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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18화 (18/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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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

이선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했는지, 며칠 후 이홍장으로부터 북양대신 관저에서 보자는 연락이 왔다.

"요새 군께서 많이 바쁘신 모양이더군. 각국 영사관에 출입한다지요. 특히 아라사 영사와는 돈독한 관계를 맺는 모양이던데."

이선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웃으면서 답했다.

"아라사는 현재 청과 조선을 위협하는 북방의 대국이니만큼, 그 허실을 면밀히 살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선의 대답에 이홍장도 표정을 풀었다.

"좋은 자세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로울 일이 없으니, 지피지기 백전불태는 병법의 기본이지."

"중당의 가르침은 언제나 귀담아 들을 만합니다."

이홍장은 그동안 조선으로 사람을 보내 정보를 파악했다. 완화군이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손자이자 민씨의 경계를 받는 왕자라는 점. 완화군이 갑자기 조선에서 사라져 민씨는 당혹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는 듯하지만, 운현궁은 담담한 태도라는 점.

'정리해보면, 대원군이 대청과 나에게 손자의 보호를 요청했다고 봐야겠지. 내 품에 들어온 새를 쫓아낼 수야 있겠나?'

이홍장은 대원군이 완화군을 청으로 망명시켜 보호를 요청한 것이라 판단했고, 은혜를 베풀어 양무운동을 지지하는 친청파로 키울 생각을 했다.

"아무튼, 오늘 부른 건 홍삼무역과 관련된 건 때문이오. 엄밀히 말하면 군을 따라온 송상은 조정의 정식 공무역을 통해 온 게 아니니, 청과 조선의 사무역을 금지한 법령에 따라 밀무역이오."

본래 오직 양국 조정의 허가를 받은 사절단의 공무역 형태로만 무역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중당께 부탁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북양통상대신이 무역을 허가하는 특허장을 발행했소. 이걸 지참하고 있으면, 적어도 내가 관할하는 영역 내에서는 문제가 없을 거요."

직례총독 북양통상대신 이홍장 명의로 된 특허장을 받은 이선은 고개를 조아렸다.

"중당의 은혜에 반드시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의 개항에 대비해 대외무역과 관세에 대해 공부해보겠다는 완화군의 뜻을 따른 것이며, 만약 조선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청국 내에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 책임은 직례성이 아니라 군에게 있소."

'그래도 이로써 내가 얻는 이익이 훨씬 크다. 그 정도 리스크는 감수해야지.'

"중당의 말씀을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소. 그럼 군의 사업이 번영하기를 기원하지. 조선 속담에 뭐랬더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예 맞습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이홍장과 이선은 마주보며 슬쩍 웃음을 흘렸다.

이선은 북양대신의 특허장을 받아와 송 객주에게 보여주었다.

"앞으로 이게 있으면 천진뿐만 아니라 북양대신이 관할하는 개항장 내에서 교역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거요."

"대단하십니다. 이제 밀무역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무역을 틀 수 있겠군요."

정말로 북양대신 이홍장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송 객주, 아니 송상이 완화군을 믿고 투자한 게 보답 받게 된 셈이었다.

"내가 처음 제안했던 것처럼, 홍삼을 중국에 판매하고, 서양목(면직물)을 사들여서 조선에 판매합시다."

"중국에서 홍삼 수요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에서 서양목 수요도 높지요. 지금까지는 일본 상인이 독점하고 있었지만 송상이 나서는 거군요."

"수입 수출을 합치면 이문은 최초 투자액의 열 배는 될 거요."

"이게 다 군 대감 덕입니다."

"뭘, 그대들이 나를 믿고 투자해준 덕이지. 앞으로는 무역과 상인의 시대가 될 것이고, 조선도 서양처럼 상인이 국가의 동량(棟梁)으로 대접받게 될 것이오. 그대들이 힘써주길 바라오."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송 객주는 크게 만족해하며, 이선을 향해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홍장의 특허장을 받게 된 것으로, 이선은 무역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원활히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개항장에서 점포를 마련해 홍삼 판매에 나선 송 객주와 송상의 일꾼들이, 여기 저기 얻어터지고 봉두난발로 저택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오?"

안영흠이 깜짝 놀라 물었다.

"되놈들이 조선놈 꺼지라고 점포를 박살내고, 우리를 이 꼴로 만들었습니다."

