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1화 (4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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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

이선은 알프레드 노벨의 신조를 말했다. 알프레드 노벨은 압도적으로 우월한 무기가 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말하자면 상호확증파괴의 두려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노벨도, 최초의 기관총이라 할 수 있는 개틀링 건을 개발한 개틀링(Gatling)도 그렇게 생각했다. 근대적 기관총의 효시인 맥심(Maxim) 기관총의 위력에 전율을 느낀 이들도 다시는 대규모 전쟁이 없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인류는, 세계대전이란 최악의 전쟁을 향해 나아갔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전쟁을 향한 인간의 욕망 자체를 없애지 않는 한 불가능한 꿈이지.'

"노벨 선생께서는 세계 평화를 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평화를 원합니다. 제 동포들을 마적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평화, 더 나아가 동양의 평화를 지키려면, 동양의 발칸이라 할 수 있는 요충지에 있는 조선이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노벨처럼 인류와 세계 평화 같은 거창한 목표는 말하지 않겠다. 어차피 그건 이루지 못할 영원한 이상이니까. 일단은 내 조국과 동포의 평화만 유지하면 돼.'

"여러분의 조국 스웨덴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평화를 유지하여 번영하는 것처럼, 제 조국 조선도 청과 일본, 영국과 러시아에서 중립을 지키며 평화를 유지하여 부강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선의 말은 또 다른 이상(理想)이었다. 그는 독일 제국이나 일본 제국과 같은 군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평화를 지키는 중립국, 복지국가 스웨덴을 원했다.

'고종도 열강의 동의를 얻어 중립을 꾀했지만, 이루지 못했지. 왜? 약소국의 중립 요구를 들어줄 정도로 열강은 친절하지 않으니까.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무력을 갖출 수 있을 때, 진정한 중립이 가능한 것이다.'

이선의 야망에서, 연해주는 시작에 불과했다.

'연해주의 수만 고려인들을 근대화의 표본으로 만들 것이고, 그다음에는 수천만 조선인이다. 지금의 조선인들은 250년간의 장기평화에 익숙해 있다. 진정한 평화를 지키려면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는 걸, 내가 똑똑히 보여줘야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 4세기 로마의 <군사학 논고>에서 나온 금언으로, 서양 군사학의 뿌리가 되는 말이었다.

"정말로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부와 명예가 보장되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머나먼 극동까지 가서 조국과 동포의 평화를 위해 헌신하겠다니요. 아무나 하지 못할 선택입니다."

루트비히의 찬사에 이선이 겸손히 답했다.

"왕족으로서 마땅히 의무를 수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왕족뿐만 아닙니다. 남의 위에 서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의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이는 정치인이나 자본가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알프레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저는 두 가지 관점에서, 경쟁자들보다 유리한 처지에 있습니다. 돈 긁어모으기와 아첨은 제 흥미를 전혀 끌지 못하지요."

술과 담배는 물론이고 사교 모임도 멀리한 알프레드 노벨은 '이 시대의 가장 소박한 갑부'였다. 형이 주최하는 자선 파티라 온 거지, 이런 자리조차 극력 피하는 사람이었다. 귀족들의 뒷담화 따위는 알 바도 아니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도덕적 의무와 이상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공작께서 하신 말씀에 완전히 공감합니다. 공작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무엇이든 도와드리지요. "

알프레드 노벨은 이선의 이상에 깊이 감명을 받은 듯, 도움을 약속했다.

"무기가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지금 당장은, 소총 1천 정과 3년 치 탄약. 개틀링 기관총 10문. 다이너마이트와 폭약도 넉넉하면 좋습니다."

일단 이선은 고려인이 2만 명 있다는 전제하에, 1천 명의 병사를 조직할 생각이었다.

"그 정도를 극동으로 싣고 가려면, 당연히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받으셔야 할 터인데요."

"그건 물론이지요. 황제 폐하께 직접 청원할 생각입니다."

"좋습니다. 행정절차만 마치면, 우리 형제가 필요한 무기를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무기 대금은 어떻게 처리해드릴까요?"

"공작님은 브라노벨의 중요한 투자자이신데, 대금을 어찌 받겠습니까? 주식 배당금을 선지급한다 치고 드리겠습니다."

