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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땅
"제가 알기로 연해주의 토지 대부분은 개척되지 않은 황무지입니다만, 고려인이 정착하여 농지로 만들어 식량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연해주의 안정적인 식량 공급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연해주 지사 바라노프는 순순히 인정했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토질에 익숙해 황무지 개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국민으로서도, 러시아인과 같이 부역 의무를 이행하고 있습니다."
"조선과의 밀무역 문제도 마찬가지인데, 조선인에게 주로 소는 대개 농업용이지만 러시아인에게는 중요한 육류 소비용이지요. 만약 교역이 끊기면······."
"······ 남우수리 지역 주민들에게 필요한 가축의 대부분이 조선에서 수입 됩니다. 만약 조선이 소의 수출을 중단하면 기아가 발생할 겁니다. 이 지역의 안정적인 식량과 육류를 보장하기 위해서 밀무역이 아니라 합법적인 육로무역으로 대체되어야 합니다."
국경위원 마튜닌도 인정했다. 유럽 러시아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어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는 연해주에서, 조선에 대한 의존도는 예상보다 더 높았다.
"군사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국 마적들이 들어와 농촌을 침탈하는 건 러시아 제국의 위신에도, 현지 백성들 입장에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국경이 너무 광활해서 방위에 한계가 있다면, 이 지역에 징병제를 실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고려인들을 대상으로 말입니다."
"고려인들이 징병에 응하겠습니까? 당국의 요구대로 러시아식으로 사는 것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지사께서 아까 말씀하셨듯이, 고려인들도 러시아인과 같이 세금도 내고 부역의무를 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근대국가의 가장 대표적인 부역의무가 뭐겠습니까? 징병이지요."
1874년 징병법 제정으로, 러시아에도 국민개병제가 도입되었다. 기본적으로 성년 남성은 6년간의 병역 의무에 종사해야했다. 단 인구가 많은 러시아의 특성상 광범위한 면제 조건이 있었고, 실제 징집되는 인원은 소수였다.
"그래서 제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안한 게, 카자크 방식으로 고려인을 징집하자는 것입니다. 적령기에 이른 청년을 징집해서 훈련시킵니다. 지역 특성을 고려해 정규군이 아니라, 카자크처럼 둔전병으로 평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시에 징집되는 것이지요. 인구 비례를 감안하면 1천 명 가량 징집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선은 육군부에 제출한 계획안을 블라디보스토크 군정장관 펠드하우젠과 연해주 지사 바라노프에게 전달했다.
"흠, 아무르 카자크의 사례도 있으니까 극동에서도 적용할 만은 하지요. 근데 이들의 충성심을 어떻게 확신합니까? 고려인들은 대개 자신을 러시아인이 아니라, 조선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것 같던데."
지사의 질문에 이선이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라고 제가 온 것입니다. 제가 황제 폐하께 충성을 다짐했듯, 이들 또한 충성하는 병사들로 만들겠습니다."
'물론 그들의 1차적인 충성대상은 나지.'
"좋습니다. 언젠가 연해주에도 징병제를 도입할 생각이 있었으니, 그 시기를 앞당겼다고 생각해야겠군요."
육군 소장이기도 한 바라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무조건 징병에 응하라고 하면 저항이 크겠지요. 카자크 방식으로 토지 분배도 준비해야 합니다."
"이미 합법적으로 정착하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고 정교회로 개종한 고려인들에게 1세대 당 15 데샤티나(десяти́на)의 황무지를 분배했습니다."
1데샤티나는 약 1헥타르, 약 3천 평에 해당됐다. 15데샤티나는 4만 5천 평이니, 250마지기에 달한다. 조선과 달리 땅이 넓은 러시아는 토지 배분의 기준이 넉넉했고, 조선인에게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조선 이주민에게 러시아가 얼마나 기회의 땅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였다.
다만 이는 이주 초기의 정책으로, 근래에 정착한 이들에겐 해당사항이 없었다.
"하지만 극동에 정착하는 러시아인들에게는 1인당 15헥타르, 세대당 100헥타르를 분배한다는 황제 폐하의 칙령이 이미 반포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유럽에서 오는 러시아인들에게 분배되는······."
"징병과 납세 의무를 수행한다면 고려인들도 똑같이 러시아인이 아니겠습니까? 세대당 100헥타르는 무리더라도 징병에 응하는 고려인 가정에게는 15헥타르의 토지라도 불하한다는 정책을 발표한다면, 제 생각엔 입대자 폭주합니다."