조선인이란 걸 가급적 티를 내지 않으려고 호복을 입었지만, 변발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결국 청국인과 구분이 되었다.

청국 상인들은 조선인은 천진에서 상업을 할 권리가 없다며, 송 객주의 항의에도 다짜고짜 점포로 난입하여 박살을 내고 구타한 것이었다.

보고를 받은 이선의 얼굴이 굳어졌다.

"북양대신의 허가를 받았다고 말했는데도 말이오?"

"예, 안 믿더군요. 어떤 말도 통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때려 부셨습니다. 조선에서 홍삼을 들여와 판매하는 자는 밀무역이 틀림없다며, 오직 청국 상인만 홍삼을 판매할 자격이 있다더군요."

송 객주는 호신술을 익힌 덕에 그나마 가장 덜 맞았지만, 중과부적을 이겨낼 수 없었다.

"대감, 이중당께 고해서 그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지요."

안영흠의 말에 이선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중당이 우리를 뭘로 보겠소?"

이런 사소한 일까지 이홍장에게 해결을 부탁한다면, 이홍장은 이선을 입만 살았지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어린애로 여길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 공은 점포에 난입해서 폭력을 행사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보시오. 그리고 저들이 공공연히 난동을 부렸는데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면, 분명히 뒷배를 봐주는 자가 있을 거요."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저들이 홍삼무역을 독점하려 한다면, 홍삼이 조선에서 들어온 이상 분명 조선 측에도 연계하는 대상이 있을 터. 송 객주는 이를 알아봐주시오."

"알겠습니다."

이선은 이어 장무영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무영. 그대는 저들의 무력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유사시 우리가 상대할 수 있을지 파악해보게."

"예!"

안영흠, 장무영, 송 객주는 각자 이선에게 명을 받은 정보를 구하기 위해 달려 나갔다.

며칠 후, 각자 맡은 바 정보를 구해 이선에게 보고했다.

"알아냈습니다. 난동을 부린 자들은 천진에서 홍삼판매를 독점하던 자들로, 천진 도대(道臺)를 뒷배로 삼고 있습니다."

"도대라? 그래서 저토록 무소불위였군."

도대 혹은 도원(道員)은 청나라 지방관의 명칭으로, 지방에서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 특히 천진은 개항장의 특성상 해방(海防) 업무까지 맡고 있었다.

이선은 저들이 천진 도대를 믿고 설친다는 게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대감께서 추측하신 바와 같이, 조선 상인들이 한 패로 있는 듯합니다. 이들과 밀무역해서 중국에 홍삼을 반입한 뒤, 천진 도대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인 공무역을 통해 얻었다고 한 후 판매한다 합니다."

"내 그럴 줄 알았소. 누가 누구더러 밀무역이래. 역으로 때려잡을 수 있겠군."

결국 저들이 횡포를 부린 건, 자신들이 선점해서 이권을 누리는 밀무역에 새로운 사업자가 나타난 걸 경계해서였다.

"저들이 거느리는 무력이라고 해봐야, 천진 뒷골목에서 나대는 건달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크게 걱정할만한 정도는 아닙니다."

장무영은 명령만 내리면 당장 쓸어버리겠다는 기세였다.

'훨씬 개항장 규모가 큰 상해라면 조직폭력배의 쟁투가 심하겠지만, 천진만 해도 이홍장이 직접 관리하는 곳이니 큰 탈 없이 굴러갈 테지. 이홍장의 후원을 받게 된 이상, 신속히 기선을 제압해야겠다.'

"좋소. 그럼 해답은 나왔군. 개항장에 점포를 다시 세웁시다."

"분명히 저들은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이중당께 보호를 요청해야하지 않을까요?"

"전에 말했다시피, 이 정도 일은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하오. 내가 직접 나서겠소."

"대감께서 어찌하시려고······."

"위험합니다. 군 대감과 같이 지체 높은 분이 나설만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은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내게는 그대들과 같이 믿을만한 가신이 있고, 배후에는 이중당이 있는데 뭐가 두렵겠소? 걱정 마시오. 내가 직접 가서 점포를 지킬 테니까."

자신들을 믿고 직접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이선의 말에, 세 사람은 모두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충심으로 대감을 모시겠습니다."

"저들은 감히 대감의 옷깃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이선은 직접 송상을 거느리고 개항장으로 나가 다시 점포를 세우고, 자신이 점포 한가운데에 떡하니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상인이 몽둥이를 든 건달들을 이끌고 점포를 향해 달려왔다.