루트비히는 통 크게 증여 의사를 밝혔다. 이선이 브라노벨에 투자한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답례로 더 좋은 투자처를 알려드려야겠군요."

"좋은 투자처라 하시면······?"

"제 조국, 조선입니다. 근래 청국이 양무운동을 실시하고 일본이 부국강병을 추진하면서, 전세계 군수상의 시선이 동양으로 쏠리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조선도 그 뒤를 따를 겁니다. 제가 조선으로 돌아가서 책임 있는 위치에 오른다면, 군수 납품의 우선권을 노벨 가문으로 고려하겠습니다."

순간 노벨 형제의 눈이 빛났다. 아무리 석유 산업으로 방향을 돌렸다지만, 그들은 근본적으로 군수상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조선의 군수산업을 선점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가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무기를 조선에 드리겠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앞으로도 계속 무기에 대한 혁신을 일으키지. 1880년대는 노벨의 전성기니까.'

이선이 계획하는 조선의 신흥 군수산업에 노벨을 참여시키려는 건,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열강 국가에 군수산업의 우선권을 주면 지나치게 한 나라에 의존한다는 느낌을 줄 거야. 노벨은 중립국인 스웨덴 국적이고, 러시아에서 시작해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다국적 자본가다. 문제 삼을 나라도 없다.'

군수산업이 일차적으로 외국에 의존하는 건 어쩔 수 없으나, 최종적인 목표는 자국화였다.

'군수산업은 결국 자국화하는 게 중요한데, 노벨은 이미 러시아에서 자국화를 시켰지. 현지 노동자 대우도 좋고, 기술 이전도 확실하고. 손을 잡을 상대로 이만한 사람도 없다.'

이선은 노벨 형제와 미래를 함께 할 동업자로서 악수를 나누었다.

5번째 암살 위기를 극복한 황제의 개혁 정책은 순항 중이었다. 로리스-멜리코프 백작의 개혁안은 3월에 통과되어 러시아 제국 최초의 대의기구가 설립 예정이었다.

암살 기도자에게는 관용이 없었다. 테러를 주도한 '인민의 의지' 지도부 9명 중 체포 직전 자살을 택한 2명을 제외한 전원이 체포되었다. 임산부라 출산 때까지 재판이 지체된 1명을 뺀 나머지 6명은 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이 신속히 선고되었다.

4월 15일, 5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는 페테르부르크 시내에서 공개적으로 교수형을 당했다. 이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용서를 받길 거부하고, 당당하게 죽어갔다.

"혁명 만세!"

"압제자 차르, 다음엔 네가 교수대에 매달릴 거다!"

"러시아 인민이여, 우리는 비록 여기서 죽지만 반드시 압제자를 타도하시오!"

하지만 '러시아 인민'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들은 황제를 향한 또 다른 암살시도에 경악했다. 오랜 전통을 내려온 '신의 대리인이자 어버이 차르', 농노해방을 실시한 '해방자 차르'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은 아직도 강했다.

자신의 목숨을 끊임없이 노리는 급진주의에 경악한 황제는, 러시아 인민의 잠재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새로운 개혁을 반드시 완수할 생각이었다.

1881년 4월 17일(서력 29일)은 황제의 63번째 생일이었다.

국가 차원에서도 이날은 경축일로 여겨졌다. 황제는 겨울궁전에 가족들을 초대해, 생일을 자축했다. 초대자 중에는 물론 '구원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황제 폐하, 탄신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감축드립니다."

"고맙소, 이선 공작. 짐이 살아서 생일을 맞이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공작의 공이 크오."

"신께서 폐하께 내리신 책무를 다하기 위함이지, 저는 특별히 한 일이 없습니다."

이선은 황제가 훈장 수여식에서 러시아어로 했던 연설을 나중에 이해했고, 그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답했다.

"하하, 공작은 늘 언제나 겸손하고 정직하군. 그래서 짐이 공작을 좋아한다네."

이선의 겸손한 처신에 황제는 껄껄 웃었다.

"저 또한 신으로부터 받은 책무가 있지요. 바로 제 조국과 동포를 위해 헌신하라는 책무입니다."

이선은 본격적인 연해주행을 추진하기 위해, 황제와 담판을 준비했다.

황제 암살에서 구원한 직후, 이선은 연해주로 가고 싶다는 포부를 드러냈으나 아직까지 황제는 확답이 없었다.

