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롤모델 (2) >
“워싱턴으로 와야 할 기자들이, 최근에 왕자님 댁 앞에 진을 치고 밤을 새운다면서요?”
“······.”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아닙니다. 힘드신 것은 대통령님이시지요.”
“제가요?”
“예.”
서부로 가는 기차 안.
휴즈와 마주 앉은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휴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그의 노고를 위로했다.
그럴 만도 한 게.
휴즈는 나를 만난 이후로 기차를 타다가 내려서 유세를 하고, 또다시 기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 지점에서 내려서 유세하고.
이 행위를 끊임없이 계속하여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야 근 일주일 동안 피로했다지만, 대통령님께서는 지난 3년 내내 그자들과 상대하며 국정까지 운영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내 앞에 놓인 커피에 각설탕 하나를 툭 하고 넣으며 그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지 예측했다.
이에.
피식-
휴즈가 웃는다.
기레기들의 진절머리 나는 극성에 휴즈 역시도 단단히 질렸기 때문이겠다.
“겸양을 떨고 싶어도, 왕자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뭐 그 점은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는 우리 둘만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둘 다 속 시원히, 있는 진실만을 이야기합시다.”
“그러죠.”
휴즈가 수저를 계속 휘휘 젓고 있는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알렉세이 황태자는 어떤 인물입니까?”
“어린데 생각이 깊습니다.”
“제 아비와는 다르게 말이죠?”
“예.”
휴즈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마찬가지로 각설탕 하나를 더 집었다.
커피가 많이 썼기 때문이다.
“아직 성년까지 4년이나 남았다면서요.”
“예.”
아프고, 어린데, 잘생기고, 지위도 높은 이가 바로 알렉세이다.
그는 내가 건넨 알렉세이와 네 자매의 사진을 보며 이들을 어떻게 하면 자신의 선거 유세에 활용할 수 있나 이를 저울질 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론의 반응은 왕자님의 예상처럼 다행히도 좋은 것 같습니다.”
“뭐, 니키의 망명만은 불허했으니까요. 더욱이 뉴욕의 여론이 볼셰비키 쪽에 많이 부정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휴즈는 무언가를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다 좋은데 한 가지가 아쉽습니다.”
“한 가지요?”
“예. 저는 알렉세이가 겨울에 왔으면 어땠을까 합니다만.”
“겨울에는 왜요?”
“겨울에 왔다면, 기자들이 왕자님 댁 앞에서 노숙할 수 있었겠습니까?”
미국의 정치인들은 가끔 이런 개그들을 예고도 없이 툭툭 던질 때가 있다.
“아, 듣고 보니 그렇군요. 하하하- 진짜로 알렉세이가 겨울에 뉴욕으로 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그랬다면 우리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기자 놈들이 죄다 얼어 죽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요? 이 왕자님도 기자들에게 아주 단단히 질리신 모양이로군요.”
“예.”
커피를 홀짝였다.
흠.
향이 참 좋다.
내가 만족한다는 표정을 한껏 지어 대자, 휴즈는 방금 나왔던 주제에서 살짝 결이 비슷한 다른 대화 주제로 화젯거리를 바꿨다.
“예전부터 느꼈지만, 우리 국민은 이상하게도 유럽 상류층들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자신감을 가져도 될 때가 되었는데······ 참 그 점만 생각하면 무언가 속이 꼬이는 것 같습니다.”
좋게 말해 대단한 관심이지.
그놈의 유럽 상류 사회를 향한 열등감은 버릴 때도 되었는데 말이다.
“동의합니다. 근 십여 년 전부터 미국은 경제적인 면에서 유럽을 뛰어넘었습니다.”
“세계대전 이후가 아니고요?”
“예. 적어도 제가 계산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나는 지난주에 읽었던 보고서를 토대로 미래를 예상했다.
“앞으로 여기서 이십 년만 더 지나면, 영국은 물론이고 독일, 프랑스, 러시아를 다 합쳐 놔도 미국과 맞상대하기 벅차게 될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예. 과장이 아니고, 미국인들은 더는 유럽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자국 경제와 문화에 자신감을 가져도 될 것입니다.”
“흠. 미래를 잘 예상하기로 소문나신 이 왕자님이 그리 말씀하시니······ 뭐 왕자님 말씀이 맞겠지요. 아! 그래서 지난날, 영화 쪽 투자 보고서를 제게 건네신 것이로군요.”
한 산업을 육성할 때는 민간의 거대한 자본도 필요하지만,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역시 필수적이다.
1920년대부터 미 서부.
특히나 할리우드 인근에서 영화산업이 크게 성장하는데, 나는 이를 조금 더 당겨 볼 작정이었다.
