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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의 시대-46화 (46/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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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개의 눈

"군대 다녀와서 내 땅을 가질 수 있다면, 당연히 지원하겠소!"

"나도!"

토지가 없는 소작농과 임노동자를 중심으로 군대 지원이 속출했다.

"이봐, 땅 얻으려다가 죽을 수도 있어. 되놈 마적들이 그렇게 흉악하다는데."

"까짓 거 죽는다면 죽는 거지. 내 땅을 가져보는 건 우리 부모님 평생의 소원이었는데, 목숨을 걸고 싸워봐야지."

아무리 개척되지 않은 황무지라고 해도, 자작농이 된다는 건 엄청난 유혹이었다. 그것도 조선 기준에선 엄청난 4만 5천평의 땅이었다. 러시아에선 자작농이지만, 조선에선 대지주였다.

토지 소유자에게도 10년 간 토지세를 면세해주고, 원하면 토지를 추가로 불하할 수도 있다는 말에, 자작농들도 집에서 아들을 한 명씩 지원하게 했다.

"둘째야, 네가 우리 집안을 대표해서 군대에 다녀와야겠다."

"아바이, 왜 하필 제가 갑니까?"

"그럼 이미 장가간 네 형이 가야겠냐, 어린 막둥이가 가야겠냐? 어차피 집안에서 한 명은 가야한다더라."

"아유,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요."

"옆 동네 연추영에서 복무한다잖아. 평시에는 농사 짓게 해준다니까 마음 놓고 가라."

"아바이, 어떻게 마음 편히 가요. 마적과 싸우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간나새끼도 아니고, 사내새끼가 뭐 그래 말이 많네? 널 군대 보내서 10년 간 면세 받으면 우리 집안에도 남는 장사 아니가? 장가갈 때 혼수는 넉넉히 해주마. 입 다물고 빨리 가."

"에휴······. 알겠어요."

투덜거리면서 징집에 응한 이들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모인 이들도 있었다.

"아라사 군인들 군복입고 행진하는 게 그렇게 멋지더만. 나도 군복 입어보는 게 소원이었소."

"신식 양총 써보는 게 소원이오. 조선총은 너무 낡아서 말이지."

"내 가족들도 마적놈들에게 피해를 입었소.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후레자식들을 쓸어버린다면 바랄 게 없겠소."

이들은 주로 함경도에서 포수로 활동했던 이들이었다. 호랑이 사냥꾼으로 유명한 함경도 포수들은 사격술이 탁월했고, 즉시 전력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선은 즉시 고려인 부대 편성에 착수했다.

가칭 '고려인 대대'는 러시아 편제에 맞춰 1개 대대, 5개 중대, 20개 소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러시아군은 나라의 덩치만큼이나 병력규모도 커서, 1개 소대의 정원은 48명, 4개 소대가 모여 1개 중대, 5개 중대가 모여 1개 대대가 되었다.

1개 대대는 완편시 960명에 달했으나, 그걸 실질적으로 채우는 부대는 없었다. 극동 변경은 상황이 더 심각해서, 실제로는 그 절반 정도로 편성되었다.

남우수리 국경전권위원 마튜닌, 국경수비대장 트루베츠코이 중령은 고려인 부대 편성 계획 자체는 지지했지만, 이를 실전에 투입시키려면 적어도 반 년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트루베츠코이는 이선을 쳐다보며 말했다.

"공작의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만, 혹시 군대에 대해 좀 아시는지?"

"군대에 대해 조금은 압니다."

중령은 이선이 어린아이치고 제법 군대 편제에 대해 잘 알지만, 군대를 왕자의 병정놀이라 여긴다고 생각했다. 중령 본인도 공작가 출신이고, 이선 또래 귀족 소년들이라면 흔히 보이는 증상이었다.

"아아, 물론 공작께서 페테르부르크 근위대의 명예소령인건 압니다만, 진짜 군대 말입니다."

'가봤다, 21세기에 대한민국 국군으로. 실전은 모르지만, 군단 사령부에서 행정병으로 구른 덕에 최소한 조직의 생리는 안다.'

물론 그렇게 대답할 수 없는 이선은, 웃으면서 답했다.

"잘 모르지요. 황제 폐하의 호의 덕에 니콜라이 대공 전하와 함께 저도 기본 군사 교육을 함께 받을 수 있었습니다만, 제가 뭘 알겠습니까? 그러니 중령님의 많은 지도 편달 바랍니다."

은근슬쩍 황태손과 군사교육을 같이 보았다고 강조하니, 트루베츠코이도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적들 기동력이 얼마나 좋은지 아십니까? 포수들은 그렇다 치고, 농부들을 훈련시켜서 마적과의 전투에 투입시키려면 최소 3개월에서 6개월의 훈련기간은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곧 추수철 아닙니까? 완전 징집상태도 아니고 카자크처럼 둔전병이니, 추수철에는 훈련 받기도 난망할 거고."

