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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왕양이(尊王攘夷)
북경에서의 일정을 마친 후, 이홍장은 이선과 변원규를 대동하고 천진으로 떠났다.
"군 대감, 날이 무더운데 심신은 평안하십니까?"
"덕분에 아주 좋습니다."
조선 조정의 정식 사절로 온 사역원정 변원규가 이선을 깍듯이 모시는 걸 보고, 이홍장은 이선의 중국행이 본인 주장대로 서양과의 수교를 돕기 위한 목적이라는 말을 납득하게 되었다.
8월의 무더운 날씨 속에서, 이홍장은 새로운 손님을 기다렸다. 바로 미국의 아시아 특사 슈펠트(R. W. Shufeldt) 해군 제독이었다.
이미 1867년에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선을 방문하여 개국을 촉구했던 슈펠트는, 1878년 미국 정부로부터 조선과의 조약에 대한 전권을 얻어 조선으로 향했다.
1880년 4월, 나가사키에 도착한 슈펠트는 일본 외무경 이노우에 카오루에게 조약 주선을 부탁했으나 거절당했다. 무작정 군함을 타고 부산항을 방문한 슈펠트는 국서를 전달했으나, 개국을 확정시키지 않은 조선이 응할 리가 없었다.
일본이 미국의 기대와 달리 순순히 조선과의 조약을 주선해주지 않자, 슈펠트는 난망하게 되었다.
때마침 보고를 받은 이홍장이 슈펠트를 천진으로 초청했고, 슈펠트가 수락하면서 천진에서 조선 수교를 놓고 회담이 결정된 것이다.
1880년 8월 25일.
슈펠트가 탄 미 군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는 천진항에 입항했다. 이홍장은 슈펠트를 북양대신 관저에 초대했고, 두 사람의 회담이 시작되었다.
역사대로라면 조약 당사자인 조선이 제3자가 되고, 청국과 미국 사이에서 조미조약이 논의되는 역설적인 상황이지만 바뀐 역사에서는 좀 달랐다.
천진에는 이선이 있었던 것이다.
26일, 이홍장은 슈펠트와의 3시간에 걸친 단독회담을 마친 후, 이선을 소개했다.
"Admiral, this is an envoy from Corea. Prince Yi seon.(제독, 이쪽은 조선에서 온 사절이오. 프린스 이선.)"
"Good morning, Your Excellency. I am Yi seon, From Corea. It is a great honor to meet you.(안녕하십니까, 각하. 조선에서 온 이선이라고 합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58세의 슈펠트는 눈앞의 소년이 조선 왕족이라는데 놀랐고,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데 더 놀랐다.
"저야말로 만나서 영광입니다. 미합중국 특명전권공사, 해군 준장 슈펠트입니다."
이선은 체격이 한참 큰 슈펠트와 서양식으로 악수했다. 슈펠트는 신기한 듯 했다. 미지의 나라 조선의 왕족과 만나게 될지도, 그 왕자가 영어를 쓰고 서양 예절을 알거라곤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본관은 조선에 대한 수교 전권을 부여 받았지만, 직접 조선인과 차분히 대화해보기는 처음입니다. 부산항을 방문했을 때도 조선의 관리들은 하루라도 빨리 떠나주길 요청하더군요. 대화를 해볼 시간도 없었습니다."
"아직까지 조선 정부의 공식 입장은, 서양과의 수교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곧 정책은 변화할 것이며, 늦어도 내년에는 수교 계획을 통보할 것입니다."
"아시아에 도착한 이래 가장 반가운 뉴스군요."
슈펠트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프린스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최근에 이탈리아의 제노바 공작(Prince of Genoa)이 조선의 부산을 방문해 수교를 요청한 걸 아십니까?"
'그런 일도 있었나? 이탈리아가?'
"아뇨, 처음 듣습니다."
1880년 8월, 이탈리아 국왕 움베르토 1세의 사촌인 제노바 공작 톰마소(Tommaso di Savoia)가 비공식적으로 조선을 방문해 수교를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부산 주재 일본 영사의 비협조로 국서 전달에도 실패했다고 합니다. 대신 동해안의 조선인들은 친절하게 대해줬다죠. 사냥하고, 굴 캐고. 여름 휴가 잘 갔다 온거죠."
슈펠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빈말로라도 이탈리아는 세계적 열강이라고 말하기 어렵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교를 원한다는 건, 조선에 대한 서양 각국의 관심이 높다는 걸 의미합니다."
