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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인도(引導)
"Nice to meet you, Your Excellency. I am Yi-seon, From Corea(안녕하십니까, 각하. 저는 조선에서 온 이선이라 합니다)."
고든은 호복을 입은 소년이 영어로 인사하며 악수를 청하는 것도 놀라운데, 조선에서 왔다고 하니 더 놀라웠다.
"반갑습니다. 조선 사람은 처음 보는군요.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야말로 명성 높은 차이니즈 고든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선은 반가움을 표시했다. 고든이라면 그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영국 제국주의자지만, 드물게 도덕적이고 타문화에도 관용적인 인물이지.'
고든은 제국주의 시대의 군인치고는 상당히 도덕적이고 원칙을 지키는 인물이었다.
제2차 아편전쟁 당시, 고든은 영국군 지휘관으로 북경 공격에 가담했다. 하지만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원명원(圓明園) 약탈에 크게 실망한 고든은, 공친왕에게 '동료들의 야만적인 행위가 수치스럽다'고 대신 사과하여 청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이었다.
항복한 병사는 절대 죽이지 않는다든지, 서태후가 내린 은 1만 냥을 단호히 거절한다든지, 중국 문화에 대한 존중심을 보이는 태도는 중국인에게 상당한 호감을 주었다.
"차이니즈 고든이라. 과연 여기 이 사람만큼 중국을 아끼는 친구도 드물지. 만약 전쟁이 발발하면, 흔쾌히 군대를 지휘할 의사를 밝혔소."
고든의 중국행은 영국 국방부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는데, 만약 러시아가 청을 공격한다면 고든은 다시 청군 사령관이 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1870년의 '외국 군대 입대 금지법'에 따라 청과 러시아의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는 국방부의 명령에, 고든은 그렇다면 영국 국적을 포기하고 중국 국적을 취득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만약에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긴다면, 영국인이 아니라 중국인으로서 싸울 용의가 있습니다."
고든의 태도는 이홍장뿐만 아니라 청 조정을 크게 감복시켰고, 청 조정은 북경으로 들어와 회의에 참석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제가 희망하는 바는, 청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아닌 평화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소. 근데 만약 협상이 결렬되어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러시아는 동양의 대국인 청에게 대군을 투입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약 조선을 공격한다면? 러시아는 부동항을 원하는데, 조선은 러시아를 막을 능력이 되지 않소."
'그럴 가능성도 없는데······.'
이선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가 청은 아니더라도 부동항을 원할 목적으로 조선을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 이 소년은, 조선과 서양 사이의 수교를 타진하기 위해 온 고귀한 신분의 밀사요."
"오, 그렇습니까. 저는 외교는 잘 모르지만, 영국 정부 역시 조선과의 수교를 희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러시아가 조선을 공격한다면, 솔직히 말해 청이 이를 효과적으로 방어할 자신이 없소. 영국이 조선을 도와 싸울 수 있겠소?"
'그러니까 그런 일은 없다니까······.'
전혀 가능성은 없으리라 보지만, 이선은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저는 영국 정부를 대표하는 입장이 아니기에,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침략행위를 간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든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군인인 그는 가급적 외교적 문제에는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길 바라야지. 왕자, 현재 조선의 상황을 고든 제독에게 간단히 설명해 줄 수 있겠소?"
이홍장이 사용한 'Prince'라는 단어에, 고든이 놀라서 이선을 쳐다보았다. 고든은 베베르처럼 이선을 왕자라고 생각은 못했지만, 적어도 고위 귀족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저도 조선의 상황을 모두 알 수 있는 건 아닙니다만, 대신의 요청이 있으시니 간략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이홍장이 이선을 부른 이유 중의 하나였다. 만약에 있을지도 모를 러시아의 공격 시도에 대해 미리 대비할 수 있도록, 조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선은 현재 조선이 정치경제적으로 취약한 상황이며, 군사적으로는 더욱 극히 취약한 상태임을 솔직히 인정한 후에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러시아가 조선을 공격하면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결코 조선을 공격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째서 확신하십니까?"