"맞는 말씀입니다. 일단 포수들 중심으로 1개 중대를 편성하고, 이들을 상비군으로 두죠. 나머지는 농사가 끝난 겨울철에 집중적으로 훈련해서, 내년 봄에는 실전에 투입시킬 수 있도록."

이선이 합리적인 대안을 내놓자, 중령도 제법 놀란 듯 했다.

"좋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하지만 마적들은 추수철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걸 아실 겁니다. 이번 추수철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우리 국경수비대만으로 버텨야 합니다. 포수들로 1개 중대를 편성한다고 해도, 모든 마을을 다 방어한다는 건 어렵습니다."

"물론입니다. 마적들의 본질은 비정규군이지요. 그래서 정규군을 편성할 때까지 일단 우리도 비정규군으로 맞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비정규군으로 맞선다니요?"

"연해주 주민 중에, 마적들을 막기 위해 자경단을 만든 이들이 있지요. 이들을 적극적으로 편성해서 마적과 맞서 싸우려고 합니다."

"자경단이요?"

"이미 국경 연변에서 자체적으로 다국적 기병대를 편성해 마적들과 맞서 싸우는 이가 있습니다. 정식 편제에 넣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만."

이선의 말에 트루베츠코이도 짐작하는 바가 있는 듯 했다.

"아, 그 말목장주······. 기병대에 말 납품하는 폴란드인 말입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마튜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얀코프스키란 폴란드인이죠."

"근데 그 작자, 시베리아에 유배 온 정치범 아닙니까? 정치범이 민병대를 편성해도 되나?"

"물론 안 되죠. 다만 그 친구의 유배는 해제됐고, 전향서를 내고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완전히 사면 받지는 않았습니다만, 활동 자체는 허가한 상황입니다. 여전히 경찰의 감시대상이긴 합니다만."

"충성심을 확실히 믿을 만합니까? 폴란드인이라면 기병으로는 알아주지만, 정치범 출신이라는 게 영······."

트루베츠코이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자, 이선이 나섰다.

"고려 대대에도 기병이 필요합니다. 마침 얀코프스키의 자경단에 고려인들도 있다고 합니다. 제가 직접 얀코프스키를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이선이 폴란드 출신 정치범 미하우 얀코프스키(Michał Jankowski)를 알게 된 건, 최재형의 추천 덕이었다.

"자경단이라. 혹시 동포들 사이에 유명한 '네눈이'라고 아시는지요?"

"네눈이? 눈이 네 개 달렸다는 말이오?"

"문자 그대로 그렇습니다."

"왜 별명이 '네눈이'지?"

"얀코프스키란 목장주인데, 독자적으로 자경단을 편성해서 마적과 맞서 싸우고 있다고 합니다. 그 자경단에는 우리 동포들도 있고요. 근데 이사람 사격술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합니다. 마적 토벌 중에, 마치 뒤에 눈이 달려있는 것처럼, 뒤를 노리고 있던 마적을 쏴죽였다는군요. 그래서 뒤에도 눈이 달려있다, 해서 동포들이 네눈이라고 부른답니다."

"그거 흥미롭군. 한번 만나봐야겠어."

이선은 마튜닌과 가신들을 대동하고 얀코프스키의 목장이 있는 시데미 반도(sidemi)로 향했다.

"얀코프스키는 비록 사면 받았다고는 하지만 정치범입니다. 경찰에서는 여전히 요주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최재형은 얀코프스키에 대해 조사한 바를 설명했다. 얀코프스키는 폴란드 출신 귀족으로,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에 맞서 독립전쟁을 일으킨 1863년 1월 봉기의 가담자이다.

봉기가 진압된 후 얀코프스키는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 받았고, 5년 간 강제노역을 했다. 1868년에 황제의 사면을 받긴 했지만, 극동 지역에 머물러야 한다는 거주 제한을 받았다.

얀코프스키는 러시아 제국 지리학회에 고용되어 극동 탐사에 나섰고, 금광업자로 일하다가 1879년부터 연해주에 정착하여 말 목장을 열었다.

시데미 반도는 인간의 흔적이 거의 닿지 않은, 천혜의 자연과도 같은 곳이었다. 소수의 원주민이 살던 곳에 최초로 정착한 유럽인이 얀코프스키였고, 후일 이 사람의 이름을 따 얀코프스키 반도가 된다.

얀코프스키의 저택은 마치 요새처럼 성벽으로 둘러 쌓여있었고, 그 자체도 튼튼한 돌벽이었다. 요새처럼 건설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미하우 얀코프스키라고 합니다."

40 남짓의,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이선 일행을 맞이했다.

"러시아 제국 극동 전권위원 이선입니다."

얀코프스키는 이선 일행을 저택 안으로 안내했다.

