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 혁명의 시대-47화 (47/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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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둔도(鹿屯島)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주변 방위는 누가······."

"국경 연변을 모두 지킬 겁니다. 나는 선생의 기병대가 꼭 필요합니다."

난색을 표하는 얀코프스키를 이선이 설득했다.

"폴란드가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 사이에 포위되어 있다면, 조선은 청과 일본, 러시아 사이에 놓여있습니다. 조선은 꼭 100년 전 폴란드에 가깝지요. 이대로 가다간 폴란드처럼 멸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동포들은 세상을 떠돌며 더 힘든 삶을 이어나가야할 겁니다."

여전히 폴란드인으로서의 애국심이 남아있는 얀코프스키에게, 이선은 그 애국심을 자극했다.

"판(Pan, 폴란드 경칭) 얀코프스키, 폴란드인들이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기 위해 프랑스에서 폴란드 군단을 편성한 것처럼, 나 역시 러시아에서 고려인 부대를 편성할 생각입니다. 아직 1개 중대에 불과합니다만, 이제 시작이지요."

1795년, 폴란드가 러시아, 오스트리아, 독일에 의해 멸망당했다. 2년 뒤, 돔브로스키(Dąbrowski) 장군은 프랑스에서 폴란드 독립군단을 편성했다. 이들의 군가가 바로 폴란드 국가(國歌)이다.

"이주민만을 지키는 게 아니라, 조국의 독립을 지키기 위함이라······."

비록 폴란드 독립의 꿈은 저버리고, 새로운 땅에서 새 삶을 개척하기로 결심한 얀코프스키였다. 하지만 이선의 비장한 제안에, 문득 청년 시절의 뜨거운 열정이 밀려왔다.

"좋습니다. 뜻을 함께하지요."

"탁월한 선택에 감사합니다, 판 얀코프스키."

"다만 저는 정치범 출신인데, 괜찮겠습니까? 사면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찰의 시찰 대상입니다."

얀코프스키의 우려에 이선이 씩 웃었다.

"그건 제 권한으로 해제해드리지요. 완전히 사면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경찰보다 위에 있는 이선의 권한에, 얀코프스키는 놀라는 눈치였다.

"위원께서는 젊은 나이에 대단하시군요. 대체 어떤 공로를 세웠기에······."

'폴란드 독립을 짓밟은 러시아 황제를 구했다고 하면 별로 좋아하진 않겠지만, 뭐 상관없겠지.'

"제가 러시아와 조선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사람이라, 러시아에서도 잘 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시군요. 제가 대장이라곤 하지만 대원들의 동의가 필요하니, 하루만 답을 기다려주십시오."

"그러지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이선은 얀코프스키의 저택에서 하루 동안 머물며 직접 목장을 시찰했다.

시베리아 말은 키가 작아 군용으로 쓰이긴 한계가 있었는데, 얀코프스키는 유럽 말과 교배를 해서 품종개량을 이뤄냈다. 균형 잡힌 말의 모습에 이선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냈다.

"말이 아주 멋지군요. 품종개량을 한 건가요?"

"알아 봐주시니 고맙군요. 이르쿠츠크까지 가서 종마를 얻어 교배를 시도했습니다."

얀코프스키는 좋은 소식을 전했다.

"대원들도 위원의 부대에 들어가는 데 동의했습니다."

"현명한 선택입니다. 여러분은 고려 대대의 중핵을 맡게 될 겁니다."

기병이라면 러시아에는 그 유명한 카자크가 있지만, 이선은 러시아가 아니라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병사를 원했다.

"목장의 말이 훌륭한데, 아예 정식으로 부대에 말을 거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 그럴 수 있다면야 저야 좋지요."

얀코프스키는 진작 말을 군대와 거래하고 싶어했지만, 정치범 출신이라는 딱지 때문에 교섭에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선 덕에 판로가 열리게 되었다.

"나도 기병을 육성하고 싶습니다. 조선은 보병과 달리 기병 육성은 쉽지 않은데 잘 됐군요. 선생이 고려 대대, 더 나아가 향후 조직될 조선군의 기병 육성에 도움을 주십시오."

"얼마든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선과 얀코프스키는 악수를 나누었다.

"그런데 자경단이라면, 우리 부대 말고 또 있습니다. 소수지만 고려인으로 구성된 부대지요. 알고 계셨습니까?"

얀코프스키의 말에 김학우가 들은 바 있다는 듯 대답했다.

"크라스노예 셀로 일대에서 활동하는 민병대 말씀이십니까?"

"맞습니다. 우리 부대와 협력 관계이기도 하지요."

"호오, 그런 부대가 있었나.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부대로 끌어 들어야지."

이선은 자신이 직접 가기로 하고, 얀코프스키와 작별했다.

"그럼 준비가 되는 대로 부대와 말을 이끌고 노보키예프스크(연추)로 와주십시오."