“그렇습니다. 국토 균형 개발을 위해서라도, 더불어 시대의 요구에 맞춰 가기 위해서라도······ 미국의 영화와 출판 등 문화 관련 산업은 꼭 육성해야 할 것입니다.”
휴즈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주장에 동의했다.
“제 생각도 왕자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렇죠. 현재는 동부에 너무 쏠려 있습니다. 서부의 발전은 우리 미국의 잠재력을 크게 끌어올릴 것입니다.”
휴즈는 내 제안을 받아들여 서부 쪽에 대규모 투자를 강행할 생각이라고 그의 포부를 밝혔다.
“딱 맞는 핑곗거리도 있겠다······ 이쪽에 대규모 자금을 퍼부을 생각이시군요.”
“예. 근래 미 서부에서 산불이 많이 발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피해를 본 지역에 대규모로 조림 사업을 진행하며, 동시에 서부 쪽에 신산업이 많이 들어올 수 있도록 관련 인프라 구축에 연방 정부 예산을 많이 지출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 옛날.
뉴욕이 모건의 영지였다면, 서부 3개 주는 나의 기반이다.
이곳이 발전하는 것은 나의 영향력 역시 높아지는 것이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어 댔다.
“대통령님.”
“예. 이 왕자님.”
“혹시 이번 샌프란시스코 유세 현장에서, 하와이와 알래스카의 연방 편입 주제도 거론됩니까?”
현재 하와이와 알래스카는 21세기 푸에르토리코나 괌같이 준주에 머물러 있다.
원 역사에서는 1950년대에 들어서야 정식으로 연방의 주로 승격된다.
‘알래스카는 몰라도 하와이에는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지.’
만약 하와이가 미합중국의 정식 주가 된다면, 원 역사 때보다도 더 빠르게 한인 중 한 사람이 연방의 하원의원, 나아가서 연방의 상원의원까지 오를지도 모른다.
이를 언급하며 그 가능성을 묻자, 휴즈가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어 댔다.
“관련 주제는 언급할 예정입니다. 다만······.”
“다만?”
“애리조나가 48번째 주로 편입한 지 채 5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 두 지역의 연방 편입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아직 많이 존재합니다.”
“의회 내에서 말이죠?”
“예.”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이자 법치주의 국가다.
행정부가 강하지만 입법부 역시 이에 못지않게 세다.
의원들의 기류를 내게 전해 주며 단기일 내에는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계속하여 여론을 흔든다면, 제 임기 내에는 몰라도 십 년 내에는 진짜로 가능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서부에 사는 우리 국민의 불안감을 해결하기엔, 이만한 조치는 없으니까요.”
“그렇죠. 일본이 동남아를 넘어 미 서부에도 관심을 보인다는 풍문이 월가에 돌 정도니까요.”
이런 여론을 조성한 것은 사실 나다.
하와이의 연방 편입이 빨라질수록.
한인들의 연방의회 진출이 가속화될수록.
그 영향력이 세지는 것은 나니까.
“그나저나 저는 매번 이 왕자님께 도움만 받는 것 같아서 송구스럽군요.”
“후원금 때문이라면 그런 말씀은 안 하셔도 됩니다.”
“후원금도 후원금이지만······ 독일의 원유 수출 금지 카드를 그리 빨리 수용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 그거.
손절할 때가 슬슬 온 것 같아서 그리 행동한 거다.
창고에 쌓아 둔, 루마니아서 생산했던 비축유도 독일로 죄다 밀어냈겠다.
영국과 이면 계약도 했겠다.
이젠 진짜 줄을 제대로 탈 준비가 되었기에, 일본처럼 꿈지럭대지 않고 바로 해당 결정을 내렸는데.
휴즈는 이에 기쁜 표정을 지어 댔다.
독일을 아주 제대로 협박할 카드 하나가 그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전에도 말했듯, 저는 대통령님과 한배를 타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대통령님께서 권하시는데 제가 어찌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호호.
휴즈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렇듯 즐겁다.
독일놈들처럼 뻔뻔하지도 않고.
영국놈들처럼 언제 뒤통수를 맞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이 왕자님.”
“예.”
아까부터 나는 살짝 두리번거리며, 계속 주변을 계속 관찰했다.
이에 휴즈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까부터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자꾸 살피시는데.”
“······.”
“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나는 이에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다른 건 다 그대로인데 말입니다.”
“예.”
“오늘따라 경호원이 많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휴즈가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이에 나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휴즈에게 재차 질문했다.
“예전 유세 때보다도 배 이상은 경호 인력이 증원된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원래 경호원이 이리 많습니까?”