입대 조건으로 토지를 불하한다면, 조선 농민들에게 가장 큰 소원인 자영농이 될 것을 보장한다면, 그들은 열심히 개척과 징병에 응하리라는 계산이었다.
'진짜 조선에서는 엄두도 못할 일이다. 러시아 영토가 넓고 인구가 희박하니까 가능한 일이지.'
"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귀관의 생각은 어떤가? 공작의 제안이 타당하다고 보는가?"
지사 바라노프는 국경위원으로 고려인 문제에 가장 정통한 마튜닌의 의견을 구했다.
"큰 틀에서, 공작의 제안은 러시아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여겨집니다. 황무지의 개척은 반드시 필요한 문제입니다. 고려인들만한 적임자가 없지요. 또한 토지분배의 대가로 징집해서 국경 방위를 맡기면 가장 저렴하게 병력을 운용할 수 있습니다."
이선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연해주의 정책 담당자인 바라노프와 마튜닌은 고려인에게 매우 우호적인 인사들이었다.
지방관이 누구냐에 따라 이주민 정책은 극과 극을 오갔고, 전임 지방관 중에는 고려인 이주를 아예 금지하고 차별한 이들도 있었다.
바라노프와 마튜닌은 고려인이 연해주에 꼭 필요한 존재라는데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고, 이선의 제안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이들이 러시아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전제조건만 지켜진다면 말이지요."
"그건 제가 보증하도록 하지요. 제가 책임지고 추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선의 호언장담에 바라노프가 껄껄 웃었다.
"하하, 좋습니다. 그럼 추진해보도록 하지요. 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나?"
"확실한 인구 재조사, 그리고 토지 조사지요."
"그럼 조사가 우선이겠군."
"제가 마튜닌 위원과 함께 고려인 마을을 돌며 직접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작께서 직접 말입니까? 좋습니다. 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공작을 도와 실무진을 꾸려보게."
"예, 알겠습니다."
'좋아, 고려인 카자크 부대 탄생이다!'
카자크 방식으로 고려인을 징집하자는 이선의 제안이 먹혀들자, 그는 매우 만족했다.
'카자크가 변방의 개척자이자 황제의 친위부대인 것처럼, 고려인 카자크는 나의 개척자이자 친위부대가 되게 만들어야지.'
이선은 마튜닌과 함께 즉시 실무진을 꾸렸다. 지금 이선에게 가장 필요한 인재는,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현지 사정에 밝은 고려인이었다.
이선은 이미 염두에 둔 인물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 중에,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란 인물이 있을 겁니다. 즉시 수소문해서 데려오세요."
이선의 명을 받은 안영흠은 머지않아 그 인물을 찾아냈다.
"이곳의 동포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라, 쉽게 찾았습니다."
"역시."
이선은 표트르 최를 오라하지 않고, 직접 만나러 그의 근무지로 향했다.
표트르 최가 근무하는 곳은 항구에 위치한 무역회사였다. 표트르 최는 2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회사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 선생 되십니까?"
양복 차림의 소년이 뜻밖에도 조선말로 자신을 찾자, 표트르 최는 놀라워하며 답했다.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만."
"반갑습니다. 나는 이선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제국 극동 지역 전권위원을 맡고 있지요."
이선은 굳이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전권위원이란 말에 표트르 최는 깜짝 놀라서 이선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소문을 들은 바 있습니다. 우리 고려사람 중에 러시아에서 큰 공을 세운 이가 있다고······."
"아, 그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습니까? 참 멀고도 널리 퍼지는군요."
"저도 긴가민가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나리를 뵙고 나니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알겠군요."
"하지만 저도 선생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 마찬가지입니다.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 중, 가장 많은 걸 배운 사람이라지요. 동포들을 위해서도 힘을 많이 쓰고 말입니다."
"과찬이십니다. 저는 소문 날 것도 없는 사람인데······."
"너무 겸손할 것 없습니다. 표트르 세묘노비치, 아니 최재형 선생."
순간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 아니 최재형(崔在亨)의 표정이 놀라움에 물들었다.
"제 조선 이름을 어찌 아십니까?"
"나는 러시아 제국 정부로부터 고려인 문제를 전담하라는 임무를 받은 사람입니다. 선생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내 귀에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선의 말에 최재형은 지레 움찔했다.