이선은 고든의 붉은 군복, 즉 영국군의 상징인 '레드 코트'를 가리켰다.
"귀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호오, 그거 재미있는 말이군요."
영국이 러시아를 경계하는 것 이상으로, 러시아는 영국을 두려워했다. 러시아는 쓸데없이 조선을 침략해 영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었고, 대 조선 정책도 유보적인 상황이었다.
"조선의 지리적 위치는 유럽으로 치면 발칸이나 터키와 유사하고, 동해는 흑해, 조선해협은 보스포루스해협과 비슷합니다. 영국이 크림전쟁과 최근의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했듯이, 극동에서도 러시아를 막으리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영국이 더 공격적이지.'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할 목적으로 이미 1875년에 거문도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역사대로 진행된다면 1885년에 점령을 실천으로 옮긴다.
"아주 명석하시군요. 공께서 하신 말은 현재 극동 정세를 정확히 분석한다 할 수 있겠습니다."
솔직한 성격의 고든이 이선에게 찬사를 보냈다.
"내가 어째서 이 소년을 불렀는지 제독도 이해했을 거요. 나이는 어리지만 조선에서 가장 현명한 축에 들어간다 할 수 있겠지."
"과찬이십니다."
"이 소년의 할아버지는 조선의 고위 귀족인데, 손자 교육을 아주 잘 시킨 듯하오. 앞으로 조선이 서양과 수교하게 되면 빛을 발하게 될 거요."
"그렇군요. 대단합니다."
이홍장은 여전히 이선의 탁월한 능력이 대원군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군, 그러면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오. 나는 제독과 더 이야기 할게 있어서······."
"예, 알겠습니다."
이선은 이홍장과 고든에게 정중하게 예의를 표한후, 자리에서 물러났다.
'차이니즈 고든이라, 잘 됐군. 영국에도 한명쯤 선을 댈 필요가 있었는데. 고든의 지위가 영국 내에서 특별히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수단에서의 고든의 죽음이 자유당 내각을 붕괴시킬 정도로 영국 내에서 명망이 높은 사람이다.'
청의 상승군 지휘관, 이집트의 파샤, 수단 총독 등 외국의 다양한 직위를 역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고든은 모험심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 모험심이 고든을 수단에서 이슬람 반군에 의해 죽게 만들지만, 영국 제국주의를 한 몸으로 상징하는 고든이란 인물은 영국인의 사랑을 받는 존재였다. 고든의 비극적인 죽음은 영국 여론의 분노를 낳았고, 1885년 글래드스턴 내각의 붕괴로 이어졌다.
'워낙 모험심도 강한 사람이니, 나중에 조선으로 군사고문관으로 데려올 수도 있지 않을까······.'
이선이 추구하는 1차적인 외교적 구상은, 청과 일본,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전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영국 정부가 나를 상대해주지도 않겠지만, 바로 그 영국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고든을 나중에라도 조선으로 데려올 수 있다면, 영국은 조선을 공격하지 못한다. 거문도 사건이나 러시아와의 극한대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고든의 등장이 이선으로 하여금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만들었다.
상해에서 천진을 거쳐 북경으로 가는 동안, 이선은 의도를 숨기고 고든에게 접근했다. 서양 문물에 궁금한 척 하며 순진하게 영어로 질문을 하는 동양 소년을 고든도 호의적으로 반응했다.
"제독께서는 영국군의 원명원 약탈을 비난했고, 청군의 반란군 학살에 반대했고, 태후가 내린 은사금도 거절했다 들었습니다. 이는 유학을 공부한 사대부도 쉽게 할 수 없는 일인데, 제독께서는 어찌 그럴 수 있었던 것입니까?"
고든은 동양인이 유교와 사대부를 최고로 치고, 기독교를 낮게 여기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자부심을 갖고 말했다.