* * *
“아······.”
휴즈는 내 질문의 요지를 단박에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졸린 지, 비서실장에게 다시금 커피를 요청한 후 손깍지를 꼈다.
“경호원이 많이 늘긴 했죠.”
“······.”
“비서실장도 이를 언급하던데, 왕자님께서도 제가 유난을 부린다 여기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 아닙니다. 본인 또한 평소 많은 경호 인력을 데리고 다닙니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뭐, 선거철이지 않습니까? 때가 때인 만큼 보안 이슈가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시기지요.”
나의 대답에 휴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평소 경호원을 상당히 많이 대동하고 다니니까.
“다만 일주일 전보다 그 인원이 확 는 것 같아서······ 혹시 관련 정보를 입수한 것이 아닌가 싶어서 조심스레 속으로 이를 유추하고 있었습니다.”
휴즈는 제법 놀랐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경호 인력을 어째서 증원하게 되었는지, 그 상세 이유를 내게 설명했다.
“왕자님의 눈은 정말이지 속일 수가 없다니까요.”
“그, 그 말씀은?”
“예. 최근에,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들이 중서부 쪽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데 제 유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가 많다고 합니다. 더불어······.”
“더불어?”
“일부 과격 공산주의자들도 저를 노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월가의 하수인이니 뭐니 하면서 말이죠.”
“흠······.”
나는 제법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냥 넘길 일은 아니군요.”
“그렇지요.”
휴즈는 비교적 최근에 벌어졌던 사건 하나를 내게 언급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테디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어떻게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
전전임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매킨리가 총에 맞아 뒈지면서, 부통령이었던 루스벨트가 어부지리로 대통령 자리를 꿰찬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 일이 터진 지 불과 십오 년밖에 안 흘렀군요.”
“예. 저 또한 그리될 수 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생각하여 인원을 증원하게 되었습니다.”
“하긴, 협박에 겁먹고 예정되어 있던 유세에 불참하는 것보다는 낫지요.”
“예. 그렇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하나다.
하지만 20세기 미국 정계는 상 마초들의 놀음 터.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바로 물어뜯긴다.
멕시코 내전에 뒤늦게 개입한 휴즈의 결정을 두고, 겁쟁이 같았던 행동이었다며 지금도 그와 반대편에 서 있는 언론사들이 이를 거론하며 까는 것을 보아라.
“왕자님께서도 한번 크게 곤욕을 치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느 영역이나 그렇지만.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공감 능력은 참으로 중요해진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적은 비용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호감을 살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니까.
휴즈 역시도 나와 계속하여 좋은 관계를 이어 가고 싶었기에, 살짝 민감했던 지난 저격 이슈를 꺼내며 내게 너도 나와 비슷하지 않냐는 표정을 지어 댔다.
이에 나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죠. 아! 다만, 그 일은 한 번으로 그치진 않았습니다.”
“예? 그 무슨······.”
무슨 일이긴.
기사화된 사건은 겨우 한차례라는 뜻이라는 거다.
나머지는 미수사건으로 그쳤기에 아무도 몰랐던 것.
“그런 테러를 몇 번 더 당하셨단 말입니까?”
“뭐, 대부분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제압되었지만······ 미수 사건도 본인을 위협한 사건이니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요.”
“허허. 저런.”
내가 좀 밉상이어야지.
동양인 왕자인 것도 부러운데, 돈도 많다.
심지어 금기시되는 ‘최상류층 백인 여성’을 동양인이 반려자로 맞이하지 않았던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극혐하는 혼혈을 술술 낳고 있고.’
이것만으로도 눈이 뒤집히는데······ 가끔 잊을 만하면 뉴스에 나오니 배알이 꼴려서 미칠 지경일 테다.
그렇기에 종종 미친놈들이 밖으로 나와 내게 인사를 하려고 했다.
안주머니에 권총을 들고.
‘실내에서 행사하면, 나는 꼭 검열 부스를 설치해 달라고 요구하지.’
왜냐고?
요런 똘아이들 덕분이다.
일본놈들이나 중국놈들도 있고.
아무튼.
실제로 이런 검열과정에서 걸린 놈들이 무려 다섯 명이나 된다.
뭐, 직접적인 총기 난사는 샌프란시스코 이후에는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자잘한 암살 시도를 포함하면 나 역시도 순탄한 삶을 계속하여 산 것은 아니었기에.
휴즈의 행동을 한껏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오버한다는 반응을 보이는 놈들은 무시하라고 조언했다.
“사람의 운명은 재미나게도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꼭 잃게 되는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유명해지고 부자가 될수록, 이유 없이 싫어하는 이들 역시 많아지더라고요.”
