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왕(王)과 비(妃)
세자가 천연두에서 회복했다.
이는 실로 국가적인 경사였다. 천연두를 걸렸다가 회복한 사람은 항체가 생겨 다시 걸리지 않는다. 천연두를 가장 무서워하는 질병으로 여기는 조선에서, 천연두에서 회복했다는 건 대단한 기쁨이었다.
대신들이 입시하여 임금에게 국가적 경사라고 찬양을 보냈고, 임금 또한 크게 기뻐하며 국운이 융성할 징조라 답했다.
세자의 회복을 종묘에 고묘(告廟)하고 창덕궁에서 진하(進賀)하는 잔치를 열며, 대역죄나 강상죄 등 중범죄를 제외한 전국의 경범죄자들을 사면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기묘년 12월 28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세자의 회복을 진하하는 잔치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선 또한 종친이자, 영종정경부사로서 관복을 입고 창덕궁으로 나아갔다.
"대감께서는 실로 평안해보이십니다."
안영흠의 말에 이선이 빙긋 웃었다.
"국본이 병에서 회복하신 일은 국가의 경사인데, 어찌 평안하지 않겠소?"
대놓고 말은 못해도, 운현궁과 그 일파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만약 세자가 잘못 된다면, 큰아들인 완화군의 주가가 다시 오를 것이다.
'아서라, 아서. 세자가 병약하긴 해도 결코 죽지는 않는다. 그런 요행을 바란다고 될 것 같은가?'
이선은 씁쓸했다.
자신도 아들이고, 세자도 아들이다. 그런데 임금과 중전은 세자만 사랑하고 완화군은 무시했다.
반대로, 자신도 손자이고, 세자도 손자다. 하지만 대원군은 완화군만 사랑하고 세자는 무시했다.
'참으로 콩가루 집안이야.'
결국 이는 왕실이기에 만든 비극이었다. 완화군과 세자는 차기 대권을 놓고 벌이는 두 권력집단의 장기말일뿐, 그들 본인의 뜻과 무관했다.
이선 본인은 세자에 대해 전혀 악감정이 없었다. 어린 세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찌되었건 둘은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였다. 그렇기에 완화군은 기꺼이 세자의 회복을 축하할 마음이 있었다.
'나는 결코 단순히 장기말이 될 생각이 없다. 앞으로의 상황은 내가 주도할 것이다.'
진하가 시작되기 전, 종친들이 입궁하여 임금을 알현했다.
완화군은 순서를 기다리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았다.
"영종정경부사 완화군 대감 입시옵니다."
"오, 어서 들라 이르라."
편전(便殿)의 문이 열리고, 옥좌에 앉아있는 임금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제26대 국왕,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
이선은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묘호는 서거한 군주에게 붙는 것이기에, 아직 고종이라 불릴 일이 없는 임금이었다. 하지만 미래인의 영혼이 빙의한 탓에, 고종이란 호칭이 훨씬 익숙했다.
'44년이나 재위했으나 불행하게도 망국의 군주가 되었지.'
역사학도 이선우였던 시절, 고종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고종은 제법 머리도 좋고 시대변화에 대한 이해도 괜찮았으나, 우유부단하고 무책임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최악의 결정만을 내려 국가를 망국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내 아버지이기도 하고.'
완화군 이선으로서는, 고종은 친아버지였다. 가장 존경하고 사랑해야할 사람이었다. 자신도 왕자로서 충성하고 보필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완화군 대감, 전하께 예를 갖추셔야지요."
완화군이 한동안 가만히 있자, 임금은 의아하게 여겼다. 이에 상선이 조심스럽게 끼어 들었다.
'아차.'
이선은 즉시 절을 하며 군신의 예를 표했다.
"신(臣) 이선, 삼가 주상 전하를 뵈옵나이다. 성수무강(聖壽無彊)하옵소서."
임금은 이선의 인사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어서 오너라, 완화군. 간만에 만나니 기쁘구나."
실로 오랜만에 상봉하는 부자(父子)였다.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
"한결같다."
완화군은 궁궐 예법에 따라 모든 왕실 어른들의 안부를 물어야했다.
"대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대왕대비, 즉 익종(翼宗, 효명세자)의 비이자 고종의 법적 어머니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를 일컫는 말이었다.
"한결 같으시다."
"왕대비전의 기후는 어떠하십니까?"
헌종(憲宗)의 비이자, 고종의 법적 형수인 효정왕후(孝定王后) 홍씨를 일컫는 말이었다.
"또한 한결 같으시다."
"중궁전의 기후는 어떠합니까?"
