여 인정받게 된다면.
이 파병 주체가 대한제국인지, 혹은 나인지, 또는 최악의 경우 일본으로 상정되는지.
일이 복잡해질 거다.
“왕자님이 원하는 그림이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보험을 하나 들어 놓을까 하는데 말입니다.”
“보험요?”
플랜 B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간 사람들을 사방팔방에 파견하며, 밑 작업을 쳐 놓았던 것도 이를 생각하여 그리 행동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에 초창기 미합중국도 사용했던 방식이긴 한데······.”
“뭡니까? 한번 들어나 봅시다. 왕자님이 생각하시는 계책 말입니다.”
후원은 진즉 빠져나왔다.
휴즈의 경호 때문에 보육원 건물 일부가 비어 있었는데, 우리 둘은 원장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며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흠. 비밀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원장 집무실에는 세계 전도가 하나 크게 걸려있다.
나는 맨 처음에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쪽을 한번 바라본 후 살짝 이동했다.
그 후, 태평양 건너의 아시아 쪽 지도 앞에서 선 후.
휴즈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나라를 하나 세울까 합니다.”
“나라요?”
“예.”
나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여기 이곳이 적당할 것 같군요.”
< 플랜 B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