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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26화 (2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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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으로 향한 창(窓)

수에즈 운하를 지나 지중해에 접어든 기선은, 다른 배들과 달리 북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경유,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흑해에 진입했다.

러시아 제국 제2의 항구인 오데사가 목적지였다. 오데사는 러시아 제국 최대 수출품인 밀의 집산지인 우크라이나에 있었으므로, 러시아에게 중요한 수출항이었다.

그렇기에 철도 사정이 다른 나라에 비해 열악한 러시아에서,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오데사를 잇는 철도가 있었다.

5주간의 기나긴 항해를 마친 끝에 오데사에 도착한 이선 일행은, 오데사에서 잠시 쉬었다가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바다만 끝없이 이어진 줄 알았는데, 도착하고 나서도 육지가 끝없이 이어지는구나."

"그래도 서양인들은 기선과 기차가 있어 이 넓은 대륙을 빠르게 잇는군요."

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키예프-오데사를 잇는 러시아 종단철도는 문자 그대로 유럽 러시아를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종단했다. 증기기관차가 속도를 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중간에 대도시마다 쉬었다 가고 하니 다시 며칠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드디어 페테르부르크입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신사 여러분."

모스크바를 출발한 열차가 마침내 페테르부르크 역에 진입하자, 베베르가 환영사를 건넸다.

천진을 출발한 지 무려 6주 만이었다. 9월 초순에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10월 중순이었다.

북위 60도에 위치한 북방의 도시답게, 이미 페테르부르크에는 첫눈이 내린 뒤였다.

지금껏 따뜻한 남쪽에 있다가, 갑자기 밀려오는 추위에 이선은 비로소 러시아라는 걸 체감했다. 이 시대 조선의 추위도 만만치 않은지라, 안영흠과 장무영은 곧잘 적응하는 듯 했다.

그래도 프록코트만으로는 추위를 막는데 한계가 있어서, 이선 일행은 베베르의 권유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일 먼저 외투와 털모자부터 마련했다.

'아, 이래서 러시아에선 다들 모피를 입는 거구나. 모피 얻겠다고 우랄산맥 넘어 시베리아까지 진출한 거고.'

17세기 러시아의 동진이 모피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사를 바꾼 모피 애호였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베베르의 물음에 이선이 답했다.

"호텔에 숙소를 잡으려고 합니다."

이홍장은 페테르부르크 주재 청국 공사관에 묵으라고 소개장까지 줬지만, 이선은 공사관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기껏 페테르부르크까지 왔는데 공사관으로 가서 청나라 외교관들의 감시대상이 될 필요가 없지.'

"아니, 호텔이면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임대로 집을 구하는 게 낫습니다."

"지금 막 온 사람이 임대를 구하는 건 무리죠. 집을 얻을 때까지 호텔에서 묵을까 합니다."

"그럼 숙소를 구할 때까지 저희 집으로 가시겠습니까?"

이선은 정중하게 사양했다. 러시아 외무부의 영향력 하에 있을 생각도 없었다.

"제안은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어찌 그렇게까지 신세를 지겠습니까. 호텔에 머무르겠습니다."

"허허, 정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제가 호텔을 추천해드릴까요?"

"제가 미리 알아봐둔 데가 있습니다. 여기로 가시지요."

이선은 영어로 발행된 러시아 여행 가이드북을 지참하고 있었다. 19세기 말에 해외여행이 크게 유행하면서, 여행 가이드북이 인기를 끌었다.

특히 '머레이의 여행자를 위한 소책자(Murray's Handbooks for Travellers)'는 이 시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이선이 갖고 있는 건 머레이가 출판한 1878년 최신 버전 러시아 여행 가이드북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중심부, 넵스키 대로 한복판에 위치한 그랜드 호텔 유럽(Grand hotel europe). 카잔 성당까지는 도보로 불과 400미터, 러시아 제국을 상징하는 겨울 궁전까지는 1킬로라 걸어서 갈 수 있었다.

21세기에도 성업 중인 이 호텔은, 1875년에 개장하여 1880년 페테르부르크에선 최신 호텔이었다.

"허허, 이 호텔은 제가 중국으로 발령받은 후에 생긴 곳이라 처음 보는군요. 위치도 좋고, 최신 시설이라 숙박비용이 엄청날 것 같은데······."

