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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무대 등장
일본 영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郎).
'갑신정변 당시 조선 공사잖아. 이때 천진 영사로 있었군.'
다케조에는 조선하고도 관계가 깊다.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의 정변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에서는 음모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다케조에는 본래 한학자였다. 한문 실력이 뛰어나서 대(對) 청 외교에 투입되었다가, 조선 공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다케조에는 북경 주재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절부터 이홍장과 친분이 있었고, 일본 외무성은 이 점을 고려해서 천진 주재 영사를 거쳐 조선 공사로 보낸 것이었다.
'일본은 안 돼. 내가 누군지 단숨에 파악해서 일본에 보고할 걸. 현재 조선과 유일하게 수교를 맺은 나라가 일본이니, 조선까지 이야기가 들어가면 곤란하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일본하고는 아예 대화 자체를 할 생각이 없었다.
영국 영사 찰로너 그랜빌 알라바스터.
'······ 누구야?'
솔직히 이선도 누군지 몰랐다.
'알 건 모르건 필요가 있다면 접촉해봐야겠지만······. 영국놈들 정보력은 너무 무서워. 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 신상 다 털린다.'
이선은 근대 외교사를 연구면서 영국의 정보력에 감탄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선과 수교가 없던 1880년 시점에서, 도쿄 주재 영국 공사관은 조선의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홍장과 이유원이 비밀리에 주고받은 편지 내용도 파악하고 있었고, 아직까진 비밀결사 단계에 불과했던 개화당의 지도자가 김옥균·박영효 등이라는 것도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도쿄에 있던 개화파 승려 이동인이 영국 서기관 어니스트 사토(Ernest Satow)와 접촉하고 있었는데, 사토는 이동인에게 조선어를 배우면서 조선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동인은 사토의 신임을 받아 영국행까지 주선받기로 한 상황이었다. 이동인은 영국에 가서 차관을 얻어 조선에 신식 군함과 무기를 들여온다는 장밋빛 꿈을 꾸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못했다.
'무서운 영국놈들······. 나도 할 수만 있다면 영국을 잡고 싶지만.'
이선은 일본 못지않게 영국도 꺼렸다. 영국은 중국에서 가장 큰 기득권을 보유한 나라였고, 그렇기 때문에 호구로 잡은 청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1894년 이전까지 청의 조선 속방화 정책을 가장 강력히 지지한 나라였다. 약소국 조선이 영국에게 어떤 호소를 하려고 하든, 영국 입장에선 알 바가 아니었던 것이다.
프랑스 영사 샤를 딜롱.
'딜롱이면 아마 임오군란 직전에 와서 프랑스와의 수교를 요구했지? 천주교 전교 문제로 인해 협상은 지연됐고, 때마침 임오군란이 터져서 중단됐지.'
병인양요를 일으킨 장본인인 프랑스는, 1830년대부터 프랑스인 신부들이 조선에 들어왔기에 어찌 보면 조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나라였다.
하지만 새로 수립된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의 대 아시아 관심사는 베트남과 인도차이나에 있었고, 조선은 부차적인 존재였다. 천주교 전교 문제를 제외하면 크게 중요한 이슈도 없었다.
'프랑스는 1884년에 베트남을 놓고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니,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나중에 접촉할 필요가 있겠군. 파리 금융시장은 해외투자에 관대한 편이니, 차관교섭 할 필요도 있겠고······.'
프랑스는 금융강국이라, 후일 차관 문제를 논의할 때 프랑스는 도움이 될 나라였다.
독일 부영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가 이때 천진에 있었어? 이홍장의 통역관이지 않았나? 그래서 조선으로 오게 됐고.'
서양과의 수교 직후, 조선이 외국인 고문관으로 초빙한 독일인 묄렌도르프.
묄렌도르프는 외교사무와 통상사무에 관한 전권을 부여받고, 해관의 창설과 운영, 외교정책을 도맡았다. 서양과 수교조차 없었던 나라에서, 서양인이 단숨에 조선의 중책을 맡게 된 것이었다.
'그만큼 조선에 근대 전문가가 없기 때문이라지만, 이홍장이 묄렌도르프를 파견한 건 결국 친밀한 관계였기 때문이지.'