이선 본인에게는 중전 민씨가 법적 어머니였다.
"안순하다."
"세자궁의 기후는 잇달아 평안합니까?"
"침식도 평상시와 같고 노는 것도 뜻대로 하니, 마음이 매우 기쁘다."
형식적으로 답하던 임금이, 세자에 대해선 진심으로 기쁜 표정을 지었다.
"군부(君父)의 기쁨이 곧 신자(臣子)의 기쁨이오니, 신 또한 기쁨을 감추지 못하겠나이다."
"옳은 말이다. 이리 보니 완화군이 정말 의젓해졌구나. 왕실의 홍복이다."
완화군의 말에 임금은 크게 기뻐하며,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
"어찌하여 예를 표하기 전에 오랫동안 서 있었었느냐?"
'당신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느라 그랬습니다, 라고 할 순 없지.'
이선은 변명으로 생각해둔 바를 재빠르게 혀를 굴려 말했다.
"신이 성상을 뵌 지 오래되었나이다. 하여 성상을 뵈오니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였으나, 자주 찾아뵙지 못한 신의 불충불효를 스스로 탓하고 있었나이다."
그 말에 임금은 딱한 마음이 들었다. 완화군이 자주 궁에 들어오지 못하는 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궁궐 법도상 왕자가 부왕을 자주 찾아뵙고 문안을 드리는 게 맞으나, 중전이 완화군을 경계하는 걸 아는 임금이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아니면 궁에 오지 않아도 좋다고 명을 내렸던 것이다.
임금 나름으로는 완화군을 보호하려는 조치였으나, 영보당은 맏아들을 만나기조차 싫어하는 것이냐며 크게 섭섭해 했다.
"이는 과인이 부덕한 탓이니, 네가 탓할 일이 아니다. 영보당은 무탈한가?"
"평안하십니다."
"내 듣기로 네가 아프다고 들었다. 지금은 괜찮으냐?"
"가벼운 감기였사옵니다. 전하의 염려 덕에 무탈하옵니다."
"다행이구나. 정사가 급하여 네게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미안할 따름이다."
"전하께서는 공사다망하시온데, 어찌 이런 가벼운 일까지 신경쓰시겠습니까? 전하께서 심려하실 만한 일이 아니옵니다."
임금은 더욱 감탄했다. 아버지가 오직 애정을 이복동생에게만 쏟는 상황이니, 아프다 깨어난 열두 살 어린애가 삐칠 법도 한데 참으로 대범하기 그지없었다.
'과연 맏이는 다르구나.'
임금이 겨우 열일곱에 얻은 아들이라, 부자는 겨우 열여섯 살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아버지나 아들보다는 오히려 나이차 있는 형제에 가까워보였다.
"그래, 세자가 이제 회복하였으니, 너도 자주 궁에 들르도록 하여라. 세자와 너는 하나뿐인 형제이니, 어찌 각별하지 않겠는가?"
첫아들이니만큼, 임금도 완화군을 가장 사랑했던 시절이 있었다. 첫사랑이었던 영보당을 총애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세자의 탄생 이후 갈수록 멀어지니, 임금도 가슴속으로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었다. 임금이 완화군과 영보당을 멀리하는 건 본래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중전마마 납시옵니다."
"중전께서? 뫼시거라."
임금의 명이 떨어지자, 중전이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오시오, 중전. 진하에 참석하기는 아직 이르거늘, 어찌 편전까지 거동하시었소?"
"완화군이 모처럼 입궁하였는데, 신첩(臣妾)이 어미가 되어 어찌 가만히 있을 수만 있겠나이까?"
후궁 소생의 자식도 모두 법적으로는 중전의 자식이었으니, 중전의 말도 틀릴 것은 없었다.
"과연 중전의 말이 옳소. 완화군은 중전께 예를 하여라."
중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이선은 불편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선은 '어머니'에 대한 예를 표했다.
"이선이 삼가 중전마마를 뵙사옵니다. 성수무강하옵소서."
"어서 오시오, 완화군. 오랜만에 이리 만나게 되어 기쁘구려."
중전은 답례하며, 마치 반갑다는 듯이 완화군을 맞이했다.
'명성황후 민씨, 중전 민자영.'
올해 나이 스물아홉인 중전은 예사로운 여인이 아니었다.
왕비다운 우아한 자태에, 머리카락은 윤이 나는 흑단이었고 피부는 투명하여 진주빛이었다.
왕실의 큰 어른답게 예의범절에 밝았으며, 화법에는 교양과 지성미가 넘쳤다. 과연 일국의 국모다운 풍모였다.