"괜찮습니다. 노잣돈을 넉넉히 준비했거든요."

이선이 굳이 이 호텔을 택한 건, 좋은 위치의 최고급 호텔이란 점도 있지만 역사성이 있어서였다. 1897년, 민영환이 유럽 6개국 전권공사에 임명되어 러시아를 방문하여 황제에게 신임장을 제출했을 때 투숙했던 호텔이 바로 이곳이었다.

민영환은 최초의 주 러시아 전권공사였고, 이선은 자신을 조선 최초의 유럽 주재 외교관으로 여겼으므로 일부러 이 호텔을 택한 것이었다.

베베르와 함께 동양인 셋이 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보이는 자연스럽게 베베르의 짐만 들어주고 나머지 셋은 무시했다. 자연스러운 하인 취급에 이선은 빈정 상했지만, 지배인에게 다가갔다.

"Здравствуйте.(안녕하세요.)"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분명히 말을 건 건 이선이었는데, 지배인은 자연스럽게 베베르에게 답했다.

"아, 투숙객은 내가 아니고 여기 이분이시오."

지배인은 이선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난감하다는 식으로 베베르에게 답했다.

"저희 호텔은 페테르부르크 최신 최고의 호텔로서, 투숙비용이······."

이선이 슬슬 기분이 나쁘던 참에, 베베르가 지배인을 향해 신분증을 보여주고 러시아어로 빠르게 쏘아붙였다.

러시아어를 잘 못하는 이선이지만, 분위기만 봐도 베베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짐작이 갔다.

지배인은 굽실거리면서, 이선 일행의 짐을 보이들에게 나르게 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여기 이 분은 동양의 고위 귀족으로, 러시아 외무부의 귀빈이라 하였습니다. 이제 제대로 모실 겁니다."

"늘 영사님의 신세를 집니다."

"뭘요, 공을 초대한건 러시아 외무부인데. 숙소를 제공해드려도 부족한데 호텔에 투숙한다니 도와드려야지요."

이선과 베베르는 며칠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잠시 작별을 고했다.

"어어, 이거 왜 이러는 거야?"

난생 처음 엘리베이터를 타본 안영흠이 깜짝 놀라 외쳤다. 철제문이 닫히고, 갑자기 덜컹거리면서 올라가니 기겁을 할만 했다.

"지진이라면 어서 대피해야지요!"

장무영은 지진으로 오해하고 철문을 열려 했다.

"촌티 내지 말고 가만히 있으시오. 알아서 우릴 올려다 줄 터이니."

이선의 말에 안영흠은 불안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엘리베이터는 천천히 5층까지 올라갔다. 안영흠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온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양인들은 정말 대단하군요. 계단을 걷지 않고도 올라가는 마법을 쓴단 말입니까?"

"엘리베이터······ 그러니까, 승강기라는 거요."

"대감은 어찌 모르시는 게 없으십니까?"

"아, 난 상해를 방문했을 때 서양인 조계에서 타봤거든."

이선의 말에 안영흠이 놀라움 섞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배인이 안내한 객실은 동양풍으로 꾸며 놓은 곳이었다. 창문 밖으로 넵스키 대로가 보이는, 넓찍하고 아늑한 방이었다. 이선은 만족감을 표하고, 지배인과 짐을 나른 보이들에게 두둑한 팁을 주었다.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공작(князь) 각하. 앞으로 저희 호텔에서 편히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지배인은 베베르의 지시가 신경 쓰였는지, 아니면 이선의 팁이 만족스러웠는지 손을 비비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크냐지라고? 그럼 공작이잖아. 지나친 대접은 오히려 좀 부담스러운데.'

아무튼 신분제 국가인 러시아 제국에서 귀족 대접해줘서 나쁠 건 없었다.

이선의 화려한 페테르부르크 생활이 시작된 것이었다.

객실에 여장을 푼 이선은 안영흠과 장무영을 데리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좋든 싫든 이 도시에서 극히 드문 동양인인 이선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다. 이선 일행의 등장에 넵스키 대로를 걷던 러시아인의 시선은 일제히 집중되었다.

"왜 다 우리만 쳐다보죠?"

"입장 바꿔서 서양인이 한양 한복판에 나타나 육조거리를 걷는다고 생각해 보시오. 안 쳐다보겠소?"