“예. 그렇기에, 대통령님의 판단을 저는 지지합니다. 때론 과하더라도 안전은 꼭 챙겨야 할 필수 덕목입니다.”
그때였다.
멀리서 우리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비서실장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시계를 한번 쓱 훑어보더니, 휴즈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아! 왕자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시간이 훌쩍 흘러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대충 오늘 예정된 만남은 여기까지인가 보군.
내일 있을 유세 내용도 확인해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기도 해야 하기에 이쯤에서 대화를 끊는 것이 맞긴 했다.
“이 왕자님.”
자리에서 일어나, 휴즈가 배정해 준 특실로 이동하려 하는데.
휴즈가 급히 나를 불러 세웠다.
“말씀하십시오. 대통령님.”
“저······.”
휴즈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내게 한 가지를 고백했다.
“저도 최근 들어서 왕자님처럼 성경책 하나를 안 주머니에 넣고 다닙니다.”
“그, 그러십니까?”
“예.”
지난번에 술 마실 때, 샌프란시스코 저격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해 줬는데.
이를 감명 깊게 들었던 것일까?
미국의 대통령 되는 자가 나를 따라 하네.
“괜찮은 아이디어인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주시는 느낌이 들어 심리적으로도 안정이 되더라고요.”
그렇지.
방탄 효과는 덤이고.
“그럼 내일 일정이 끝난 뒤에, 뒤풀이 행사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예. 그리하시죠.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 * *
“저 자식 잡아!”
우려했던 일이 터졌다.
“여러분, 휴즈는 사기꾼입니다. 저놈은 평생 월가의 대리인 역할을 하며, 우리를 자본가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저들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유세 현장에 똘아이가 출연한 거다.
주목할 것은.
이 똘아이가 조현병을 앓는 놈도.
무정부주의를 외치는 놈도 아닌 진성 빨갱이였다는 것.
“지, 지금이라도 마르크스 님의 공산주의 선언을 읽으십시오. 그동안 장님으로 살았던 여러분의 눈을 확 뜨게 만들 것입니다.”
“입 닥치지 못 해!”
“놔, 안 놔? 나는 무죄야. 당신들은 속고 있다고. 휴즈는 미국을 뉴욕의 자본가들에게 바칠 거야. 우리를 전쟁터로 몰고 갈 거라고.”
다른 이야기는 모르겠고.
마지막.
한마디가 귀에 울렸다.
‘최근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가 이 가능성을 거론하며, 휴즈를 압박하던데. 만약 진짜로 참전하면 어쩔 거냐고 몰아갔었지. 아마?’
그 이야기가 이놈의 입에서도 나올 줄이야.
이거 잘만 활용하면 민주당 놈들과 이놈과의 연관성을 소설로 쓸 수도 있겠네.
“네놈. 악마에게 영혼을 판, 더러운 일본인!”
경찰은 암살미수범을 체포한 후, 경찰서로 연행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어쩌다 보니 범인과 시선을 교환하게 되었다.
“나는 알고 있다. 네놈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망할 일본인! 네놈도 지옥에 갈 거다.”
흠.
나는 일본인은 아니고 한국인인데.
역시 공산주의를 믿는 놈치고 정상인 놈이 없다는 가설은 맞는 말인 것 같다.
두들겨 맞으며 끌려가는 놈을 한참 쳐다보다가 나는 최현우에게 물었다.
“휴즈는?”
“다행히도 무사합니다. 측근의 이야기로는 가슴팍에 있는 성경책에 총알이 일부 박혔다던데······ 휴즈가 이를 보며 껄껄 웃었답니다.”
살아 있어서 껄껄 웃었을 수도 있지만.
이번 사건으로 선거에서 유리해졌다는 확신이 들어서 박장대소를 해 댄 것일 수도 있다.
일단 동정표를 얻을 수 있으니까.
더욱이 신께서 그를 지켜주셨다는 무적의 치트키 또한 얻게 되었다.
20세기 미국은 현대보다 좀 더 종교적인 나라였기에, 이 점을 무시할 수는 없을 터.
‘그보다······.’
그동안 휴즈 역시도 막연하게 공산주의에 관해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그 경향이 좀 더 짙어질 것 같다.
나로서는 좋은 소식.
‘신기루 같았던 연해주에 우리 민족의 괴뢰국을 세우는 일이, 점점 더 현실화하고 있군.’
“저, 전하.”
“왜 또?”
“그게······.”
저 멀리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고 한다.
가을에나 예상되었던 붉은 혁명이 바로 오늘 터졌다는 소식이었다.
< 롤모델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