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대륙으로
경진년 정월 그믐, 1880년 3월 10일.
이선은 예성강 하구에 있었다.
지난 몇 주 간 안영흠이 이선을 대신해 움직여준 덕에, 민씨의 감시를 받지 않고 은밀히 행동할 수 있었다. 개성행도 마치 왕족들이 흔히 그러는 것처럼 유람이라도 떠난 것처럼 꾸몄다. 천연두 공격이 실패한 이후, 민씨도 섣불리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완화군이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릴 때쯤에는, 이미 서해상에 있을 터였다.
이선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는 구름이 껴있어, 그믐달조차 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대감, 곧 출항한다고 합니다. 배에 오르시지요."
"알겠소."
안영흠은 이선이 쉽게 배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나고 자란 조선 땅을 떠나 낯선 외국으로 가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대범하신 분이라고 해도, 외국으로 가려니 감회가 새로운 것이겠지.'
하지만 아니었다.
'내가 개성에 오게 될 줄이야. 전세계 어딜 다 가도 갈 수 없었던 곳이 이북이었는데. 가능하면 개성 유람 좀 하고 갔으면 좋겠지만······.'
정작 이선은 중국에 가는 것 자체는 무덤덤했다. 21세기에 북경도, 천진도, 현재 목적지인 산동반도의 지부(芝罘, 옌타이)도 모두 가본 곳이었다. 하지만 개성은 갈 수 없었던 곳이었다.
'뭐, 다시 돌아오게 되겠지. 그때는 조선팔도에서 못 갈 곳이 어디 있겠는가?'
이선은 반드시 돌아오리라 다짐하며, 밀항선에 올랐다.
"완화군 대감이시옵니까? 소인이 청국까지 편히 모시겠나이다."
"여기 송 객주가 나이는 젊지만, 청국에 가본 경험도 있고 청국말도 곧잘 합니다. 청국에 가서도 우리를 돕겠다고 합니다."
안영흠의 설명에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잘 부탁하리다."
"운현궁에 도움이 된다면 영광일 따름입니다."
밀항선을 맡은 송 객주(宋客主)는,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상인이었다. 완화군 이선이 대원군의 밀명을 받아 청나라로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배가 서서히 서쪽으로 움직였다. 밀항선에는 홍삼 1천 근이 화물로 실려있어, 만약 단속에 걸리면 큰일이었다.
"단속은 걱정마시오. 이미 다 손을 써두었으니."
이미 이선의 명을 받은 안영흠이 손을 써서, 서해를 단속하는 수군들을 매수한 상황이었다.
'나라 꼴 하고는. 참 서해 방위 쉽게 뚫린다. 이러니 밀무역이 성행하지. 조선으로 돌아오면 해상 방위부터 재편해야겠군. 홍삼은 포삼세를 물리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국가 전매로 돌려서 대중 무역을 독점하도록 하고.'
"점점 육지가 멀어지는구나."
"이렇게 조선을 떠나다니······!"
담담하게 출국을 받아들이는 이선과 비교될 정도로, 안영흠과 장무영이 더 감정적이었다.
21세기에 수없이 외국을 다녀온 기억이 있는 이선과 달리, 평생 조선에서 살아오며 '해외'로 나간다는 생각조차 못했던 이들에게 외국행은 엄청난 모험이었다.
"하하, 그대들은 빛나는 역사의 출발을 상징하게 될 것이오. 앞으로 조선에서 해외로 나가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게 될 것인즉, 그대들은 그 시초가 되는 셈이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안영흠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조선 땅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이는 사신과 역관, 일부 상인을 제외하면 전무 했었다.
"당장 올해 일본으로 떠나는 수신사가 있을 것이고, 청국으로 가는 영선사가 있소. 함경도에는 아라사로 향한 사람들도 많고. 지금은 교류의 시대, 더 이상 조선만 문 닫고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오."
이선은 확신했다. 앞으로 수많은 사람이 조선을 떠나 해외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그 선두에 우리가 서게 되는 것이지.'
"이제 우리는 함께 조선을 떠나 대륙에서 대업을 도모하게 되었으니, 뜻을 함께하는 동지라 할 수 있소."
"동지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십니다. 저희는 대감의 가신이니 어디든 따라가는 게 도리에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부디 저희를 아랫사람으로 편히 대해주십시오."