"하긴 그렇군요."

"그러니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고 도시나 구경합시다."

이선은 탁 트인 넵스키 대로와 웅장하게 서있는 고전주의 양식의 건축물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21세기의 기억이 있는 곳에 1880년의 도시를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정말로 엄청나게 큰 도시군요."

"지금까지 봐왔던 그 어떤 도시보다 크고 아름답습니다."

"맞아, 천자가 계신 북경이나 비교가 되려나? 아니지, 막상 북경을 보고 여길 보니 비교가 안 되겠는 걸······."

안영흠과 장무영은 눈이 돌아가는 듯 했다. 페테르부르크는 그들이 경험한 최초의 서양 대도시였다. 더욱이 철저하게 인위적으로 유럽식으로 건설된 도시인 페테르부르크는 '서양의 표본'으로 손색이 없었다.

"잘 봐 두시오. 이게 바로 근대 문명이고, 서양 문명이오. 페테르부르크란 도시 자체는 역사가 지극히 짧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도약한 저들 서양 문명 그 자체를 상징하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젊은 도시였다. 1703년에 처음 건설되어, 1712년에 수도로 선포된 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공언한 바와 같이 '유럽으로 향한 창'이었다.

네바강 하류, 발트해의 해안가의 늪지대에 건설된 페테르부르크는 철저하게 인공적인 도시였다. 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가 상징하는 러시아의 보수성에 대한 근대와 합리성의 승리를 의미했다.

러시아적 '중세'를 거부하고 유럽식의 '근대'를 도입하고, '유럽을 향한 창'인 페테르부르크를 통해 문화적 정체성을 철저하게 개편한다. 과거 러시아의 무지하고 후진적인 관습을 버리고 진보적이고 계몽적인 근대 서구 세계에 동참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표트르 대제와 페테르부르크의 목표였다.

이선은 넵스키 대로 끝에 있는 해군본부를 지나, 네바 강을 향해 힘차게 뻗어있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을 보았다.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시킨이 서사시의 주제로 썼던 그 기마상이었다.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는 초월적인 존재.

'개혁을 하려면, 나라를 바꾸려면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해야지. 어설프게 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이선은 표트르 대제야말로 낙후한 국가를 단기간에 근대화시킨 모범으로 여겼다.

표트르 대제는 급진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러시아를 변화시켰다.

무수히 많은 새로운 문물과 제도가 러시아로 들어왔고, 신분이 아닌 능력 중심의 인재 선발로 많은 러시아인들에게 기회를 주었다.

표트르 대제 이전의 모스크바 대공국과 이후의 러시아 제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였다. 러시아인의 삶은 완전히 새롭게 일신했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반대파는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트르 대제는 한나라의 운명을 뒤바꾼 계몽적 전제군주의 전형이었다. 역사는 표트르를 러시아를 바꾼 위대한 군주로 기억한다.

'표트르가 10대에는 이복누이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밀려 자유롭게 자랐지. 그 경험이 혁신적인 표트르 대제의 출발점이 되었고.'

표트르는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자마자 이복 누나 소피야의 쿠데타로 밀려났다. 소피야의 섭정기간 동안, 표트르는 주로 궁궐 밖의 외국인 촌에서 평민들과 어울리며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그 결과 기존에 찾아볼 수 없었던, 완전히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황제가 등장하게 된 것이었다.

17세에 소피야를 몰아내고 권좌에 오른 표트르는, 이후 자신의 방식대로 러시아를 바꿔나갔다.

문득 이선은 표트르 대제의 삶이 자신에게 와 닿았다.

'모델이라면 역시 진문공보다는 표트르 대제지.'

궁궐 밖에서 견문을 넓히며 힘을 기른 표트르가 소피야를 몰아내고 권좌에 올랐듯이, 세상을 떠돌며 견문을 넓히며 힘을 기른 이선이 중전 민씨를 몰아내고 권좌에 오르고 싶었다.

그리고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를 바꾼 것처럼, 조선을 철저하게 바꾸고 싶었다.

200년 전 러시아보다 훨씬 사정이 열악한 조선에서 근대화를 완수하려면, 더 철저한 개혁을 필요로 했다.

'어떠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진보를 향해 멈춤 없이 달려가야 한다. 평가는 역사가 내릴 일.'

이선은, 조선의 표트르 대제가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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