"이 고려봉자(高麗棒子)놈들이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역시 고려놈들은 몽둥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느냐!"

가오리빵쯔, 즉 '고려 몽둥이'는 중국인이 조선인을 비하할 때 쓰는 표현이었다.

"저 되놈들이 감히······."

이중에서 유일하게 중국어가 유창한 송 객주가 부들거리며 분노했다. 중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이선도 '가오리빵쯔'란 말은 알아들었다.

"송 객주, 통역."

"예? 아, 예!"

이선은 상인의 모욕에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듯, 피식 웃으면서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 청국노(淸國奴)놈들아! 3백년 가까이 만주 되놈 노예노릇이나 하는 놈들이 누가 누구더러 몽둥이를 운운하느냐? 3백년째 만주 몽둥이가 무서워 노예로 기는 놈들이 입만 살았구나. 이 자라새끼(王八蛋)들아!"

송 객주는 통역하면서 이런 말까지 해도 되나 싶었지만, 속은 시원했다.

"저, 저, 저 건방진 고려봉자놈이 감히······."

"애새끼가 벌써부터 건방진 것이, 어르신에게 예의교육을 받아야겠구나!"

이선은 다시 송 객주의 입을 빌려 말했다.

"조선은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 하였다. 너희에게 조선의 예의가 무엇인지 알려주도록 하겠다!"

이선이 장무영에게 눈짓을 보내자, 장무영이 검에 손을 댔다.

"殺(죽여라)!"

청국 건달들이 점포로 몽둥이를 들고 난입했다.

"네놈들이 몽둥이만 있으니, 나도 칼집으로만 상대해주마."

퍽!

장무영은 철로 된 칼집으로 맨 먼저 들어오는 건달의 머리통을 내려쳤다.

"으윽!"

"죽여!"

장무영은 날렵한 움직임으로 난입하는 건달들을 거침없이 두들겨 팼다.

"저거 한 놈을 상대 못해서 쩔쩔 매다니, 이런 무능한 놈들! 밥값 좀 해라!"

"한 번에 덤벼들어!"

건달들이 떼로 덤벼들어보려고 했지만, 입구가 좁은 점포라 많은 숫자가 한 번에 덤벼들 수도 없었다. 건달들이 잡아보려고 해도 장무영이 훨씬 기민했다. 장무영은 칼집과 발차기로 건달들의 급소만을 노려 쓰러트렸다.

"아악!"

"어이쿠······."

'장무영이 내 생각보다 더 실력이 좋군. 운현궁이 내 경호를 맡길 만 해.'

장무영의 솜씨를 처음 본 이선은 솔직히 감탄했다. 장무영을 믿고 맡기긴 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몰릴 경우에 대비해 송상의 일꾼들에게도 전부 무장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장무영은 순식간에 건달 10여명을 쓰러트리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상인을 향해 다가갔다.

"네, 네 이놈! 나를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아느냐! 도대께서 가만히 안 계실 것이니라!"

상인의 절규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때마침 난동의 소식을 듣고 청국 병사들이 달려왔다.

"마침 잘 오셨소! 이 조선놈들이 금령을 어기고 대청국 내지에서 홍삼 장사를 하려고 있소!"

그러자 관리로 보이는 자가 상인 편을 들었다. 애초에 이럴 때를 대비해서 기다렸다가 나타난 것일지도 몰랐다.

"조선인이 천진에서 홍삼 장사를 하다니, 밀무역이 틀림없다! 금령 위반이다!"

이제 이선이 나설 차례였다.

"내 하나 묻겠소. 그대들은 천진 도대의 명령을 받소?"

"그렇다! 밀무역을 금지하는 도대의 명으로 너희를 체포한다!"

"그렇다면 천진 도대는 누구의 명령을 받소?"

"그건 왜 묻느냐?"

이선은 이홍장의 명의로 된 특허장을 내보였다.

"정4품 도대는 정2품 총독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고, 하물며 상해 이북의 모든 해안을 책임지는 북양대신과 비교하면 말할 것도 없지 않겠소?"

"이, 이, 이건······?!"

"나는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서 왔기에 가급적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으나, 저자가 먼저 폭력을 쓰려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구려."

관리는 틀림없는 직례총독 북양통상대신의 인장이 찍혀있는 특허장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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