안영흠과 장무영이 과분해하며 무릎을 꿇었다. 이선은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선은 진심으로 안영흠과 장무영이 고마웠다. 권력자인 중전과 외척에게 미움을 받는 왕자와 함께,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약 없는 길을 함께 가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대들이 나를 믿고 먼 길을 함께 해주어 고맙소. 나는 이제부터 그대들을 동지로 여길 것이오. 앞으로 동고동락하며 생사를 같이합시다. 그리고 반드시 조선으로 돌아와, 나라에 충성하며 함께 영화(榮華)를 누립시다."
안영흠과 장무영은 크게 감동을 받은 듯, 두 사람 모두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중인인 안영흠이나 상민인 장무영이나, 왕족인 완화군은 까마득하게 높으신 분이었다. 아무리 찬밥 취급받는 서장자라 할지라도 고귀한 왕자였다.
그런데 왕자가 직접 그들을 동지로 여기겠다고 말하니,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영흠, 군 대감을 위하여 충성을 다하겠나이다!"
"장무영, 군 대감을 위하여 이 목숨을 다 바치겠나이다!"
밀항선의 선원들이 보거나 말거나, 두 사람이 경쟁하듯 충성맹세를 했다. 이선은 심히 민망했으나 그들의 충성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고맙소. 이 나라 조선과 우리 모두를 위하여, 힘을 다해봅시다."
배는 순항을 거듭했다.
중간에 수군의 단속을 받긴 했으나, 이미 매수된 장수는 형식적인 조사만 하고 물길을 열어주었다.
배는 옹진반도를 거쳐, 조선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최단 루트인 산동반도로 향했다.
"육지다!"
"마침내 청국에 왔군."
육지에 익숙한 이들은 시야에 수평선만 보이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다가, 마침내 서쪽으로 지평선이 보이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최종목적지는 천진이니, 여기선 잠시 거쳐갑시다."
산동반도의 지부항은 개항장으로, 서양 상선들이 대거 입항해 있었다.
송 객주는 이런 일이 익숙한 듯, 청국 선박으로 위장해서 지부항에 입항했다.
"부끄러운 말이나, 이미 밀무역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청국 측 협조자가 있지요. 이 나라도 조선 못지않게, 아니 조선보다 더 뇌물이 잘 통하는 나라입니다."
완화군은 이제 공범이 된 셈이니, 송 객주는 흔쾌히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렇구려. 그런데 나는 더 높은 선을 대고자 하오."
"사실 그게 궁금했습니다. 대체 운현궁에선 누구와 접촉하려고 하시기에 군 대감을 직접 보내신단 말입니까?"
"천진으로 가면 답이 나올 것이오."
이선이 빙긋 웃으며 확답을 하지 않자, 송 객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물과 식량만 공급받고, 천진으로 가시지요."
배는 다시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지부에서 천진까지는 황해 연안을 따라 쉽게 항해할 수 있었다.
1858년 천진조약에 따라 천진이 개항함에 따라, 북경의 외항인 천진이 크게 성장했다. 서양선으로 보이는 수많은 기선이 해안을 따라 천진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군 대감, 이제 알려주시지요. 대체 천진에서 누구를 만나려고 하십니까?"
안영흠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비밀을 물었다.
"북양대신, 직례총독 이홍장."
"이, 이홍장이오?!"
송 객주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북양대신 직례총독 이홍장이라니.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거물이었다.
"그렇소. 이홍장을 만나려 하오. 조선의 뜻을 전하는데, 청국의 대외정책을 총괄하는 이홍장을 만나야 하지 않겠소?"
'······ 사실 미리 선약을 잡은 건 아니지만.'
수도 북경의 경기 지역인 직례총독(直隷總督)이자, 상해 이북의 모든 항구를 관리하는 북양통상대신(北洋通商大臣)인 이홍장. 행정·군사·외교·통상 전 분야에서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총괄하는, 청 조정의 최고 실력자라 할 수 있었다.
그만큼 각국 사절이 모두 만나고 싶어 하는 최고 실력자라 만나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선은 그가 자신을 쉽게 만나주리란 믿음이 있었다.
'대원군이 보낸 조선의 왕자, 뭐 물론 이것도 먹힐 수는 있겠지만. 보다 중요한건 조선의 대 서양 수교 문제지.'
1879년, 일본의 류큐 병합에 놀란 이홍장은 일본의 조선 영향력 확대를 우려했다. 조선에게 서양 각국과의 수교를 권유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서양이 조선과 관계를 맺으면 일본이 감히 조선을 차지하지 못하리라 계산한 것이다.
이홍장은 친분이 있는 영중추부사 이유원에게 친서를 보내 '이이제이'를 권하며 서양과의 수교를 권유했으나, 완곡한 거절의 답변을 받아 실망한 상황이었다.
