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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략(策略)
한편, 조선에서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 다녀온 후, 조선에는 한바탕 파란이 일었다.
바로 <사의조선책략(私擬朝鮮策略)>이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일본 주재 청국 외교관 황준헌이 쓴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방의 대국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이 중국과 친하고[親中國], 일본과 결합하며[結日本], 미국과 연결하는[聯美國] 정책을 취해야 한다.
또한 김홍집은 일본 측 정보를 인용해 긴박한 정세를 전했다.
"아라사는 근일에 두만강 하구에 군함 16척을 배치했습니다. 군함 한 척에 3,000명의 병사가 있으며 해군경이 이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그 의도는 장차 우리나라 동해안을 거쳐, 중국 산동성 해안으로 돌아 북경에 바로 들어가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까닭에 중국 공사와 일본인들이 모두 현재의 급박한 우려를 말하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말을 보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러시아로서 조선이 대비하기를 요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라를 위한 것이다."
임금은 일본이 호들갑 떠는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청나라 간의 위기상황을 이용할 생각도 있었다.
임금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분석해 미국과의 수교가 타당한지 논의하라 명했고, 영의정 이최응, 좌의정 김병국, 영부사 이유원, 영돈녕 홍순목, 판부사 한계원, 봉조하 강로 등 6명의 원로대신들은 제대신헌의(諸大臣獻議)를 통해 통교를 허락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조선책략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제대신헌의가 있기 전, 이미 임금은 개화파들과 비밀리에 논의해 미국과의 수교를 결정했다. 중전의 조카로 떠오르는 실세인 민영익(閔泳翊)으로부터 개화파 승려 이동인을 만난 임금은, 이동인의 식견에 감탄했다. 일개 승려였던 이동인을 정탐위원(偵探委員)으로 임명해 도쿄로 파견, '연미국'을 위해 일본 주재 청국 외교관들과 논의하라고 밀서를 내렸다.
조선의 서양 수교가 결정된 것이다.
10월, 원산.
이동인의 일본행을 앞두고, 개화파 지도자 유대치(劉大致)는 원산을 방문해 이동인과 은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유대치는 박규수, 오경석의 뒤를 이어 개화당을 지도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비록 관직은 없지만, 막후에서 신진 개화파 관료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어 '백의정승'이라고 불렸다. 신진 개화파를 대표하는 관료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는 중인인 유대치를 스승처럼 모셨다.
"주상께서 제대신헌의를 통해 미국과의 수교 방침을 결정하셨네."
"잘됐군요. 주상의 뜻이 굳건하시니, 이제 수구파가 아무리 반대를 늘어놓아도 소용없을 겁니다."
"그렇지. 시간이 많이 부족하네. 수교가 지금도 늦은 감이 있어."
"그렇다면 역시 서둘러야지요. 저는 영국 공사관의 사토(Satow) 서기관을 만나 수교를 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영국 외교관은 조선에 대해 엄청 우호적입니다. 저한테 조선어도 배우고 있지요."
임금의 밀명은 미국과의 수교를 위해 청국 외교관을 만나라는 것인데, 이동인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다만 주상께서 사대부의 눈치를 너무 봐서 걱정이네. 수교만 한다고 해서 개화가 이뤄지는 게 아니야. 군민일치, 단결하여 개화를 달성해야 하네."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건 평화적인 방법. 주상 전하를 설득해 수구파 관료들을 조정에서 일소하는 겁니다."
"고균(김옥균)과 금릉위(박영효)가 원하는 방식이 그거지. 하지만 그게 여건이 녹록치 않네."
"불가피하나 폭력적인 방법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삼아, 영국군을 조선으로 파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구파들을 일소하는 것이지요."
개화파는 이미 오래전부터 급진적인 방식으로 수구파를 제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다.
1874년에 오경석이 북경 주재 영국 공사관을 찾아가 '무능하고 부패한' 조선 조정을 일소하고 싶다는 뜻을 드러냈고, 이동인은 도쿄 주재 일본 공사관과 접촉하며 영국과의 동맹과 파병을 희망했다.