"그, 그렇군요. 그럼 나리께서는 어쩐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나는 선생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려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이선은 간략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처음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던 최재형은, 계획을 끝까지 듣고 나자 감명을 받은 듯 했다.
"러시아 정부에서 그렇게 훌륭한 계획을 세웠다니! 역시 조선 조정과 달리 러시아 정부는 백성을 생각하는군요."
'······ 엄밀히 말하면 그 계획을 세운 건 나다.'
"그런 계획이라면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최재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동포들을 위해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진작부터 있었는데, 좋은 계획까지 생기니 더욱 의욕이 생겼다.
"고맙습니다. 선생의 도움을 받게 되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저를 이렇게 알아봐주시는 분은 나리뿐입니다. 저는 조선으로부터도, 가족으로부터도 탈출한 사람인데······."
최재형은 감동받은 눈치였다.
"탈출이라. 자세한 사정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 그게 귀인께 드릴 말씀은 아닌 듯한데······."
최재형이 말하기를 꺼려하자, 이선이 자신에 대해서도 밝혔다.
"뭐, 나도 조선에서 탈출했으니 선생과 처지가 비슷합니다. 선생이 이야기를 하면 나도 이야기하지요. 나는 선생을 조사하러 온 게 아니니, 가감 없이 말을 해주세요."
이선은 장무영에게 준비해온 보드카 한 병을 따게 했다. 최재형은 술잔을 건네받고, 권하는 대로 한 잔을 쭉 들이켰다. 술기운이 오른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본래 머슴의 아들입니다."
최재형은 올해 22세로, 본래 함경도 경원 출신이다. 본래 아버지 최형백은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말하자면 조선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었다.
1869년, 조선에서 '기사년 대흉년'이라고 부르는 큰 가뭄이 들었다. 수많은 조선 백성들이 굶주림과 학정을 피해 두만강을 넘어 새로운 땅으로 향했다.
최형백도 이주대열을 따라 두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넜다. 적응이 빨랐던 최형백은 일찌감치 단발하고, 차남 재형을 러시아 초등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리고 자신은 장남에게 가정을 맡기고 이곳저곳 사정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최재형은 학교를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으나, 형수와 불화를 겪었다. 교육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형수는 어린 최재형을 일을 안 하면서 식량만 축내는 식충이 취급을 했고, 최재형은 그런 부당한 대우를 꾹꾹 참았다.
4년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12세의 최재형은 취직할 목적으로 무작정 가출했다. 무작정 도시를 향해 가던 최재형은 도중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말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제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분을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포시예트 항구 인근에서 쓰러진 최재형은 러시아 원양상선 선장 세묜에게 발견되었다. 선장 부부는 굶고 지친 최재형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했다.
최재형은 은혜를 갚고 싶어 했고, 선장도 동양 소년의 총명함과 성실함에 감탄하여 견습선원으로 고용했다.
"그리고 제 인생은 바뀌었습니다. 선장님을 따라 바다를 누볐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지구 반대편까지 돌았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있었습니다."
"나 역시 근 1년 사이에 두 번을 항해했지요. 얼마 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오는 길입니다."
"역시, 나리께서는 그래서 저를 알아봐주시는 거로군요. 새로운 세상을 본 사람은 절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술기운에 얼굴이 불콰해진 최재형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6년 간, 선원으로서 정말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리고 3년 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지요."
최재형은 선장의 권유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고, 세묜 선장이 대부가 되어 '표트르 세묘노비치(세묜의 아들 표트르)'란 이름을 받았다.
187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세묜 선장은 원양상선에서 은퇴했다. 그간 최재형은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세상물정에 밝은 청년으로 성장해 있었다.
선장은 블라디보스토크의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친구에게 최재형을 추천했고, 최재형은 3년 간 열심히 일하며 승진하여 돈을 모았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유능한 청년의 훌륭한 성공담이었다.
'조선에서 살았더라면 노비의 아들이 어떻게 이렇게 성공할 수 있겠나? 러시아, 아니 근대 세계는 이렇듯 기회의 땅이다. 내게도 마찬가지고.'
왕의 아들과 노비의 아들.
조선에서의 신분은 하늘과 땅과 같은 격차였지만, 지금은 대등한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조선을 떠나 새로운 땅에서 기회를 얻었고, 앞으로 조국과 동포를 위해 일하길 원했다.
기회의 땅, 근대 세계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