이선은 묄렌도르프는 만날 필요성을 느꼈다. 조선의 묄렌도르프 초빙은 임오군란과 무관하게 결정된 것이었다. 역사가 크게 바뀌지 않는 이상, 묄렌도르프는 조선으로 가서 중책을 맡게 될 것이었다.
'떠오르는 강국인 독일과 관계를 맺으면 좋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시점에서 독일은 동아시아에 전혀 관심이 없지.'
독일은 군사강국이라, 후일 군사교관단 파견이나 무기 수입을 위해 도움이 될 나라였다.
러시아 영사 카를 이바노비치 베베르.
'베베르가 천진에 있었군. 다음 부임지는 조선이지.'
조선과 가장 관계가 깊은 서양 외교관, 베베르.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장본인이자, 1885년에 조선에 부임하여 97년까지 주재 공사로 재임했다.
베베르는 동양 문화가 밝고 처신에 능해,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가 특별히 신임했다. 1895년에 베베르가 멕시코 공사로 전임되자, 고종이 러시아에 친서를 보내 조선에 더 머무르게 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베베르는 조선에 대해 우호적이었고, 조선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많이 하였다. 고종이 러시아에 대해 우호적인 인식을 갖게 되고, 아관파천까지 단행할 정도로 러시아를 신뢰하게 된 데에는 베베르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조선이 러시아를 두려워하지만, 앞으로는 정말 중요한 나라다.'
현재 조선과 러시아의 주된 이슈는 국경 문제와 조선을 넘어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 문제였다.
조선과 러시아가 국경을 접한 1860년 이래, 러시아는 조선에게 수차례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조선은 청조차 두려워하는 북방의 대국인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것을 굉장히 꺼려했고, 불신했다.
하지만 1860년대부터 함경도에서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주하는 주민들이 대거 발생함에 따라,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는 이주민 문제도 달려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무리 내가 외국으로 나왔더라도 기반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해야지.'
이 시대에는, 해외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있었다. 간도로 이주한 조선인과, 연해주로 이주한 고려인. 하지만 간도는 봉금령이 풀린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조선인은 통계가 잡힐 수가 없는 불법 이주자였다.
그에 비하면 고려인은 러시아 지방정부에서 정식으로 이주를 받아들이고 관리했기에, 확실하게 실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려인이 그래도 1,2만은 되지? 러시아도 연해주의 개발과 식량 공급을 위해서라도 조선과 고려인이 필요하지. 답 나왔다. 역시 제일 먼저 접촉해볼 나라는 러시아야.'
미국 영사는 현재 부재. 북경 공사관까지 가야함.
'미래를 생각해보면 미국이 가장 좋은데······. 지금의 미국은 동아시아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지. 어차피 이홍장이 곧 미국과의 수교를 주선할 테니까, 조미조약을 체결한 슈펠트 제독이 오려나? 그때 접촉해보면 되겠지.'
이선은 천진에 상주하는 미국 외교관이 없는 게 아쉬웠다. 미국과 접촉하는 건 차후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순위를 따졌다.
이선은 여러 가지를 따져보다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러시아 영사관을 찾아 베베르를 만나보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음날, 천진 주재 러시아 영사관.
청나라와의 전쟁설을 반영하듯, 러시아 영사관의 방비는 엄중했다. 이선은 이홍장의 소개장을 내민 덕에 쉽게 통과되어, 영사관 응접실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어시래 오오. 반캅습네다."
뜻밖에도 러시아 외교관이 어설프나마 조선어로 인사했다. 이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가 악수를 청했다.
"Здравствуйте. I am Yi-seon, From Korea.(안녕하세요. 조선에서 온 이선이라고 합니다.)"
동양 소년이 서양 예법으로 먼저 악수를 청하면서 러시아어와 영어로 인사하다니, 러시아 외교관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천진 주재 러시아 영사 카를 베베르입니다. 귀하는 러시아와 영어를 할 줄 아십니까?"
"러시아어는 인사뿐이고, 영어는 조금 합니다. 영사야말로 조선어를 할 줄 아십니까?"
"러시아 제국에는 귀하의 동포들이 살고 있지요. 저는 동양 관련 업무를 맡으니 만큼, 인사 정도는 배웠습니다."