중전은 얼굴에 부드럽고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차갑고 예리했고, 눈매는 날카롭고 매서웠다.
'하지만 가장 무서운 건 저 아름다운 머리 안에 든 두뇌지.'
이선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중전 민씨는 조선 역사상 가장 똑똑한 왕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그 똑똑함이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고 해만 되었다는 게 문제지. 정사에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중전 민씨는 역사서 읽기를 좋아해 고금의 역사에 정통했고, 특히 정치사에 정통했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정세를 읽는 눈이 뛰어나, 대원군에 맞서 친정(親政)을 추진하는 임금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
그 결과, 중전 민씨는 조선 역사상 유례없을 만큼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다. 임금이나 중전 입장에서 가장 믿을만한 건 처족인 여흥 민씨였고, 임금이 친정하자 여흥 민씨가 대거 등용되는 결과를 낳았다.
수렴청정과 같은 비상상황이 아니면 왕비의 정치 참여를 금하는 조선의 특성상 겉으로 중전은 절대 나서지 않았지만, 내밀히 배후에서 정치를 조종했다.
후대의 편견과 달리 고종은 절대 왕비의 치마폭에 쌓여있지 않았다. 임금이 대원군과 직접적으로 맞서기에는 불효라고 공격을 받을 여지가 있으니, 중전과 처족들을 내세워 대신 싸우게 하는 셈이었다.
대원군이라는 위협적인 정적이 있는 이상 두 사람은 튼튼한 동맹관계였고, 임금은 중전의 말이라면 어지간해선 다 들어주었다.
완화군을 멀리하는 것도 임금의 뜻이 아니라, 중전의 뜻이었던 것이다.
"신첩이 밖에서 들으니, 전하께옵서 완화군을 자주 궁에 들르라 명하셨사옵니까?"
"아아, 그렇소."
임금은 약간 떨떠름해하며 답했다.
"신첩도 전하의 뜻을 받들겠나이다. 완화군 또한 신첩의 자식이요, 세자의 형이옵니다. 완화군이 자주 궁에 와서 효도하고 세자와 형제의 우의를 나눈다면, 왕실의 경사가 아니겠사옵니까?"
뜻밖에도 중전이 흔쾌히 완화군의 입궁을 반기니, 임금도 크게 기뻐하였다.
"과연 중전께서는 현명하고 인자하시구려. 완화군, 중전의 말씀을 들었느냐? 앞으로 자주 궁을 찾아 문안을 올리고, 세자와 친밀히 지내도록 하여라."
'······ 무슨 속셈이지?'
이선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중전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었다.
'세자에게 형제가 필요하다? 세자가 천연두에서 회복한 게 그렇게 기쁘단 말인가? 아니면 나를 자주 궁에 불러들여 대원군을 견제하겠다는 뜻인가? 내가 중전에게 복속하면 대원군 입장에서는 닭 쫓던 개 노릇이 될 터이니······.'
중전에게 단순한 호의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선은 속으로 경계하며, 겉으로는 예의를 다해 답했다.
"중전께옵서 신을 이리 후대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다만 신은 사사로이 성상의 아들이자 세자궁의 형제가 되지만, 공적으로는 신하가 되옵니다. 어찌 함부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궁에 자주 들어간다는 건 너무 부담스러운 일이야. 일거수일투족을 중궁전의 통제를 받아야한다는 건데······. 그럴 수야 있나?'
이선의 속내가 무엇이든, 겸손한 처신에 임금이 크게 기뻐했다.
"오호, 완화군은 참으로 처신이 바르구나. 그렇지 않소, 중전?"
"실로 그러하옵니다. 이렇게 훌륭한 왕자가 있는데, 누가 감히 세자의 지위를 위협하겠나이까?"
중전의 말은 뼈가 있었다. 대원군이 완화군을 총애하다 못해 후계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소문을 임금의 귀에다 속삭이는 것이었다.
"신은 종친의 일원으로서, 오직 성상과 왕실에 충성을 다하고자 할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를 신경 쓰지 마시라고.'
이선의 겸손한 처신에 임금은 더욱 기뻐했다.
"참으로 갸륵하다. 완화군, 그 누구도 네 충정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러니 세간의 못된 소문 따위는 신경 쓰지 말고, 종친으로서 네 역할을 다하길 바란다. 너는 과인의 맏이요, 또 세자의 형이니, 장차 종실의 큰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황공하옵니다. 성은에 부응하겠나이다."
임금의 신임과 중전의 경계를 확인한 이선은, 내심 향후의 행보를 가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