"좀 살벌하지요? 이해해주십시오. 워낙 마적이 날뛰는 곳이라······. 작년에도 크게 난리를 쳤습니다."

저택 안에는 곳곳에 총기가 있었다. 저택 밖에는 총으로 무장한 사람들도 보였다.

"무장한 민병대라. 봉기를 일으키겠다고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이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마적을 막기 위함입니다. 당국의 허가도 받았습니다."

이선이 농담조로 말하자, 얀코프스키는 정색을 했다. 정치범 출신인 그로선 러시아 정부의 관리를 경계할 법했다.

"하하, 걱정 마십시오. 전 선생을 감시하러 온 사람이 아니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얀코프스키가 무슨 말이냐고 쳐다보는데, 이선은 호의적인 웃음을 담아 말했다.

"우리 동포들 사이에서 선생은 '네눈이'라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네눈이에게 감사드리러 왔죠."

"네눈이요?"

"Nenuni, Czyli czterooki."

의미를 이해한 얀코프스키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그거 오해입니다. 뒤에 눈이 달려있을 리가 있나요. 제가 평상시에는 안경을 안 쓰다가 저격할 때에는 안경을 쓰는데, 그럴 때마다 적을 저격하니까 고려 사람들 눈에는 마법의 눈처럼 보이나 봅니다."

얀코프스키는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서 썼다.

"고려인들도 안경은 압니다. 그만큼 선생의 저격술이 뛰어나니까 네 개의 눈이라는 전설이 만들어진 거겠죠."

"고마운 말입니다. 저는 정말로 고려인들을 좋아합니다. 근면성실하고, 순박하고. 동료로써 이만한 사람들이 없지요."

호의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선은 방문 목적에 대해 말했다.

"선생은 독자적으로 자경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기병대로요. 자경단을 이끄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예, 그건 당국에 설명드렸다시피······.

"제가 러시아 정부의 직위를 받긴 했지만, 본질적으로 조선 출신입니다. 제가 관심 있는 건 고려인 동포들을 돕는 겁니다. 그러니 러시아 당국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편히 이야기하십시오."

얀코프스키가 계속 당국을 신경 쓰는 것 같아, 이선은 그가 마음 편히 이야기하도록 했다.

얀코프스키는 차를 마시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재작년에 당국의 허가를 받아 국유지인 시데미 반도에 정착하고 목장을 개설했다.

인근에 고려인 마을이 있어, 얀코프스키는 그들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 얀코프스키는 고려인들을 목장에 고용했고, 치안 부재 상황에 있는 고려인 마을을 중국인 마적들로부터 지켜주었다.

"그런데 작년에 일이 터졌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출장을 다녀온 사이에, 마적들이 이 인근에 출몰하여 난리통을 만들어버렸죠."

마적들이 시데미 반도와 고려인 마을에 난입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해갔다. 인질로 잡혀간 사람들도 허다했다.

얀코프스키의 시데미 정착을 도왔던 러시아인 선장도 아내와 아이를 잃고 망연자실해했다.

그 처참한 광경을 본 얀코프스키는 눈이 뒤집혀졌다. 그는 즉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자경단을 편성했다.

"마적들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내게는 총이 있고, 말도 있었죠. 처음에는 저들을 막는 데만 그쳤지만, 점점 사람들이 모여 들면서 적을 쫓아 만주까지 나갈 수 있었습니다."

얀코프스키의 기병대는 만주 국경을 넘어 마적의 본부를 기습했고, 인질로 잡혀있던 고려인들을 구해 개가를 올리며 돌아올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인들 사이에 '네눈이' 전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적을 토벌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비결은 간단합니다. 마적은 기동력이 빠르지요. 우리도 그만한 기동력을 확보하면 됩니다. 기병에는 기병으로 맞서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선생은 폴란드 출신이지요? 폴란드 기병하면 역사적으로 알아줬지요. 선생은 폴란드 기병의 전설을 이 머나먼 극동에서 이어나가고 있군요."

비록 지금은 전향했다지만, 독립전쟁에 뛰어들 만큼 폴란드인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얀코프스키였다. 이선이 그 자부심을 추켜세우자, 얀코프스키의 기분은 좋아졌다.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폴란드인입니다. 그래서 고려인들에게 더 동지애를 느끼나봅니다. 폴란드인들을 나라를 잃고 세상에 뿔뿔이 흩어졌지요. 고려인들 또한 고향을 떠나 고생을 하는 걸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자경단을 편성해 마적들에 맞서 싸운 것입니다."

얀코프스키가 고려인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계속 보이자, 이선은 마침내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선생이 이끌고 있는 자경단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70명쯤 됩니다. 그 중 50명은 고려인이지요."

"좋습니다. 자경단이 아니라, 정식 부대를 편성했으면 합니다. 선생이 그들을 이끌고, 새로 편성하는 고려인 부대의 기병대에 들어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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