이선은 극동 전권위원 명의로 된 서한을 얀코프스키에게 건넸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이선은 가신들과 함께 시데미를 떠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런데 크라스노예 셀로라면 두만강 근처 아닌가? 조선에서 지척이군."

이선이 지도를 보며 말하자, 김학우가 설명했다.

"예, 조선 이름으로는 녹둔도라고 하죠."

'크라스노예 셀로가 녹둔도였어?'

녹둔도(鹿屯島). 본래 조선 땅으로 섬이지만, 두만강 하류의 퇴적 현상으로 인해 북쪽 육지에 붙어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이전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재임하며 여진족과 싸웠던 바로 그곳이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 영토에 귀속되었지만, 사는 주민은 여전히 한민족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여진의 잦은 침입으로 조선 조정에선 녹둔도를 포기했다. 1870년대에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녹둔도에 들어가 황무지를 개척한 고려인들은, 어느새 800여 명이 모여 사는 마을이 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이곳을 '크라스노예 셀로', 즉 아름다운 마을이라 불렀지만, 여전히 고려인들은 옛 관습 그대로 '녹둔'이라고 불렀다.

녹둔도에 이르자 두만강이 보였다. 두만강만 건너면, 함경도 경흥이었다.

'마침내 여기까지 왔군.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선이 생각하는 건 단순히 지리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조선으로 돌아갈 그 날을 위해 이선은 청과 러시아를 돌며 외교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다. 계획대로라면 내년에 그 결실을 맺고, 이를 토대로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이선의 가신들도 녹둔도에 이르러 옛 조선 성곽에 올라 두만강을 바라보자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저기가 바로 조선이군."

"그리 멀리도 갔건만, 이제 지척에 있군요."

"근데 녹둔도라면 본래 충무공께서 오랑캐를 무찌르던 곳인데, 지금은 왜 러시아 영토가 된 거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안영흠과 장무영은 답답한 듯 말했지만, 본래 두만강 일대에 살다가 연해주로 이주한 김학우나 최재형은 그 이유를 알았다.

"언제 조정에서 함경도에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녹둔도가 러시아로 귀속된 걸 안 것도 최근입니다."

"조정에선 함경도 사람들은 사람으로도 안 보는데. 한양에서 온 사또들은 대기근에도 수탈에만 열심이었죠."

"······."

이선은 할 말이 없었다.

조선 조정에서 함경도, 특히 두만강 육진 일대는 방기한 지가 오래였다. 그나마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러시아를 경계하느라 경흥부사로 측근들을 보내긴 했지만, 이들 또한 군사적인 경계만 했을 뿐 백성의 민생 같은 건 아랑곳 없었다.

조선 사람이 벌써 간도와 연해주로 수만 명을 넘어갔건만, 조선 조정은 사실상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임금이 선정을 베풀라고 그렇게 외쳐도 함경도로 오는 관리들에겐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양복 입은 조선 사람들이라. 여긴 어인 일이신지?"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날렵한 체구의 청년이 나타났다.

"누구냐!"

장무영이 인기척 없이 나타난 청년을 경계하며 품에서 권총을 빼들자,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여긴 우리가 사는 곳이고, 당신들이 이방인이오. 누구냐고 물어야 하는 건 우리 쪽이 아닌가 싶은데?"

청년의 손짓에 여럿의 사내들이 이선 일행에게 총을 겨누었다.

무장한 사내들을 보고, 이선은 자신이 찾는 사람이다 싶었다.

"그대들이 이 지역을 지키는 고려인 자경단이오?"

"자경단이라, 그런 호칭을 쓴 적은 없지만 맞는 말이군. 여긴 조선도 러시아도 신경 안 쓰는 땅이니까,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하니."

처음 나타난 청년이 우두머리인 듯했다.

"만나서 반갑소. 나는 러시아 제국 극동 전권위원이오. 새로이 고려인 부대를 편성해서 국경을 방위하라는 사명을 갖고 왔소."

청년은 전권위원을 칭하는 소년을 쳐다보았다. 이선이 건네준 신분증을 보고 틀림없이 전권위원인 걸 알게 되자, 청년은 부대원들에게 총을 내리게 하고 마을로 안내했다.

"본래 조선 사람입니까?"

"그렇소. 여러분들처럼."

"조선 사람이 드물게도 러시아에서 출세하셨군. 귀하신 분이 여기까진 어인 걸음이신지?"

청년의 불손한 태도에 안영흠과 장무영이 발끈했지만, 이선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일단 통성명부터 합시다. 나는 이선이오."

"정유진이라고 합니다."

이선이 악수를 하자고 손을 내밀자, 정유진은 손을 맞잡긴 해도 영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러시아 당국에서 지금까지 여길 내버려 두다가 온 이유가 뭡니까?"