이선은 나름대로 정보망을 가동해서, 황제가 이선의 제안을 각 부처에 논의해 진지하게 검토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아쉬울 게 없는 제안이지. 이제 결단을 내려라, 차르!'

"공작이 그토록 페테르부르크를 떠나 극동으로 가려는 게 잘 이해가 되지않는군. 여기서 부족함이 있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폐하께서 저를 손자처럼 대해 주시니, 너무나 행복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선은 황제에게 먼저 감사를 표한 뒤, 열정적인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여기서 행복할수록, 저는 오히려 더욱 강한 의무감을 느낍니다. 저는 왕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과 백성에 대한 책무를 갖고 있습니다. 저 혼자 여기서 부귀영화를 누린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 조국과 국민이 함께 부귀영화를 누릴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황제는 거듭 감탄했다.

"공작의 애국심과 의무감에 진정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소."

황제는 얼마 전, 국무회의에서 이선의 제안에 대해 논의했다. 반응은 반반이었다.

"매우 흥미로운 제안입니다, 폐하. 현재 러시아인들의 극동 이주가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 이주민들은 극동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러시아화하여, 변경의 개발을 맡긴다면 매우 유용할 것입니다."

황제의 개혁 정책을 추진 중인 내무대신 로리스-멜리코프 백작은 찬성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이선 공작에게 그 지도를 맡기는 건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선 공작은 조선 국왕의 서장자고, 왕위계승의 가능성이 있는 인물임이 확실합니다. 그런 인물을 조선과의 국경지대에 이주민 대표를 맡긴다면, 조선을 크게 자극할 것입니다. 만약 조선을 자극하면 청국이나 일본까지, 더 나아가 영국까지 자극하게 될까 우려가 됩니다."

실질적인 외무대신 역할을 수행 중인 차관 기르스 남작은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폐하, 그건 걱정할 사안이 아닙니다. 제가 이선 공작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바, 청국의 외교정책을 전담하는 북양대신 이홍장과도 각별한 관계라고 합니다. 이번 청국과의 국경회담에서, 이홍장과 증기택 같은 인물들은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청국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할수록 정치적 주도권을 잡는 건 이홍장일 것입니다."

황실 외교 자문관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조미니 남작은 이선의 제안을 적극 지지했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면 이선 공작이 정국을 주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러시아의 품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순수하게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선 공작의 제안은 검토해볼만 합니다. 현재 연해주에 주둔 중인 육군 병력은 총 1만 5천으로, 대부분 블라디보스토크 주위에 있습니다. 극동의 방위는 지극히 취약하며, 특히 두만강 국경지대에 준동하는 마적에게조차 뚫리고 있습니다. 조선 이주민들을 무장시킨다는 제안은 가장 저렴하게 국경 방위를 이뤄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를 지휘할 장교진은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어야겠지요."

육군대신 밀류틴 원수는 군사적인 관점에서 찬성을 표했다.

"해군도 마찬가지입니다. 태평양함대의 전력은 영국 동양함대와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취약합니다. 이는 제국이 알래스카를 포기한 가장 큰 요인이기도 합니다. 조선과 이를 대표하는 이선 공작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면, 영국의 극동 장악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미 영국은 청과 일본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조선까지 저들에게 넘어간다면, 러시아에게 위협적인 상황에 직면할 것입니다."

해군총사령관이자 황제의 동생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도 찬성 의사를 밝혔다.

"폐하, 조선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로 비쳐지면 곤란합니다. 종주국인 청을 자극할 수 있고, 영국도 개입하려고 들 것입니다. 영국이 포트 해밀턴(거문도)을 점령할 수도 있습니다. 조약 체결로 간신히 유지된 극동의 평화가 깨어질까 두렵습니다."

기르스의 거듭된 우려 표현에, 밀류틴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대체 왜 러시아 제국이 주변국의 눈치를 보느라 자국 내의 이주민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폐하, 단호하게 결단을 내려주시옵소서."

러시아 군부는 국경회담에서 외교관들이 청에게 너무 양보를 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군부는 영국은 그렇다쳐도, 청국의 눈치까지 보는 외무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러분의 의견은 잘 알겠소. 이제 짐이 결단을 내려야겠군. 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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