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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27화 (27/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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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리다

'혁명······. 혁명이 필요하다. 산업혁명, 시민혁명, 과학혁명, 사상혁명. 조선을 총체적으로 뒤바꿀 대혁명이.'

이선도 가능하다면, 프랑스나 미국처럼 민중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독일이나 일본처럼 과두 지배층의 혁신을 통한 위로부터의 혁명을 고려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선의 백성은 아래로부터의 대혁명을 일으킬 역량이 부족하고, 조선의 지배계층인 양반은 더 절망적이라 위로부터의 혁명은 어림도 없지!'

조선의 민중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서 보았듯이 반(反)봉건적 농민혁명을 일으킬 동력은 갖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전통사회 중심의 혁명이라 근대화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은 소수의 개혁파를 제외하면, 대개 이익에만 몰두하는 반동적 계급이었다. 프로이센의 융커나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본질적으로 보수적일지라도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 혁신을 택할 가능성은 없었다.

시간이 급선무인 근대였다. 조선의 생존을 위해 근대화를 추구하려면, 일관적인 목표를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다.

'내가 그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표트르 대제야 역사에 길이 남을 지도자였지만, 나는 역사에 대해 좀 알고 있는 평범한 왕족일 뿐인데······.'

이선은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을 보다가, 강한 자기암시를 걸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성장하면 되지. 표트르 대제도 초인은 아니었다. 숱한 실수를 저질렀지. 역사를, 특히 앞으로 전개될 역사를 안다는 건 나만의 장점이다. 이를 통해서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야 한다.'

이선은 넵스키 대로의 카페에 들어가, 만년필과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이선은 오직 집중을 다해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오늘은 1880년 10월 20일. 다가올 1881년에 무슨 일이 있지?'

역사학도 이선우는 비상한 기억력으로 유명했다. 그 비상한 기억력은 오직 자기 전공분야에만 발휘해서, 특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은 연월일 단위로 기억했다. 역사학에서 연대를 외는 게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 기초적인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어선 매우 유용했다. 이선우의 전공분야인 19세기에서 20세기의 사건들은 집요할 정도로 세세하게 기억했다.

'기억력이 너무 그쪽으로만 발전해서, 정작 내가 며칠 전에 뭐했는지는 기억 못했지.'

그래서 일상생활에서는 허당이기가 일쑤였다.

'1881년의 정치사와 외교사. 다른 건 젖혀두고 일단 러시아와 관계된 것만.'

이선은 자신이 틈날 때마다 기억을 되살려서, 빽빽하게 적어두었던 메모 중에서 러시아 관련만 살펴보았다.

2월, 러시아와 청나라가 6개월간의 지루한 협상 끝에 국경분쟁을 마무리한다.

3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대의제의 기초가 될 헌법 초안을 발표한다. 전제군주정에서 서서히 입헌군주정의 방향으로 트려는 개혁안이었다.

공교롭게도 개혁안을 발표한 그날, 알렉산드르 2세는 급진적 혁명가의 폭탄에 맞아 암살당한다.

'바로 이거다.'

이선은 여기에 밑줄을 쫙 그었다.

'러시아는 전제군주 국가다. 1881년에는 미국 대통령도 암살당했지만, 역사를 바꾸진 못했다. 미국은 민주국가고, 대통령은 4년마다 바뀔 수 있는 인물이니까. 하지만 전제군주가 죽으면 그 나라의 방향성은 바뀐다.'

개혁군주 알렉산드르 2세의 죽음 이후, 재위를 계승한 알렉산드르 3세는 타협 없는 반동정치로 일관한다. 제정 러시아가 혁명으로 가는 기나긴 몰락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근데 그 전제군주, '국가의 어버이' 차르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그리고 구하는 당사자가 바로 나라면? 더욱이 조선의 왕자라면?'

이선은 '황제 알렉산드르 2세'라고 적힌 부분을 동그라미를 쳤다.

알렉산드르 2세에 대한 급진파 혁명가의 암살 기도는 수차례 있었다. 특히 근래 들어 급증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의 시도는······.'

이선은 천진에 온 이래, 열심히 영자 신문을 구독했다. 그래서 올해 있었던 황제 암살 미수 사건에 대해 자세한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1880년 2월 17일, 겨울궁전에 혁명가가 잠입하여 황궁 식당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다. 폭탄은 제 시간에 터져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지만 황제와 그 가족들은 멀쩡했다. 그날의 만찬은 알렉산드르 2세의 처조카인 불가리아 대공 알렉산더 폰 바텐베르크와 함께 할 예정이었다. 알렉산더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만찬 일정도 밀렸고, 그 덕택에 황제 일가는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불가리아 대공의 지각이 결과적으로 황제의 목숨을 살렸고, 황제는 대공에게 크나큰 감사를 표하며 불가리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와 후원을 약속했다.