"더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으니까 왔다면 되겠소?"

"마적들이 휩쓸고 다닐 때는 신경도 쓰지 않다가, 이제와서? 참 빠른 조치군요."

녹둔도는 연해주 기준에서도 워낙 외진 곳에 있어서, 러시아 당국도 그동안 신경 쓰지 않았고, 이선의 조치가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고려인 부대를 편성해서 마적을 막으려 한다는 겁니다. 정 선생이 이끄는 자경단도 부대의 일원이 되었으면 하고."

"거절합니다. 조선이건 러시아건, 우리는 관에 소속될 생각이 없소."

정유진의 불손한 태도에, 마침내 안영흠이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이놈이, 감히 이 분이 뉘신 줄 알고······!"

"뉘시길래? 극동 전권위원이시라며?"

이선이 말릴 틈도 없이, 안영흠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라사에선 그럴지 몰라도, 조선에선 군 대감이시다! 네놈이 감히 함부로 대할 분이 아니란 말이다!"

"어허!"

이선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안영흠은 그제서야 아차 싶은 듯 입을 닫았다.

이선의 신분이 밝혀지자 녹둔도 백성들이 웅성거렸다.

"군 대감? 그럼 왕자님이라는 거야?"

"정말? 그런 분이 여기까지 왜 오나?"

정유진은 놀라긴 했지만, 불손한 태도를 저버리진 않았다.

"나는 두만강을 넘은 시점에서 조선인이길 포기했으니, 군 대감이든 주상 전하든 내 알 바 아니오."

"이, 이런 무례한 놈! 뚫린 입이라고 감히!"

장무영도 더이상 참지 못하고 칼을 빼들었다.

이선은 장무영의 칼을 거두게 했다.

"조선인이길 포기했다면, 러시아인이길 원한다는 건가? 그럼 러시아 제국 전권위원의 말은 받아들일 생각 있나?"

"그 또한 거절하겠소. 우리는 조선에게도, 러시아에게도 버림받았거든."

'아 젠장, 어쩌라고.'

이선은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왔지만, 그보다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나는 전권위원으로서 주민들의 애로사항도 해결해줄 의무가 있으니까, 까닥없이 불평불만만 늘어놓지 말고 이유라도 말해주는 게 어떻겠나? 먼저 이유를 알아야 해결이라도 할 것 아닌가?"

정유진은 그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말씀드리지. 홍호자, 이 씹어먹을 되놈 마적들이 번번이 국경을 넘어 약탈하는 데도 이 지역 국경수비대는 중과부적이라고 구경만 하고 있었지. 근데 국경수비대란 작자들은, 마적들과 싸우기는커녕 우리 백성들을 여럿 쏴 죽였소."

"아니, 왜? 무슨 이유로?"

"이유인즉슨, 백조 사냥이라는군!"

"백조 사냥이라니?"

정유진이 분노를 표했다.

"조선 사람들은 늘 하얀 옷을 입으니까, 백조에 비유하더군. 난 그날 이후로 다시는 하얀 옷을 안 입소."

과연 청년은 러시아식으로 검은 외투 차림이었다.

"이런 개새끼들이······."

이선은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이제 우리가 러시아의 말도 듣지 않겠다는 이유를 알겠소? 우리를 지킬 건 우리 스스로밖에 없소. 그래서 우리가 직접 무기를 구하고, 우리 스스로 자경단을 편성했소."

"그 살인자들은 어떤 처벌을 받았소?"

"처벌은 무슨. 여전히 수비대에 있소. 우리가 총을 가지고 무장하니까 그 후론 더이상 '사냥'을 하지 않더군."

이선은 비로소 녹둔도 주민들이 왜 조선과 러시아 모두에 적대적인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는 정의가 필요한 법이지.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으나, 마땅한 처벌을 받게 하겠소."

"전에 왔던 국경위원이란 자도 그리 말하더군. 하지만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소."

"마튜닌 말인가? 그와 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소."

"무슨 차이요?"

"의지와 능력 차이. 따라오시오."

이선은 정유진과 자경단에게 자신을 따라오게 했다.

녹둔도 근방에 있는 국경수비대는 소대 규모였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변방에 배치된 소대장은 허구헌날 술타령이나 하다가, 전권위원이 왔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영접을 나갔다.

"각하, 어서 오십시오······. 엥?"

10대의 동양인 소년이 전권위원이라고 오니, 소대장은 황당한 듯 쳐다보았다.

"나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오, 중위?"

"그, 금시초문입니다만."

이선은 전권위원의 신분증을 소대장에게 전했다. 소대장은 황제의 친필 서명을 보고, 거수경례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각하! 제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백조사냥은 재미있습디까, 중위?"

"예······?"

"중위의 부하들이 백조사냥을 즐긴다던데? 나도 그 사냥이란 거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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