"지금 시국에서 그건 너무 위험하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다 하는 나라가 영국일세. 영국이 조선을 위해 군대를 파견할 리가 있겠나? 그들 자신을 위해 하는 거겠지."
"수구파의 눈치를 보다가는 대체 언제 개화를 이룩할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영국은 이익에 눈이 먼 나라이니, 우리가 적당한 이익을 제공하면 손을 잡을 겁니다."
이동인은 자신이 조선에서 가장 국제정세를 잘 아는 인물이라 확신하고 있었고, 세계 최강국인 영국의 힘을 신봉했다. 이미 사토 서기관을 통해 영국의 '비밀요원'으로 인정받은 이동인은, 영국군을 끌어들여 조정을 뒤엎고 개화정책을 추진할 계산을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동인의 낙관적인 생각과 달리, 영국이 그럴 의사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부디 자중하시게. 가장 좋은 건 주상의 동의를 얻어 평화적으로 개화를 추진하는 거야. 섣불리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렸다간 일을 다 그르칠 수가 있네. 고균과 금릉위 중심으로 조정 내의 세력을 불려, 주상을 설득해 나가야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유대치도, 임금이 개화에 우호적이긴 해도 우유부단하고 언제든지 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대원군의 단호한 결단력과 주상의 개화의식이 하나로 합쳐지면 좋으련만. 정녕 조선의 왕족 중에는 개화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할, 국제정세에 밝으면서도 단호한 지도자가 없는가? 그런 이가 있다면 조선의 국운이 크게 변하련만······.'
같은 시간, 유라시아의 반대편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선 국왕께서는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싶으나, 심히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이선을 조선 국왕의 특사로 여기게 된 조미니와 베베르는 진지하게 경청했다.
"말씀해주십시오."
"첫째, 북방의 대국 러시아가 조선을 침략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조선인들은 이 소문에 상당한 공포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건, 왕자께서도 직접 러시아에 오셨으니 알 것입니다. 러시아 정부는 조선을 침략할 의사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아마도 이는 러시아를 경계하는 영국이 퍼트린 소문을 청과 일본이 인용해서 조선에 알려준 것이겠지요."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소문이 퍼져서 조선이 우려한다는 걸, 러시아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는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조선에 특사를 보낼 용의가 있습니다. 이미 귀국에 수교 서한을 보낸 게 여러 번입니다만······."
러시아가 처음 국경을 접한 1860년대부터, 두만강을 통해 조선에 수교를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 게 여러 차례였다. 하지만 조선은 그때마다 거절했다.
"조선은 지금까지 서양과 수교할 의사가 없었으나, 최근에 수교를 결정하였습니다. 첫 수교 국가는 미국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러시아는 수교를 위해 특사를 파견할 용의가 있습니다."
"하지만 양국 간에는 또 다른 장애물이 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조선과 러시아 사이에는 수교가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러시아에 사는 조선 백성의 존재입니다. 귀국의 연해주에는, 조선 백성 수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금령을 어기고 국경을 넘은 죄인들로, 송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어와 러시아 국민이 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어떻게 송환을 한단 말입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베베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구가 극도로 희박한 연해주에서, 조선인들은 극동 개발의 첨병이었다. 그렇기에 러시아는 새로 이주한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추진해왔던 것이다.
이로 인해 두만강 일대의 조선 백성들은 계속 러시아로 넘어가고 있어, 조선 입장에서는 골치 아픈 문제가 되었다. 러시아가 조선에 수교를 요구할 때마다, 조선은 먼저 이주한 백성들부터 돌려놓으라고 반박했다.
"걱정 마십시오. 이건 외교적 수사일 뿐, 정말로 송환을 요구하는 건 아니니까. 다만 조선 백성들 대부분이 진심으로 러시아 국민이 되길 원하는 건 아니고, 먹고살기 힘들어 러시아로 이주해왔음을 인정하셔야 할 겁니다."
"그렇다 하나 이미 러시아에 온 이상 러시아 국민이지요."