황제의 지지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다. 1881년, 알렉산더 대공은 러시아의 후원을 받아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다.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를 해산, 전제 권력을 쟁취한다.

'비슷한 상황을 내가 연출하면 되겠군. 근데 알렉산더는 황제의 처조카이기도 하고, 러시아의 우호국인 불가리아의 군주니까 만나기도 쉽지.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러시아 황실에 접근할 수 있을까?'

이선은 조선의 왕자였고, 외교관인 베베르의 추천으로 러시아 외무부의 비공식 초청을 받아 페테르부르크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만나줄 신분은 아니고······. 일단 그 아래부터 차분히 공략해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황제에게 접근해봐야겠군.'

이선은 이홍장의 호감을 산 것처럼, 러시아 황실의 호감도 살 자신이 있었다.

'쓸데없는 잡지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때 써먹을 수 있구만.'

이선은 빙긋 웃고, 수첩을 다시 품에 넣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십니까?"

"청국 공사관. 북양대신 추천으로 왔는데 가서 인사는 해야지."

이선은 일단 자신이 가진 인맥부터 활용할 생각이었다.

이선은 일행을 대동하고 주 러시아 청국 공사관을 찾아갔다.

청의 출사아국흠차대신(出使俄國钦差大臣), 즉 러시아 공사는 증기택(曾紀澤)으로, 영국 및 프랑스 공사를 겸했다.

청이 유럽에 상주공사를 파견한 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1875년, 곽숭도(郭嵩燾)가 초대 주 영국 및 프랑스 공사가 되면서 첫 상주공사가 되었고, 그 후임으로 1878년 증기택이 부임했다. 증기택은 영국 및 프랑스 공사로 재임하다, 올해 러시아 공사를 겸임하게 되었다.

"이선이 삼가 흠차대신을 뵙습니다."

증기택은 이홍장으로부터 조선의 왕자가 러시아로 갈 예정이라고 전문을 보낸 상황이라 별로 놀라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먼 길을 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노고가 많으셨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이렇게 흠차대신을 뵙게 되어 기쁠 따름입니다. 고(故) 양강총독 의용후(毅勇侯) 증국번 공의 충성과 위엄은 조선에서도 소문이 자자합니다."

증기택은 태평천국을 진압한 최고 공로자이자 양무운동의 지도자였던 증국번(曾國藩)의 장남이었다.

부친을 찬양하는 말에 증기택의 표정도 풀렸다.

"조선에서도 말입니까?"

"장발적을 토벌하여 무너져가는 나라를 되살렸으며, 나라에 충성하여 천하의 어려움을 잠재웠으니, 그 공은 과히 한말 충무후 제갈량과 당말 충무왕 곽자의에 비견할 만합니다. 어찌 조선에서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증국번은 태평천국을 진압하면서 장강 이남의 모든 군사력을 독점하게 됐지만, 끝까지 청조에 충성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렇기에 증국번을 제갈량이나 곽자의(郭子儀)에 비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갈 무후와 곽 충무왕이라니. 선친께서 들으셨으면 겸손히 사양하셨을 겁니다."

"이선 또한 신하된 자로서 의용후처럼 나라를 위해 충성할 수 있다면 영광일 것입니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생각이 깊으니, 조선의 복입니다."

상대방에 대해 미리 조사해서, 자연스럽게 상대방을 칭찬해 호감을 얻는 게 이선의 강점이었다. 더욱이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한 얼굴로 말하니 그 의도를 의심하는 이도 없었다.

"북양대신의 말씀으로는 군께서 조선을 위해 아라사의 허실을 파악하고자 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대청과 아라사 간의 협상을 지켜보며, 향후 조선과 있을지도 모를 분쟁에 대비하고 싶습니다."

증기택이 러시아 공사로 파견된 이유도 국경 분쟁과 이에 뒤따른 협상때문이었다.

증기택의 전임인 만주 귀족 숭후(崇厚)는, 1879년 러시아의 기만책에 넘어가 청나라에 극도로 불리한 라비디아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가 점유한 일리 지역의 대부분을 그대로 점유하고, 청나라가 오히려 배상금 500만 루블을 지불하는 해괴한 조약이었다. 더욱이 러시아는 몽골과 신강에 영사관을 신설하고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는 권리까지 얻었으니, 협상 결과를 통보 받은 청 조정이 기겁하는 것도 당연했다.