"이는 주님께서 내게 명하신 바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신 앞에 당당해지길 원하며, 기독교의 원칙에 충실하고자 합니다."
고든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고, 군인이 아니면 목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신앙이 투철했다.
"호오,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렇게 훌륭하단 말입니까? 우리 조선에서는 기독교는 사교라 여겨, 금령을 내려 금지합니다."
"이는 잘못된 편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시며, 조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이 그리도 훌륭하다면, 저도 성경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이선은 일부러 순진한 척하며 떡밥을 던졌다.
"정말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공께서는 영어를 읽을 수 있으니, 제 성경을 드리겠습니다."
예상대로 고든은 상당한 열의를 보이며, 이선에게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려고 힘썼다.
고든이 성경을 가져오자, 이선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어째서 말입니까?"
"조선에서는 기독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조선의 왕족이 되어 법을 어기겠습니까? 반드시 처벌받게 될 것입니다."
"공께서는 이미 중국에 와 있는데, 어찌 조선의 처벌을 두려워하십니까?"
"음······. 사실 제 할아버지께서는 기독교 탄압에 앞장서신 분입니다. 저는 그 분을 사랑하고 존경하기에, 차마 기독교를 긍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와서 처음 교회를 구경했습니다. 성화와 성상을 보고 성가를 들었습니다. 그 성스러움이 제 영혼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고든은 그 순간 신의 인도와 같은 걸 느꼈다. 기독교를 거부하던 조선인이 자발적으로 성스러움을 느끼다니! 그는 이선의 손을 잡으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형제여,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모든 이를 사랑하시며, 형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고든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10여 년 전 조선에서 대대적인 기독교 탄압이 있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벌받았다고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를 탄압하던 이의 후손이 스스로 기독교에 감화되다니, 이는 신의 인도가 아니고서야 설명될 수가 없었다.
'오, 이거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좋은데.'
이선은 더욱 적극적으로 연기를 했다.
"저는 조선의 왕족이기에 기독교를 믿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후일 조선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서양과 기독교에 대해 모르는 2천만 조선인에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하고 싶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실 겁니다!"
고든은 열정적으로 답했다.
"저는 조선에 기독교뿐만 아니라 서양식 제도와 군대도 갖추어 자주독립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그게 신이 제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신앙인이자 군인인 제독께서도 조선으로 와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
"하느님을 모르는 2천만의 조선인에게, 그 가르침을 전파할 기회가 있다면 마땅히 도와드려야지요. 저는 군인이니만큼, 군인으로서 돕겠습니다."
이선은 속으로 감탄했다. 거액의 돈이나 높은 지위로도 절대 넘어오지 않는 고든이, 기독교 전도에 대해서는 열광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그래, 이거네! 이 시대 서양인들을 낚으려면 돈이나 지위보다 신앙이 더 효과적이겠군.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겠다.'
이선이 기독교에 기울어졌다고 믿고 감동하는 고든과 달리, 이선은 지극히 계산적이었다.
서양은 자신들의 문명이 기독교 문명이라 생각했고, 기독교를 전파하는 게 사명이라 여기는 이가 많았다. '하느님을 모르는' 조선을 기독교 전도의 블루오션으로 여기는 이가 차고 넘쳤다. 조선은 신앙을 미끼로 서양을 낚을 수 있었다.
'미국인 앞에서는 청교도, 영국인 앞에서는 성공회, 독일인 앞에서는 루터파, 프랑스인 앞에서는 가톨릭, 러시아인 앞에서는 정교회. 때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지.'
무교인 이선은 오히려 종교를 기호품처럼 이용할 수 있었다. 나라별로 이해관계가 다른 종파 간의 경쟁을 부추겨 이득을 취할 수도 있었다.
'물론, 조선인과 중국인 앞에서는 성리학을 숭배하는 유학자로 흉내 낼 수도 있지.'
사람의 호감을 얻는데,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도 없다.
이선은 차이니즈 고든의 호감을 얻게 된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갈 중요한 처세술을 배우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