'오, 이런 사례가 있구나. 왕족이 비공식적으로 미수교국을 방문해 수교를 논의하는 경우도 있단 말이지? 그럼 전례가 없는 것도 아니군.'
이선은 제노바 공작의 사례를 자신이 써먹으면 적절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또한 미국과 이탈리아의 사례에서 드러나듯, 일본은 조선 조정이 서양인에게 적대적이라 하여, 수교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건 핑계입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이익을 독점하길 원하고 있으니, 오히려 중간에서 훼방 놓는 것이지요."
이선의 비판에, 이홍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의 행태가 심히 수상하오. 그렇기에 대청은 아무런 조건 없이, 조선과 서양 각국 간의 수교를 주선하는 것이오."
'아무런 조건이 없을 리가 있나.'
이선은 청에 대해서도 냉소적이었다. 슈펠트와의 회담에서 이홍장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는 자주이나,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걸 명문화하려했고, 슈펠트는 난색을 표했다. 국제법 하의 대등한 관계에서 조약을 체결해야 미국이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조선에 대해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만, 먼저 이걸 물어보고 싶습니다. 조선의 국제적 위치는 어찌 됩니까?"
이홍장이 황해에 진입한 러시아 함대에 대한 보고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슈펠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이선은 주위를 둘러보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보이자 단호하게 답했다.
"Kingdom of Corea was not a 'vassal state', but a 'tributary state' of the Chinese empire. (조선 왕국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조공국'입니다.)"
"속국이 아니라 조공국이라······."
서양의 외교에서는 조공체제가 없으니, 헷갈려하는 건 당연했다.
"근대의 국제법과는 상충되는 전근대적 유대관계입니다. 중화 세계의 일원으로, 한가족과 같은 관계라는 의미이지요."
"그러나 그걸 국제법적으로 적용하려면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최근의 사례와 비교한다면, 불가리아 공국과 비슷하겠습니다."
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의 결과,산 스테파노 조약으로 불가리아가 독립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한 불가리아의 독립과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을 우려한 영국의 항의로, 베를린 회의에서 불가리아의 위치가 규정되었다.
불가리아의 영토를 반으로 줄이고, 법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영역으로 남지만, 내정·외교·군사에서 완전한 자치를 누리게 되었다.
1880년대 개화파 유길준(俞吉濬)이 주목한 사례가 바로 이 불가리아였고, 이선이 이를 역사보다 빨리 활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신생독립국 불가리아는 불과 7년 만에 세르비아를 격파하고, 명색이 종주국이라는 오스만에게서 영토도 되찾아오지. 조선이 나아갈 길로 참고할 만하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본국에 이 사례를 참조하라고 보고하겠습니다."
"예. 하지만 청의 공식적 입장은, 청은 조선의 종주국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조선이 종주권을 부정해서 구태여 자극하고 싶지 않으니, 귀국이 감안해서 조선의 국제법적 권리를 지켜주십시오."
슈펠트는 이선이 하는 말의 속내를 파악했다.
"전근대적 관계와 근대적 국제법이 상충된다면, 당연히 국제법을 따라야지요. 그리 하겠습니다."
"귀국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슈펠트와 이선은 다시 악수를 나누었다.
"귀공께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영어만 유창한 게 아니라, 국제법과 국제정세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하고 계시군요. 조선에 대한 제 인식을 바꿔야겠군요."
슈펠트의 찬사에 이선이 빙긋 웃었다.
"조선도 나름대로 준비하는 게 있습니다."
"······ 군 대감, 대체 양인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신 겁니까?"
그동안 대화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변원규가 마침내 침묵을 깼다. 한어 역관인 변원규는 중국어에는 능통했지만, 영어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으니 꿀 먹은 벙어리였다.
이선은 슈펠트와 나눈 대화를 변원규에게 빠르게 설명하고, 건의사항을 덧붙였다.
"지금 시급한 건 사역원에 영어나 법어 역관을 양성하는 겁니다. 현재의 외교 구도 하에서 서양 언어를 모르면 의미가 없습니다. 청국에 올 유학생들에게 영어부터 배우라고 하세요. 아니, 당장 영감부터라도 배워두면 좋을 겁니다."
"이 나이에 어찌 서양 언어를······."
"영감의 춘추가 올해로 몇입니까?"
"마흔 셋입니다."
"늦지 않았네요. 이중당도 마흔 넘어서 영어를 배워서 저렇게 유창하게 구사합니다. 북양대신은 중국어가 가능한 서양인 통역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사람인데, 왜 구태여 영어를 배웠겠습니까? 언어를 구사하면 저들과 내밀한 대화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서양의 외교관들이 유독 동양에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를 높이 평가한 건, 물론 그들의 정치적 식견이 탁월한 점도 있지만 유창한 영어실력 덕분도 있었다.