절대로 승인하지 말라는 청 조정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숭후는 멋대로 조약에 조인하고 돌아왔다.

청나라의 여론은 폭발했고, 매국적 조약을 체결한 숭후를 처형하고 러시아와 일전을 각오해야한다는 강경론이 쏟아졌다.

청나라가 리바디아 조약을 파기하자, 러시아도 격분하긴 매한가지였다. 러시아와 청나라 간에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최근에야 러시아가 한발 물러나 재협상이 확정되어 증기택이 페테르부르크로 파견된 것이었다.

'뭐, 협상하는 거야 청나라가 알아서 할 일이고. 중요한건 나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지.'

"흠차대신께서 계시니, 결코 숭후와 같은 실수는 반복하지 않으실 겁니다. 대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한발도 물러서지 않으시겠지요."

"그렇소. 아라사에게 단 한 뼘의 땅도 넘겨줄 수 없소."

"저는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만, 아라사 측이 무도하게 나올까 걱정입니다."

이선이 진정 걱정된다는 식으로 말하자, 증기택도 표정이 밝진 못했다.

"협상이 쉽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황명을 받은 이상, 대청의 신하된 자로서 신명을 다할 뿐이오."

"흠차대신께서는 과연 충신이요, 뛰어난 외교관이십니다. 저 또한 흠차대신께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중당께서도 이를 추천해주셨습니다."

이홍장은 증국번의 제자이기도 해서, 증기택과 이홍장은 절친한 관계였다.

"이중당이 추천장을 써주었으니, 나도 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증기택의 호의적인 답변을 얻은 이선은, 숨겨둔 방문목적을 밝혔다.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아라사 황제와는 자주 만나시는지요?"

"8월에 대청국의 국서를 증정할 때 알현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에도 다른 나라 공사들과 함께 알현한 바 있었고."

"그럼 혹시 저도 아라사 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허허, 군이 아라사 황제를 알현하고 싶습니까?"

이선은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가장해 말했다.

"저는 왕족으로서, 세상을 호령하는 황제의 풍모를 보고 싶습니다. 대청 황제 폐하께서는 하늘 아래 가장 존엄하신 분이라 북경에서도 뵐 수가 없었지만, 아라사 황제는 외국 공사도 자주 접견하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싶어서요."

이선이 눈을 빛내며 하는 말에, 증기택이 껄껄 웃었다.

"하하, 포부가 대단하군요. 하지만 나 역시 아라사 황제를 자주 알현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라사 외무부 관리들은 매일 보다시피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라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요?"

"군은 공식적으로 대청의 관리도 아니니, 내가 사적으로 함부로 궁전에 데려갈 수도 없습니다."

증기택의 말은 완곡한 거절의 뜻이었다.

"그렇군요······."

이선이 아쉽다는 식으로 말하자, 증기택이 위로라도 건네듯이 말했다.

"아라사 황제는 가끔씩 마차를 타고 지나곤 합니다. 그때마다 아라사 근위병들이 대로를 질주하며 호위하지요. 황제의 위엄 보고 싶은 것이라면, 오히려 그때 지켜보면 더 좋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황제를 보고 싶은 것이라 생각한 증기택은, 황제가 근위병을 이끌고 나설 때를 권한 것이었다.

'쳇, 그때라면 구경밖에 못하잖아. 내가 여기에 관광객으로 온 줄 아나.'

이선은 더 이상 얻어낼 게 없어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중당이 소개장에 청국 공사관에서 거처를 알아봐달라고 했는데, 그리 하시지요."

"아, 너무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시내 숙소에 여장을 꾸렸습니다. 개의치 마십시오."

"비용이 많이 들 터인데, 괜찮습니까?"

"이왕이면 황제의 궁전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정말 엄청나더군요."

이선은 진짜 관광 온 소년마냥 답했다.

"하하, 아라사 겨울 궁전이 볼만하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그럼 편한 대로 하십시오."

"예, 그럼 대청과 흠차대신의 대운을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종종 공사관으로 찾아오시지요."

"그리 하겠습니다."

이선은 청국 공사관에서 나오자마자, 웃음을 거두었다.

'증기택에게 순진한 인상을 심어놨으니, 내가 러시아 관리들과 접촉하고 다닌다해도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겠지.'

이선에게는 중요한 인맥이 하나 더 있었다.

'청국 공사관은 방해만 안하면 돼. 역시 베베르를 통해 뚫어봐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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