'어쩐지 함경도 방언 같더니만.'
"다만 이는 변방의 방언이군요. 앞으로 필요하시다면, 제가 표준 조선어를 가르쳐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지요. 대신 저는 표준 러시아어를 가르쳐드리지요."
이선과 베베르는 호의적으로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
"조선에서 이렇게 귀한 손님이 오시니 반가울 따름입니다."
이홍장의 소개장을 통해, 이선이 '조선의 서양 수교 목적으로 파견된, 고귀한 신분의 소년'이라는 걸 파악한 베베르는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환대에 감사합니다. 조선과 러시아의 관계는, 국경을 접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북경에 파견된 조선 사신이 러시아 공사관을 방문하여 필담을 나누기도 하고, 사진을 찍은 적도 있지요. 조선이 최초로 접한 서양 국가란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선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이미 18세기부터 아라사관(俄羅斯館)은 북경에 존재했고, 때때로 조선 사신과 러시아 외교관이 접촉하기도 하였다. 1816년 연행사 조인영(趙寅永)과 러시아 신부 비추린이 만나 필담을 나누며 우정을 다진 이래, 연행사가 아라사관을 방문하여 개인적 친분을 맺는 사례가 여럿이었다. 1863년에 아라사관을 방문한 연행사 이이익(李宜翼)은 조선인 최초로 사진을 남겼다.
"아, 그렇지요. 이처럼 양국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인적 교류가 빈번할 정도로 관계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양국 간에 아무런 외교관계도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습니다."
"머지않아 양국 간에 관계가 정립되리라 봅니다. 하지만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우호적인 역사를 언급하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던 이선은, 조선의 우려를 전달했다.
"러시아가 중국 혹은 조선을 침략하려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조야는 귀국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리 분쟁을 놓고 러시아와 청의 대립이 격화되자, 러시아가 곧 청나라를 치려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두만강 하구에 대군을 배치해놓고 조선을 공격한다는 소문도 돌았으니, 조선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닙니다. 러시아는 평화를 사랑합니다. 중국과의 국경분쟁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체결될 것이며, 귀국의 영토를 넘볼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러시아를 음해하려는 악의적인 소문입니다."
이런 소문은 사실에 근거한다기보단, 러시아에 대한 과도한 공포가 만들어낸 헛소문이었다.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청국 외교관 황준헌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통해 중국과 친하고, 일본 및 미국과 연대하여 러시아를 경계하라고 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선은 이웃나라인 러시아의 호의를 믿고 싶습니다."
'러시아가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라서가 아니라, 동아시아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니까. 당장 극동지역을 관리하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조선을 노리나.'
러시아 극동지역은 인구가 희박했고, 조선과 국경을 면한 연해주의 경우엔 인구의 상당수가 고려인이었다. 실질 통계에 잡히는 인구만 해도 그러니, 실상은 더 고려인 비중이 높을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조선을 넘본다는 건 가당치도 않았다.
"결코 귀국의 호의를 저버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양국 간에 수교가 이뤄져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면 오해는 더욱 사라지겠지요."
베베르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조선과의 수교 가능성을 타진해보라는 명령을 받은 바 있었다. 때마침 조선에서 온 밀사가 찾아오니 그로선 행운이 날아온 기분이었다.
"다만 양국 간에 해결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영사께서 말씀하셨다시피, 러시아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들었습니다. 이는 조선 정부의 입장과 배치(背馳)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조선 정부의 입장은, 러시아로 넘어간 이주민들을 불법으로 국경을 넘은 죄인이라 송환을 요구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이미 러시아 국민이 된 이들을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베베르는 조선의 요구를 알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이선은 웃으면서 말했다.
"송환을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조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해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귀국의 후의로 정착을 잘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우리 백성들이 러시아에서라도 행복하게 산다면 좋은 일이지요."
러시아로 이주한 백성들의 삶의 질은 조선보다 훨씬 높았고, 그로 인해 국경을 넘어 이주하려는 이들은 매해 속출하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조선 이주민들은 변방을 개척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영사께 제안하고 싶은 일도, 그와 관련된 것입니다."
이선은 단도직입적으로 베베르에게 제안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