"대감의 말씀을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변원규는 역관이니만큼, 이선의 말을 정확히 이해했다.
"앞으로 조선에서 대신을 파견해 이중당과 함께 수교를 논의하게 될 겁니다. 아마 김윤식 대감이 오지 않을까 싶은데. 미국 측 전권대신은 여기 이 슈펠트 제독이 될 겁니다. 너무 북양대신에게만 의존하지 말고, 최대한 직접 논의해보도록 하세요. 조선의 국익을 위해서 말입니다."
"명심, 또 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변원규는 이선의 가르침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제 내가 청에서 할 일은 대충 끝났군.'
이홍장과 슈펠트가 회담을 가진 날, 수신사로 일본을 방문한 김홍집은 일본 주재 청국 공사인 하여장으로부터 대미 수교를 제안 받았다.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업무를 마친 이홍장은 다시 돌아왔다. 이선이 이홍장을 향해 물었다.
"아라사의 일은 어찌 되었는지요? 혹여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흠, 전쟁은 없을 거요. 협상을 유리하게 하기 위한 무력시위요. 결국 아라사 수도에서의 협상으로 결판이 날 거요."
총리아문은 영국 주재 청국 공사인 증기택을 러시아로 보내,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훈령을 내린 상황이었다.
"중당께 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호오, 말해 보시오."
"저를 아라사 수도로 보내주십시오. 직접 아라사의 허실을 보고, 조선이 아라사를 방비하는 대책을 얻고 싶습니다."
이홍장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군이 아라사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아라사는 대청과 조선을 공동으로 위협하는 북방의 강국입니다. 대청과 아라사가 협상을 하는 것을 직접 본다면, 향후 조선에도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미 베베르로부터 러시아의 초대장을 받은 이선은, 이홍장의 허락만 받으면 바로 떠날 생각이었다.
"아라사 수도는 군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멀고 험한 길이오. 여기서 배를 타고 두 달은 가야할 것이오."
"사역원정이 왔으니, 이제 제가 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습니다. 부디 대청과 조선을 위해 아라사에서 견문을 넓히게 해주십시오."
"뜻은 훌륭하나, 왕족인 군이 직접 나설 필요가 있소?"
"저를 아라사로 보내주시면, 그곳에서 대청과 중당의 이익을 위해 일하지요."
이익이란 말에 이홍장이 처음 반응을 보였다.
"당장 해삼위-원산-부산-인천-천진-상해를 잇는 무역로가 생기면 북양대신께 가장 큰 이익이 될 겁니다. 일본의 조선 무역 독점도 막을 수 있지요."
"생각을 많이 했군. 그도 그렇지만, 혹시 대청을 떠나려는 이유가 조선의 중궁전과 관계가 있소?"
이홍장은 이선의 조선에서의 입지를 조사해서 알고 있었다.
"짐작하신 바입니다. 제가 중당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조선에서는 난리가 날 겁니다. 저는 중궁전과 세자궁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멀리 떠나려는 것입니다."
이홍장은 이선의 처지가 이해가 됐으나, 자신의 품에 들어온 새를 날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 충심은 이해하오. 하지만 피하는 게 꼭 답은 아니지 않소?"
"지금은 중이(重耳)가 여희(驪姬)의 참소를 피해 잠시 몸을 피하며 때를 기다린 것처럼, 세상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힐 때입니다."
중이, 즉 춘추오패인 진문공(晉文公)을 스스로에 비유하는 패기에 이홍장이 껄껄 웃었다.
"하하, 그럼 중이처럼 19년이나 세상을 떠돌겠다는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중이가 진으로 돌아와 주의 천자를 높이 받들어 존왕양이(尊王攘夷)를 하였듯, 외신 또한 그리하겠나이다."
이선의 비유적인 말을 해석하면, 조선으로 돌아와 왕위를 쟁취한 후 중원의 천자를 높이 받들어 서양 오랑캐와 싸우겠다는 말이었다. 현실성은 차치하더라도, 이홍장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좋소! 사내라면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중이처럼 세상을 떠돌면 견문을 넓히면 장차 패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겠지. 뜻대로 하시오."
"감사합니다! 반드시 중당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선이 생각하는 '존왕양이'는 이홍장의 생각과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이홍장이 그걸 깨달을 무렵에는, 이미 때는 늦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