이선이 굳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바로 그 연해주의 조선인, '고려인'들을 자신의 기반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 시대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약 1~2만. 만약 이들의 자치권을 얻어낼 수 있다면?'
러시아가 이선을 위해 그래 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바로 그렇기에 이선은 황제에게 접촉을 시도하려는 것이었다.
'러시아에게 도움이 된다는 명분으로, 인구가 희박한 극동지역 개발과 조선과의 우호를 내세워 고려인 자치권을 따내는 거지. 실제로 러시아는 아시아 변경 지역의 통치는 현지 지배층을 끌어들여 다스리는 경우가 많으니까.'
실제 이 무렵 러시아 제국에선 새로 정복한 캅카스와 투르키스탄 지역의 현지 지도자들을 러시아 귀족계급으로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여전히 근대 국민국가라기보단 전근대적 신분제 사회이자 다민족제국이었던 러시아는, 자국의 백성들보다 외국의 귀족들을 더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예컨대 외무부의 관료들은 스웨덴계 기르스, 스위스계 조미니, 독일계 베베르처럼 다양한 외국계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시아국의 경우에는 튀르크계나 몽골계 귀족들도 있었고, 그래서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외무부를 '외국인부'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물론 난 저들처럼 러시아에 충성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 서로 이용하는 관계일 뿐.'
여기에는 중대한 전제조건이 있었다.
'러시아 황제에 대한 테러를 막아, 내가 생명의 은인이 된다. 전제군주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 되지 않고서야, 절대 러시아가 나를 위해 호의를 베풀 이유가 없지. 지금 내 시점에서는 해볼 만한 도박이 아닌가?'
이선이 아이디어를 얻은 건, 바로 불가리아 대공 알렉산더의 사례였다. 대공이 본의 아니게 지각을 해서 테러로부터 황제의 목숨을 구했고, 황제는 그 '은혜'를 높이 평가하여 불가리아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물론 불가리아는 러시아 덕에 독립한 나라이고, 대공 자신이 황제의 처조카니까 도와주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쪽은 본의 아닌 거였고, 내 의지로 황제를 살릴 수 있다면, 러시아도 나를 무시할 순 없겠지. 여기에 도박을 걸어봐야겠다.'
"저는 양국 간에 모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지요. 이주민 문제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에 있어서 말입니다."
"알려주십시오."
이선은 마침내 약을 팔 타이밍이 됐다고 판단했다.
"제가 러시아에 오기 전, 부왕으로부터 신신당부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반드시 러시아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직접 이야기를 나누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조선이 러시아에게, 조선 국왕 폐하께서 러시아 황제 폐하께 드리는 책략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사실이 아니었지만, 이선이 임금을 파는 건 부득이한 조치였다.
'정세가 급변하고 있는데, 정공법대로 가면 시간이 없다. 기만책을 써야 해.'
"으음······. 하지만 공식 사절이 아니라면, 황제 폐하를 뵙는 것은······."
"만약 제가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일본의 영국 공사관을 향해 파견된 밀사가 수를 쓸 겁니다."
이선은 이동인이 조선 국왕의 밀사로 영국 공사관에 파견되었음을 암시했다.
"조선 국왕께서 영국으로도 밀사를 파견했단 말입니까?"
"저는 내키지 않지만, 영국 측이 조선에 대해 상당히 적극적입니다. 조선 측에서도 영국이 진정 믿을만한 우방이 될 거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요."
'개화파들은 서양에 대해 우호적인 유일한 세력이지만, 외세에 대한 인식이 너무 순진하다.'
"이는 잘못 생각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영국만큼 못 믿을 나라는 없습니다. 영국에게 황궁이 불타고, 아편을 강매당하는 중국의 현실을 보십시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와 러시아 모두를 위해 남작께서 힘을 써주십시오."
그레이트 게임의 상대국, 영국에 대한 경쟁심이 불타오르는 러시아였다.
특히 베를린 회의의 외교적 참패 이후 러시아 외교관들은 절치부심하고 있어서, 이선의 말은 조미니와 베베르에게 상당한 자극이 되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폐하께 보고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만과 허장성세. 마침내 이선의 책략이 효과를 발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