사실 조선 조정이 곧 수교로 전환한다고는 하지만, 공식적인 입장은 '서양과는 교류하지 않음'이었다. 조선 내부의 내밀한 상황을 모르는 이홍장으로서는 다른 방법으로 수교를 권유해볼 생각이었다.
이선은 바로 이 점을 공략해볼 생각이었다.
'이홍장이 지금 조선에게 원하는 건 서양과의 수교다. 나 또한 이를 바라마지 않고 있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서양 각국과 교섭하려는 조선 내부의 시도도 있었다.
1874년, 일본과 수교하기 전에 이미 개화파의 지도자이자 역관 오경석(吳慶錫)이 북경 주재 영국 공사관을 방문해 비밀리에 수교를 타진한 바 있었다.
1880년 현재도, 개화파가 일본으로 밀파한 승려 이동인(李東仁)이 도쿄 주재 영국 공사관을 방문해 비밀리에 수교를 논의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 역시 곧 김홍집을 일본에 수신사로, 김윤식(金允植)을 청나라로 영선사로 파견해 서양과의 수교를 논의할 예정이었다.
이들은 당대 조선에서 가장 국제정세에 밝은 축에 속했으나, 모두 서양에 대해 아는 바가 극히 적었고, 서양의 의도에 대해서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과 달리 청나라뿐만 아니라 열강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이선이었다.
천진에만 해도 열강들의 영사관이 있었고, 이번 기회에 여러 국가들과 비공식적 접촉을 가질 생각이었다.
'나 자신을 위한 길이자, 조선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밀항선은 천진항에 입항했다. 북경에서 가장 가까운 외항이자 서구 열강에 개방한 항구답게, 천진항은 서양의 수많은 기선으로 북적거렸다. 밀항선 옆으로 군함이 지나갔다. 그에 비하면 조선의 배는 나룻배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가장 눈으로 보이는 현실적인 열강과 조선의 차이요. 서양의 대형 기선과 조선의 작은 범선. 앞으로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이 격차를 줄여야지."
이선의 설명에 안영흠, 장무영, 송 객주는 누구 가릴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서양의 군함을 보면서 위압감과 힘의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작금의 조선은 거친 바다 위를 항해하는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소. 안전한 항해를 위해선 저렇게 크고 튼튼한 기선이 필요하오. 천진에서 머무르는 동안 우리가 할 일이 바로 그런 일이오."
"예, 힘닿는 대로 돕겠습니다."
중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이선은 상인과 대외무역에 대해 우호적인 관점을 수차례 드러냈고, 이에 송 객주도 내심 크게 만족한 상황이었다. 송상, 아니 상인 전체를 위해서라도 이선에게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이선 일행은 천진의 여각에 여장을 풀고, 즉시 이홍장과 접촉할 준비를 취했다.
천진은 직례성 관할로, 이홍장은 직례총독 관저인 보정(保定)과 천진, 북경을 오고가며 업무를 보았다.
근래 해방 정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이홍장은, 서양에서 군함을 사들이고 천진에 해군사관학교격인 수사학당을 개교할 목적으로 자주 천진에 왔다.
이선이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이홍장은 때마침 천진의 관저에 머무는 중이었다.
"일각이 여삼추요. 즉시 갑시다."
"이홍장을 만나기가 쉽지가 않다는데,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걱정 마시오. 다 방법이 있으니."
이선은 조선에서 준비해온 관복을 입었다. 안영흠, 장무영, 송 객주를 대동하고 북양대신 관저로 향했다. 이홍장에게 선물로 줄 석파란과 함께였다.
북양대신 관저에 도착하자, 예상대로 경비병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우리는 조선국에서 온 사신이오. 이중당(中堂, 대신을 높여 부르는 말)을 뵈러 왔소이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송 객주가 통역하자, 경비병이 총독은 사전에 약속을 잡지 않은 이는 만나지 않는다고 막았다. 이 또한 예상대로였다.
"중당께서 조선국 영중추부사 이유원에게 친서를 보내신 바 있소. 이에 대해 조선국의 새로운 답신을 갖고 왔으니, 이를 중당께 알리지 않으면 그대는 크게 경을 치게 될 것이오."
엄밀히 말하면 사칭이었지만,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비병이 급히 안으로 들어가 보고하자마자 즉시 반응이 왔다.
굳게 닫혀있던 관저의 대문이 열린 것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이선의 역사적인 첫 외교무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